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농업의 成敗를 가를 쌀 협상이 여전히 안개 속이다.
- 정부는 눈치만 살피고 있고 농민들은 물러설 기미가 없다.
- 그러나 한국인의 식탁을 노리는 쌀 수출국들의 속내를 들어다보면 ‘쌀의 미래’도 보인다.
수입쌀의 국내 소비시장 진입이 초읽기에 들어감에 따라 쌀값 폭락을 우려하는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정부는 올해 미국과 중국 등 우리 쌀 시장을 노리는 상대국들과 재협상을 벌여 쌀 시장을 본격적으로 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04년은 한국 농업의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한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출발 신호가 울리기도 전에 벌써부터 협상 절차 등을 둘러싸고 미묘한 이상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 1월20일 우리 정부는 쌀 관세화 유예를 계속하기 위한 협상을 개시하겠다는 의사를 세계무역기구(WTO)에 통보했다. 우리 정부로부터 이러한 협상 의사를 통보받은 WTO는 회원국들에게 이를 알리게 되고, 회원국들은 90일 내에 협상 참가 의사를 우리 정부와 WTO 사무국에 동시 통보하도록 되어 있다. 절차상으로만 보자면 4월20일까지 우리와 쌀 협상을 벌이게 될 상대국들이 선정되어 4월말~9월말 협상에 들어갈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당시 한국 쌀 시장에 대해 관세화 유예라는 ‘특혜조치’를 주고 10년을 기다려왔던 미국이나 중국 등 쌀 수출국들이 이 기간동안 마냥 기다려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WTO로부터 한국의 협상 의사를 통보받은 나라들이 지금이라도 협상을 요청해온다면 당장이라도 양자협상이 시작될 수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서진교 부연구위원은 “이해당사국들이 WTO에 협상 의사를 통보하고 나서 2~3주 내에 협상이 시작됐던 과거의 관례들을 감안한다면 한국과 미국의 쌀 협상은 3월에 시작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통상전문가들이 2월 말까지는 정부의 1차 협상안이 확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게다가 쌀 협상에 들고나갈 정부안이 확정되기 위해서는 대외경제장관조정회의의 의결 절차를 거쳐야 한다. 대외경제장관조정회의에서 정부가 협상단에 훈령을 내려야만 협상단이 훈령의 범위 안에서 협상에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정부의 쌀 협상 준비는 이미 한참 늦은 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는 과거 관례에 비추어볼 때 대부분 이해당사국들이 통보시한 마감에 임박해 협상 의사를 통보해왔기 때문에 급히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다.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협상전선에 미묘한 이상 기류가 감지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쌀 협상 시한을 놓고도 정부와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견이 노출되고 있다. 현재 정부는 우리가 지난 UR 협상 당시 쌀 관세화를 유예받은 근거가 된 WTO 농업협정문 제5부속서에 따라 2004년 중 협상을 종료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 일정에 따르면 협상 결과 검증에 필요한 3개월을 제외하면 사실상 9월 말까지는 협상을 마쳐야 한다는 결론이다.
경제논리냐 농업보호론이냐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협상종료 시한을 9월 말로 잡는 것이 우리 스스로 협상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검증 기간은 WTO 농업협정문이 규정한 ‘협상 시한’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12월 말까지도 충분히 협상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것.
