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장은 현대도시의 스펙터클이다.
- 경기장에서 관중은 결코 시키는 대로 말 잘 듣고 쥐꼬리만한 월급봉투에 만족하는 소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기꺼이 ‘ 정의’와 ‘우리’를 위해 치사한 악당이나 이민족과 싸우려 한다. 스포츠 민족주의라는 이름의 에너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떴다 보아라 안창남,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주인공인 사이클 선수 엄복동(맨오른쪽).
이날 밤에는 전일본 아마추어 권투 선수권자이며 프로권투 세계 랭킹 6위로 미국에서 활약하던 일명 ‘독침’ 서정권(徐廷權)의 귀국 환영 경기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미 많은 서울 시민들이 경기 전부터 흥분해 있었다. 남대문과 청량리를 오가는 전차 속 신사와 청년·학생들은 너나없이 권투 이야기뿐이었다. 전차와 자동차는 쉼없이 관중을 동대문으로 실어 날랐고 500촉 전구가 켜진 경기장 정리를 위해 보이스카우트 단원들이 운동장에 배치됐다.
오픈 경기가 모두 끝나자 다시 거구의 여운형이 링사이드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드디어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바로 서정권이었다. 플라이급이라 몸이 작고 미남형이었지만 그 얼굴에는 ‘범하기 어려운 투지’가 엿보였다. 상대는 역시 미국에서 활약하는 스페인 출신(필리핀이라는 설도 있다) 의 라슈 조. “그야말로 서반아인의 강한 쟁투심을 보인다 하여 전 미국사람을 놀라게 했고, 세계적으로도 ‘표범’이라고 불려오던 권투계의 강적”이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서정권은 조선 사람들의 기대와 흥분을 배신하지 않았다. 관중들의 긴장은 금방 환호로 바뀌었다. 1회부터 서정권은 라슈 조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2회와 3회에도 일방적인 우세였다. 결국 라슈 조는 4회에 무방비 상태로 소나기 펀치를 맞고 “이마가 터지며 피가 흘러” 쓰러졌다. 심판은 서정권의 TKO승을 선언했다. 감격적이고 통쾌한 승리였다. 경기가 끝났는 데도 관중들은 서정권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흩어질 줄 몰랐다.
월간 ‘삼천리’의 기자는 이 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썼다. “이 5척 어린 청년 앞에 전세계의 코끼리 같은 양키-들이 길을 피하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음에 우리들은 그와 피와 산천을 같이 하였음을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아, 우리 반도에는 세계적으로 우러러보는 새로운 영웅 한 분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의 장래를 빌며 그가 현재의 제6위로부터 제1위에 오를 날이 하루 급하기를 빌 따름이노라.”(‘무적 서정권 대승 광경-서반아의 강호를 격파’ 삼천리 1935. 11)
일제시대 권투 영웅 서정권
2002년 월드컵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 한국인의 뜨거운 스포츠 사랑, 그리고 ‘사랑’을 넘어서 때론 ‘광적’인 경지까지 다가가는 스포츠 민족주의는 개화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일제시기에 본격적으로 자라났다. ‘삼천리’ 기자가 썼던 것처럼 이때 이미 한국 스포츠 영웅의 이미지는 확정되어 있었다. 그 영웅은 다름아닌 ‘코끼리 같은 양키들을 당당히 물리치는 맵고 작은 조선 고추’이다.
