NL서 찍혀 나간 이단 집합소 = 민주당

• 주사파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 대통령이 소환한 ‘NL 주사파’

• 이데올로기 흥행작 ‘강철서신’

• 대선 공약집 같은 김영환의 항소이유서

• 주식으로 치면 ‘상장폐지’ 기업

• 전혀 필요 없는 짓은 아니었다

• 헛된 적에 휘둘리지 말지어다

1985년 5월 23일 서울 지역 5개 대학교 학생 73명이 연대해 서울 중구 미국문화원을 기습 점거하고 사흘간 농성을 벌였다. 사진은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으며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 [동아DB]

‘신동아’ 고재석 기자가 쓴 책 ‘세습 자본주의 세대’를 읽다가 좀 의아했다. 그의 모교인 경희대학교가 2000년대 중반까지 ‘NL운동권의 세가 강한 대학’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고 기자보다 열두 살 많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1974년생으로 고교 1학년 때인 1989년에 운동권이 됐다. NL 주사파 지하조직에서 활동하다가 1997~98년경 사상 전향을 했다. 1999년에는 반(反)한총련 계열로 전남대 학생회장을 지냈다. 대학을 떠나던 2000년에 ‘앞으로 4~5년 정도면 대학가에서 NL이란 이름은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까지도 NL이 회자되고 있었다니, 게다가 ‘NL의 세가 강한 대학’이 있었다니, 참으로 끈질긴 존재들이로구나 싶었다.

불멸의 NL

요즘에도 NL이라는 용어를 심심찮게 듣곤 한다. “586 NL 정치인들”이라느니 “NL 주사파 세대의 도덕적 헤게모니”라느니 하는 표현으로 말이다. 주로 1980년대 학번 세대를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심지어 대통령마저 N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종북 주사파와는 협치가 불가능하다”느니 “종북 주사파들은 북한 인권 이야기가 나오면 철저하게 가로막는다”느니 하는 발언으로 ‘주사파’를 현실 정치의 의제 위에 올려놓는다.

지겨운 일이다. 정말로 주위에 NL 주사파가 남아 있다는 생각으로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물론 NL 주사파의 ‘잔재’들은 있을 것이다. NL의 이념적 영향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세대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NL이나 주사파를 운운하는 것은 과연 어떤 ‘현실적’ 의미가 있을까.

이제는 그저 혐오의 표현밖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특히 대통령이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우려되는 대목이다. 누군가 대통령 주위에서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된 인식을 주입하고 있다는 징표처럼 보인다.

요즘 일부 20~30대 ‘논객’을 보면 NL이 뭔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NL을 운운하는 경향을 본다. 그 윗세대의 경우에도 운동권에 몸담아 보지 않은 사람들이 (혹은 앞뒤 맥락이나 내부 구조를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상상력에 입각해 NL이 어떻다느니, 주사파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을 터무니없이 사용하는 경우를 발견한다. 모르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정확히 알지 못하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역시 지겨운 일이다. 대명천지 21세기의 한복판에 여전히 ‘NL 주사파’라는 20세기의 낡은 유물을 설명해야 하는 과제 말이다. 게다가 간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1980~90년대의 시대 상황과 역사적 맥락, 당시 조직 내외부의 해프닝까지 입체적으로 설명해야 온전한 이해가 가능하고, 빠짐없이 설명하는 것이 사회 발전에 그나마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에 대한 책을 한 권 써보려고 한다. 이번 칼럼은 그 예고편이거나 요약문 정도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종북’은 PD계열이 만든 용어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히 용어의 뜻을 설명하자. NL은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의 약자다. 1980~90년대 학생운동권에 크게 양대 계파가 있었다. NL과 PD. NL이 주류로 70~80% 정도를 차지했고, PD는 소수 계파였다. PD는 민중민주(People’s Democracy)의 약자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NL은 한국 사회를 변혁하는 데 ‘미제(미 제국주의) 축출’을 우선으로 보았고, PD는 노동자 해방을 우선했다.

‘주사파’는 주체사상파의 약자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따르는 세력이라는 뜻이다. NL 주사파는 있어도 PD 주사파는 없다. 왜냐하면 주체사상은 북한에서 태동했는데, PD계열은 북한 정권을 탐탁지 않게 봤기 때문이다. NL인데 주체사상을 따르지 않는 NL도 있었나? 있었다.