정부 논리대로 3~4월경 협상을 시작해 9월 안에 마쳐야 한다면 실질적인 협상 기간은 5개월에 불과한 셈이어서 ‘수비수’ 입장에 있는 우리가 이 기간 동안 충분한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또 7~8월경 협상이 한참 진행중인 상황에서 ‘9월말 시한론’이 불거질 경우 농민들로부터 ‘시간에 쫓긴 졸속협상’이라는 비난이 터져나올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에 대해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WTO 협정문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각 회원국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공인된 해석’이 존재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협상 개시를 앞두고 있는 정부는 현재 경제논리와 농업보호론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농민단체 관계자들은 “정부가 관세화 유예를 목표로 협상을 개시한다고 선언했지만 협상중 얼마든지 관세화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며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농민단체들은 관세화를 통해 쌀이 밀려들어올 경우 현재 100% 안팎인 쌀 자급률은 2010년 70%까지 떨어질 것이라며 ‘관세화 절대 반대’는 물론 수입 물량 추가 확대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박웅두 정책위원장은 “지금 정부 태도대로 추가 개방이 불가피하다거나 관세화를 통한 개방이 더 낫다는 식으로 협상에 임한다면 그나마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도 모두 놓치게 될 뿐”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우리가 관세화 유예를 받을 당시 WTO 농업협정문에는 관세화 유예라는 특혜조치를 연장하도록 합의할 경우에도 ‘추가적이고 수락 가능한(additional and acceptable) 양허를 부여하도록’ 못박고 있다. 설령 관세화를 다시 유예받더라도 현재 국내 총소비량의 4% 수준인 최소시장접근(MMA) 물량을 늘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관세화든 관세화 유예든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반면 경제전문가들은 전문가들대로 “미국이나 중국 등 상대국들이 과도한 MMA 물량 증대를 요구해와, 관세화를 유예받더라도 관세화 개방보다 더 큰 폭의 수입 증가가 예상되는데도 농민들의 정서만을 의식해 관세화 유예를 선택한다면 이는 엄청난 국익 손실”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관세화든 관세화 유예든 간에 경제논리에 입각해 개방폭을 최소화하는 ‘실용적’ 선택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두 가지 모두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시작하는 것은 물론이다.
우리와 함께 관세화 유예라는 특혜조치를 받았다가 관세화로 돌아선 일본이나 대만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러한 우려는 더욱 분명해진다. 2002년 WTO에 가입하면서 1년간 쌀 관세화를 유예받았던 대만은 우리의 2배인 8%의 MMA 물량을 적용받았다. 1999년 관세화를 받아들인 일본 역시 8%라는 의무수입 물량을 견디다 못해 차라리 관세화를 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문가들이 미국이나 중국 등 쌀 수출국이 적어도 ‘8%+α’의 MMA 물량을 요구할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결국 우리가 관세화를 한번 더 유예받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MMA 물량이 안 그래도 재고 증가와 소비 부족에 시달리는 우리 쌀 시장 현실을 감안할 때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냐 아니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국내수요를 훨씬 웃도는 의무수입 물량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수입하느니 차라리 쌀 수입을 관세화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관세화 유예의 대가로 의무수입 물량의 일정부분을 민간무역으로 전환하게 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크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올해까지는 국내 총소비량의 4%에 해당하는 20만5000t의 수입쌀을 정부가 관리하면서 가공용으로만 유통시키기 때문에 일반 소비시장에서 미국이나 중국쌀을 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이나 중국측 기류를 보면 더 이상 이런 국영무역 형태를 고집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일본도 우리의 2배 수입 허용
말하자면 ‘위험하지만 속 편한’ 관세화 방식과 ‘안전하지만 부담스런’ 관세화 유예 방식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관세화가 ‘위험이 따르는’ 방식이라는 말은 일단 관세화 이후 수입량이 어느 정도 될 것인지를 정확하게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쌀을 관세화했을 때 시장개방의 폭이 어느 정도나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상되는 시장개방의 폭이 상대국이 요구하는 MMA 물량보다 적다면 관세화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고, 관세화했을 때 예상되는 시장개방의 폭이 상대국이 요구하는 MMA 물량보다 많다면 의무수입 물량을 늘려주더라도 관세화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도하개발어젠더(DDA) 협상이 결렬됨으로써 그러한 예상마저도 쉽게 할 수 없는 형편이 돼버렸다. 