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한국 고대사 빼앗기 전략’을 정확히 분석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섣부른 ‘감정싸움’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학계는 ‘만주는 우리 땅’ 식의 과잉반응을 경계한다. ‘동북공정’의 실체가 공개된 후 중국이 펼칠 논리와, 이에 대응하는 한국의 전략을 알아보자.
지난해 12월9일 결성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공동대책위원회.’ 최광식 공동대표는 ‘성명서’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한국고대사학회 등 한국사 관련 17개 학회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와 고구려역사지키기범민족시민연대 소속 130여개 시민단체가 손잡고 ‘고구려사 바로잡기’ 1000만명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정부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기구 설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해 ‘동북공정’의 과제를 공개한 중국은 이미 구체적인 실천작업에 들어갔다. 향후 중국의 논리와 이에 대응할 한국의 전략은 무엇인가.
중국의 고대사 빼앗기 전략
지난해 10월 중국에서 출간된 ‘고대중국고구려역사속론’(古代中國高句麗歷史續論, 이하 속론)은 동북공정의 기초 방향을 제시한 ‘고대중국고구려역사총론’(2001년 2월 출간)의 속편에 해당된다. ‘속론’에서 중국은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점검하고 이에 따른 새로운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선 중국은 남북한의 고구려사 연구가 ‘비학술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1983년 육군본부가 펴낸 ‘통일과 웅비하는 민족 역사를 향하여’에서 “잃어버린 만주 대륙을 되찾자”고 한 부분을 거론하며 “한국 재야사학의 비학술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역사인식이 당시 한국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에게 대륙수복 의지를 불러일으켰다”고 적고 있는 것.
또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일어난 한국의 고구려 유적 탐방과 연구 붐 역시 ‘대고(구)려민족’에 공감하는 민족주의 열기의 한 단면이며, 분열·대치 상태에 있는 남북한이 고구려사 귀속 문제(고구려사의 한반도 역사성 강조, 중국 역사성 부정)에 관해서는 놀랍게도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한다. 북한이 고구려 벽화고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한 것에 대해서도, 정치와 외교 이익을 고려한 것일 뿐 학술적·문화적 목적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못박고 있다.
‘고대중국고구려역사속론’
서 회장은 이 대목에서 중국이 고구려사에 대해 취해온 ‘일사양용(一史兩用)’ 원칙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일사양용’을 한 역사를 두 나라가 공유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나, 사실 이것은 한국이 고구려사에 대해 논하는 것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결코 고구려사의 절반이 한국사라고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중국은 남북한이 고구려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우리(중국)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학술연구와 정치문제 그리고 역사연구와 현실관계를 분리하는 원칙을 견지해야 하며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국제 학계에 제공함으로써 고구려사 연구를 추진하고 심화시켜야 한다”는 고도의 전략전술을 펼치고 있다.
이를 위해 한국어에 능숙하며 한국 학계와 교류가 있는 조선족 역사학자들을 적극 지원하고, 동시에 중국내 모든 문헌과 고고학 자료 등 고구려사에 대한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편년체제를 만들고 남북한 및 기타 국가의 고구려 관련 연구와 저술 목록(색인 포함)을 만든다는 구체적인 실행방법까지 적시했다.
그러나 이미 ‘고대중국고구려역사’ 총론과 속론 집필에 한국 유학파 중국인 혹은 조선족 학자가 참여했고, 또 이들은 국내 고구려·발해 관련 연구 및 학술서적의 중국어 번역작업을 맡아왔다. 결국 중국은 조선족 연구자들을 척후병 삼아 한국 학계의 실상을 파악하고 철저하게 대응논리를 마련한 후 비로소 한국을 향해 ‘학술전(學術戰)’을 선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경이 되도록 한국은 중국의 한국 고구려사 빼앗기 전략을 몰랐던 것일까.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1980년대에 시작돼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됐다. 단국대 서영수 교수는 중국 고구려사 연구의 변화를 3단계로 설명했다.
1950년대부터 1980년까지(1단계)는 중국 각종 교과서에 고구려사가 한국사의 일부로 기술되는 등 전통적인 견해가 유지됐다. 하지만 1980년대(2단계) 들어 ‘일사양용’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고구려사의 한국사 귀속 문제를 비판하는 한편, 427년 고구려의 평양 천도 이전 시기를 중국사로, 천도 후를 고구려사로 구분하는 일종의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다 1990년대(3단계)에 접어들어 ‘모든 역사는 중원(中原)으로부터’라는 중원 중심의 민족사 연구인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이념화하고 고구려사를 전면적으로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가 노골화됐다.