NL에 대한 항간의 오해 가운데 하나는 NL을 ‘단일 대오’로 보는 견해다. NL 내부에도 여러 분파가 있었다. NL이 워낙 폭발적으로 성장해 거대한 세력이 되다 보니 북한에서 지하당을 정비하면서도 지역별로 ‘관할권’을 줬다. 그것이 나름의 차이를 갖고 발전하기도 했고, 노선과 입장에 따라 몇 개 분파가 존재했다.

예컨대 ‘새벽’이라는 분파가 있었다. NL이면서도 북한의 주체사상은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사람중심사상’ 같은 것을 만들어 따랐던 조직이다. 북한의 수령론을 인정하지 않았고, 북한의 노동당이 남한 혁명을 일괄적으로 ‘영도’하는 것 또한 거부하는 계파였다. 결국 그들은 NL 내부에서 이단으로 찍혀 쫓겨나, 어디 갈 곳이 없으니 현실 정치판에 가장 먼저 진입한 계파가 됐다. 범(汎)NL 진영 가운데 노동운동에도 가장 먼저 세력을 뻗친 계파가 됐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추방’이 그들에게는 행운이었던 셈이다.

그럼 윤석열 대통령이 운운한 ‘종북’이라는 용어는 무엇인가. 종북(從北)은 북한 정권을 추종하는 세력, 혹은 북한 정권에 종속된 세력이라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고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이 용어는 보수세력이 NL운동권을 폄훼하기 위해 만든 용어가 아니라 PD계열이 NL계열을 멸시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용어다.

운동권 소수파였던 PD계열은 대학에서 세력을 확장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외부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노동계급’을 중시하는 PD계열은 원래 학생운동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이른바 진보정당 운동에 가장 먼저 뛰어든 계열이 PD계열이었고, 초창기 진보정당 내부에 PD가 주류를 이뤘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나중에 NL이 진보정당에 침투해 주류가 되자 PD계열은 과거의 악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학생운동 시절에도 ‘쪽수’에 밀려 서러움을 당했는데 자신들이 애써 만든 진보정당마저 순식간에 NL에 접수당한 상황이 되니 그야말로 어이없었던 것이다. 그때 PD계열이 NL을 공격했던 용어가 “너희들은 종북이야!”라는 표현이었다. 그 용어가 돌고 돌아 오늘에 이른다. (그런 진흙탕 싸움 끝에 벌어진 사건이 2012년의 통합진보당 사태다.)

정리하자면, NL에서도 이단으로 찍히거나 개별적으로 전향한 인사들이 하릴없이(?) 진출한 정당이 민주당이었다. 이젠 40~50대 나이가 된 NL 주사파가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자는 뜻에서 진출한 정당이 이른바 진보정당이다. 진보정당으로 침투한 NL 주사파는 사실 ‘주류’도 아닌 주사파다. 거기까지 설명하자면 훨씬 많은 지면이 필요할 테니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그 ‘비주류 NL 주사파’들은 뒤늦게 노동운동으로까지 진출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민주노총의 ‘물’을 흐려놓게 된 결과다.

강철 김영환의 시대적 의미

NL 주사파에 대한 항간의 오해 가운데 둘째는 “1980년대 학생운동은 주사파가 주도했다”는 것이다. 크게 틀렸다. 명백히 설명하자면 NL 주사파가 학생운동을 주도한 시기는 1990년대다. “1980년대에는 NL 주사파가 없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표현이 아니다.

NL의 핵심은 ‘반미(反美) 자주’다. 우리나라 운동권에 반미적 경향은 1960~70년에도 일부 있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에 반미 성향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5·18광주민주화운동 때문이다. 광주 학살에 공수부대가 동원됐다. 기본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의 군사작전 지휘권은 미국이 갖고 있는데 공수부대가 어떻게 시위 진압에 투입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마련이다. 물론 그것은 작전 지휘권에 대한 오해다. 전두환도 그러한 허점을 이용해 부대를 이동했다. 그런 오해 자체를 능멸할 필요까진 없었겠다. 분명히 ‘할 수 있는’ 오해니까.