한국 스포츠의 영원한 숙명
그런데 한국에서 국민적 스포츠 영웅이 되려면 서양의 덩치 큰 선수를 이겨야 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숙명적인 적과도 맞서 이겨야 한다. 그 숙명은 정말 끈질기고 지독해서 경기장에 나서는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을 괴롭힌다. 바로 일본이다. 지난 1월 하순 카타르 친선축구대회 한·일전에서 최성국은 골을 넣은 후 ‘독도는 우리 땅’이란 문구가 쓰여진 속 셔츠를 보여주며 골 세리머니를 했다. 그 숙명은 금세기에도 결코 중단되지 않을 듯하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주인공인 사이클 선수 엄복동이 유달리 1920~30년대 조선인들의 사랑을 받은 것도 그가 이런 숙명을 잘 헤쳐나갔기 때문이었다. 1920년 5월3일 만화방창한 봄날, 경복궁 마당에서 ‘경성 시민 대운동회’가 열렸다. 종목은 단 두 개, 마라톤과 사이클이었다. 일제시기에 이 두 종목은 축구나 권투처럼 양편으로 나뉘어 바로 맞장 뜨는 경기가 아니라도 관중들이 피아(彼我)를 나누어 싸우고, 결국 열렬한 스포츠 민족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두말할 나위 없이 엄복동과 손기정이 그 대표적 아이콘이다. 아무튼 전해인 1919년 봄에는 3·1 만세운동의 여파로 창경원 벚꽃놀이도 야시장도, 이런 운동회도 열리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시내는 구경 나온 남녀노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단축 마라톤에는 100여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모두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가벼운 속옷’만 입은 채 아직은 공기가 맑았던 서울 시내 한가운데를 뛰었다. 종로통에서 출발, 남산공원을 올랐다가 서대문으로 돌아와서 광화문 오른편 첫 번째 해태 상 옆으로 골인하는 7마일(11.263km)짜리였다. 이 경기에서 스물네 살 먹은 한 청년이 36분53초 만에 1등으로 골인했다. 그 청년은 조선인 인력거꾼 최원기였다. ‘동아일보’는 이 사실을 뚜렷이 기록하고 있다. 원래 우리에게 마라톤을 가르쳐준 것은 조상들이 아니라, 일본인이나 서양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즐거운 잔치를 중단시킨 불상사는 이틀째 사이클 경기에서 벌어졌다.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았던 엄복동이 출전한 시합이었는데. 8명이 한 조가 되어 트랙을 돌다 선수들끼리 부딪쳐 2명을 빼고 다 넘어졌다. 영웅 엄복동과 일본인 선수 1명이 남아 트랙을 돌고 있었다. 하지만 엄복동이 일본 선수보다 몇 바퀴나 앞서 있었기에 관중들은 여유 있는 우승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갑자기 심판이 경기를 중지시키고 경기 무효를 선언했다.
마치 2002년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과 오노의 쇼트트랙 결승경기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열혈청년 엄복동의 난투극
그러나 엄복동은 혈기가 넘치는 청년이었던 데다 김동성보다 성격도 훨씬 급했던 모양이다. 경기가 중단되자마자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본부석으로 뛰어들었다.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나를 1등을 아니 주려고 하는 교활한 수단이라” 부르짖으며.
그러고는 앞뒤 안 가리고 우승기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가서는 “이까짓 우승기를 두었다 무엇 하느냐”며 깃대를 잡아 꺾어버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일본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제히 달려들어 엄복동을 집단 구타했고 마침내 엄복동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럴 때 만약 독자께서 그 자리에 계셨다면 어찌하셨겠는지?
조선인 관중들도 앞뒤 가리지 않았다. “엄복동이가 맞아 죽는다”는 외침이 퍼지자 그들은 운동장 안으로 물결같이 달려들었다.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짖는 자, 형형색색 분개한 자들 때문에” 사태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대단한 규모의 난투극이 벌어질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경관의 진력으로” 군중은 해산했고 대회는 중단되고 말았다. 사태에 대한 ‘동아일보’ 보도는 여기까지라 경기장 소요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상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기자는 “자세한 말은 추후 보도하겠으나 우선 이것만 보도하노라”며 기사를 서둘러 마무리해 뭔가 중대한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동서고금과 경기 종목을 막론하고 경기장에서 패싸움을 벌이거나 소요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결코 잘 배우고 많이 가진 자들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경기장에서 종종 벌어지는 관중 소동은 도시의 일상을 살아가는 민중의 심성을 보여준다.
그들의 억눌려 있던 감정은 경기장에서 터져나온다. 눌린 것이 많고 다른 데서 풀 기회가 없을수록 감정 분출은 느닷없고 강도가 높다. 경기장 안에서 뜻밖의 패싸움이나 소요가 벌어질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억압된 감정은 상대 선수(때로 우리 선수)나 심판을 욕함으로써 우회로를 찾아 해소되는데, 어느 순간 배관이 막히거나 흐르는 양이 너무 많으면 터진다.
