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 입력2004-02-27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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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대 총선이 임박했다. 각 당은 사활을 걸고 새 인물을 영입, 전면에 포진시켰다. ‘신동아’는 이번 총선에 각 당이 기대주로 내세운 정치신인 20명을 선정해 소개한다. 이들은 각 당의 공천 및 후보자격심사위원회의 추천을 받은 후 ‘지역민심’ ‘인지도’ ‘주요경력’ 등을 고려해 선정했다. 단 총선출마 유경험자와 전국구 신청자는 제외했다.
    • 게재 순서는 의석 수를 고려해 한나라당(6명), 민주당(6명), 열린우리당(6명), 자민련(1명), 민주노동당(1명) 순이며 당별로는 가나다순을 원칙으로 했다(편집자).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65년 서울 출생 ●문일고, 고려대 법대 졸업, 미국 듀크대 로스쿨 연수 ●사시31회●태평양로펌 국제담당 변호사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 ●수원지검 안산지청 검사

    수원지검 안산지청 검사 출신’ 강민구(姜?求·38)씨는 2003년 8월 정계입문을 결심했다. 한나라당 후보로 고향인 서울 금천에서 출마하기로 한 것.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TV에 자주 출연해 인지도가 높은 연세대 의대 윤방부 교수(60)와 금천지구당위원장 자리를 놓고 경선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잘 나가는 검사였다. 검사직을 내던진다 해도 국회의원 당선은커녕 한나라당 위원장직 얻기마저 극히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강씨는 서슴없이 사표를 내고 정면승부를 걸었다. 2개월 간 정신 없이 선거운동을 했다. 10월1일 경선이 실시됐다. 결과는 594 대 586표. 불과 8표 차로 강씨가 윤 교수에 승리한 것으로 나왔다. 강씨의 승리는 한나라당 세대교체 바람의 첫 번째 사건이며, 상징이 됐다.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힘든 테스트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이는 정치인으로서 그를 단련시키고 성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강씨의 말투는 온화하다. 그의 취미는 색소폰 연주다. 그러나 ‘세속적인 것에 타협하지 않는’ 강골의 기질도 있다. 강씨는 “공익에 부합하는 정의로운 일이라면, 맞서야 할 상대가 누구든 정면으로 상대하는 스타일”이라고 자신을 평했다.

    사시 31회 출신인 강씨는 사법연수원 수료 후 서울 ‘태평양로펌’에서 국제간 무역분쟁 소송을 전문으로 다루는 변호사로 법조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강씨는 경제문제 소송을 맡으면서 사회부조리 척결에 일조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고 한다. 1년 뒤 그는 검사임관을 신청해 검사가 됐다. 서울지검, 수원지검, 부산지검, 울산지검을 거치면서 그가 보여준 활약상은 인상적이었다는 평이다.



    1995년부터 97년까지 그가 파헤친 ‘아가동산’ 사건 수사는 ‘강민구’라는 이름보다 사람들에게 더 깊이 각인돼 있다. 그 외에도 여주 조직폭력배 사건, 서울시내 음대 입시부정사건, 한국전력 비리, 서울시내 건축과 교수들 비리, 연예계 비리, 월드컵경기장 건설관련 뇌물수수 사건, 안산시장 뇌물수수 구속 수사도 그가 일궈낸 성과들이다.

    그의 지지자들은 “법조계에선 ‘강 검사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정의로운 특수부 검사의 전형’이라는 평이 있다”고 말한다.

    ‘금천 토박이’라는 강씨는 “금천은 낙하산 공천, 뜨내기 공천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이번엔 될성부른 젊은 사람을 뽑아서 크게 키워달라”고 호소했다. 군부대 이전, 첨단 상업지구 조성, 규제완화, 뉴타운지정 등 금천 주민들의 바람이 실현되도록 힘을 쏟겠다고 한다.

    강씨는 스스로를 개혁파로 칭한다. 그러나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의 개혁파와 자신을 구분시켰다.

    “도덕성, 개혁성에서 저는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공직수행은 민주화운동만큼이나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념적 대결보다는 국익과 국민의 실생활 개선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30대는 ‘열정은 있으되 경륜은 없다’는 비판을 듣지만 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도권내에서 치열한 트레이닝을 받았습니다.”

    강씨는 “한나라당이 대한민국의 버팀목이 되어야 함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그렇게 거듭날 수 있도록 검사시절의 정의감으로 부패정당, 수구정당 이미지를 뜯어고치는 데 힘을 쏟겠습니다.”

    허만섭신동아 기자mshue@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61년 경북 안동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고려대 정외과 및 정책대학원 강사, 통일원 통일정책실 정책보좌관 ●2000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보좌역 ●현 미래연대 공동대표

    “열린우리당 내의 386세대들 대부분은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의회주의 안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의회주의 내에서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을 훈련하지 못했으니 지금처럼 갈등을 조장하는 국정운영밖에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 자신 80년대 학번으로 대학 시절 운동권에 몸담았던 권영진(權泳臻·44) 한나라당 미래연대 공동대표의 지적은 신랄했다. 권 대표는 고려대 재학 시절 전국에서 최초로 대학원 총학생회를 결성해, 이른바 ‘대학원 운동’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던 주인공. 북한 문제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통일원에서 7년간 근무하다가 2000년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정무보좌역으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현재 노원을 출마를 목표로 지역을 누비고 있다. 현역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맡았던 열린우리당 임채정 의원.

    미래연대는 16대 총선 직전인 2000년 1월, 남경필 오세훈 김영선 의원 등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과 외부 전문가들이 주축이 돼 출범한 정치 결사체다. 당시 권 대표는 ‘정치권과 비정치권의 전문가 연대’를 표방했던 미래연대의 산파역을 맡았고 그 후로도 사무처장으로 미래연대의 살림을 책임져왔다. 16대 임기 내내 국회의원 배지만 달지 않았을 뿐 한나라당내 소장 개혁파의 목소리를 꾸준히 대변해 온 셈이다.

    그런 만큼 정치권 전반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극복하고 우리 정치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치신인들이 국회에 한 사람이라도 더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 권 대표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는 ‘젊고 참신하다’는 조건 이외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바로 ‘전문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 권 대표는 북한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강단에서 정치학을 가르친 경력을 갖고 있다.

    이제 지역구에 사무실을 연 지 6개월째 되는 권 대표는 신인들에게 불리한 정치제도에 불만이 많다. “신인다운 참신한 선거운동 방식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고 하자 당장 “오히려 신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치신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다름아닌 ‘돈’ 문제다. 곧바로 선거자금이 얼마나 들 것 같으냐고 묻자 “3억원 정도는 들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중 1억원 정도는 여태까지 모아둔 돈으로 충당하고, 나머지 2억원은 주택담보대출과 후원회를 통해 충당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그러나 아직 당내 경선이라는 ‘예선전’을 앞두고 있는 권 대표는 “당내 경선을 치르게 되면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다. 서울 지역 다른 곳에서 당내 경선을 치른 경우를 보면 평균 3억원 정도는 들었다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원 10%와 일반 유권자 90%가 참여하도록 돼 있는 당내 경선은 결국 투표인을 동원하는 능력에서 선거 결과가 판가름나기 때문에 돈을 뿌릴 수밖에 없는 구조를 안고 있다는 것.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단어는 ‘양심적 보수’와 ‘합리적 개혁’이라는 말이었다. “한나라당이 다음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기회에 기득권을 버리고 ‘틀갈이’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개혁’ 목소리를 대표하는 권영진 대표가 유권자들의 어떤 심판을 받을지 주목된다.

    성기영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61년 경남 진해 출생 ●연세대 법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시 35회●1996년 변호사 개업 ●현 태인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새천년민주당 법률자문단장, 과학기술부 고문변호사, 연세대 법학과 강사, 동아일보 자문변호사, 김대중 전 대통령 소송대리인

    서울 노원을 선거구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17대 총선 출마를 선언한 최인호(崔仁虎·42) 변호사는 민주당과 일찌감치 인연을 맺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당 총재 시절 법률특보를 맡은 것을 계기로 이후 민주당 소속 의원 30여명의 각종 소송 진행을 도맡다시피해 민주당에 큰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수차례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음에도 끝내 민주당을 고집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최 변호사가 선거전략의 하나로 강조하는 자신만의 강점은 ‘젊은 정치신인’과 ‘전문성’이다.

    “국민들이 우리 정치를 불신하고 욕하는 이유는 기성 정치권이 부패하고 시대에 뒤쳐진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젊은 전문가들이 정치를 이끌 때입니다. 미국은 40대 대통령이었던 케네디와 클린턴 시절에 가장 부흥했고,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도 46세의 나이에 영국을 이끌지 않았습니까. 젊은 정치인, 그것도 40대가 역동적으로 일을 잘할 것이라는 기대가 노원 을 지역에서도 매우 큽니다.”