1993년까지만 해도 중국 역사책은 고구려를 한국사라고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쑨진지(孫進己) 등 고구려사를 중국사 입장에서 연구하는 학자도 있었지만 중국 당국이 우방국가인 북한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해 이들의 발표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중 국교 수립 후 1993년 8월 지안시에서 열린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예상치 않게 이 문제가 불거졌다. 중국 한국 북한 일본 대만 홍콩 등 각국 학자들이 참석한 토론회에서 고구려 귀속문제를 놓고 당시 지안박물관 겅톄화(耿鐵華) 부관장과 북한의 원로 역사학자 박시형이 설전을 벌였다. 이어 쑨진지가 “역사상 고구려는 오랫동안 중국의 중앙 황조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후예는 조선족이라 할 수 없고 대부분 오늘날 중국의 각 민족이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중국측 입장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쑨진지는 더 나아가 ‘동북민족사연구’(1994년)에서 한국사의 범위를 신라사로 한정하고, 만주 외에 한반도 북부까지도 중국 영토였다고 주장했다.
이후 중국 동북부 지역 대학마다 고구려 혹은 한국 관련 연구소들이 설치됐다. 1996년에는 아예 중국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이 앞장서 고구려 문제를 중점연구 과제로 선포했다.
‘아, 고구려’의 만시지탄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고구려 붐’이 일었다. ‘고구려사’를 집필한 이화여대 신형식 교수는 1980년대 말부터 북한의 연구성과가 국내에 소개되고 한·중 수교 이후 중국(만주)의 고구려 유적을 접하게 됨으로써 고구려 연구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됐다고 설명한다. 이 전까지 국내 역사학계의 고대사 연구는 신라사 중심이어서 상대적으로 고구려는 외면당하고 있었다. 문헌사료 부족과 만주와 북한 고구려 유적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1993~94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고구려 문화유적 전시회 ‘아! 고구려’는 만주지역 한민족 역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학문적 연구 열기도 높아져서 1990년대 중반 이후 고구려 관련 박사학위 논문이 이어졌다(금경숙 ‘고구려 전기의 정치제도 연구’, 임기환 ‘고구려 집권체제 성립과정 연구’, 박경철 ‘고구려의 국가형성 문제 연구’, 여호규 ‘1~4세기 고구려 정치체제 연구’,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연구’, 최종택 ‘고구려 토기연구’, 강현숙 ‘고구려 고분연구’ 등).
하지만 한국에서의 ‘고구려 붐’은 대중의 일시적 관심과 개별적인 연구성과에 머물렀을 뿐 중국에서처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프로젝트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고구려사가 우리 역사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이하게 대처한 측면이 있고, 외교적으로 예민한 만주지역 문제를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의식도 작용했다.
서울대 송기호 교수는 ‘역사비평’(2003년 가을호)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으나 굳이 상대방을 자극하여 연구마저 장애를 받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참아왔다”고 고백했다.
고려대 최광식 교수는 1999년 베이징대 초빙교수로 머물 당시 이 문제를 감지하고 한국고대사학회에서 학술발표회를 준비했으나, 2002년 12월에야 이루어졌다. 결국 고대사를 둘러싼 한·중 역사분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그 사이 많은 고대사 연구자들은 현장답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발해 ‘친자확인소송’
1994년 헤이룽장성 발해박물관에 들렀던 경성대 한규철 교수는 발해사 연구자라는 이유만으로 입장이 거부됐다. 그후 중국 답사 때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연락을 하고, 가급적 행선지를 정확히 알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었다. 그렇게 조심을 해도 허락없이 답사를 했다고 벌금을 물거나 필름이나 카메라를 빼앗기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심지어 중국 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돼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한·중 역사전쟁을 처음 실감한 것은 고구려가 아닌 발해사 연구자들이었다. 중국이 발해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20여년 전부터 진행됐다.
송기호 교수에 따르면 20년 전 중국은 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상고사 체계 대신 숙신-읍루-물길-말갈로 이어지는 계보도를 공식화했다.
중국 정부의 유적 복원·정비 사업에 의해 유리벽 속으로 들어간 광개토왕비.