‘슬픈 월계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한 손기정, 남승룡 선수는 우승의 기쁨보다 일장기를 달고 뛰었다는 슬픔에 고개를 숙였다.
경기장은 일상 근처에 있지만, 일상적인 공간은 아니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집합적인 주체로 존재한다. 거기서 개인은 해방되거나 소거되기 쉽다. 사람들은 군중 속으로 자기 몸을 숨김으로써 다소나마 자유로워진다. 이런 공간에서 나타나는 민중의 행위는 체계화된 이념으로서의 ‘주의’와는 다른 심리적 기제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1920년 5월 경복궁 운동장에서의 군중 행동과 1919년 3월 아우내 장터의 군중 행동이 같은 것이라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양자의 관계는 중요해보인다. 경기장에서 엉뚱하고도 무계획적으로 터져나오는 ‘감정’ 분출이야말로, 민족주의의 바탕을 이루거나 또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민중의 ‘심성’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식민지 시대의 일상을 살아가는 조선인들이 일본이나 일본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또는 일상 속에서 일제가 조선인들을 얼마나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었는지? 그것은 ‘식민지 근대화’나 ‘수탈’로 일도양단하기 어려운 복잡한 실상을, 그리고 통계수치나 지식인 담론과는 다른 세계를 보는 직관적 자료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은 조선에서 지지기반이 매우 허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 앞에서 조선인은 굽실거릴 수밖에 없고 때리는 손모가지에 그냥 뺨을 맡기고 산다. 소설에서도 자주 묘사되는것처럼, 일본 경찰은 손버릇이 더러워 걸핏하면 거리에서나 주재소에서 일상인들의 뺨을 쳤다. 식민지 파시즘의 일상적 구현이다.
그렇게 맞고 굽실대며 사니, 인종적 편견이나 민족적 차별에 대한 불만이나 감정이 없을 수 없다. 그러다가 집단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을 때, 또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정의감과 양심을 위협당할 때 불만은 표출되었다.
경성 시민 대운동회 사건후 꼭 3년이 지난 1923년의 봄날. 또다시 엄복동을 두고 조선인과 일본인들 사이에 경기장 패싸움이 벌어졌다. ‘경성 윤업회(輪業會)’ 주최 전조선 자전거 경기대회 마지막 날이었다. 이날 관중이 무려 4만~5만명에 달했기 때문에 ‘본정 경찰서’에서는 경관 100여명을 보내 경계 태세를 갖췄다(관중 수에 비해 100여명이라는 숫자가 믿기 어렵지만 1923년 5월8일자 ‘동아일보’ 보도가 그러하다).
이날 소요는 엉뚱한 데서 시작됐다. 일본인 관중 하나가 술병을 경기장으로 던지면서 주변의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시비가 붙게 되었던 것. 조선인 관중들이 그 일본인 주위에 모여들자 말썽은 커졌다.
조선인들은 그 일본인의 행동이 “1등 할 엄복동군의 경기를 방해하는 것”이라 해석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말썽이 생긴 끝에, 일본인과 조선인 관중 사이에 서로 돌을 던지는 등 한동안 큰 분요가 일었다.” 그 중 폭력에 적극 가담한 조선인들이 일경에 잡혀갔다. 청진동에 살던 노동자 손룡근(24) 등 7명이었다.
그 일본인이 진짜로 엄복동을 방해하려고 술병을 던졌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조선인 관중들은 분명히 1920년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술 먹은 일본인 관중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했을 것이다.
대중은 뭐든지 잘 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스포츠 경기장의 관중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대단히 기억력이 좋다. 영웅과 배신자, 우리 편과 적을 구분하여 머릿속에 저장한다. 예를 들어 황선홍은 그가 가진 출중한 기량에도 2002년 폴란드전에서 선제골을 넣기 전까지 계속 ‘황선홍 똥볼’이라는 조롱에 시달려야 했다. 관중들이 그가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몇 차례에 걸친 ‘문전’ 실수로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걸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관중들은 잘 기억했다가 훗날 반드시 절차를 거쳐 용서하거나 보복한다. 그러니 어찌 조선인들이 엄복동을 민족의 영웅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쨌든 일제시대 경기장 소요는 한국인들이 결코 마조히스트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들은 그저 ‘유령같이’ 흰 옷이나 입고 다니는 가난한 평화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때리면 맞는, 또는 북어처럼 패야 말 잘 듣는 ‘엽전’이 아니었다.