    최 변호사의 이력을 보면 그가 허투루 전문성을 내세우는 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변호사 개업 후 주로 가정법률 분야에서 경륜을 쌓아왔고 관련 TV프로그램의 상담변호사로도 활동의 폭을 넓히는 등 ‘이혼상담 변호사’로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 온화한 이미지 덕에 ‘법조계의 박수홍’이라는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지역주의와 무관하다는 점도 최 변호사의 강점이다. 경남 진해 태생이지만 고교시절 이후 줄곧 서울에서 생활한 데다 민주당 소속이어서 영·호남과 서울을 아우르는 만큼 지역주의 시비로부터 한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짧지 않은 강의 경력에서도 전문성은 엿보인다. 그가 3년째 강의하고 있는 연세대 법학과 개설의 ‘현대사회의 법과 원리’ 교양강좌는 매번 수강생이 470∼480명씩 몰리는 ‘인기과목’으로 자리잡았다.

    선거구의 현안과 관련, 최 변호사는 노원을 지역을 서울의 신교육중심지로 육성하려는 청사진을 갖고 있다. 강남 대치동과 같은 사교육중심지가 아니라 공교육을 보강한 교육중심지로 부각시키겠다는 것.

    서울의 다른 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노원구의 경제자립도를 업그레이드시키는 한편 사회적 약자와 빈곤계층에 눈 돌린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당선되면 법제사법위원회보다는 교육위원회나 보건복지위원회, 여성특별위원회 등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친다.

    불법 정치자금 문제가 심각하다는 질문에, 최 변호사는 “당선되면 신진 정치인들과 연대해 국회의원 청렴 입법을 통해 검은 돈과 정치의 결탁을 원천 차단하는 데 앞장서겠다”며 “헌법을 공부한 법조인으로서 정치개혁 또한 국민 중심의 행정서비스 개혁이어야 한다는 관점을 항상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4년 전에도 민주당의 공천 제의를 받았는데, ‘방송 일 등 안 그래도 하는 일이 너무 많은데 언제 쉴 틈이 있겠느냐’는 가족들의 강한 반대로 뜻을 접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가족도 흔쾌히 동의해 정치입문을 결심했습니다.”

    최 변호사는 “민주당의 인기가 예전보다 낮긴 하지만 유권자의 세대교체 요구에 부합할 수 있는 인물이란 점을 적극 부각시킬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김진수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52년 전남 강진 출생 ●연세대 정외과 졸업, 미주리대 정치학 박사 ●1993년 아태평화재단 연구실장, 사무부총장 ●1995년 국민회의 원내기획실장, 총선 상황실장●현 건국대 정외과 교수

    전남 강진·완도 지역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황주홍(黃柱洪·52) 건국대 교수는 ‘50대 정치신인’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번 총선의 최대 화두로 떠오른 30∼40대 신인의 대거 등장이란 ‘물갈이’ 흐름과 비교하자면 10년 이상 후배들과 어깨를 맞대고 신인 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그러나 황 교수가 정치권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만 따지면 역사가 꽤 길다.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귀국한 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먼 사돈간이라는 인연으로 1993년 아태평화재단 연구실장으로 들어간 것이 정치권 입문의 계기가 됐다. 그후 아태재단 사무부총장과 국민회의 원내기획실장, 15대 총선 상황실장 등을 맡으면서 현실 정치의 한복판에 발을 담갔다. 16대 총선에도 출마를 노렸으나 같은 당 소속 천용택 의원에게 밀려 원내 진출에는 실패했다. 지난 4년동안 황 교수는 강의가 없는 주말마다 서울과 강진을 오가며 지역구 유권자들을 꼼꼼이 챙겨왔다.

    그런 만큼 그는 다른 신인들에 비해 현실정치의 감(感)에 능통하다. 유권자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짚어내는 데도 탁월한 편이다. 최근 신인으로서는 눈에 띄는 공약과 제안을 내걸고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겠다고 지역을 누비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대표적인 것이 당선되면 1년 안에 선거법을 고쳐 신인에게 불리한 법조항을 뜯어고치겠다는 것. 정치 신인들조차 선거운동 기간에는 현역의원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거법 조항에 분노하다가도 일단 당선만 되면 그러한 선거법 조항 자체가 기득권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선거법의 문제점을 거론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래서는 우리 정치의 미래가 없다’고 결심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황 교수는 요즘 지역 유권자들을 만날 때마다 “당선되더라도 재선까지만 하고 그만두겠다”고 다짐한다. ‘의정활동을 제대로 하려면 8년 이상은 힘들어서 더 하려야 할 수도 없다’는 것이 황 교수의 지론. 게다가 임기 시작과 함께 재산을 동결하고 늘어나는 재산이 있다면 지역발전기금으로 내놓겠다거나, 국회의원에 당선되더라도 현재 타고 다니는 2500cc급 승용차 이상의 대형차를 절대로 타지 않겠다는 공약도 내놓았다.

    이런 파격적인 공약 탓일까. 황 교수는 지역언론의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해 최근 광주전남 지역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열린우리당에 비해 1.5∼2배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당선을 확신하는 듯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공격도 빼놓지 않았다. ‘16라운드 중 4라운드만 뛴’ 한화갑 전 대표를 구속하겠다고 하면서 정작 노무현 대통령이나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경선자금 수사에 미온적인 것을 보고 호남 민심이 민주당쪽으로 빠르게 모여들고 있다는 것이다.

    17대 불출마를 선언한 천용택 의원이 완도 출신이기 때문에 ‘강진에서 금배지를 탈환해야 한다’는 주민 정서가 황 교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완도 지역 유권자가 훨씬 많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가며 도서지역 유권자들을 부지런히 만나러 다녀야 할 판.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농림해양수산위원회에 들어가 무엇보다도 고향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황 교수는 “한 마리 참새가 여름을 가져오고 한 마리 제비가 가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기성 정치의 벽에 집요하게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성기영신동아 기자sky3203@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54년 경남 창원 출생 ●경희대 행정학과 졸업, 경남대 행정학 석사, 경희대 행정학 박사 ●1978년 제22회 행정고시 합격 ●1983∼92년 경남도청 재직 ●1993년 함양군수 ●1994년 대통령민정비서실 행정관 ●1995∼2002년 제 1·2대 민선 창원시장

    ‘경남의 정치 1번지’로 불리는 창원갑 선거구는 열린우리당이 17대 총선에서 승리를 점치는 지역 중 하나다. 5선 경력의 현역의원인 김종하(69) 한나라당 의원이 정치후진 양성을 명분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후 각 정당 및 무소속 출마예정자들이 ‘무주공산’을 선점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지만, 여론조사 결과 공민배(孔民培·49) 전 창원시장이 당선 가능성 면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방자치제는 여러모로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방분권도 물론 중요한 과제지만, 지방자치를 제대로 이루려면 무엇보다 실질적인 제도나 법령을 개선하는 국정활동이 더 시급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중앙정치무대로 진출해야죠.”

    공 전 시장은 7년간의 시정(市政)을 대과(大過) 없이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재임기간 중 ‘도시경쟁력 전국 1위’ ‘올해의 문화도시’ 등 창원시에 대한 높은 외부 평가를 이끌어내 유권자들의 인지도 또한 높다.

    공 전 시장이 자신만의 큰 자산이라 강조하는 것은 지방행정 전문가로서의 오랜 공직경험이다.

    1978년 행정고시(22회)에 합격, 경남도청에서 10년간 재직한 뒤 함양군수, 민선 1·2기 창원시장을 두루 거친 데다 행정학 박사 학위까지 따내 명실공히 이론과 실무를 겸비했다는 점을 특장(特長)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게다가 창원 토박이여서 자신만큼 지역구 사정을 줄줄 꿰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는 게 그의 자평이다.

    “창원갑 선거구엔 구시가지에 해당하는 구(舊)창원지역이 포함돼 있는데, 공단이 주로 포진한 신(新)창원지역처럼 계획적으로 조성되지 못해 문화인프라가 열악한 형편입니다. 앞으로 그 지역의 그린벨트가 해제되면 공공시설을 적극적으로 유치할 생각입니다.”

    공 전 시장은 당초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열린우리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며 당적을 바꿨다. 열린우리당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공 전 시장은 “말로만 지역감정 타파를 외칠 게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려 정치생명을 걸고 가치판단을 한 것”이라 잘라 말했다.

    이러한 그의 결단에 화답하듯 열린우리당도 그에게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직을 맡길 만큼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국회 상임위원회 활동으론 당연히 행정자치위원회를 권하겠지만, 그보다는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에 인색한 관련법령 정비에 힘쓰고 싶습니다.”

    공 전 시장은 “조금만 노력하면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상당한 경제· 문화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데도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을 적정하게 조율하지 못해 중복투자가 이뤄지는 등 부작용이 빚어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공 전 시장은 그러나 “그보다 먼저 당선이 ‘발등의 불’ 아니겠느냐”며 “현재 선거구의 열린우리당 지지도가 한나라당에 근접하고는 있지만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정서가 매우 강한 지역이어서 일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자신과 함께 경선이 유력시됐던 이상익(50) 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이 한국도로공사 감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독자출마해 총선에만 진력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선 공 전 시장. 그런 그에게도 정계 입문은 부담스런 ‘비포장도로’다.

