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8일, 중국에 머물던 70대 국군포로가 한국에서 찾아간 가족들과 만난 후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전용일씨가 공안에 체포됐다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직후 발생한 일이다. 전씨 사건 이후 ‘재발 방지’를 다짐했던 정부의 약속은 거짓말로 드러났다.
지난 1월8일 중국에서 막내 여동생 김말숙씨와 상봉 당시의 국군포로 김기종씨
특히 이번 사건은 정부가 전용일씨 사건 이후 유사 사건 재발 방지를 다짐하고 국무총리 훈령으로 ‘국군포로 송환에 관한 업무 운용규정’을 제정하는 등 국군포로 문제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밝힌 직후인 1월초 발생한 일이어서 더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중국 현지에 억류중인 국군포로는 대구 출신의 김기종(72)씨. 김씨는 “수도사단 출신으로 지난 1952년 입대했으며 53년 7월 금화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됐다”고 밝혔다. 김씨는 또 자신은 “함경북도 무산 지역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했으며 한국에 가 가족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신동아’의 확인 결과 김기종씨는 1953년 6월 1일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어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다.
김씨가 지인을 통해 한국의 가족 소식을 듣고 북한을 탈출한 것은 지난해 12월초. 그후 북중 국경 도시에 머물던 김씨는 조선족 중개인을 통해 김씨의 탈출 소식을 듣고 현지로 날아간 형과 여동생들을 상봉했다. 그러나 가족 상봉 직후인 1월8일 밤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김씨와 같은 날 체포된 김씨의 형 기상씨와 여동생 2명은 여권을 압류당한 채 억류되었다가 1주일 만인 1월15일 강제추방당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편 김씨의 체포 직후 한국 정부 당국은 외교라인을 동원해 김씨 송환 협상에 나섰으나 40일이 넘도록 김씨의 신병 확보는커녕 정확한 소재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국군포로 처리과정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정부는 지난해말 이미 김씨의 탈출 사실을 확인하고 신분 확인 과정을 거쳐 한국의 가족들에게 통보까지 해준 데다 김씨 가족들의 중국 상봉 역시 통일부의 허가 아래 이뤄진 것이어서 김씨의 체포와 억류는 한중간 외교문제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중국 공안 관계자는 “비록 한국 통일부의 허가를 받고 이산가족 상봉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중국법 위반으로 이들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 관계자는 “중국측이 김씨의 신병 인도를 약속했기 때문에 북한으로 송환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조속히 해결되기를 기다릴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현지 관계자들은 ‘탈북자 수용소인 투먼수용소에 수감됐던 전용일씨가 30여일 만에 귀환했던 전례에 비춰볼 때 옌지(延吉) 인근 간수소(구치소)에 임시 수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김씨의 귀환이 늦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기종씨를 상봉한 지 1주일 만인 1월15일 한국으로 돌아온 가족들은 누구로부터도 김씨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한 달 넘게 애를 태우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김기종씨는 지난 1월8일 가족상봉 직후 ‘신동아’와의 현지 인터뷰에서 “무산광산 지역에만 120명 정도의 국군포로가 거주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김씨는 송영철 김사문 김성원 송종구 황성원씨 등 무산에 거주하던 국군포로 5명의 명단을 밝혀 한국 내 생존 가족들이 나타날 지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신동아’는 1월8일부터 국군포로 김기종씨의 가족상봉에서 체포에 이르기까지 전 기간 동안 동행 취재한 바 있다. 기자 역시 취재 과정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돼 1주일간 억류되었다가 강제출국당했다. 당시 상황과 김씨 사건의 전말을 시간대 별로 재구성했다.
“오빠, 오빠, 이게 웬일이야? 내일이면 서울로 함께 갈 줄 알았는데… 아무도 우리 오빠한테 손 못대. 놓으란 말이야!”
1월9일 밤,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옌지시에 있는 공안국 청사 6층 조사실. 국군포로 김기종씨의 막내동생 김말숙(60·대구 거주)씨는 수갑이 채워진 채 끌려와 고개를 떨구고 선 오빠 김기종씨를 보는 순간 ‘설마, 설마’하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쪼글쪼글하고 파리해진 손목에 수갑을 걸고 서있는 오빠 기종씨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숙씨가 주저앉아 통곡을 하는 사이 말숙씨의 언니 정숙씨(68·경기 안산 거주)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아예 실신한 채 쓰러져버렸다. 순간 공안국 청사는 온통 울음바다로 뒤바뀌어 버렸다.