중국은 한국 연구자의 접근 자체를 봉쇄하고 한국의 발해사 연구가 객관성이 없으며 동아시아 전체로 볼 때 반(反)평화적이라고 매도하는 한편, 자신들은 1980~90년대 사이 발해사 연구를 집중 지원했다(중국 발해사 관련 논문의 90%가 이 시기에 나왔다). 한규철 교수는 “2002년 발표된 ‘동북공정’은 발해사에 이어 고구려사, 고조선사에 매진하겠다는 신호탄”이라고 말한다.
송기호 교수도 “만주지역 관련 한국 고대사로는 민족의 형성,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를 들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부여에 대한 논쟁이 없다는 것은 중국이 너무도 당연히 자기들 역사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며 “2003년 동북공정 연구과제를 보면 고구려와 발해가 소홀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는 이미 전년도 과제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여기에 제시된 과제들은 그 이후에 대한 포석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1998년 ‘발해의 지배세력 연구’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임상선(교과서연구소 소장)씨는 “발해를 둘러싼 소유권 분쟁은 아주 복잡하다. 우리는 발해사가 한국사임을 의심하지 않지만 중국, 일본, 러시아까지도 발해사를 자국 입장에서 연구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친자확인소송’을 하고 있는 셈”이라며 “고구려도 발해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학계는 눈뜨고 우리 역사를 도둑맞으면서도 항의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10년 전 고토회복을 꿈꾸며 외쳤던 ‘아, 고구려’가 지금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의 ‘아, 고구려’가 된 것이다.
고구려재단 출범부터 난항
지난해 12월9일 결성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공동대책위원회’(공동대표 최광식)는 정부에 고구려사를 비롯, 고대 동북아시아 역사를 체계적으로 다룰 연구센터 설립을 건의했다. 당장 대응논리를 개발할 전략사령부라도 만들자는 뜻이다. 고건 국무총리가 앞장서 ‘고구려사연구센터’ 설립을 약속하고 1단계로 50여명의 연구진 예산 100억원 확보를 발표하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구 설립 과제가 교육인적자원부로 넘어온 후 명칭, 법적 위상, 연구 및 활동 범위 등을 놓고 관련 학계와 시민단체의 의견이 크게 엇갈려 쉽사리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애초 정부가 발표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하 정문연) 산하 부설기관 계획은 백지화됐다. 새 기구는 재단법인 형태의 독립법인으로 하되 구체적 사안은 ‘고구려사연구재단 설립추진위원회’를 꾸려 결정하기로 했다.
2월4일 열린 재단설립추진위 창립 총회에서 고려대 김정배 교수가 위원장에 추대됐다. 김 위원장은 “가칭 ‘고구려사연구재단’은 연구가 활동의 중심이 돼야 한다”며 “연구영역을 한·중·일 역사, 고대에서 현대까지를 모두 포괄해야 한다는 주장은 재단 설립의 당초 목표에서 벗어나 산만해질 수 있다. 독도 문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하고 있고, 상고사는 정문연이 맡아 연구 영역이 중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선택과 집중으로 연구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물론 고구려만 연구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부여, 고조선, 발해 등 모든 영역이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소위원회를 구성해 재단 설립 방향을 마련하고 2월12일 공청회를 거쳐 3월1일 공식 출범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가칭 ‘고구려연구재단’(창립총회 때 ‘고구려사’에서 ‘사’가 빠졌다) 설립 추진을 위한 공청회에서는 각계각층의 요구와 제안, 불만이 쏟아져나왔다.
소위원회를 거쳐 한국외국어대 여호규 교수가 정리한 안을 살펴보면, 기구 명칭은 ‘고구려연구재단’으로 하되 고구려사 외에 상고사·발해사·한중관계사·민족문제를 전담하는 3개 부서 6개팀을 구성하고 38명 정도의 상근 연구인력을 확보해 연구중심 기구로 만든다는 내용이다. 애초 고구려에 집중하기로 한 것과 달리 상고사, 발해사, 한·중관계사를 포함시키는 등 연구범위가 상당히 넓어졌다.
그러나 공청회 토론자로 나선 ‘고구려역사지키기 범민족시민연대’ 박원철 대표(변호사)는 “동북공정의 핵심은 동북지역의 패권전략이며 역사전쟁인데 재단의 목표를 고구려사 연구에 한정하자는 주장은 중국의 초기전략에 말려들어가는 무책임한 대응”이라고 비판했다. 또 박 대표는 고구려사를 전공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재단 명칭이나 활동 범위를 고구려사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나 이 사안은 연구뿐 아니라 교육·홍보 그리고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정책적 방안 마련까지 망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한 중국 지린성의 광개토왕비. 유적 정비사업 이전 모습이다.