    김진수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64년 제주 출생 ●서울대 경영대학·대학원(경영학) 졸업 ●한신증권 한신경제연구소 연구원 ●서울경제신문·시사저널 기자,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 진행 ●열린우리당 정동영 당의장 경제특보, 민생경제특별본부 부본부장

    “안녕하십니까. 손에 잡히는 경제, 김방희입니다.”매일 아침 8시35분이면 어김없이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MBC 라디오프로그램 ‘손에 잡히는 경제’ 오프닝 멘트다. 구수하면서도 편안한 목소리, 어려운 전문용어도 쉽게 풀어 설명해주는 김방희(金芳熙·40)씨의 진행솜씨에 방송 3사의 경제전문프로그램 중 청취자들로부터 인기가 가장 높았다.

    지난 1월12일자 방송으로 프로그램을 끝맺기까지, 그는 근 6년에 이르는 기간 방송을 진행했다. 특정 전문프로그램 진행자 중에서 이처럼 장수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당초 김씨의 꿈은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영국의 유력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 미국의 경제지 ‘비즈니스 위크’를 합쳐놓은 성격의 경제 저널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한 적이 있다.

    “사실 (그 꿈을) 구체화시키고 있었어요. 자금도 모집하고…. 원래 계획대로라면 발행부수 1만부 정도의 유력 경제주간지를 만드는 것이죠. 그런데 영향력 있는 경제 지배엘리트 대부분이 정치에 가 있더군요. 경제가 액세서리 같은 느낌이었어요. 현실적인 한계와 의문도 생기고. 결국 ‘정치라는 틀을 통해 경제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꿈을 일단 보류했다는 이야기다. 김씨는 예를 들어 설명을 덧붙였다. 이른바 ‘진공청소기론’이다.

    “마지막 방송에서 경제부총리에게 포장마차에 가서 서민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했어요. 경제원리로만 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많은 민생문제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이에요. 진공청소기가 만능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닿지 않는 구석이 분명히 있어요. 실제로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고. 경제주간지를 만들어서 진공청소기의 사용원리를 설명해주는 것보다, 빗자루를 내가 직접 드는 게 옳은 게 아닐까 고민이 되더군요.”

    정치권 선배들의 유혹도 만만치 않았다. “객석에서 해설만 하지 말고, 삼진을 당하더라도 내려와서 방망이 한 번 휘둘러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 그래서 그는 고심끝에 “이제 정치권에서 경제를 이야기해볼 때가 됐다”는 판단을 내려 총선 출마를 결심했다고 한다.

    김씨가 내세운 구호는 ‘경제가 새 정치다’라는 것. ‘차떼기’ 하지 않는다고 새 정치가 아니라, 앞으로 상당기간 계속될 국민의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새 정치라는 의미다.

    그가 꿈꾸는 정치 또한 ‘경제적인 정치’다. 돈 안 쓰는 선거, 돈 안 쓰는 정치, 정책과 메시지 중심의 정치가 곧 비용은 적게 들이면서 효과를 극대화하는, 경제원리에 충실한 정치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같은 바탕 위에 ‘경제의 발목을 잡는 정치’가 아닌 ‘경제를 살리는 정치’를 펴겠다는 게 그의 계획이자 포부다.

    “정치를 바꾸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없어요. 정치권에서 경제파수꾼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한편 김씨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 지지자’라면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정치인의 권력투쟁은 다르다. (노 대통령은) 이 둘을 혼동하는 것 같다”고 걱정하면서 “지난 1년간 그 차이를 학습해서인지, 최근 국정연설을 보면 다행히 이제 조금씩 방향을 잡아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요즘 지역구를 돌면서 정치신인으로서 현행법상 한계를 크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 법대로 한번 도전해 볼 생각이다. ‘20년 경제인생 올인’이라며 걱정하는 부인의 말처럼 모든 것을 걸고.

    엄상현신동아 기자gangpen@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62년 전북 군산 출생 ●전주고, 서울대 지리교육과 졸업●미국 UC버클리 초청 연구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재학●동아일보 기자 경력 16년, 한국기자협회 최다 특종상 수상 ●저서 : ‘도둑공화국’ ‘문민정부 비화’

    ‘특종기자 양기대’에서 ‘정치신인 양기대(梁基大·42)’로 변신한 지 한 달. 거리에서 명함을 내밀고 악수하며 지지를 부탁하는 일이 아직도 쑥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그때마다 왜 ‘정치’를 선택했는지 되새기며 허리를 곧추세운다.

    부패척결. 양기대 열린우리당 부대변인은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한 16년 동안 수없이 ‘부패’ 현장을 취재했다. 특히 사회부(법원·검찰), 정치부 기자를 하면서 전직 대통령을 비롯 내로라하는 정관계 인사들이 권력형 비리로 줄줄이 구속되는 것을 지켜보며 ‘부패척결’이란 화두를 끌어안게 됐다.

    이형구 전 노동부장관 수뢰, 김영삼 대통령 아들 김현철씨 비리, 의정부 판사 금품 수수 비리,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 안기부 자금 신한국당 선거자금 유입, 폭력조직 두목 김태촌에 대한 검경 비호세력, 전두환씨의 검은돈을 이용한 신당 창당 추적 보도 등으로 그는 ‘한국기자협회’가 수여하는 ‘한국기자상’ 2번, ‘이달의 기자상’ 7번(최다 수상 기록)을 받았다. 국세청 비리를 추적할 때는 자신과 가족, 친인척까지 뒷조사를 받는 씁쓸한 경험도 했다. 덕분에 ‘특종기자’라는 별칭을 얻었으나 돌아서면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명예가 높아진 만큼 세상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선자금 및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마침내 정계 입문을 결심했다. 기존의 정치 통념과 관행에 직접 몸으로 부딪혀 보겠다며 경기도 광명에서 출마를 선언했다.

    “아내가 이곳에서 10년간 교사생활을 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고향 같은 곳이죠. 출마를 결심하고 제일 먼저 아내와 상의했는데 젊은 유권자가 많은 광명이 좋겠다고 하더군요. 상대가 누구인지는 나중 문제였어요. 현역 전재희 의원이 여성 최초의 관선·민선 자치단체장인 데다 지역기반이 탄탄해 정치신인에게는 버거운 상대입니다. 그러나 전 의원이 과연 국회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차떼기 정당’으로 지탄받는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한 전 의원의 개혁은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전 후보와 맞대결을 피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광명을은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20~40대 샐러리맨이 주류입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변화’예요. 기존 조직을 가동해 얼굴을 알리는 식의 선거운동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리라 봅니다. 유권자는 후보의 공약과 개혁 의지를 보고 냉정한 판단을 할 것입니다.”

    햇병아리 정치인의 넘치는 자신감은 광명 지역 열린우리당 당원들에 대한 믿음과도 관계가 깊다. 광명 지역 당원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이다. 그들은 40대 초반의 양 부대변인이 ‘바꿔’ 바람을 몰고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지역 현안과 민심을 파악해 알려주기 때문에 광명 출신이 아닌 양 부대변인에게는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정치부 기자들이 권력 실세에게 잘 보여 한 자리 보장받는 일이 있었죠. 그런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저의 경우 ‘낙하산 공천’과는 거리가 먼 ‘소신 출마’입니다. 광명에서 열린우리당 바람을 위해 필요하다면 지역 경선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앞서 그는 자신의 기자인생을 정리할 책을 한 권 썼다. ‘한국의 대표특종기자가 쓴 반부패전쟁 종군기’. 기자 출신 정치신인이 시장 출신 현역의원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특종보도보다 짜릿한 ‘인생 특종’이 될 것이다.

    김현미신동아 기자 khmzip@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54년 대구출생 ●경북고, 서울대 치과대학 졸업 ●극단 ‘처용’ 대표●이재용치과 원장, 대구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회장, 대구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장, 대구 남구 구청장 ●열린우리당 대구시지부 지부장

    1996년 대구 남구 양지로 속칭 ‘영계골목’. 140여개 퇴폐업소에서 수백 명의 여성들이 윤락행위를 강요받고 있었다. 이들 여성의 절대 다수는 10대 청소년. 오랜 세월 관행화되어온 것이라며 경찰도, 검찰도 손을 놓고 있었다. 호객행위가 심해 인근 고등학교는 학교이전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8월 남구청이 퇴폐업소들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무차별 단속을 벌였다. 업소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조직폭력배들이 구청장에게 “가족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이 소식은 전국적 관심을 끌었다. 구청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6개월 뒤인 1997년 2월, 마침내 상황은 종료되어 양지로의 퇴폐업소는 모두 문을 닫았다. 7년 뒤인 2004년 2월, 양지로는 대구지역 예술·문화인들의 거리가 되어 있다.

    이 당시 구청장이었던 이재용(李在庸·50)씨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대구 남구에서 출마한다. 그는 현재 열린우리당 대구시지부장이다. 한때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던 그의 삶의 무대는 언제나 ‘현장’이었다. 치과의사인 이씨는 1995년 구청장이 되기 이전 남구에서 오랫동안 빈민들에게 무료 치과 치료 봉사활동을 해왔다. 수많은 생활보호대상자, 독거노인들이 그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지지자들은 “이씨는 ‘인술(仁術)을 펴는 의사의 대명사’로 통한다”고 말한다. “대구에서 연세 많은 어르신들이 손을 꼭 잡아주는 정치인이 두 사람 있는데, 한 사람은 박근혜이고 다른 사람은 이재용”이라는 말도 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선 ‘이회창 대세론’에 힘입은 한나라당 바람이 호남을 제외한 전국을 휩쓸었다. 대구는 그 진원지였다. 이때 이재용씨는 무소속으로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해 한나라당 조해녕 후보(현 시장)와 맞섰다. 이 선거에서 비록 지기는 했지만 40%에 이르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총선 출마는 이번이 처음이다.