52년 만에 피붙이를 만난 상봉의 기쁨도 한순간. 그날 밤으로 중국 공안에 체포돼 옌볜 공안국으로 압송돼 온 국군포로 김기종씨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이대로 북한에 가면 죽는데… 죽는데…”라는 말만 힘없이 뇌까리고 있었다.
정숙씨와 말숙씨는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옌지에서 두 시간 가량 떨어진 북중 국경의 한 도시에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오빠 기종씨를 52년 만에 만나 ‘이제는 모두 살았다’며 ‘한국으로 건너가 오순도순 살자’면서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그러나 이들 남매가 다시 만나기까지 기다려왔던 52년의 시간은 단 한 시간 만에 산산조각나 버렸다. 예상치 못한 중국 공안의 습격으로 현장에서 가족 모두 체포되면서 상봉의 기쁨은 가슴 저미는 초조한 기다림으로 바뀌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장면 2 “니 와 이렇게 폭삭 늙었노?”
이보다 하루 전인 1월8일 오후, 중국 지린성(吉林省) ××시. 눈빛이 선하고 총명하던 스물두 살의 청년은 52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이빨이 뭉텅 빠지고 머리는 백발로 뒤덮인 보잘것없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노인은 어려서 전쟁이 갈라놓은 동생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조바심치며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52년 만에 오빠를 찾아나선 누이동생들도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동행한 안내인으로부터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두리번거리지 말고 각자 거리를 둔 채 미리 지정해둔 집으로 들어가라고 단단히 ‘교육’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옌지에서 차로 두 시간을 달려 ××시에 내리는 순간부터 이미 두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발걸음을 어떻게 떼놓는지도 모른 채 뛰어들 듯이 허름한 민가의 문을 열어젖혔다.
“맞네, 맞네.”
“오빠 맞다! 우리 오빠 맞다!”
숨어 있던 노인을 보자마자 두 여동생의 입에서는 똑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일곱 살 때 봤던 우리 오빠 맞네. 내 어릴 때 봤던 우리 오빠 맞다.”
“아버지 얼굴 그대로다!”
두 여동생은 펄쩍펄쩍 뛰며 폭삭 늙어버린 오빠한테 매달렸다.
“네가 기종이가? 니 와 이렇게 됐노, 날 알아보겠나?”
맏형 김기상(76)씨는 자신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네살 아래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더 확인하고 말 것도 없었다. 갸름한 턱선과 서글서글한 눈매를 보자마자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돌아온 것 같은 느낌에 3남매는 ‘와락’ 얼싸안고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끝도없이 비벼댔다.
아버지는 아들 기종씨가 전쟁에서 죽은 줄로만 안 채 70년대 중반 이미 세상을 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둘째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는 아들의 전사 사실을 통보받고 나서 피를 한 대야쯤 토하고 몸져 누웠다. 어머니가 세상을 등진 지도 올해로 20년이다. 4남2녀나 되는 남매들 중에서도 이미 두 사람이 세상을 떴다.
그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70줄에 들어선 4남매의 기억력은 전쟁과 생활고의 가혹한 세월 앞에서도 녹슬지 않았다.
“소대 전체가 전투에 나갔다가 중공군에 포위가 돼버린기라. 사방에서 수류탄이 막 터지는데 다른 동료들은 다 죽고, 나만 운전석에 있었던 바람에 살아남았지 뭐냐.”
“나는 또 젊을 때 오빠가 하도 날래놔서 ‘빵’하고 터지면 혼자 뛰어 달아나다가 총맞은 줄 알았다카이.”
“오빠가 없어지고 나서 어머니가 온통 용하다는 점쟁이들은 다 찾아다니면서 3년 동안이나 점을 봤다 아이가?”
“그래, 그래. 난 지금까지 어머니 모습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50년 세월을 뛰어넘은 대화가 1시간이나 이어졌을까. 집주인이 저녁식사를 차려 나왔다. 52년 만에 피붙이를 만난 기상씨와 두 여동생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도무지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일흔이 다 된 정숙씨는 오빠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나서 줄곧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오빠를 만났지만 눈물에 비빈 밥은 여전히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았다. 오빠의 총명함과 젊음을 송두리째 나꿔챈 세월이 야속할 뿐이었다.