스포츠는 살아 있다. 돈과 권력과 더불어. 돈 가진 자, 권력 가진 자들은 언제나 스포츠를 이용해먹으려 들었다. 스포츠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그랬다. 근대 스포츠가 돈과 권력에 오염되어 있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스포츠의 순수’ 운운하는 공염불도 함께 존재해왔다. 공염불이야말로 현실에 없는 것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의 표현인 것이다.
스포츠는 현존하는 모든 못된 이데올로기가 재생산되는 풀(pool)이며,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아로새겨진 메달 중에도 금메달이다. 못 사는 놈들은 고작 배드민턴이나 족구나 하고, 잘 사는 분들은 해외원정 골프판이나 기천만원 짜리 회원권이 필요한 스포츠클럽에서 활약하신다. 어인 까닭인지 모든 종목의 협회장은 재벌이거나 그에 준하는 기업가다. 돈이 들거나, 혹은 돈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는 남성 권력과 남근중심주의를 반영하고 유포한다. 1932년까지 여성의 올림픽 참가는 제한되었다. 스포츠는 차별적 성역할을 재생산한다. 가장 ‘남자다운 남자’들이 스포츠 분야에 있고, ‘예쁜’ 여자들은 치어리더가 된다.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를, 다카노 하나는 미야자와 리에를, 조성민은 최진실을 아내로 택한 바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잘 성립하지 않는다. 대신 남자들은 쿠르니코바(러시아 테니스 선수)나 체스테인(미국 축구선수) 같은 여자 선수의 ‘섹시한’ 벗은 몸을 보고자 안달한다.
그리고 스포츠는 언제나 국가 권력에 이용당해왔다. 정통성이 약하거나 나쁜 정권일수록 스포츠에 더 적극적이고 돈도 많이 쓴다. 히틀러는 나치의 힘과 아리안족의 혈통적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베를린올림픽을 이용했고, 1968년 멕시코올림픽은 3000여명의 대학생·노동자의 목숨을 요구했다.
학살로 1980년대를 연 전두환은 이 땅에 프로 스포츠 시대를 열었으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유치했다. 아랍인들에게 한방 된통 맞은 조지 W.부시는 미국의 건재를 과시하기 위해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01 월드시리즈에서 시구를 했고, 2002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미국은 세계를 상대로 횡포를 부렸다.
체력은 국력
스포츠를 이용해 민족과 국민의 ‘단결’을 유도하고 이민족에 대한 대결의식을 고취시키는 주체는 물론 근대 민족국가다. 한국·일본·독일처럼 국민의 인종적 동질성이 비교적 높은 나라에서는 스포츠의 승리가 곧 국민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일이며, 미국이나 구소련 같은 다민족 국가는 여러 민족과 인종을 국민국가에 통합·복속시키기 위해 스포츠를 이용해왔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스포츠와 ‘한민족’ 혹은 ‘대한민국’은 굳게 결합했을까?
건강과 신체적 강건함이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인정받은 것은 개화기에 이르러서다. 위기에 빠진 조선을 자강론으로써 구하고자 했던 1900년대 계몽 지식인들에 의해 ‘체(體)’라는 완전히 새로운 가치가 발견되었다.
체는 지(知)·덕(德)과 같은 전통적 가치와 정립(鼎立)했다.