    2004년 2월 현재 대구·경북 지역의 열린우리당 지지율은 전국 최저 수준. “이재용씨가 이번 총선에 무소속으로 남구에서 출마하면 선거가 한결 수월할 텐데…”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그러나 이씨는 “일시적 유·불리에 따라 정치적 행보를 하지는 않겠다”며 그와 같은 얘기들을 일축했다.

    “나는 마음이 맞는 정당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구청장 첫 당선 이후 10년 동안 어느 정당에도 기웃거리지 않고 무소속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열린우리당의 지역주의 타파, 정치개혁 이념이 나의 이상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번 총선을 앞두고 입당하게 됐습니다.”

    이씨는 “국회의원이 되면 우선 ‘미군기지주둔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제정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캠프워커, 캠프헨리, 캠프조지 등 3개 미군기지가 있는 대구 남구 주민들은 헬기소음, 고도제한 등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실정. 이씨는 “일본 오키나와처럼 미군 기지 주변지역이 쾌적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뀌는 일은 한국, 미국에 모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재용씨는 “지역감정, 수구보수 이미지에서 이제 대구를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 대구시지부 한 관계자는 ‘인물론’을 전개했다. “젊은, 개혁 성향의, 언행에 신뢰가 가는, 화끈한 추진력을 갖춘, 한국 정치 발전의 구심점이 될 만한 대중성과 포용력이 있는 인물들이 이번 총선을 통해 대구에서 많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대구 유권자들은 새 인물에 대한 기대와 갈증이 큽니다.”

    허만섭신동아 기자mshue@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52년 전남 여수 출생 ●성균관대 전자공학과 졸업, 고려대 경영대학원 무역학과 석사 ●제4·5대 전남도의원, 여천군수, 여수시장 ●전남 시장·군수협의회 회장, 전국 시장·군수협의회 공동의장

    전남은 전통적인 민주당 텃밭이다. 호남 내에서도 전남의 지역정서는 유난히 강해 민주당 공천은 곧 당선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유능한 인물이라도 다른 당이나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민선초대 여수시장 주승용(朱昇鎔·52)씨가 바로 그 예외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가 특정정당 후보로 나선 것은 1991년 실시된 제4대 자치단체 의원선거. 그때 신민당 후보로 전남도의회 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주씨는 1995년 제5대 전남도의회 의원선거, 1996년 민선2대 여천군수선거, 1998년 민선초대 통합여수시장선거 등 세 차례의 지자체 의원 및 단체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당히 승리했다. 그의 노력과 활동이 지역주민들로부터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열린우리당 전남도지부 중앙위원 선출 전당대회에서 주씨가 최다득표로 선출돼 전남도지부장을 맡게 된 것도 그의 전력과 무관치 않다. 주씨는 “그동안 전남에서 무소속으로 세 차례나 당선된 것을 대의원들이 높이 평가했고,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에 맞설 사람으로 제격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주씨의 가장 큰 무기는 오랜 기간 자치단체 의원 및 단체장을 하면서 다져놓은 지역기반이다. 과연 민주당의 텃밭에 열린우리당 깃발을 꽂을 수 있을까. 그는 “밑바닥의 정서는 아직까지는 민주당이다. 하지만 민주당이 더 개혁되지 않고 현재에 머무른다면 열린우리당의 도전에 상당히 고전할 것”이라고 조심스레 전망했다.

    그는 이어 총선 출마의 변을 밝혔다. “현재 여수시는 2010년 세계박람회유치 실패와 내수경기 위축으로 도시가 전반적으로 침체돼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와 시민의 상실감을 달랠 수 있는 대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인물이 필요한 상황이죠. 야당보다는 여당 국회의원이 배출돼야 시급한 지역현안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역현안을 잘 아는 분이 지역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방자치와 중앙정치는 상당히 다를 텐데요”라고 되묻자 그의 답은 명쾌했다.

    “지방자치라는 풀뿌리 민주주의는 이제 어느 정도 정착됐다고 생각해요. 지방자치 단체장 출신들이 중앙정치로 나서야 할 때가 된 거죠. 지역의 현안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중앙정부의 정책에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국회의원은 중앙정부의 정책을 입안하는 자리인 동시에 지역의 대표성도 갖고 있습니다. 주정부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연방정부로 진출하는 미국처럼 우리나라도 그런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편 주씨는 그동안 무소속이었다가 열린우리당 공천을 신청한 이유에 대해 “국민적 염원인 정치개혁과 망국적인 지역주의를 타파하려는 의지를 가진 유일한 정당이 열린우리당이라고 생각해 입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지난 1년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지금의 정치적 혼돈과 대립, 갈등현상을 “정치권이 구조조정에 들어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현재 진행중인 정치인들에 대한 검찰의 강력한 수사 덕분에 노 정부의 임기 말쯤 되면 정치권이 매우 맑고 투명해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 소신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엄상현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63년 전남 해남 출생 ●광주일고, 전남대 법대 졸업 ●사시 29회●2000년 법무법인 ‘한강’ 설립, 대표변호사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원

    최재천(崔載千·42) 변호사는 의료소송 전문변호인으로 통한다. 의사나 병원 편에 선 적은 없고 의료사고 피해자들만 변호해왔는데, 승소율이 95%에 이를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는 또 국내 처음으로 국가를 상대로 흡연피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 승소한 기록을 갖고 있다. 최근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재심소송을 맡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자 20여명에 대한 무죄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정치를 통해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고 출마동기를 밝힌 최 변호사는 열린우리당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시대정신에 가장 잘 맞는 당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정부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 정권을 잡은 민주당의 정통성은 반독재민주화투쟁과 남북화해협력을 통한 평화통일 추구에 있다. 거기에 덧붙여 정치개혁을 통해 정치가에게 집중됐던 권력을 주권자인 국민에게 넘기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정신이고 그걸 주창하는 게 열린우리당이다. 또한 연고주의를 깨트릴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정당이다.”

    -일각에서는 열린우리당을 ‘노빠당’이라고 비판하는데.

    “대선 때 ‘노변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변호사들 모임)’를 했던 사람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이다. 노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노무현 개인의 캐릭터를 좋아하고 숭배하는 게 아니라 그를 정치개혁의 도구, 시대정신을 가장 잘 표상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로 생각한다. 그런 표현은 보스정치라는 구시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무지의 소치다.”

    -노무현 정부의 성과와 실책을 꼽는다면.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스스로 해체했고 지방분권화를 통해 지역·계층 갈등의 핵심인 서울 중심적 사회구조를 바꾸고 있다. 이처럼 각 분야에서 실질적인 권력 분산·이양 작업이 시작됐다는 게 가장 큰 성과다.”

    -그렇게 함으로써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아야 하는데, 혼란만 가중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가는 창조적 파괴활동으로 봐야 한다. 정확한 목표의식을 갖고 해체하는 과정이므로 위험시할 게 아니라고 본다.”

    -권력분산도 좋지만 실제로 국민에게 득이 된 게 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국민 개개인이 책임 있는 주체로서 국정에 참여하는 데 익숙지 않은 탓이다. 국가라는 기구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버리고 참된 국민주권주의 실현을 위해 국민 모두가 인내해야 할 것이다.”

    최 변호사는 현 정부의 실책에 대해선 “절차적으로 정교하지 못했던 점”을 꼽았다. 목표를 정확히 내걸고 국민을 이해시키는 절차를 제대로 밟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 또 정부의 정책과 이념을 지지하는 여론을 합리적으로 추동하지 못하고 대통령의 원맨쇼로 비치게 한 점도 지적했다.

    그가 서울 성동갑을 지역구로 선택한 이유는 혈연이나 지연, 학연과는 상관이 없다. 1997년부터 성동구 고문변호사를 맡고 있으며 성동구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의 표현대로 “일을 통한 연고”가 출마 기반인 셈이다.

    그는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 “지원병은 찬성하지만 전투병 파병엔 절대 반대”라고 주장했다. 미국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남북 당사자간 대화와 지혜가 있어야만 외세 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끊임없이 정권교체가 이뤄지며 그때마다 대외정책이 바뀐다. 그런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지 대미외교에 조급성을 띠면 안 된다.”

    조성식신동아 기자mairso2@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47년 충남 공주 출생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 미국 테네시주립대 석사(기계공학), 한국과학기술원 석·박사(원자력공학) ●한국원자력연구소 한국형표준원전 개발책임자·원전사업본부장·신형원자로개발단 책임연구원, 대북경수로지원팀장 ●대전 유성구청장

    두 차례 민선 구청장을 지낸 대전 유성구에서 17대 총선 도전장을 낸 자민련 이병령(李炳?·57) 후보는 ‘경수로 대부(代父)’로 잘 알려진 인물. 원자력공학 박사인 이 후보는 경수로의 계통설계기술을 개발, 한국형 경수로를 탄생시켰으며 최초의 한국형 경수로인 울진 3·4호기를 설계·건설해 한국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원자력발전소를 갖게 한 주인공이다. 그는 1995년 대북 경수로 지원협상 당시 한국형 경수로 채택과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강력히 주장하며 미국에 맞서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원전사업본부장에서 보직해임됐다.