이는 2005년 일본 우익교과서 검정 통과시 역사왜곡 문제가 다시 불거져나올 때 대응할 기구가 없다는 현실적인 고민을 반영한 것이다. 현재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를 다루기 위해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구성돼 있으나, 2005년 5월까지 한시적 기구여서 앞으로 이 일을 맡을 새로운 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이에 대해 여호규 교수는 “중국 변강에 대응해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분야 전문가가 거의 없는 상황이고, 국민 홍보나 국제 홍보는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고구려연구재단’으로 출범한 후 고려할 사안”이라고 답변했다.
토론자들의 견해가 엇갈리는 데다 방청석의 뜨거운 참여열기로 공청회는 예정시간을 2시간이나 넘겼다. 방청석에 있던 포항공대 박성희 교수는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공개한 27개 과제 중 12개가 간도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이것은 고대사가 아니라 근현대사 문제”라면서 “동북공정의 궁극적 목적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현재 제안한 기구로는 대응이 곤란하다”고 했다.
동아대 윤휘탁 연구교수도 “우리끼리 고구려사는 우리 역사라고 외쳐봐야 소용이 없다. 중국의 역사왜곡을 바로잡으려면 한·중·일이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고구려’라는 명칭으로 그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을 수 있겠는가”라며 명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 중국 현지답사를 다녀온 우석대 조법종 교수는 “참여정부가 ‘동북아 중심국가’라고 하자 중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듯이 ‘동북아’라는 표현이 오히려 중국을 자극할 여지가 있다”면서 “고구려라는 표현이 가치 중립적”이라고 주장했다.
대체로 한국고대사학회 중심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라는 명칭과 고대사 중심의 순수 연구기구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또 시간이 촉박한 만큼 명칭 논란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출범부터 하자는 쪽.
반면 근·현대사 전공자들과 시민단체는 ‘동북아’나 ‘동아시아’ 등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명칭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시민단체들은 연구 외에 교육·홍보 등 시민단체의 참여가 보장되는 종합적인 기구를 요구하고 있어, 가칭 ‘고구려연구재단’이 연구중심 기구가 된다 해도 시민단체의 참여 열기를 뿌리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연구인력 부족 타령 언제까지
동북공정이 터지자 정부가 서둘러 연구재단 설립을 추진한 이유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 상응한 연구기관을 설립해 중장기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연구 역량이나 성과물 부족이 아니라 이를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결집할 창구가 없다는 데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호규 교수도 “2002년 12월 한국고대사학회에서 중국학계의 고구려사 연구현황을 정리하는 과정에 이 문제를 파악했으나 정작 문제를 제기할 공식 창구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중국 사정에 밝은 한 연구자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알려지자 국내의 고구려사 연구자가 10여명에 불과하다는 등 연구인력 부족이 가장 큰 이슈가 됐으나, 사실 중국의 경우 대학에서 고구려를 전공한 사람은 3명밖에 안 되고 그 중에서도 겅톄화 빼고는 복수 전공자들”이라며 “지금까지 고구려 연구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한국이 절대우위에 있다. 다만 기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중국에 전략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고, 또 우리 연구가 오히려 중국의 논리를 뒷받침하는데 역이용당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신형식 교수도 ‘고구려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라는 글에서 “고구려사 연구는 많은 제한과 이설(異說)이 있지만 근자에 이르러 풍부한 연구성과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중국측에서 주장하는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의 한 축을 이룩한 정치·군사·외교적 강국이었고, 문화대국이었음이 밝혀졌다”고 높이 평가했다. 다만 “남북한과 중국측에서 보는 각각의 입장 차이로 이들 세 나라 학자와의 공동연구 및 비교사적 검토를 숙제로 남겼다”는 것이다.
당장 중국은 고구려와 관련, 한국의 백산학회(회장 신형식)와 고구려연구회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고대중국고구려역사속론’은 이들 학회의 회칙과 연구진, 연구성과를 수십 쪽에 걸쳐 소개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38년 전통의 백산학회는 백두산정계비나 간도 문제 등 우리 민족의 만주지역 활동사 연구에 주력해왔다. 1996년 학회 창립 30주년을 맞아 ‘한민족의 성장과 영역’이라는 제목으로 만주대륙 연구성과를 총정리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했고, 연 3회 발행하는 학회지는 북방연구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2003년 12월 발행한 백산학보 67호는 ‘고구려·발해사 복원’을 주제로 신‘중국 동북공정의 허실’(신형식), ‘중국의 고구려사편입과 한국의 대응전략’(이인철) 등 무려 29편의 논문을 게재했다.