국군포로 김기종씨와 가족들이 압송돼 조사받았던 옌볜 공안국 청사.
그 때였다. 집주인 남자가 갑자기 기종씨를 일으켜 세우더니 “잠깐 볼일이 있다”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러는 사이 집주인 여자는 ‘누군가가 우리집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안절부절 못했다. 집주인 여자는 차라리 빨리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겠다며 불을 끄더니 자리를 펴고 누울 것을 종용했다.
‘내일 다시 데리러 올 것’이라는 안내인의 말만 철석같이 믿었던 기종씨를 제외하고, 3남매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 5분이나 지났을까. 건장한 청년 5~6명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3남매는 직감적으로 ‘뭔가 일이 잘못됐구나’ 하고 느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영하 10。C가 넘는 찬바람 속에 세 노인은 누군가에 둘러싸인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장면 3 ‘미행, 그리고 체포’
“오늘 오후 ××에 갔습네까, 안 갔습네까?”
“안 갔습니다.”
“우리가 이미 상황을 다 장악(파악)하고 있단 말이요. 갔습네까, 안 갔습네까?”
“안 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자백을 했어요, 빨리 인정하면 돌려보내줄 테니 털어 놓으란 말이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국군포로 김기종씨 가족들이 체포된 시각. 김씨 4남매의 상봉 현장을 취재하고 옌지로 돌아와 호텔에 여장을 푼 기자 역시 중국 공안에 체포돼 공안국 청사로 압송됐다.
체포와 압송은 곧바로 밤샘 조사로 이어졌고 공안과 기자 사이에서는 고성이 오갔다. 잠을 안 재운 상태에서 계속되는 조사에 항의하는 기자와 ‘여기가 어디인 줄 아느냐’며 윽박지르는 공안 사이의 말싸움은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취재 내용에 대해 부인과 함구로 일관하자 공안 7∼8명이 번갈아가며 다그쳤다. 한편으로는 자백을 강요했고 한편으로는 회유에 나섰다.
“우리는 번갈아가며 자니까 일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혼잡니다. 안 자고 어드메까지 버티겠습네까?”
“…”
“속시원하게 털어놓으면 그게 사내답지 않습네까? 집에 아이는 몇 살입네까?”
“…”
험악한 줄다리기가 끝나지 않자 결국 공안측은 이날 취재에 동행했던 다른 관계자들의 진술 내용을 토대로 기자에게 확인을 요구했다. 시계바늘은 새벽 5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더 버틸 도리는 없었다. 공안 관계자들은 이날 오후 공항에서부터 기자 일행의 뒤를 완벽하게 미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자는 여권과 신분증, 그리고 가방에 든 소지품을 모두 압류당한 채 맨몸으로 새벽 어둠 속으로 걸어나왔다. 4남매의 상봉 장면을 찍은 필름만 기자의 몸 속 깊숙이 숨겨져 있었다.
# 장면 4 ‘동사무소로부터의 전화’
김기종씨 4남매가 중국의 낯선 도시에서 52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하게 만나게 된 것은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기종씨의 맏형 김기상씨가 관할 동사무소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의 이름이 담긴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지난해 12월17일. 뜬금없이 날아든 동생의 소식은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이산가족 상봉 소식을 접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최근 전용일씨 사건 등 잊을 만하면 국군포로가 한 명씩 귀환했다는 소식을 접하기는 했지만 하나같이 남의 일일 뿐이었다. 김씨 가족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해본 일이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장난을 치고 있거나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사무소에서 이산가족상봉 주선단체의 전화번호를 주면서 직접 연락해 만나보라고 할 때만 해도 누군가가 대가를 바라고 없는 사실을 꾸며내 사기를 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상들이 숨겨놓은 땅을 찾아준다’며 사기행각을 벌이다가 붙잡힌 사람들도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날 동사무소에서 소개해준 사람이 갖고 나온 동생 기종씨의 편지와 사진을 본 순간 기상씨는 심장이 멎는 듯한 전율에 휩싸였다. ‘정숙아, 내가 살아 있다’로 시작되는 기종씨의 편지에는 어린 시절 대구 칠성동 굴다리밑을 함께 뛰어다니던 동생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기종씨는 어릴 적 몸이 유독 약했던 형이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바로 아래 누이동생인 정숙씨 앞으로 편지를 써보냈던 것이다.