    그후 2000년 기초단체장 보궐선거 때 유성구에서 당선돼 최초의 과학자 출신 자치단체장이 됐고, 2002년 지방선거에서 재선됐다. 유성구는 그가 20년간 몸담은 한국원자력연구소와 대덕연구단지 등이 위치한 곳으로 연구인력이 유권자의 30%에 육박한다. 그에겐 더없이 탄탄한 지지기반이다.

    이 후보가 대북 경수로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깐깐한 원칙주의자의 면모는 구청장 시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러브호텔과의 전쟁’이 그 예. 온천지역 인근의 봉명지구에 러브호텔 건축 붐이 일자 그는 “‘한국 과학기술의 메카’인 유성이 ‘한국 퇴폐단지의 메카’로 전락하고 있다”며 러브호텔 건축을 불허했고, 이에 맞서 토지 소유주들이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승소했다(현재 항소심 계류중). 그는 집무실에 ‘원칙에 강하자’라고 쓴 액자를 걸어놓고 ‘전쟁’을 지휘했다.

    “지역사회에서 러브호텔을 지을 정도의 토지 소유자라면 대단한 재력과 인맥을 가진 권력자들입니다. 힘든 싸움이었죠. 자기들끼리 연대해 저에 대한 낙선운동을 천명하는 등 정치적 부담도 만만치 않았어요. 그렇게들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마당에 제가 아주 사소한 비리나 부정에라도 연루됐다면 이 일을 해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게 하기 위해 원칙에 관한 한 결벽증에 가까운 자세를 가져 왔습니다.”

    그는 이번 총선에서 공명선거를 담보하기 위해 “공식 선거비용에 대해 시민단체의 회계감사를 받겠다”며 대전시민참여연대, 경실련, 대전환경연합 등에 회계감사 요청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 후보는 “국회에 진출하면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엘리트 과학기술인력을 육성하고 이들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며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가칭 ‘과학기술혁신법’ 제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에게 충분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는 수준의 대우를 보장하고 정년을 연장해주며, 연구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관(官)의 지나친 간섭을 배제하자는 게 그 골자다.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주안점을 두려 한다. 유성은 부여·공주·금산·무주를 잇는 백제권 관광벨트화의 거점지역. 따라서 퇴폐업소가 난립한 봉명지구를 ‘문화의 거리’로 개발하는 데 정부 차원의 든든한 지원이 이뤄진다면 유성이 중부권을 대표하는 문화·관광도시로 성장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덕연구단지가 창출하는 부가가치를 지역경제로 끌어내는 데도 중앙 정부 차원의 힘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후보는 “그동안은 지역 정치인들이 이에 대한 마인드가 부족하거나 방법을 몰라서, 또는 인맥이 닿지 않은 나머지 ‘대덕연구단지 따로, 대전 따로’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기술계와 지역 사정을 꿰뚫고 있는 내겐 복안이 있다”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이형삼신동아 기자hans@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63년 울산 출생 ● 동국대 생명자원경제학과 졸업, 울산대 지역개발대학원 석사 ●울산에서 노동운동,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 ●민중당 활동 ●울산광역시의원, 울산환경운동연합 정책실장, 울산참여연대(준) 공동대표 ●울산 북구청장

    정당선호도 투표로 비례대표 의원을 선출하는 ‘정당명부제’가 도입된 이번 4·15 총선은 민주노동당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끈질기게 이어온 진보정당 운동에 힘입어 2002년 지방선거에서 8.1%의 정당지지율을, 같은 해 대선에서 98만표를 얻었지만 원내진출에는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한 민노당은 “이번 선거에서 국회의원 배출은 기정사실이며 총 15석 확보가 목표”라며 기염을 토하고 있다. 그중 울산 북구에 출마할 조승수(趙承洙·41) 전 구청장은 민노당이 당선을 자신하는 대표적인 인물.

    “울산은 2000년 총선 때도 진보진영 후보가 아깝게 낙선한 곳입니다. 가장 큰 패인은 후보단일화에 실패했다는 점이었죠. 시행착오를 거듭하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투명한 경선을 통해 후보를 선출했고 주요 후보가 모두 승복했습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난 셈입니다.”

    1998년부터 이 지역에서 최연소 기초자치단체장을 역임한 조 전 구청장은 인지도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자신한다. 더욱이 노동운동진영의 ‘파워’가 강한 울산은 민노당 지지율이 전국 최고수준을 달리는 지역. 이쯤 되면 그의 자신감이 이해할 만도 하다.

    “이 지역의 가장 큰 특징은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외지에서 유입된 노동자 유권자와 토박이인 농민 유권자들 사이에 괴리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 고장 출신으로서 지역민들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고민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저의 또 다른 강점입니다.”

    구청장 시절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우선은 2002년 총선을 앞두고 김두관 당시 경남 남해군수, 임익근 서울 도봉구청장 등과 함께 ‘머슴골’이라는 기초단체장 모임을 만들어 기성정치권의 개혁을 촉구하고 나선 일.

    당적에 상관없이 시민사회 운동가 출신 단체장들이 주축이 된 이 모임은 “청렴하고 개혁적인 인물을 공천하고 지역감정을 이용하지 말 것” 등을 중앙정치권에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후에도 머슴골 회원들과 교류를 지속하며 지자체를 운영하면서 느낀 고민들을 나눴다는 것이 조 전 구청장의 설명이다.

    또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섰던 것은 지자체장으로는 유일하게 공무원노조 합법화를 요구하고 나선 2002년 3월. “이전부터 구청 공무원들에게 ‘권익을 위해 노조를 결성하라’고 권하곤 했다”는 그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중앙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해 행정자치부로부터 기관경고를 받기도 했다.

    “같은 지자체장이라도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의 이름으로 당선된 사람이라면 분명한 소신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1995년 시의원 시절부터 다른 정치인들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고요.”

    그러나 제도권의 벽을 돌파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고, 각오는 했지만 타협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조 전 구청장은 털어놓았다. 방황 끝에 시의원을 그만둘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돌아보면 나름대로 성공적인 활동을 해왔다고 자부한다”는 그는, 국회에 진출하게 된다면 국회의원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세비(歲費)와 법정 보좌관 급여를 모두 합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보좌관을 채용하는 데 나눠 쓰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보수 일색의 정치환경에서 진보정당 인사 몇 명이 국회에 들어간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켜봐 주십시오. 국민 여러분께 진보정치가 무엇인지 그 참모습을 보이는 정치인이 되겠습니다.”

    황일도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71년 부산 출생 ●대명여고, 연세대 정외과 졸업 ●연세대 정치학 석·박사(수료) ●신한국당 공채 4기, 한나라당 중앙당 부대변인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최초로 도입한 공천신청자 공개면접과 토론이 진행된 1월30일 이변이 벌어졌다. 부산 연제를 놓고 경합을 벌인 끝에 김희정(金姬廷·33)이 현역 국회의원인 권태망 후보와 최병렬 당대표 특보인 김정훈 변호사를 제치고 1등을 한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부산 연제에서 열린우리당으로 출마가 유력한 김모 후보와 맞붙을 경우 경쟁력이 무엇이냐”고 묻자 김희정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어차피 선거는 ‘각’을 세우는 구도로 가야 합니다. 김 후보가 남자면 나는 여자고, 그쪽이 구정치인이면 나는 신인이며, 상대는 당적을 여러번 바꿨지만 나는 한 번도 당적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상대당의 선거 컨셉트가 ‘개혁’과 ‘도덕성’ ‘바꿔보자’라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나를 뽑아야죠.”

    김희정은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나 대명여고 졸업 후 연세대 정외과에 진학,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박사(수료) 과정을 밟았다. 그 사이 연대 응원단 아카라카 여자 기수단장이라는 남다른 경력도 추가했다. 그후 정치판에서 보여준 그의 재기발랄함과 리더십은 응원단 시절 경험과도 관계가 깊다.

    정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12월. 당시 신한국당 공채 4기로 정당에 들어와 기획조정국 간사에서 공천심사특위·전략기획팀·사이버팀 부장, 부대변인이 되기까지 밑바닥서부터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갔다.

    “처음 입당할 때 ‘왜 신한국당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본 것이죠. 정치학을 하면서 한국정치의 폐단이 ‘3김정치’에 있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고, 그렇다면 앞으로 ‘3김’을 넘어서는 정치를 할 수 있는 곳이 어디냐에 주목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입문은 유명정치인 비서로 가거나 학연·지연 등 개인적 인연이 중시됐는데, 신한국당이 공채를 하자 전국적으로 1000여명의 정치 지망생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저도 그 중 한 명이었죠.”

    그가 정당에 몸담은 직후 쓴 석사학위 논문이 ‘한국 정당의 대통령후보자 선출에 관한 연구’였다. 대통령선거 ‘본선’에 관한 분석은 많지만 정작 정당 내부의 ‘공천’ 과정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틈’을 읽은 것이다. 이후 그는 당내 공천 전문가로 활약했다. 1997년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 규정을 만드는 일부터, 2002년 지방선거 때는 공천심사특위 부장으로 처음 실시된 후보 경선 전과정을 진행했다.