1907년에 김희선이 쓴 ‘체육의 필요’(‘서우’ 제4호, 1907년 3월)는 애국계몽기의 지식인들이 체육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국민교육 중 필요한 두 가지가 ‘학육(學育)’과 ‘체육’이라면서, 무릇 사람이 학문에 대한 열의가 있어도 체력이 온전치 못하면 심력(心力)이 약할 것이고, 심력이 약하면 학문상 큰 손실과 장애가 있으니 결국 지식의 활동이 체육에 좌우된다 했다. 체육에 1차적 중요성을 부여한 것인데, 이는 전통적인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새로운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생각을 당대 국제정세와 국가적 위기의 문제로 연결시켰다. 김희선은 우리 국민이 수백년 동안 문약(文弱)에만 빠져 있는 바람에 임금에 충성하고 애국하는 마음은 있으나 용감하게 분발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고 했다.
1907년은 을사조약에 의해 외교권을 빼앗긴 지 이미 2년째가 되는 해이며, 조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해이다. 돌아가던 형세에 비하면 ‘문약’에 대한 반성은 예지도 선견도 아니다. 문약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식의 생각은 상식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신채호, 박은식 같은 사상가가 그 선구 역할을 했다.
금년 1월22일 카타르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최성국 선수가 골을 넣은 후 ‘독도는 우리땅이다’라고 쓰여진 셔츠를 보여주며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판타지이지만 구체적인 대상과 실행을 필요로 한다. 무를 매개로 했을 뿐 이때의 체육 민족주의는 현실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이 단계의 체육 담론은 당시 지식인 담론의 지배적 형태가 그러했듯이 서양 국민의 애국주의로 근거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오호라, 범 우리(我) 동포형제여. 세계 열국의 독립사와 중흥사(中興史)를 읽어보시오. 학육도 학육이지만 결국 독립과 중흥의 최후수단은 무예였고, 무예적으로 나가는 경우에도 체육이 없다면 애국의 혈성(血誠)이 있어도 소용없다.”(김희선 ‘체육의 필요’)
조선인들은 서구인의 몸과 스포츠를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스포츠를 인식했다.
그 제목도 상징적이기 그지없는 ‘사나이거든 풋볼을 차라’(‘개벽’ 제5호, 1920년 11월)의 내용은 매우 구체적인 데로 나아갔다. 이 글의 필자는 조선 사람이 어릴 때부터 업혀 길러지고 꿇어앉는 습관이 있어서 다리가 짧고 양복을 입어도 폼이 안 난다고 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그래서 인기를 끌고 있던 야구도 좋고 정구도 좋지만 축구를 권장한다는 것이다. 축구를 하면 다리가 튼튼해져서 민족적인 신체 결함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족적인 신체 결함을 고쳐야 하는 이유는 서양인만큼 크고 튼튼해져서 ‘진충보국’, 즉 애국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생각은 1907년대와 비교하며 크게 달라진 것이다. 서구인보다 우리가 부족한 것은 국가에 대한 ‘열혈’이 아니다. 대만 우리는 서구인에 비해 키가 작고 등이 굽었으며 다리에 힘이 없다. 그래서 약하다. 생각이 이렇게 바뀌는 데 10년이면 족했다.
민족주의의 완성은 영웅의 탄생
한국민의 스포츠 민족주의는 엄복동, 서정권, 손기정 같은 1920~30년대의 영웅에 의해 한층 높은 단계로 나아가고 완성된다. 현실에서 외교권과 군대를 잃고 국가를 상실한 조선인은 일본과 대결하지 못한다. 독립운동 또한 잘해야 ‘저항’일 뿐이지 진정한 ‘대결’은 아니다. 조선인은 세계를 이끌어나간다는 서구 국가들과도 대화하거나 대결하지 못한다. 식민지가 감히 제국의 카운터파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수들은 다르다. 그들은 덩치 큰 양키나 나라를 강점한 일본인과 동등하게 경쟁하여 승리하거나 패배함으로써, 민족의 좌표나 현실을 실제로 보여준다. 운동선수야말로 발견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실현 주체이며 대상인 것이다.