백산학회 육낙현 총무(백산자료원 대표)는 “너도나도 ‘고구려지킴이’로 나설 게 아니라 연구자들이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며 “동북공정은 고구려 문제가 아니라 한·중 영토문제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간도 문제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1991년 ‘간도협약에 관한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일걸 박사 등 8명의 소장학자들은 매주 백산학회에서 간도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백산은 3월 중 ‘고구려는 중국인가’라는 단행본을 펴내 한·중 역사학자들의 상반된 고구려관을 보여줄 계획이다. 6월에는 근대의 국경문제와 영토분쟁을 주제로 학술행사가 예정돼 있다.
중국 앞지른 고구려 연구
한편 ‘속론’은 고구려연구회에 대해 “한국학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고구려를 연구하고 있는 단체”라고 소개하고 “소장학자들 중심으로 연구방법론, 연구영역 모두에서 새로운 경향을 보이며 학제간 연구에 매진, 심지어 자연과학과 각종 현지답사 등을 포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고구려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서길수 교수는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중국 답사만 37회나 한 중국통. 특히 만주지역 고구려 산성의 분포와 특징을 밝히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또 1994년 KBS주최 ‘고구려 특별대전’ 때 ‘고구려성’ 전시를 전담했고 2003년 ‘국내성 천도 2000년 기념 특별전’을 진행하는 등 고구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기여했다.
고구려연구회 소속 윤명철 동국대 겸임교수(해양문화연구소 소장)는 역사학자 이전에 탐험가로 더 알려졌다. 직접 뗏목을 타고 대한해협, 황해, 동중국해를 건너면서 고대 해상항로를 직접 확인했고, 17일간 말을 타고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는 등 ‘행동주의 역사학’을 시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윤 교수는 “역사학이 문헌고증에 매달려 역사를 관념적으로만 이해한다”면서 “‘삼국사기’에 장수왕이 800필의 말을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나 어떻게 보냈는지가 빠져 있어 그것이 바닷길임을 증명하기 위해 뗏목을 탔다”고 한다. 1995년 ‘말 타고 고구려 가다’ 프로젝트는 기마민족, 대륙문화라고 알려진 고구려인들의 시간과 영역개념을 직접 체험하려는 시도였다.
‘고구려 해양교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윤 교수는 우리 민족이 대륙과 반도, 해양을 역사 활동의 무대로 삼았다는 ‘해륙사관’을 주장해, 내륙 중심의 고구려를 해양국가로 확대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아가 고구려가 국제 질서의 한가운데에서 역학관계를 잘 조정해 강국이 될 수 있었다는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을 설정, 한국의 발전모델로 삼기도 했다.
최근 고조되는 고구려 연구 열기에 대해 윤 교수는 “고구려사가 아닌 고구려 그 자체를 연구해야 하고, 고구려를 계기 삼아 역사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면 비(非)고구려 전공자들까지 이 논의에 흡수해야 한다”고 했다.
고구려 非 전공자까지 아울러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김일권 박사는 학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석사·박사는 종교학을 한 이색 경력을 갖고 있다. 1999년 제출한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이 ‘고대 중국과 한국의 천문사상 연구: 한당대(漢唐代) 제천의례와 고구려 고분벽화의 천문도를 중심으로’였다. 김 박사는 “종교의식을 연구하다 보면 동양사상의 우주론과 연결되며 결국 ‘천문사상사’라는 독립된 연구영역을 발견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특히 ‘고구려 벽화와 별자리’에 관한 그의 연구는 거의 독보적이다.
김 박사에 따르면 고구려 별자리는 6~7세기 무렵 북극성이 추가돼 ‘오방위’가 되고 고분 천정에 황룡을 그려넣어 고구려의 천하관, 즉 ‘황룡사상’을 완성했다. 같은 시기 중국은 북극을 ‘북극 오성’으로, 고구려는 ‘북극 삼성’으로 그려 별자리 양식이 서로 다르다. 이 분야는 아직 중국의 연구가 전무한 분야인 데다 고구려의 독자적인 문화를 입증할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고구려 전공자는 아니나 ‘한국고대복식사’를 연구해온 상명대학 박선희 교수의 연구도 한·중역사 논쟁에 새로운 논리를 제공해준다. 박 교수는 ‘한국고대복식 그 원형과 정체’에서 “한민족의 고대복식 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못된 통설로, 복식뿐 아니라 생활문화 전반에서 고대 한국 고유의 문화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비강단파인 김용만 문화공학연구소 연구실장의 연구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쓴 통사 ‘고구려의 발견’을 통해 고구려인들의 삶을 복원했다. 이밖에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 고구려 관련 단행본을 가장 많이 펴낸 저자이기도 하다.