    사이버 정치판에서도 김희정의 유쾌한 정치실험은 계속됐다. 지난해 여름 그는 ‘사이버대변인단’이라는 생소한 직책을 맡아 파격적인 이벤트 ‘병렬아 놀아줘’를 기획했다. 최 대표와 네티즌들이 인터넷 생방송 토론을 펼친 이 행사는 접속자수 10만을 기록하며 ‘젊은 한나라당’의 가능성을 열었다.

    부산시청 등 12개의 주요 관공서가 위치한 부산 행정의 중심지 연제.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그의 눈엔 비어 있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큰 개천이 메워지고 큰 건물이 들어서고 발전하는 가운데 시민들의 쾌적한 삶을 외면한 측면이 많아요. 특히 교통문제가 심각하고 녹지가 없죠.”

    한나라당의 톡톡 튀는 ‘머리’로 활약하던 그가 이제 직접 정치무대에서 뛴다. 누군가 “연습 삼아 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면 단호하게 답한다. “선거는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아직 이르다”는 주위의 시선에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과거 선거에서는 ‘안정’이 중요했기 때문에 나이·경륜을 따졌지만 이번 선거의 코드는 성실성과 개혁성입니다. 저의 부족함이 오히려 장점이 될 것입니다.”

    김현미 신동아 기자 khmzip@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성동고, 서울대 법대 졸업 ●사시 34회 합격 ●1995년 3월~2003년 7월 검사 재직 ●한나라당 이규택 의원 선거법위반사건 공동변호인 ●저서: ‘사랑하는 딸들에게 건네주는 아빠의 세상’

    충남 논산에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한 박준선(朴俊宣·38) 변호사는 검사 출신이다. 1995년 광주지검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해 지난해 7월 옷을 벗었는데, 주로 공안부에서 근무했다. 각종 노사분규와 간첩단사건, 선거부정, 공천헌금비리 등을 수사했다. 2월9일 오후 서울 서초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출마 동기와 한나라당을 선택한 이유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출마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검찰에) 사표를 내는 것과 동시에 정치권 진출을 선언했다. 어릴 적부터 꿈이 검사였고 검사를 평생 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대선 후 급변한 정치상황이 나를 검사직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의 내각과 청와대 참모진 인선을 지켜보며 크게 실망했다. 한마디로 대학 총학생회 간부진 수준이다. 수십 년 동안 이 나라가 추구해온 가치와 방향성을 부정하는 코드인사와 코드정치를 지켜보며 공무원의 존재가치에 회의를 품게 됐다. 법 조항에 혹세무민(惑世誣民)죄라는 게 있다면 나는 계속 검사로 남아 그 죄를 밝히는 일을 했을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솔직하지 못하다. 좌파적 색깔을 감추고 개혁세력으로 위장해 혹세무민하고 있다. 지난 대선 때 승리한 것도 국민을 현혹하는 기술이 탁월해서였다. 이런 혹세무민의 실체를 밝히고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직접 내 목소리를 내는 확성기가 필요했다.”

    -노무현 정권만 탓할 문제는 아닌 듯싶다. 야당도 국민들로부터 심한 불신을 받고 있다.

    “이 정권뿐만 아니라 정치권 전체가 부정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 점에선 여야 차별성이 없다. 책임 있는 지식인들과 전문가 그룹이 정치권에 들어가 깨끗한 정치를 선보여야 한다. 생업이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 돈의 유혹을 비교적 덜 받기 때문이다. 작년에 책을 냈는데, 주변에서 출판기념회를 적극 권했다. 하지만 참석자들에게 부담을 줄 것 같아 하지 않았다. 또 선배들이 후원회를 만들어주겠다고 제의했지만 거절했다. 출발부터 신세지는 정치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최소한의 자산으로 선거를 치를 생각이고 그것이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는 첫 걸음이라고 본다.”

    -이인제라는 정치거물의 아성에 도전했는데, 특별한 공략법이 있다면?

    “사실 한나라당으로서는 어려운 지역구다. 그런데 경선불복, 잦은 당적 변경 등으로 민주주의 질서를 깨트린 사람이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건 이 지역 사람들의 자존심을 해치는 것이다. 게다가 비리에 연루된 안희정씨가 옥중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이런 곳에 출마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결국은 민심의 향배에 달렸다. 지역구민들을 설득하는 능력을 가졌냐 못 가졌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이다.”

    -공안검사로서의 경력이 한나라당행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보이는데.

    “공안검사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럽다. 시민단체와 노조의 범법행위를 밝혀내고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을 수사하면서 보수적 성향을 갖게 된 측면이 있다. 내가 한쪽으로 경직된 게 아닌가 늘 고민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치개혁 문제에 관해서는 개혁적 마인드를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원내에 들어가면 당 개혁에 앞장설 것이다.”

    박 변호사는 국회의원이 되면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를 위한 제도를 만들겠다는 의욕을 갖고 있다. 인사권을 검찰총장이 가져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조성식신동아 기자mairso2@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58년 전남 곡성 출생 ●광주 사레지오고, 동국대 정외과 졸업 ●국회 정책연구위원(이사관)●한나라당 중앙정치연수원 교수, 16대 총선 중앙당 미디어기획단장, 16대 대통령선거 이회창 후보 전략기획단장, 한나라당 정책기획팀장 ●(재)국가정책포럼 이사

    지난 2004년1월27일 한나라당 당직자가 광주의 시민단체 토론회(‘2004 호남의 선택, 모색 토론회’)에 나타나 발언을 신청했다. 그의 발언은 ‘광주의 문법’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국회 출석률, 법안 제출횟수로 국회의원을 단순평가하지 마세요. 김대중 정부 시절 호남이 천지개벽하고 호남인이 팔자 고칠 기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하나가 여수 엑스포 유치였습니다. 경제개발효과 61조원, 고용창출효과 53만 명의 엄청난 사업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지식기반사업의 호남유치였습니다. 호남이 최적지라는 평가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호남 정권, 호남 국회의원들의 무성의, 불성실로 이 두 사업을 모두 놓쳤습니다. 지금보다 국력이 훨씬 약할 때인 전두환 정권에선 올림픽, 노태우 정권에선 대전과학엑스포, 김영삼 정권에선 월드컵을 유치했습니다.”

    일순 토론장 분위기는 미묘해졌다. 한나라당 사람이 5·18의 심장부에 출현해 이렇게 도전적 발언을 한 적은 없었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고 당황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정현(李貞鉉·45). 호남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한나라당 사무처에서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친 이색경력자다. 당내에서 그의 정책 기획력은 선이 굵고 명쾌한 것으로 평이 나있다. 그는 광주 서구에서 한나라당 간판으로 ‘당선’ 되기 위해 도전장을 냈다.

    “왜 자신이 반드시 당선돼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댔다. 하나는 ‘정치개혁론’이다. “내가 의원이 되면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정책연대에 앞장서겠습니다. 그래서 개혁적 보수 연합을 만들어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국가에너지를 결집해 선진화와 통일의 기반을 닦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개혁입니다. 열린우리당의 지역주의 청산구호는 ‘분열의 정치’를 숨기려는 ‘위장술’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포트폴리오(분산투자)론’이다. 다시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호남 29개 지역구 중 한 곳만 한나라당 후보에게 주십시오. 나는 20년 간 한나라당(그 전신인 민정당 등)에서 깨끗하고 성실하게 당료 생활을 해왔습니다. 한나라당 지도부와의 인맥이 가장 잘 구축된 호남인입니다. 광주가 발전하려면 현실적으로 의회권력의 상당부분을 장악한 한나라당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제게 배지를 달아주면 광주 발전을 위해 국회에서 민주당-열린우리당 의원의 일당백으로 펄펄 날아다니겠습니다. 매년 광주가 기대한 것보다 1000억원 이상의 예산이 더 배정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대박이 보장된 블루칩입니다.”

    이정현씨는 ‘LST공약’을 내걸었다. 광주-전남을 굴뚝 없는 고부가가치 산업인 레저, 스포츠, 트래블(여행) 산업의 메카로 집중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의원이 되면 당장 이 사업 추진을 위해 광주시, 전남도와 머리를 맞대겠다고 한다. 지난 설 연휴 때 이씨는 전남도지사 등으로부터 김을 선물받았다. 전남도는 전남에 지원되는 중앙정부 예산의 국회 심의과정에서 한나라당의 지원이 절대적이었으나 마땅한 인맥을 찾지 못해 전남출신인 이씨에게 부탁을 했다고 한다. 이때 이씨가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이정현씨는 광주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선거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이씨는 서구 주민들에게 “이번 선거의 의미를 민족사적 관점에서 보아달라”고 부탁했다. “광주와 대한민국의 도약을 위한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미운 오리새끼를 뽑아주시면 백조가 되어 보답할 것입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화합해 광주가 잘살고,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이 진정한 정치개혁입니다.”