그런 연고로 1980년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1982년 강원대 성조기 소각 사건,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등이 일어났고, 미국을 규탄하는 분신자살도 잇따랐다. 1985년에는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을지로에 있는 미국문화원을 사흘간 점거한 사건이 일어나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를 “괜한 오해로 헛된 일을 했다”고 조롱할 수 있을까. 이참에 말하자면 대한민국에 반미 성향이 폭발하고 NL운동권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다름 아닌 전두환 정권의 공로(?)다. 전두환이 군대를 투입해 광주를 총칼로 진압하는 우둔한 짓만 하지 않았더라도 1980년대에 반미 운동권은 그만큼 자라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 반미 성향은 그냥 단순한 ‘미국 책임론’ 수준이었다. “미국도 책임이 있으니 사과하라”는 구호 정도였다. 그랬던 것이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이라는 이론으로 구체화되고, 북한의 주체사상까지 결합해 급속도로 성장한 데는 김영환이라는 인물의 역할이 크다. 현재 충북지사를 맡고 있는 김영환 씨 말고, 서울대 82학번으로 ‘주사파의 대부’ 혹은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김영환 씨 말이다. (여담으로 소개하자면 강철 김영환이 수배됐을 때, 당시 안기부에서 이름을 혼동해 충북지사 김영환을 잘못 연행하기도 했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강철 김영환이 대학 3학년이던 1984년에 서울대 ‘고전연구회’라는 동아리 멤버들을 중심으로 ‘고연 언더’(별칭 ‘단재사상연구회’)라는 지하 서클을 만들었다. 이는 우리나라에 NL이론을 체계화하고 주체사상까지 도입한 촉발점이 됐다. 그렇게 태동한 김영환 그룹이 1985~86년 대학가와 공장 지대에 배포한 팸플릿 제목이 ‘강철서신’이다.

강철서신이 크게 히트를 치면서 고려대, 연세대, 경희대 등으로 NL이론이 확산됐다. 때마침 학생회가 부활하면서 그 계열이 학생회를 장악하고, 학생회 연대체인 전대협을 구성하면서 전국적으로 이론이 확산됐다. 그들이 주장한 직선제 개헌론 등이 맞아떨어지면서 이론에 권위가 붙었다. ‘강철서신’이 1989년에 책으로 묶여 나오면서 더욱 견고해진 것이 1990년대의 NL운동권이다.

고작 3~4년 사이에 들불이 번지듯 확산되고 조직이 체계화된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이데올로기 흥행작’이었달까. 요컨대 흔히 말하는 ‘NL 주사파’가 확립된 시기는 1980년대 중반 이후다. 학생운동의 조직적 계파로서 NL이 전국을 지배한 시기는 1980년대가 아니라 1990년대다.

아이러니한 것은 1990년대 학생운동이 폭삭 망하게 된 계기 또한 NL이 주사파와 결합하면서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주사파의 대부’라는 김영환 씨는 이미 1989년경부터 사회주의 이념에 의문을 가졌고, 1991년 즈음에는 북한 체제에 대해서도 심각한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는 마음이 흔들렸는데 ‘조무래기’들만 열심히 충성 경쟁을 했던 셈이다.

지금은 부끄러운 이론

NL 주사파에 대한 항간의 오해 가운데 셋째는 NL을 ‘허접한 이론’으로 보는 경향이다. 1980~90년대 학번을 “그렇게 허술한 이론과 주장에 휘둘린 세대”라고 조롱하는 의미로 흔히 사용된다.

물론 그렇다. 지금 내가 1980~90년대의 NL 이론서를 봐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론에 내 인생이 흔들리다니…’ 하면서 부끄러움을 갖는다. 한편으로 ‘그것이 그렇게 조롱받을 일인가’ 하는 얕은 반발심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화제를 돌려보자. 흔히 ‘항소이유서’ 하면 유시민 씨를 떠올리지만 내가 학생운동을 시작한 1980년대 말에 ‘항소이유서’ 하면 강철 김영환을 떠올렸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에서는 부잣집 아드님의 감상적 자아도취만 엿보였지만, 김영환의 항소이유서에서는 혁명가로서의 배짱이나 이론적 정교함 같은 것이 느껴졌달까. 개인적으로는 김영환의 것이 백배 낫다고 여겼다.