중국 지안시 산성하 무덤군. 지안시는 그 자체가 거대한 고구려 박물관이다.
고구려사 연구의 권위자인 서울대 노태돈 교수(현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방문교수)는 ‘동아일보’(2월2일자) 기고문에서 “먼저 중국학계의 논리적 근거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른바 ‘중화민족 다원일체격국론’ 등의 민족형성 이론과 그에 근거한 역사해석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근본적으로는 남북한을 아우르는 차원에서 우리 학계 나름의 민족형성론을 정립해야 한다. 이 같은 연구 작업을 하려면 한국 고대사학을 위시한 여러 분야의 연구가 필요하다.”
노 교수의 지적대로, 앞으로 세워질 기구의 명칭이 ‘고구려재단’이든 ‘동북아연구센터’든 시급한 일은 기존 연구성과를 재검토해 우리의 논리를 개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구려·발해사의 중국사 귀속 문제에 대처하는 차원에서 한국의 고대사 체계에 대한 재검토작업이 필요하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열국시대-삼국시대-통일신라로 이어지는 고대사 체계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을 우리 역사로 인정하면 무려 1400여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은 것이 돼 자칫 중국에게 우리 역사를 내주는 빌미가 된다.
그러나 윤 교수는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중국의 지배세력과 단군조선이 동서로 대치했다고 주장한다. 즉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별개의 국가였으며, 고조선의 주무대는 요서지역이었다는 것이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의 복기대 학예연구원의 고고학 연구는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중국 지린대에서 ‘요서지역 청동기시대 문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복 연구원은 고조선 고유의 문화로 인정받고 있는 비파형 동검의 분포지를 조사한 결과 주분포지가 요서지역이었다고 한다. 이는 하가점하층문화-위영자문화-릉하문화(비파형 동검 문화)로 이어지는 만주지역 청동기 문화의 주역이 누구인지 말해준다.
우리 눈으로 고구려사 다시 쓰자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 역사학계는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했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웠다는 것이 정설. 다만 “위만과 그를 따라온 1000여명의 유이민은 중국적 세계질서를 거부한 세력으로 고조선이라는 체제 안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은 단순한 식민정권이 아니다”(‘한국사인물열전’ 중 송호정의 ‘위만’ 편에서)라고 해석한다. 이런 상반된 견해들이 새로운 기구 안에서 어떻게 걸러지고 활용되느냐가 관건이다.
앞으로 세워질 연구재단은 이처럼 한국사내 다양한 견해와 이설을 아우를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돼야 한다.
당장은 고구려 문제가 현안이지만 ‘동북공정’의 숨은 목적은 ‘남북통일이 동북지구의 조선족에 미칠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윤휘탁)이다. 윤 교수는 동북공정을 둘러싼 역사논쟁이 “만주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싼 한·중간 역사적 지정학적 갈등의 산물”이라고 했다. 고려대 최광식 교수도 최근 펴낸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서 “남북통일 후 중국 동북지방에 들어설 가능성이 높은 북한 망명정부 견제용”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나아가 송기호 교수는 “신라 이북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한 중국의 팽창적 민족주의”라고 말한다.
동북공정은 고구려를 겨냥한 국지전이 아니라, 한·중 역사를 건 전면전임이 분명하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와 학계의 대응전략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2월12일 열린 공청회에서 서길수 교수는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10년간 고구려연구회를 이끌다 보니 고구려 연구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결론이 나오더라. 중국의 논리를 방어만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중국이 언제 만주를 지배해보았느냐고 따질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중국은 고구려에 국한되지 않고 ‘흉노의 서쪽 이동과 헝가리 민족의 관계’라든지 ‘몽고 유목 제국의 해체와 중국 내몽고와 몽고, 러시아 민족과의 관계’ 등으로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데 우리는 한국사, 그것도 고구려에만 매달리고 있다. 우리는 고구려 이후 고구려 옛땅에 세워진 모든 국가-중국이 당연히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요, 금, 원, 청-에 대해 총체적으로 연구하며 우리의 눈으로 동북아시아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