선수들은 국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선다. 승리한 선수가 “The World Champion 양정모, from South Korea”라 호출되면 국가가 연주되고 국기가 게양된다. 선수는 눈물을 흘리고 화면에는 국기가 오버랩된다. 그렇게 선수들은 현실의 민족주의적 상징과 지표를 새로 창조한다. 그래서 손기정 가슴팍의 일장기는 지워져야 했던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맞서 이겼으나 시상대에 오른 그의 국적은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1936년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그때 일어난 조선 사회의 신드롬은 한국의 스포츠민족주의가 이 단계에 이르러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너무나 대단한 희열이라 조선인들은 거의 이성을 잃은 채 열병에 걸린 지경이었다. 두 달 간 온 조선이 들떠 있었다. 문필가는 감격에 겨운 환영사를 썼고, 월간지 기자는 손기정의 애인을 인터뷰하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났다. 손기정을 찬양하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기념 연극이 상연되어 흥행했다. 처벌을 받은 건 ‘동아일보’만이 아니었다. ‘조선중앙일보’,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 여성지 ‘신가정’도 신드롬에 동참했고 기꺼이 처벌을 받았다.
너무 감격했기에 조선인들은 슬펐다. 세계최고기록을 세우고 월계관을 썼지만 왠지 고개를 숙인 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식민지 청년의 사진 한 장이야말로 식민지 시대 민족적 정서구조의 표징이었다.
GDP(국민총샌산) 규모의 등위나 수출입 교역 규모 순위, 국가경쟁력 순위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국민의 실제적 삶의 질이나 행복과는 무관한 이런 등수가 왜 중요하겠는가? 한국인들은 그런 숫자들을 통해 자기를 발견해왔다. 1등부터 200등까지 죽 매긴 성적표 속에서 자아와 타자는 실질적으로 구분되고, 나는 비로소 내 분수와 처지를 깨닫고 정신 차린다. 등수야말로 민족주의를 표현하고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4강, 금메달 16개, 종합순위 6위 따위의 숫자가 무엇보다 중요한 국민적 지표가 된다. 자의든 타의든 ‘은자(隱者)의 나라’였고, ‘왜놈’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한국인들은 한국전쟁 이후 그렇게 새로 제 처지를 깨달았다. 식민지였기에 등수가 없다가 독립국으로서 등수가 매겨진 성적표를 받는 순간, 한국인들은 민족적 열패감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우리를 나타내주는 객관적 지표였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국민소득 62달러에, 월드컵경기에서 9대0으로 지는 민족 구성원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스포츠 민족주의는 과시 목적보다는, 강대국 틈바구니에 낀 약소국 백성이라는 민족적 열패감을 치유하는 데 더 자주 사용됐다. 월드컵 4강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관점은 적어도 그런 것이었다. 물론 정작 ‘붉은 악마’ 선풍의 당사자였던 젊은 세대는 그런 시각과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들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억압이며 환각이다. 스포츠 민족주의는 먼저 선수들을 억압한다. 어린 선수들은 훈련을 위해 선수촌에 보내지고 금지된 약물을 먹도록 강요당한다. 세계챔피언이 된 한국 선수는 ‘000 대통령 각하께 감사드린다’는 말로 승리의 소감을 피력했고,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한국 선수는 ‘국민들께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스포츠 민족주의는 경기를 즐기지 못하게 방해한다. 민족주의는 어릴 때부터 터무니없는 경기 관전법을 가르친다. 경기장에 있는 건 피아(彼我)만이 아닌데, 공정한 심판이나 선량한 타국 선수가 ‘우리’ 관중에게는 욕을 먹는다. 그 오프사이드가 뭔지는 잘 몰라도 안정환 오빠 때문에 축구를 보는 여성팬들이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우수한 관중이다.
독버섯 재배밭이 된 스포츠
스포츠 민족주의는 환각일 뿐이다. 월드컵 4강에 들떠 ‘세계 4강’이니 ‘우리는 하나’니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월드컵 4강을 경제 4강으로’라는 희한한 구호나, 혹 있었는지도 모르는 정치·경제적 효과는 부시의 전쟁과 다시 조장된 남북 긴장 때문에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4강의 주역이던 협회장은 대통령후보까지 올랐지만 어이없는 자책골에 주저앉았다.