당시 일부 농민단체 관계자들은 협상 결렬이 마치 우리에게도 승리를 가져다준 것인양 환호했지만 따지고 보면 당시 DDA 협상 결렬로 인해 이번 쌀 협상의 불확실성만 더욱 커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관세화냐 관세화 유예냐의 득실을 따져보기 위해서는 관세화시 예상되는 시장개방의 폭을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결국 이는 DDA 협상에서 결정될 관세감축 및 저율관세의무수입량(TRQ)의 폭에 따라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DDA 세부원칙에 관한 협상이 타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향후 관세감축률이나 이에 따른 쌀 수입 가격을 예측하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단, 현재로서는 향후 DDA 협상에서 우리가 개도국 지위를 유지할 것이냐 선진국으로 재분류될 것이냐에 따라 몇가지 예상 시나리오를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우선 우리가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고 쌀을 WTO가 인정하는 특별품목(SP)으로 인정받게 될 경우 시장 개방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농촌경제연구원 추정에 따르면 이 경우 국제 쌀 가격이 톤당 300달러라고 가정했을 때 쌀 수입 가격은 2005년 14만5000원(80kg당) 수준에서 2010년에 가서도 14만2000원 수준에 머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관세화에 따른 국내 쌀 산업 피해 정도가 미미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개도국 지위를 상실하고 150% 수준의 관세상한까지 적용받게 되면 2010년 수입 쌀 가격은 현재 수준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7만5000원 수준으로까지 폭락하게 된다. 쌀 농가에는 직격탄이나 다름없는 시나리오다. 이번 쌀 협상에서 관세화를 유예받느냐 관세화를 수용하느냐 여부에 못지않게 향후 DDA 협상에서의 개도국 지위 유지 여부가 쌀 산업 보호에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러다 보니 정부가 어떤 안을 마련해 협상에 나서더라도 운신의 폭이 제한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개도국 지위를 유지한다는 전제 아래 상대국의 요구를 일정한 범위 내에서 수용하기도 어렵고 개도국 지위를 상실할까봐 협상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것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쌀 수입 개방 확대로 인해 고품질쌀 개발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쌀 협상에 참여하고 있는 공무원들 사이에서 ‘결국 이번 쌀 협상은 누군가는 전사(戰死)해야 끝나는 싸움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협상이 어떻게 끝나건 간에 나중에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오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농림부 주변에서는 정부가 WTO에 협상 개시를 통보한 직후인 2월 인사에서 이번 협상의 수석대표로 유력하던 국제농업국장을 기획관리실장으로 영전시키면서 신임 국제농업국장에 공무원교육원 파견중이던 윤 모 국장을 임명한 사실을 놓고 뒷말이 무성하다. 큰 전투를 앞두고 장수를 갈아치운 모양이 된 데다 정부 협상 대표를 누구도 선뜻 맡기 어려워하는 상황이어서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번 쌀 협상에서 지난번 UR 협상처럼 향후 10년간 관세화와 관련한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이 아니라 2006~07년으로 예상되는 DDA 협상 타결시까지 잠정안에만 합의하고 DDA 협상 결과가 나온 뒤 쌀 수출국들과 다시 한번 협상에 나서는 것이 최선이라는 대안도 제시되고 있다. 이번에 모든 결론을 다 내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자충수를 두게 될지 모른다는 지적인 셈이다.
개방의 폭을 조율할 협상안을 짜는 것이 고차함수에 해당한다면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쌀 시장을 노리는 각 이해당사국별 요구수준을 가늠해보는 것은 이보다는 수월한 편이다. 정부는 10개국 정도가 우리나라를 상대로 쌀 협상을 요구해올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핵심적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는 아무래도 미국 중국 태국 정도.
‘DDA 타결시까지만 합의’ 案도
우선 우리와 같은 시기에 관세화 유예 조치를 받았다가 지난 1999년 자발적으로 관세화를 선택한 일본의 경우를 보자. 관세화 유예기간이던 1999년 4월 관세화로 선회한 일본은 kg당 402엔의 종량세를 부과했는데, 이를 종가세로 환산하면 무려 1200%가 넘는 것이었다. 관세화를 수용해 쌀 시장을 개방하면서도 이렇게 높은 관세를 매겨 자국 쌀 산업을 보호할 수 있었던 비밀은 관세 계산방식에 있었다.
일본의 관세계산 방식
쌀의 관세율을 결정할 때 가장 값싼 태국산 인디카계 쇄미(碎米)와 국내 도매가격 간의 차이를 관세 상당치로 계산해 1200%가 넘는 관세 부과 효과를 얻었던 것. 관세 상당치는 국내 쌀의 도매가격과 수입쌀 간의 가격차를 기준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어떠한 국내외 가격을 사용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일본은 관세 상당치 계산의 기준이 되는 국제가격을 적용하는 쌀을 가장 값이 싸고 식용으로 쓰기 어려운 쇄미(broken rice)로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관세 상당치를 높여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관세 상당치 계산방식을 규정해놓은 WTO 협정문상의 허점을 교묘하게 활용해 수입 보호장벽을 마련해놓은 셈.