    허만섭신동아 기자mshue@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59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물리학과 졸업 ●1984년 MBC 아나운서 입사 ●‘생방송 아침 만들기’ ‘스타예감’‘어린이에게 새 생명을’‘한선교-정은아의 좋은 아침’ 등 진행

    지난 대통령선거 투표마감 직후 노무현 후보가 ‘하회탈’을 들고 웃는 모습이 여러 언론에 보도됐다. 한 시사주간지는 표지사진으로 싣기도 했다. 노 후보에게 그 하회탈을 전해 준 사람은 방송인 한선교(韓善敎·45)씨였다. 당시 SBS MC였던 한씨는 데스크로부터 “노무현 후보 인터뷰를 따오라”는 ‘특명’을 받았다. 민주당사로 달려간 한씨는 여러 기자들을 물리치고 노 후보와의 최초 인터뷰를 성사시킨 뒤 노 후보에게 선물로 하회탈을 준 것이다.

    한 달 여 뒤인 2004년 1월 말 노무현 당선자 부부는 ‘SBS 한선교-정은아의 좋은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한선교씨 입장에선 대통령당선자 부부를 초청해 토크쇼를 진행하는 최초의 방송인이 된 셈이다. 이런 한씨가 노 대통령과는 대척점에 있는 한나라당 후보로 경기 용인을에 출마하기로 했다. 방송가에선 “의외”라며 놀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씨는 지난 대선 때부터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을 마음속으로 지지해왔다고 한다. 다만 방송 진행을 하는 동안엔 주변 사람들도 전혀 눈치를 못 챌 정도로 정치적 중립성을 지켰다.

    그에게 “왜 한나라당을 지지하나”라고 물었다. 대답은 간결하면서 힘이 있다. “한나라당이 지향하는 개혁적 보수, 신중한 안보관, 경제우선 정책이 지금 위기상황의 대한민국을 구해내는 옳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씨는 방송사 PD인 부인과 두 딸을 두고 있다. 그가 출마를 결심하자 부인은 “부정한 돈 받지 말라”고 했다. 중3 딸은 메모지를 건넸다. ‘잘못된 정책은 처음부터 발표하지 마세요’ ‘선거법을 준수하세요’라고 적혀있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요즘 매일 아침부터 밤늦도록 헬스클럽, 대형 할인점, 상가, 술집을 걸어서 누빈다. “시민들이 이웃처럼 친절하게 저를 맞아줍니다. 그만큼 책무도 크게 느낍니다.”

    매 순간 시청자를 의식해야 하는 MC출신이어서 자신에겐 두 가지 장점이 있단다. 어떤 현안이든 문제의 핵심을 빨리 파악해 내는 능력과 언행을 하기 전 ‘국민이 이를 어떻게 볼까’고 한번 더 생각하는 습관이 그 것. 국민에게 스트레스 주는 무능하고 품격 낮고 비도덕적인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선교씨는 출마 선언 두 달여 만에 지역구 현안을 줄줄 꿰고 있다. 용인의 아파트단지 여성 주민들은 거의 모두 지역전문가들. 용인 구석구석을 발로 뛰는 한씨에게 이들은 더없이 훌륭한 교사들이다. 용인 시민단체, 공공기관에서도 정보를 얻는다.

    “용인 주민의 90%는 교통체증을 최대 문제로 꼽았습니다. 가장 시급한 일은 용인-서울간 경전철 개통을 최대한 앞당기는 일입니다. 29만명이 사는 용인을 지역에 극장이 한 곳도 없습니다.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의 학교들은 아이들로 꽉 차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을 보고 좋은 공기를 마시러 용인으로 이사온 주민들이 많습니다. 산을 깎아내는 아파트 개발을 억제해 자연을 지켜내겠습니다.”

    그는 독특한 공약도 준비중이다. 조명시설이 설치되어 야간경기가 가능한 농구장을 대폭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용인지역 청소년들이 방과 후 갈 곳이 없어 분당 유흥가로 몰리는 것을 관찰한 뒤 내린 대안이라고 한다.

    한씨는 “신도시 용인을은 정치 신인인 나와 ‘같은 시간표’ 상에 있다. 우리는 함께 발전해 나갈 사이”라고 말했다. “저의 정치를 보면서 용인 주민들이 매일 좋은 아침을 맞으시기를.”

    허만섭신동아 기자mshue@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57년 대구 출생 ●서울대 법대, 보건대학원 졸업 ●사시 22회●대구지검 안동지청장, 광주지검 목포지청 부장검사, 서울지검 서부지청 부장검사, 서울고검 부장검사

    민주당은 분당 이후 소수 야당의 한계를 극명하게 느끼고 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에 비해 공천신청자도 크게 줄었을 뿐 아니라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였던 영입대상자 중 상당수를 다른 당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서울 강북갑에 출마를 선언한 박승진(朴承鎭·47)씨가 그나마 민주당의 체면을 살려준 영입인사 중 한 사람이다. 박씨는 대구 출신의 현직 부장검사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그가 태어난 대구 동구는 분구 예정지다.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한다면 당선은 떼어논 당상이었을 것. 하지만 그는 민주당을 선택했다.

    “한나라당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수구보수예요. 심지어 ‘꼴통’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습니다. ‘차떼기’ 부패정당이지 않습니까. 성향도 저와 맞지 않습니다. 저는 개혁적인 사람입니다. 리버럴하면서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열린우리당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도 분명하다.

    “열린우리당은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 밑에 있는 유시민 같은 사람은 말 따로 행동 따로인 사람입니다. 백년 갈 개혁정당을 만들겠다고 해놓고 금방 깨버리는 사람들이 모인 당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1980년 사시에 합격한 박씨는 사법연수원과 군 법무관을 거쳐 1985년 서울지검 검사로 첫 부임했다. 뒤이어 춘천지검 원주지청과 부산지검 검사로 일하다 1991년 미국 미시건대에 연수를 다녀왔다.

    귀국과 동시에 박씨가 맡은 사건이 1992년 10월 경기도 동두천에서 발생한 ‘윤금이 피살사건’이다. 미군전용클럽 종업원이었던 윤씨가 상상하기 힘든 엽기적인 방법으로 살해를 당한 사건으로 수사결과 미2사단 케네스 리 마클 이병이 범인으로 밝혀졌다. 당시 박씨는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고등검사관으로 재임중이었다. 이 사건은 그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사건 자체도 엽기적이었지만 미군이라는 이유 때문에 범인을 구속시키지 못한 게 가장 마음 아프고 안타까웠습니다.”

    박씨는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평검사 생활을 끝마쳤다. 다음해 대구지검 안동지청장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박씨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검찰 내에서는 유명인사다. 3년 전 검찰내부통신망 게시판에 검찰의 정치적 독립과 인사의 공정성을 주장하는 글을 올리면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그 이후 검찰을 떠나기 전까지 검찰 내 몇 안 되는 ‘논객’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

    그가 정치권에 도전장을 낸 것은 폐쇄적인 검찰 내부조직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박씨는 “강금실 법무장관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검찰 개혁을 한다고 했으면서 1년 동안 한 것이 없다.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며 “일반인들에게는 인기가 높을지 몰라도 나는 F학점을 주고 싶다”고 혹평했다. 또 “검찰의 수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다고 해놓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며 지휘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독실한 크리스찬이다. 박씨는 “내 스스로 능력이 되는지 고민했다. 하느님이 나를 쓸 뜻이 있으면 쓰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며 “총선에서 당선된다면 비전을 제시하고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정치인이 되도록 노력할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엄상현신동아 기자gangpen@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58년 서울 동대문구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이스라엘 정부 초청 ‘MASHAV 미디어 연구과정’ 수료, 세종대 언론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1985년 4월 조선일보 입사 ●1988년 4월 한겨레신문 기자 ●1988년 9월~2004년 국민일보 기자·차장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권자들은 ‘40대, 전문직업인 출신, 정치신인’을 가장 선호하더군요. 노회한 정치꾼들이 장악하고 있는 정치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평범한 생활인의 자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는 추첨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한 첫 세대입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치를 하기에 적합한 조건이 아닐까요.”

    ‘월급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온 사람’‘직장인의 비애를 잘 아는 사람’.박찬희(朴贊熙·46)씨의 자기 평가다. 남들처럼 ‘특별함’을 내세우기보다는 ‘평범함’으로 호소하고 싶다는 것. 정당의 목표를 ‘집권’으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구시대적 정치가 아니라 ‘국가의 발전’을 위해 건전한 비판자, 건설적인 대안 제시자의 기능에도 충실한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선거에 ‘목숨을 거는’ 전문 정치인의 시대는 끝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언론인의 정치권 진출을 보는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는 “나는 상황이 다르다”고 말한다. 어제까지 정당 출입기자를 하다가 오늘 사표를 내고 내일 선거에 출마하는 식이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정치부를 떠난 지 7년이 돼가는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특히 방송을 통해 얻은 이미지를 정치에 활용하는 앵커 출신 영입 대상자들과는 분명 다르지 않느냐는 반론이다.

    “1997년까지 새천년민주당의 전신인 평화민주당에 출입했습니다. 때문에 민주당의 이념이나 노선은 잘 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당시의 취재원들은 모두 정계를 은퇴한 지 오랩니다. 이번 공천심사과정에서도 옛 인연의 도움을 받은 것은 조금도 없고요. 치열한 심사 청문회를 치렀고 여론조사를 통해 공천 여부가 결정될 예정입니다. 인지도가 낮은 저로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철저히 공정한’ 과정이죠.”