김기상씨의 기억에 따르면 동생 기종씨의 전사 소식을 가족들이 확인한 것은 1952년이었다. 입대 이후 편지가 한 번 오고난 뒤 연락이 끊긴 아들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아버지는 당시 치열한 전선을 피해 후방지역인 대구로 내려와 있던 육군본부를 찾아갔다.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정종 한 병을 다 마시고 나서 육본에 드러누운 채 난동을 피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확인한 것은 아들 기종씨가 실종 처리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나마 전사 처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기다렸으나 휴전이 선언된 뒤 다시 찾아간 육본에서 김씨는 기어이 아들의 병적기록부에 붉은 줄이 그어진 것을 확인하고 말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해 가을인가는 기종씨가 남기고 간 것이라며 흰색 상자에 담긴 유골까지 전해받았다. 모든 게 끝이었다.
그로부터 51년. 유골로 돌아왔던 동생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형 기종씨에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부로부터 ‘남매의 중국 현지 상봉을 추진하고 있다’는 확답까지 들은 마당에 더 이상 ‘꿈인지 생시인지’를 따질 필요는 없었다.
# 장면 5 “우리 오빠를 돌려주세요!”
그러나 그날 옌볜 공안국 청사에서 본 수갑 찬 기종씨의 모습이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3남매 중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김기종씨가 옌볜 조선족자치주 관할 간수소(구치소)에 수감돼 있다는 것만 공안 관계자의 입을 통해 들었을 뿐 더 이상의 소식은 없었다. 52년 만의 만남은 하룻밤의 꿈처럼 4남매에게 깊은 상처만 남기고 막을 내렸다.
공안으로부터 여권을 되돌려받아 한국행 비행기를 예약한 날 정숙씨는 한국에서 오빠를 위해 준비해 간 내복과 몇 가지 물품을 중국 공안에 전달하며 신신당부했다.
“우리 오빠 꼭 돌려보내주는 거지요, 예?”
한국을 출발하기 전부터 “기종 오빠가 6남매 중 제일 멋있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던 막내동생 말숙씨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생사도 확인할 수 없는 곳에 늙고 힘없는 오빠만 남겨두고 강제출국이라니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옌지 억류 1주일 만에 3남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 장면 6 “정부는 어디 있나요?”
그후로는 하루가 잃어버렸던 지난 50년처럼 느껴지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귀국 후 정부 부처 어디에 문의해 봐도 김기종씨에 관한 속시원한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협상중이니 기다려보라’는 말뿐.
김기상씨는 1월15일 억류상태에서 풀려나 귀국한 뒤 나흘 뒤 통일부를 방문해 이산가족 상봉 보고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이들의 상봉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던 통일부측도 ‘생사 확인 및 상봉 주선 경비를 지급할 테니 출입국 기록을 제출하라’는 말뿐이었다.
중국에서 여권을 돌려받고 강제출국당하기 직전 만났던 한국 공관 관계자로부터 “잘하면 설을 전후해서 한국으로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기다려보았지만 허사였다.
김기상씨 3남매는 정부로부터 국군포로 김기종씨의 생존 및 탈출 사실을 통보받은 이후 두 달 동안 전개된 일이 왜 이렇게 꼬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중국 공안에 체포돼 조사받을 당시 알아두었던 공안 관계자의 전화번호로 무작정 전화를 걸어 김기종씨의 소재를 수소문해 보았지만 “구체적인 것은 모른다. 위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라는 답변뿐이었다.
김기상씨는 오히려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시 북으로 보내려는 것 아니냐”며 안타까워 했다. 김씨 남매는 정부로부터 기종씨가 살아 있다는 통보를 받은 직후 집을 담보로 잡혀가며 온 식구가 3000만원을 모아 중국으로 떠났었다.
김씨는 “나라를 위해 참전한 사람이 살아 있다는 나라의 연락을 받고 갔는데 왜 나라에서 이렇게 무관심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꿈에도 그리던 52년만의 상봉은 이렇게 하루만에 물거품이 됐다. 그리고 시간은 여전히 거기에 멈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