김영환의 항소이유서는 단행본 책자로 100쪽 정도, 200자 원고지로 500~600매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이다. ‘항소이유서’라고 해서 “나는 이렇게 떳떳합니다”라는 탄원서 정도를 예상했다가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자기 이야기는 거의 없고, 우리나라를 개혁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내용의 순전한 ‘이론서’였다. 분야도 방대하다. ‘자주적인 정치권력의 수립’을 우리나라의 핵심 목표로 삼고, △정치제도의 민주화 △반민족 반민주 행위자의 처벌 △ 부정축재 재산의 사회 환원 △소작제 폐지 △군사적 독립 △자주외교 실현 △연방통일정부 수립, 나아가 △노동3권 보장과 협동조합운동 △자영업자, 소상공인 문제 해결 △남녀평등권 △의료보건 분야의 민주화 △문화 민주화 △교도소의 교화체계 확립 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다. 흡사 한 권의 대선 공약집을 보는 듯하다.

언젠가 김영환을 만났을 때 왜 그런 식의 항소이유서를 썼는지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1987년 그는 감옥에 있었는데, 바깥에 있는 동지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리기 위해 나름의 팸플릿처럼 썼다는 것이다. 법정 진술 또한 이론 전파의 합법적 도구로 활용했던 셈이다. 천생 이론가이자 실천가로구나 싶었다.

김영환이 항소이유서를 쓴 나이가 스물넷이다. 김영환을 지나치게 영웅화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 스물넷 청년 가운데 나라의 미래와 관련해 그 정도 분량의 종합적인 에세이를 작성할 역량이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김영환의 이론이 탁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어쨌든 ‘그 세대’는 옳았든 틀렸든 그러한 훈련을 거치면서 자라난 세대라는 뜻이다. 그것이 과연 조롱받을 대상인가 싶다. 비웃으며 능멸하기에 앞서 반면교사일지언정 그들 세대에게 배워야 할 점은 없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저 어영부영 오늘의 성과를 쌓은 세대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석기는 호랑이 없는 굴의 여우

2021년 12월 24일 내란 선동 등으로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던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성탄절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이 전 의원이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동아DB]

NL 주사파에 대한 네 번째 오해는 그들이 지금도 상당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오해다. 조직 계보를 언급하자면, 북한 노동당이 ‘남한 최고 지하당’ 지위를 부여했던 김영환의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은 1997년 이미 자체 해산을 결정했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 정권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김영환을 위시한 다수파는 더는 북한 정권을 추종해서는 안 되고 심지어 “앞으로는 북한 정권을 타도하는 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앙위원회 해체를 다수결로 의결했다. 민혁당 해체에 반대하면서 재건을 노린 소수파가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을 위시한 이른바 ‘경기동부’라고 불리는 일파다.

굳이 조직 서열을 따지자면 이석기 씨는 민혁당 내에서 6~7위 정도에 위치했던 인물이다. 자신보다 상급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전향하거나 공개적 활동을 하기 어려워지니까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 노릇 하는 격으로 활동하고는 있다. 특유의 보스 기질로 주사파 잔당들을 이끌고 있지만 스스로 이론을 만들거나 정책을 생산할 능력은 없는 인물이다. 이석기 그룹의 활동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겠으나 과대평가하는 것도 지나치다.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한 ‘종북 주사파’가 대체 누구를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현실에 남아 있는 종북 주사파는 이석기 일파 정도인데, 그런 사람들을 대통령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혹시 더 확장된 의미에서 종북 주사파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대통령으로서 상황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이 아직도 대남 지령을 내보내고 있고, 지하당 구축을 계속 시도하고 있지 않으냐”고 반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굳이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서 언급할 수준은 아니라는 말이다.

단호하게 말하자면 NL 주사파는 역사 속에 이미 사라졌다. 1980년대 후반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자 PD계열은 상당히 위축되었지만 NL은 오히려 세력이 커졌다. 사회주의 종주국들이 쓰러지는데도 건재한 북한의 ‘저력’이 상대적으로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1990년대 학생운동을 NL 주사파가 주도한 또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남한 정부는 미제의 꼭두각시 정부”라는 NL적 사고관은 설 자리를 잃었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현실에서 NL이 갖는 의미는 완전히 파산했다. 한총련 연세대 사건이 터지고, 1990년대 후반 북한의 식량난 실태가 알려지면서 학생운동권에서도 NL은 명분을 상실했다. 주식으로 말하면 ‘상장폐지’된 기업인 셈이다.