    박씨는 지역구로 택한 서울 동대문구에서 태어나 초·중·고교를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한나라당의 박진 의원이 지난 선거에서 ‘종로의 아들’이라고 홍보했듯 자신은 ‘동대문의 아들’이라는 것.

    그는 기자 시절 얻은 다양한 경험이 지역발전을 위한 자산이 될 것이라 말한다. 특히 최근 3년간 정보과학분야를 다루면서 미래 경제를 이끌어갈 첨단 기술 등에 대한 식견을 갖추게 됐다는 것.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과학발전을 이끌어온 기관들이 지역구로 택한 동대문에 위치해 있는 만큼, ‘미니 홍릉 밸리’라는 컨셉트로 뒤처진 이 지역의 개발을 앞당길 수 있는 계획을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역을 위해 필요한 정책이 무엇인지, 이 지역을 잘 아는, 함께 살아온 자신이야말로 적합한 후보라는 자평이다.

    “사표를 내겠다고 했더니 다들 ‘참 용감하다’고 하더군요. 이제까지 기자만 해온 사람이 회사까지 그만두고 선거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는 거죠. 씩 웃어줬습니다.”

    반대하는 아내와 어머니를 “패가망신하는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말로 설득했다”고 박씨는 말했다. 법정 선거비용을 훨씬 넘겨 운동원을 동원하고 이를 위해 집 팔고 빚 내는 선거운동은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 “우선은 돈이 없고, 대폭 강화된 현행 선거법은 그런 운동방식을 용납하지도 않는다”는 설명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생활인의 정치’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라는 저의 믿음이 새로운 흐름이 되어 나타날 가능성은 더욱 높다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선거판에서 보낸 사람들이 늘그막에 국회의원이 되는 식은 이제 벗어날 때가 됐다는 거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구호, 함께 생각할 수 있는 현안을 갖고 당당히 심판받겠습니다.”

    황일도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47년 전남 나주 출생 ●광주대 문헌정보학과 졸업, 고려대 노동대학원 최고위지도자과정 ●한국노총 전남지역본부 의장, 한전 본부위원장, 공공부문 노동조합 연대회의 상임의장 ●노무현 대통령후보 선거대책위 노동특별위원회 부위원장

    “정치판이 이런곳인 줄 알았으면 (출마를) 좀더 고려해봤을 겁니다. 노동조합 선거처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네요. 완전히 딴판이에요.‘정글의 법칙’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14일 민주당에 1차로 영입돼 광주 북구을에서 당내 경선을 준비하고 있는 오경호(吳京鎬·57)씨의 고백이다. 오씨는 다른 정치신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정치의 벽을 실감하고 있다. 선거에 뛰어들었으니 자신을 하루라도 빨리 유권자들에게 알려야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명함 한 장을 주더라도 본인이 일일이 찾아다니며 건네는 수밖에 없다.

    현역 정치인들처럼 의정보고서를 만들 수도 없고, 설령 홍보물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선거기간에 돌입하기 전까지는 배포하지 못한다. 현행 선거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씨는 정통 노동운동권 출신이다. 1973년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한 그는 1984년 한국노총 노사대책부장을 맡으면서 노동운동가로 변신했다. 이후 한전노조 광주전력지부위원장에 다섯 차례나 연임(6선)될 정도로 노조원들의 신망을 얻었다.

    한전노조는 전통적으로 매우 관료적이고 배타적인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귀족노조’라고 꼬집기도 한다. 오씨는 이 같은 조직을 변화시키기 위해 세 차례나 노조위원장 선거에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동료 조합원의 분신자살 등 우여곡절 끝에 네 번째로 도전한 2000년 선거에서 노조위원장에 당선됐다. 이후 그는 한국노총 부위원장, 민주평통 자문위원, 공공부문 노동조합 연대회의 상임의장, 개혁과 통합을 위한 노동자연대 공동대표 등 중앙 노동운동계로 진출해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그가 정치권에 진출하고자 결심한 계기는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절감하면서다. 정치인과 노동자, 농민 등 일반 서민들의 괴리가 엄청난 현실에 대한 인식도 그의 결심을 부추겼다.

    “지금까지 우리 정치는 가진자들의 전유물이었어요. 그들은 서민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눈물겨운지 모릅니다. 취직을 못하고 빚에 쪼들려 가정이 파탄지경에 빠지고, 고귀한 생명까지 내던지는 게 현실인 데도 그들은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나선 겁니다. 노동운동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을 치유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던 터였어요. 진정으로 서민을 위한 정치를 펴고 싶습니다.”

    한편 오씨는 2002년 16대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선대위 노동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전국 공공부문 노동조합 연대회의를 조직해 노동계의 지지를 호소하는 등 적극적인 선거지원 활동에 나선 경력이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오씨의 평가는 무척 부정적이다.

    오씨는 “노무현 정부는 노동현안에 처음부터 잘못 접근했고, 해결방법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정부는 아무런 원칙 없이 대처했고, 청와대는 불필요하게 너무 깊숙이 개입했다. 그래서 무슨 문제만 생기면 모두 그(청와대)쪽만 본다”며 “이 모든 게 노 대통령의 잘못된 코드정치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난했다.

    오씨는 이어 “민주당의 후보였기 때문에 노동계, 특히 호남지역 노동계가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것인데 노 대통령은 이를 헌신짝처럼 버렸다”면서 “지역 주민들과 노동자들은 이번 총선에서 배신의 정치, 분열의 정치에 대해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엄상현신동아 기자gangpen@donga.com

    17대 총선 도전장 낸 정치신인 20
    ●1944년 전북 전주 출생 ●전주상고·동국대 행정학과 석·박사●경찰간부후보생 19기 ●전북경찰청장, 경찰종합학교장, 경찰대학장 경찰청장

    ‘업무장악력이 탁월하다는 평’ ‘호방하고 소탈한 성격’ ‘추진력이 대단하다는 평’…. 이무영(李茂永·60)씨가 1999년 11월 신임 경찰청장으로 임명받았을 당시 언론들이 쏟아낸 인물평이다. 보스 기질이 강하다는 공통적인 설명도 덧붙여졌다.

    이씨는 경찰청장 취임 직후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일이 많았다. 시위현장에 여경을 투입하는가 하면 어린이 명예경찰대를 발족하는 등 새로운 경찰상을 심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졌던 것.

    이씨는 특히 경찰 수사권 독립문제를 놓고 검찰과 날카롭게 대립하기도 했다. 이씨가 수지김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과 함께 검찰에 구속됐을 때 검찰을 자극한 결과가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분분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비록 대법원 무죄확정 판결로 혐의를 벗었지만 이씨에게는 치욕스런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그가 정치권에 도전하게 된 계기도 이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저는 30여년을 경찰로 살았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단언코 얘기합니다만 저는 단 한 번도 불의와 야합하거나 정도를 벗어나 주위사람을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결코 제 개인의 영광을 위해 출마하는 게 아닙니다. 제 내부에 잠재한 열정을 정치개혁에 쏟고 싶어서입니다.”

    이씨는 이어 경찰 수사권 독립문제와 관련, “청장시절이나 지금이나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현재 우리의 형사소송법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 ‘21세기형 형사소송법’으로 개정해야 한다. 이번 총선에 당선되면 국민의 편익뿐 아니라 권익보호 차원에서도 반드시 근거법규 개정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씨가 출마할 전주 완주군 분구 예정지역엔 무려 17명의 후보가 난립하고 있다. 민주당이 9명으로 가장 많고 열린우리당 5명, 한나라당과 개혁국민정당, 무소속 등이 각 1명씩 출사표를 던졌다. 이씨가 당내 경선에서 이긴다면 열린우리당 현역 의원이자 국방위원장인 장영달 의원과 맞붙을 가능성이 높다. 섣불리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이씨와 장 의원은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상대임에 분명하다.

    이씨는 오래 전부터 총선 출마를 위해 지역기반을 닦아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3선의 중진 정치인인 장 의원을 결코 얕잡아볼 수는 없는 입장이다. 때문에 지역에서는 분구가 되면 서로 지역구를 피해서 출마하기로 밀약을 주고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일부 지역 언론에서 이를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씨는 이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 “저도 그런 얘기를 우리당원들한테 들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결코 그런 일은 없고 또 앞으로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면합의를 한다든지 뒤에서 꼼수를 부리는 것은 제 성격에 맞지 않아요. 3선의 중진에 국방위원장인 장 의원이 과연 국민에게 한 일이 무엇인지 묻고 싶어서 오히려 저는 같은 선거구에서 정정당당하게 맞붙고 싶습니다.”

    경찰청장 시절 보수적인 경찰조직을 변화시키기 위해 500여개의 개혁정책을 추진했고, 그 덕분에 미 ‘비즈니스 위크’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스타 50인’에 들었던 이씨. 그는 “그동안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해왔던 것처럼 이제 다시 정치인으로서 국가와 국민, 그리고 고향인 전주와 전라북도의 부흥을 위해 살겠다. 먼 훗날의 평가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평가를 받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엄상현신동아 기자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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