물론 일본이 이렇게 높은 관세를 부과하자 일본 쌀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협상을 벌여온 호주나 태국 등 수출국들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여기서 하나 흥미로운 대목은 정작 최대 쌀 수출국인 미국이 일본의 과도한 관세 부과에 대해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점. 지금까지도 국제 쌀 협상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이 대목에 대해 농업 전문가들은 대부분 ‘미국과 일본 사이에 무언가 이면합의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내놓는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 모두 이면합의 사실을 결코 확인해주지는 않고 있다. 이를 인정할 경우 당장 특정한 회원국에 수입 물량을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특혜를 주었다는 이유로 WTO 규정상 최혜국 대우조치(MFN) 위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최혜국 대우조치란 모든 국가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WTO의 기본 원칙.
통상 전문가들이 이런 ‘이면 합의 의혹’을 내놓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일본이 각국으로부터 수입해 들여온 쌀 수입 물량 중 민간 수입에 해당하는 동시매매입찰(SBS)분 중 미국산의 비중은 계속 줄어들었지만 전체 대일 수출 물량은 줄지 않고 계속해서 일정한 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결국 총 MMA 물량의 20%에 해당하는 민간 수입 물량은 계속 줄어드는데 전체 물량이 줄지 않았다는 것은 국영 무역 부문에서 미국의 대일 수출 물량을 보장해주는 모종의 합의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강한 추측을 낳게 하는 것이다.
물론 시장개방 협상 때마다 한국을 상대로 강력한 통상압력을 행사해온 미국의 쌀 시장 개방 요구는 이번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95년 우리가 MMA 방식으로 쌀 시장을 개방한 이후에도 중국 쌀에 밀려 한국 시장을 제대로 뚫지 못한 미국의 불만은 이번 쌀 협상을 통해 크게 불거질 것이다. 우리가 쌀 시장을 개방한 1995년부터 2000년까지 국내에 들어온 쌀은 미국산보다 10% 이상 값싼 중국산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한국이 MMA 방식으로 쌀 시장을 일단 열었지만 미국산 고품질 쌀을 한국 소비자들이 접할 기회 자체가 봉쇄당하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고 있다.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는 아예 “한국의 시장 개방 방식은 MMA(최소시장 접근방식 : Minimum Market Access)가 아니라 MWA(최소창고 접근방식 : Minimum Warehouse Access)가 아니냐”고 꼬집기도 했다. 수입쌀을 들여와놓고도 시장에 푸는 것이 아니라 창고에 가둬두고 있는 한국측 조치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이 관계자는 아울러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만약 미국이 한국산 자동차에 쿼터를 주고 수입한 뒤 한국차를 시장에 내놓지 않고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폐차 시점에 가서야 고철로만 활용한다면 한국 정부는 어떻게 하겠는가? WTO의 기본 정신은 시장 접근을 공평하게 허용해 소비자들에게 선택권을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불만에 앞서 미국 쌀의 가격 경쟁력이 중국산에 뒤떨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 수입쌀 시장만 보더라도 미국산 쌀의 점유율은 1995년 53.4%로 중국산 점유율 22.3%의 두 배를 훨씬 뛰어넘었으나 1998년부터 양국간 점유율이 역전되기 시작해 2003년에는 미국산 쌀의 점유율이 18.2%에 불과, 중국산 점유율 78.8%를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미국, 관세화 고집 안 할 수도
결국 이러한 사실은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암시한다. 미국이 한국 쌀 시장에 대해 관세화를 통한 개방을 얻어내더라도 중국 쌀에 밀려 실질적 시장 진입이 어렵다면 끝까지 ‘관세화 관철’을 고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통상 전문가들도 미국이 처음에는 ‘예외 없는 관세화’라는 WTO의 원칙을 내세워 관세화 전환을 요구하겠지만 협상이 진행되면서 실익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 서면 미국은 우리가 적정 수준의 수출 물량을 보장해줄 경우 관세화 유예 연장도 고려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관세화 유예’를 목표로 하고 있는 우리 정부로서는 ‘호재’임에 틀림이 없다. 통상 전문가들은 이러한 미국의 속셈을 적절히 활용하는 협상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주문하고 있다. 주한미국대사관 농무참사관실 관계자 역시 한국측 전문가들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흥미로운 지적”이라며 관심을 나타냈다.