홀로 짐 진 김영환

차제에 소개하자면 김영환 씨가 전향하면서 언론에 발표한 ‘반성문’이 있다. 민혁당은 1997년에 해체됐지만 잔당들이 자꾸 재건 활동을 벌이다가 발각된 사건이 1999년의 민혁당 사건이다. 사실 김 씨는 여기에는 책임이 없다. 하지만 그 앞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반성문을 작성한 것이다. (당시 정권이 김대중 정부라서 김영환을 마냥 풀어주면 보수세력으로부터 자칫 오해를 받을 수도 있어 일정한 합의점으로 반성문을 공개한 측면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때 반성문도 꽤 감동적이었다.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회피할 수 있는 부분까지 김 씨는 “자기 잘못”이라고 사과한 것이다. 김 씨는 크게 3가지를 반성했다. 첫째로 “운동권 전반에 친북적인 분위기를 확산시킨 것”을 꼽았다. 알 만한 사람은 아는 대목이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김 씨는 운동권의 북한 추종적인 경향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꾸준히 피력했다. 운동권 상층에 ‘강철 김영환이 뭔가 이상하다’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 운동권에 주체사상이 유입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김영환이지만, 본인이 저지른 일에 화들짝 놀라 가장 열심히 불을 끄려 노력한 인물 또한 김영환이었다. 자신의 그런 노력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만 담담히 반성하는 태도가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세상 모든 일엔 공과가 있게 마련이다. 1980~90년대 NL주사파에 굳이 공과를 매긴다면 공이 30%, 과가 70%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큰 과오는 김영환의 반성문 내용대로 ‘친북적 분위기’에 젖어 살았다는 점이고, 그로 인해 “북한 주민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남한 및 국제사회의 관심이 늦어지도록 하는 데 한몫했다”는 점에 있다. (이는 특히 1990년대 운동권의 과오에 해당한다.) 하지만 여전히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것이 그 무슨 종북 주사파 때문이라고 본다면, 그 또한 상당한 착각이다.

어쨌든 나는 1980~90년대의 우리나라 학생운동이 전혀 필요 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틋한 향수 같은 것은 아니다. ‘당시의 시대적 조건하에서 그만큼의 학생운동마저 없었다면 오히려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 아닌가’하는 유형의 생각이다. 1960년대 이래로 세계 여러 나라에 다양한 학생운동이 있었는데 독일이나 일본에서는 극단적 테러리즘으로 흘렀다. 차라리 제도권 안으로 흡수되고 정치적 시민운동 등으로 전환한 것은 한국 학생운동의 그나마 탁월한 점이 아닐까 싶다.

나 나름대로는 1990년대 말에 전향한 이후로 누구보다 줄기차게 NL주사파에 비판적인 글을 써왔다. 그런데 강산이 두세 번 바뀐 지금까지도 20여 년 전에 내가 이미 썼던 유형의 글을 반복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착잡한 생각이 든다. 내용 또한 운동권의 내막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단순히 혐오하는 수준의 글들이라서 ‘그리하여 대체 얻으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제는 그만 이야기하고 싶다

간첩 잡는 일은 공안 당국에 맡기면 되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가면 된다. 1980~90년대 우리나라 운동권을 지나치게 우상화하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혐오하는 것도 적잖은 문제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친일파나 보수세력의 탓이 아니고 주사파의 탓도 아니며 모두의 책임일 따름이다. 주사파 잔당은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기 위해 앞으로도 부단히 노력하겠지만 “종북 주사파 때문에 국정 운영에 차질을 빚는다”는 식의 발언에는 실소가 나올 따름이며, 대통령은 얕아 보이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체제의 근간이 튼튼하면 자연히 사라질 존재들인데 굳이 그들에게 관심을 주고 순교자로 만들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반복컨대 NL 주사파는 없다. 역사 속에 사라졌다. 특정한 세대에 일정한 경향성으로 남아 있는 잔재는 있지만, 그것은 비판하고 설득하면서 바꿔나갈 일이지 조롱하고 혐오한다고 풀릴 일이 아니다. 이른바 ‘종북 주사파’는 지금 현실에서는 한 줌도 되지 않는 세력이다. 과거 NL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지금은 그들에게 가소로움이나 역겨움을 느끼지 동지애를 느끼지는 않는다.

북한 정권에 대해서도 그렇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이른바 ‘대북포용정책’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NL이거나 종북이라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울까. NL이니 주사파니 하는 케케묵은 용어가 등장하는 글을 나도 이젠 그만 쓰고 싶다. 비아냥과 혐오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헛된 적’에 휘둘리지 말고 우리가 진정 풀어야 일을 풀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