현실은 축구보다 냉혹하다. 우리가 겪은 것은 IMF 이후 가장 심각한 경기 하강이었고, ‘하나’는커녕 사사건건 마주친 반개혁과 분열이었다. 그 여름에는 다같이 입은 붉은 티셔츠에 현혹되어 그들과 내가 하나인 줄 알았지만, 사실 원래 가난했던 레즈(Reds) 중 상당수는 신용불량자나 청년실업자일 뿐이었다.
스포츠가 온갖 독버섯이 자라나는 온상이 되는 것은 ‘편 갈라 싸우기’여서 아주 재미있고, 그냥 재미있는 게 아니라 아주 독하게 재미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상징들이 달라붙어 있다. 그래서 스포츠는 인간만이 누리는 훌륭하고 장대한 상징체계, 즉 문화이다. 그 상징의 절정은 당연히 국가대항전이다.
거기에는 스포츠와 별 관계 없는 역사와 전통이 다 끼여든다.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의미들은 스포츠에 달라붙는 의미상징 중에 가장 독한 것이다. 그 맛에 우리는 자꾸 TV 앞에 앉는다.
스포츠는 그 자체로 재미있다. 거기에는 정말 인간 드라마가 있고 아기자기한 성취와 낭만이 있다. 스포츠 경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적어도 겉으로 볼 때는 그것이 현실에서의 삶과는 달리 완전히 공정하기 때 문이다.
현실이라는 인생의 마라톤 경기에서 보면 출발선보다 5km 앞에서 뛰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20km 앞에서 뛰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뛰어가기로 한 룰을 아예 무시하고 승용차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규칙 앞에 절대 평등하고 그것을 똑같이 지켜야 하는 스포츠에서는 인내하고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 임춘애나 이봉주 같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딸이 스포츠 영웅이 되는 것도 이런 이치와 무관하지 않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한국에 첫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준 양정모 선수(가운데).
예컨대 1982년에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는 분명 그 발생이 불순하고 지저분한 편에 속한다. 정통성이라고는 눈곱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운 군사 독재가 프로야구를 만들었으며, 말 잘 듣는 재벌이 동원됐다. 그래서 19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프로야구에 대해 정서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프로야구를 안 보는 것도 아니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그러한 환원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서다. 이 소설에서 프로야구는 등장인물들에게 전혀 다른, 인생론적이고 사회학적인 의미를 갖는 도구다. 박민규의 소설만큼 강력한 유머를 구사하는 한국소설을 보기란 쉽지 않다. 이 유머는 한국 자본주의의 험악한 발전사가 평범 이하의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고통, 그리고 그것을 아이러니로 포착한 작가의 예리한 시각에서 나온다.
흰 옷 입은 조선인들이 엄복동과 서정권을 경기장에서 사랑하고 경기장에서는 기꺼이 ‘왜놈’들과 맞장 떴던 심리를 보면, 언젠가부터 경기장의 한국인들이 제3국과 싸우는 미국팀을 응원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아직도 한국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보다는 안전하지만.
‘작은 고추’는 숙명인가
한국인들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기에 마지못해 문제의 그 나라가 시키는 대로 하며 산다. 하지만 속내로는 무척 ‘재수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전혀 응원할 마음이 안 생기는 걸 어쩌랴. 더구나 관중은 대체로 정의롭기에 약자 편을 들게 마련이다.
여기서 상상 한 가지. 만약 부시가 올 여름의 아테네올림픽에서 미국이 우승하는 것만이 대량살상무기와 테러를 몰아내고 세계 평화를 진작하는 일이라 한다면? 아마 우리는 미국을 응원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며 미국응원을 독려받을지도 모른다. 일부에서는 한미동맹과 안보를 위해 당장 서포터스와 치어리더들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국민들은 TV 앞에 모여 속으로 ‘빌어먹을’ 할지도 모른다.
미국이나 중국 같은 거대 강국이 스포츠를 국가주의에 이용하는 한, 우리 또한 ‘금메달 13개, 종합순위 10위’란 목표를 걸고 ‘작은 고추’ 정신으로 열나게 뛸 수밖에 없다. 올림픽은 참가에 의의가 있다며 본래의 올림픽 정신을 강조하면 이크, 돌 날아온다. 그것이 한국 근현대사의 소위 지정학적 숙명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