중국 분위기는 ‘비타협적’
게다가 이번 쌀 협상에서 한국을 골치아프게 만들 상대국은 미국보다는 오히려 중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가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중국 쌀은 이미 UR 협상의 결과로 우리가 사들여오는 의무수입물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한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최근 동북3성 지역의 쌀 생산을 크게 늘리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농촌경제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중국내에서 한국 사람들이 먹는 자포니카 쌀을 주로 생산하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등 동북3성의 쌀 생산량은 모두 1700만t. 우리나라 전체 소비량의 3배가 넘는 규모이다. 이 중 45~50만t이 수출되고 있는데, 지난해의 경우 우리나라에만 11만t 이상을 수출했다. 특히 중국은 이른바 안남미라고 불리는 인디카 쌀이 아니라 자포니카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이나 일본 시장을 목표로 쌀의 고급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한국 시장에 대한 중국 쌀의 수출 잠재력은 가공할 수준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쌀 수출국들은 한국 정부가 수입쌀 시장에 대한 개입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중국은 이번 쌀 협상에서 관세화 요구를 통해 한국을 강하게 압박하면서 최대한 수확을 챙기려 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안 전 차관은 “지금이라도 중국 농업계와의 교류를 강화해 한국 농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의 분석도 중국이 이번 쌀 협상에서 가장 큰 장애물로 등장하리라는 데에 모아지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어명근 연구위원은 “중국과의 쌀 협상에서 명쾌한 해결책은 아무것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마디로 속수무책이라는 것. 우리보다 생산원가가 훨씬 낮은 중국산 쌀 수입을 막기 위해서는 △쌀이 아닌 다른 품목에서 수입을 늘려주겠다고 보장하거나 △동북3성 지역에 대한 비교우위분석을 통해 이 지역 작물을 쌀 이외의 다른 작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방법 이외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는 이야기다. 쌀 협상 자체만으로는 중국이 밀면 밀리게 되어 있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당연히 이번 쌀 협상에서 중국은 미국보다도 훨씬 강한 톤으로 관세화 수용을 압박해올 가능성이 높다. 관세화 유예를 놓고 협상할 경우에도 중국의 요구수준은 상당히 높아질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대부분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송유철 박사 역시 “대만의 쌀 개방 협상이 쉽게 끝난 것은 중국이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최근 중국산 쌀의 고급화 추세를 볼 때 이번 쌀 협상에서도 중국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슈퍼마켓에서도 미국 쌀을(?)
미국이냐 중국이냐도 중요하지만 일반 소비자들이나 농민들 입장에서는 내년부터 수입쌀이 실제로 슈퍼마켓이나 할인점 같은 소비자들 ‘안방’까지 침투해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가 미국이나 중국 등으로부터 들여오는 MMA 물량은 모두 조달청을 통해 국영무역 방식으로 수입한 뒤 가공용이나 사료용으로만 유통된다. 일반 소비자들의 밥상에 수입쌀이 오르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서 관세화를 선택한 대만이나 일본만 해도 경우가 다르다. 쌀 협상에서 수출국인 미국이 민간업자를 통한 수입을 보장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만은 수입량의 35%를 민간업자에게 선착순 배정하는 방식으로 MMA 물량을 들여오게 됐다. 뿐만 아니라 수입쌀은 사료용이나 식량원조용이 아닌 식용으로 유통시켜야 한다는 단서조항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역시 국영무역과 동시에 20% 정도에 한해 민간업자가 직접 수입해 판매하는 방식을 택했다.
수입쌀 가격이 관건
한국 역시 올해 쌀 협상에서 이런 민영무역 방식을 수용하게 되면 내년부터는 소비자들이 미국이나 중국의 쌀을 슈퍼마켓에서 사먹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DDA 협상에서도 국영무역을 일종의 무역장벽으로 간주해 이를 철폐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외국 쌀이 동네 슈퍼마켓까지 파고들 경우 국내 쌀소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쇠고기 수입 개방 등의 전례를 들어 국내 농업 붕괴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전망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송유철 박사는 “중국산 쌀이 국내 소비시장에 들어오더라도 국내 쌀 소비량이 많이 준 데다 가계 지출에서 쌀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기 때문에 다소 비싸더라도 소비자들이 우리 쌀을 선택할 가능성이 많다”고 내다봤다. 수입쌀이 식용으로 유통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크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농민단체는 수입쌀이 일반 소비자들의 선택권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농민들의 불안감이 극에 달할 것이라며 이런 상황 자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박웅두 정책위원장의 말이다.
