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을 통해 지도자론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답을 준다. 인류 역사에는 왕정, 귀족정, 민주정, 공산체제 등 다양한 체제가 등장하였지만, 이 모든 체제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통치하는 자와 통치당하는 자로 나뉜다는 점이다. 그리고 작가는 묻는다. “피통치자는 통치자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시오노는 세 가지를 그 답으로 제시했다. 통치의 정당성과 권위, 그리고 역량이 그것이다. 그는 지도자가 합법적인 제도에 의해 선출되었더라도 지도자 스스로 권위와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스스로 권위와 역량을 입증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피통치자들로부터 항의와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지도자들이 처하게 되는 공통된 운명이다. 강건한 리더십은 스스로 하기 나름이다.
‘로마인 이야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한 믿음’이 짙게 깔려 있다. 시오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만 논하고 사는 양상을 직시하지 않는 자는 현재 가진 것을 보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모든 것을 상실하여 파멸로 향하는 수밖에 없다.”
명분 대 현실. 이것이야말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말이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사람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는 요즘이다. 명분과 도덕의 고함 앞에 실질과 실용은 힘없이 주저앉는다. 이는 결국 비용과 가난으로 낙찰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 공짜란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명분에 치우친 민족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까? ‘로마인 이야기’는 다양한 사례를 전해준다. 그 중 가장 큰 여운을 남긴 이야기는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의 3대 도시국가 중 하나였던 코린트의 비극적 멸망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문화를 존경하여 시종일관 그리스 민족의 독립과 자치를 존중해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로마의 태도를 힘있는 자의 관용이 아닌, 그리스 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자의 저자세로 받아들였다. 이는 로마 원로원을 모욕하는 결과를 낳았고, 마침내 로마인들의 관용은 끝이 났다. 급파된 로마군은 쟁기와 괭이로 땅을 고르듯 코린트 전체를 송두리째 파괴시켰다. 코린트는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 한탄한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인은 자유와 독립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력은 페리클레스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렸나 싶을 만큼 약할 정도였다. 기원전 2세기의 그리스인에 대해서는 로마인도 경멸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유와 독립을 부르짖는다는 점에서는 기원전 2세기의 그리스인도 페리클레스 시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이 자유와 독립을 현실화하는 방법이었다. 기원전 2세기의 그리스인은 다른 나라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친구의 위기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알지 못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유대인과 로마인 사이의 갈등이다. 마사다 요새의 몰락으로 상징되듯, 유대인의 배타적이고 비타협적인 저항은 스스로를 오랜 유랑 생활로 몰아넣는다. 시오노 나나미는 ‘유대인들이 좀더 현실적이고 유연할 수 없었을까’라고 되묻는다.
“유대인의 불만 원인이 반드시 로마에만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약자의 처지에 있었던 민족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피해의식밖에 없기 때문에 강자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기 쉽다. 다른 속주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고 끝날 일도 유대인과의 사이에서는 문제가 되곤 했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역사란 결국 반복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로마인의 관용을 오해했던 코린트인들과 같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과 같이 보이는 현실 너머의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실수를 오늘날의 우리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조직이든 국가든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보고 싶지 않은 현실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용기와 지혜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톡톡히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많은 이들이 경기 불황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불황이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데 있다. 육신은 이 땅에 있지만 이미 정신은 ‘이민’을 떠나버린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특히나 투자할 경제적 여력이 있고, 어느 정도 살림 기반을 마련한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늘고 있다. 나는 그런 현상을 ‘정신적 이민’이라고 부르겠다.
좋든 싫든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이 떠나버렸으니, 어떻게 성장이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의 겉은 물질로 드러나지만, 그 속은 의욕과 의지라는 엔진에 의해 움직인다. 불신, 보복, 갈등, 분쟁, 비난, 음해, 사기…. 이러한 낱말들이 오늘날 이 땅을 대표하는 용어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어느 지방 도시에 강연을 갔을 때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한 쪽에서는 새 건물을 짓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폭약을 이용해 건물을 허물고 있었다. 건물을 허무는 일은 건물을 세우는 일과는 달리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사람의 명성이나 조직의 번영 또한 이와 같아서 사람이 명성을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명성을 잃는 데는 하룻밤이면 충분하다. 하나의 조직, 하나의 국가가 번영의 기반을 닦으려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수십 년 쌓여야 하지만 그것을 허무는 일은 불과 몇 년 걸리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허물어지는 모습은 쉽게 눈에 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것들이 허물어지는 일은 벼랑 끝에 다다르기 전에는 알아차리기 힘들다. 조직과 국가를 지탱하는 자산이 그러하다. 그래서 더더욱 무서운 일이다.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한 우리 사회는 폭약으로 허무는 건물처럼 쉽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가 가진 우열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자질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로마인 이야기’의 교훈이 새삼마음에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