“수입쌀에 대해 정부가 통제권을 갖고 있는 지금도 일부 수입쌀이 유통과정에서 흘러나와 식용으로 나도는 마당에 정부가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면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대만이 미국과의 쌀 협상에서 수입물량의 35%를 민간업자에게 내준 뒤 쌀값이 생산비 이하로 폭락한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수입쌀이 들어오든 정부가 언제까지 수입물량 전부를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관측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도 “우리가 관세화 유예조치를 계속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MMA 물량이 (현재의 2배인) 8%까지 가게 될 경우 정부가 이를 시장에 풀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느냐”고 말해 사실상 수입쌀의 국내 소비시장 진입은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음을 시사했다.
결국 수입쌀 가격이 어느 수준에서 결정되느냐가 수입쌀이 국내 소비시장에 미칠 영향을 결정짓는 관건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수입쌀 가격이 80kg당 3만원이라고 가정했을 때 400%의 관세를 매기면 수입가격은 ‘쌀 가격 3만원+관세 12만원=15만원’이 된다. 2003년 기준 국내 쌀 가격이 80kg당 16만원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경쟁해볼 만한 수준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향후 국제 쌀 가격이 상승하게 되면 관세도 덩달아 올라가게 될 것이므로 수입쌀 가격이 80kg당 4만원이 된다고 하면 수입가격은 20만원으로 가격경쟁력을 상실해 관세화를 통해 시장을 열어놓더라도 국내 쌀 농업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관세화 방식으로 수입쌀이 들어올 경우 초기 관세율은 380∼390% 선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이지만 WTO 규정상 앞으로 5∼10년간 관세율을 점진적으로 떨어뜨리도록 못박고 있어 관세화의 효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국내 소비시장을 압박해 들어올 것이 분명하다.
농민들에게 실상부터 알려야
국제 쌀 가격을 쉽게 예상하기 어렵다는 점도 우리 정부를 괴롭히는 요인중의 하나이다.
당장 미국 캘리포니아 쌀의 국제가격만 해도 2002년 톤당 287달러에서 2년만인 올해초 두 배 수준인 576달러까지 폭등하는 기현상을 빚기도 했다. 쌀의 국제가격이 이렇게 널뛰기를 거듭함에 따라 전문가들조차 관세화시 예상되는 시장 개방의 폭을 추정하기가 더욱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특히 자포니카 쌀은 생산량에 비해 교역량이 적기 때문에 국제 쌀 수급의 조그마한 변동에도 국제가격이 크게 불안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 또한 관세화 이후 시장 전망을 불투명하게 하는 요인이다.
이 밖에도 쌀 시장의 관세화를 막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여러 가지가 있다. 쌀 문제가 한국 정부의 ‘아킬레스건’임을 알고 있는 농산물 수출국들이 협상 과정에서 쌀의 MMA 물량을 낮춰주는 조건으로 채소나 과일류 등 다른 관심품목의 개방 확대를 들고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경우 쌀의 개방폭을 최소화하는 효과는 거둘 수 있겠지만 다른 작목의 수입 피해가 유발될 가능성도 크다.
문제는 이런 여러 가지 변수를 놓고 정부가 얼마나 소신 있게 국민들을 설득해낼 수 있을 것이냐는 점이다. 그러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처리과정에 나타난 정부의 무소신과 무책임을 보면 벌써부터 비관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서진교 부연구위원은 “공무원들이 옷 벗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지금부터 쌀 문제의 정확한 실상을 농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협상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정부가 쌀 문제의 정확한 실상과 관세화의 의미에 대해 농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이야기다. 10년 동안 미뤄온 협상을 목전에 두고 있는 데도 전문가들로부터 이런 지적이 나오는 것이 우리 쌀 협상의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