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美 민주당 예비선거 돌풍의 주역 존 케리 연구

몽상가인가 현실주의자인가, 집념 강한 ‘두 얼굴의 사나이’

  • 글: 이흥환 미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입력2004-03-02 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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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예비선거에서 존 케리 상원의원이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독주체제를 굳히고 있다. 비록 4선 의원이지만 자신의 이름을 딴 법안 하나 없는 평범한 정치인에 불과했던 케리의 어떤 ‘마력’이 민주당원들을 사로잡은 것일까.
    美 민주당 예비선거 돌풍의 주역 존 케리 연구

    미시간주 워싱턴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후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는 존 케리 상원위원.

    “나에 대해 너무 빨리 알려고 하지 말라.”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의 말을 인용하길 좋아한다는 올해 59세의 워싱턴 정객. 나이 마흔하나에 미 상원의원이 돼 워싱턴 정치판에서 20년을 보낸 키 190cm 장신의 민주당원. 존 포브스 케리(John Forbes Kerry)는 2004년 2월초 현재 미 민주당 2004년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고, 4년 전에 이루지 못했던 정치 야망에 재도전하고 있다.

    존 F. 케네디처럼 그의 이니셜도 JF K다. 그는 지금 자신을 ‘돌아온(Comeb ack) 케리’라고 부른다. 메콩강 삼각주에서 순찰정 근무를 했던 베트남 참전 용사로서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케리고, 한때 하워드 딘 바람에 침몰할 뻔했다가 예비선거에서 화려하게 되살아난 케리다.

    그는 다재다능하다. 사냥을 즐기고 쌍발 세스나 자가용 비행기를 손수 운전하며, 윈드서핑과 아이스하키 실력은 수준급이다. 지금은 손톱이 부러져나가도록 스페인 고전 기타 음악을 배우고 있다. 재기 넘치는 임기응변도 인기를 올리는 데 한몫 거든다. 그의 선거운동을 돕고 있는 한 전직 상원의원이 “공화당은 지금 2억5000만달러나 되는 선거 자금을 가지고 있다. 살벌한 일 아닌가?”라고 걱정하자 케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걸 가져오면 되지 않나.”

    존 케리는 매사추세츠의 명문가 출신이다. 그러나 부유하지는 않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중이던 1943년 콜로라도 주 덴버의 군 병원에서 태어났다. 2차 대전에 참전, 미 육군 비행단에서 DC-3기를 몰던 아버지 리처드 케리가 결핵으로 덴버의 군 병원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케리 가족은 고향인 매사추세츠로 돌아왔다.

    케리는 예일대에 들어갔다. 동창들은 그를 야망이 큰 청년으로 기억한다. 그는 활동적이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1962년엔 에드워드 케네디의 상원 선거에 자원 봉사자로 참가해 자신의 폴크스바겐 비틀을 타고 다니며 “케네디를 상원으로!”를 외쳤다. 반 급우들이 케리를 JFK라고 놀려댔던 것도 예일 시절의 이야기이다.



    케리는 예일의 주류는 아니었다. 예일의 주류는 명문가에 부유한 집안 출신들이다. 그는 여름방학 때마다 식품점에서 일을 했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백과사전을 팔아야 했다. 졸업 후 그는 해군에 들어갔고 위관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메콩강 삼각주에서 순찰정을 탔다.

    1969년 2월28일의 참전 일화 하나. 케리가 지휘하는 순찰정이 적의 로켓포 공격을 받았다. 그는 부하들에게 적이 숨어 있는 강가 숲에 순찰정을 대라고 명령했다. 육지에 올라섰을 때 로켓포를 든 적군 한 명이 3m 떨어진 거리에서 케리 부대원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적군은 로켓포를 발사하지 않고 망설이다가 돌아서 도망쳤다. 케리는 그를 뒤쫓아가 사살했다. 이 일로 그는 은성무공훈장을 탔다.

    베트남전이 끝났을 때 26세 청년 장교 케리의 목에는 은성무공훈장 등 다섯 개의 메달이 걸렸다. 하지만 전쟁에서 친구를 잃은 그가 조국에 대해 느낀 것은 배신감이었다. 그는 그 전쟁이 ‘잘못된 전쟁’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고,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후 반전 운동가로 변신한다. 1971년 그의 나이 28세가 되던 해 그는 미 베트남참전용사회의 공동 창립자로 일하다가 반전 베트남참전용사회의 대변인을 맡았고, 같은 해 4월에는 상원 외교위원회에 참석해 증언을 한다.

    “한 청년더러 실수로 치르는 전쟁에 나가 마지막으로 죽는 사람이 되라고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청문회에 참석했던 상원의원들은 모두 놀라 이 청년을 주목했다. 케리는 영웅이 됐다.

    그는 1972년 ‘평화 후보’라는 구호를 내걸고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했다. 그의 첫 선거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뛰어다녔다. 선거운동을 돕던 요원이 그를 유세장에 데려가기 위해 집에 들렀을 때 케리는 샤워를 하다 말고 벌거벗은 채 자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높이 더 높이, 빨리 더 빨리

    1982년 그는 다시 매사추세츠 주 부지사에 도전했다. 성공이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84년 41세에 초선 상원의원이 된다. 워싱턴에 입성한 그는 베트남에서 돌아왔을 때의 기질을 또 한번 발휘한다. 초선 상원의원으로서 입법에만 눈길을 돌리기보다는 행정부의 부패 문제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는 4선의 상원의원이 됐다.

    2000년 케리는 대통령을 꿈꿨다. 하지만 앨 고어의 러닝메이트 최종 주자로 거명되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대통령후보는 아직은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

    케리 주변 사람들은 그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경쟁에는 반사적으로 뛰어든다. 어떤 물을 만나든 누구보다 앞서 먼저 발을 담근다. 더 높이 오르고 더 빨리 가기를 좋아한다. 케리 집안의 전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케리의 눈을 가린 채 길 찾는 법을 가르쳤다. 결국 어린 케리는 안개 속에서 길을 찾아 나오는 방법을 배웠다. 케리가 애완용으로 기르는 잉꼬를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보면 그가 어떤 사내인지 알 수 있다. 그의 애완용 앵무새는 3개 국어를 한다. ‘헬로우’ 한마디이긴 하지만 어쨌든 케리의 앵무새는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케리는 외교관으로 베를린에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유럽에서 살았다. 그는 스위스의 기숙사 학교에 들어갔다. 열한 살 때였다. 스위스에서 집이 있던 베를린까지 가려면 11세 소년 케리는 혼자 먼 여행을 해야 했다. 취리히에서 기차로 프랑크푸르트까지 가서 동베를린을 통과하기 위해 다시 군용 열차로 갈아타야 했다.

    “열한 살짜리 아이가 혼자 그런 여행을 하다 보면 자신감과 자존심이 키워진다.” 케리의 말이다.

    열두 살 때는 혼자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를 거쳐 노르웨이까지 간 다음 배를 타고 영국으로 건너가 셔우드 숲 속에서 캠핑을 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학교를 다니다 미국 뉴햄프셔로 돌아와 세인트 폴 기숙학교 8학년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8년 사이에 초등학교를 일곱 번이나 옮겨다닌 후였다.

    그는 모험가다. ‘꿈을 쫓아다니는 사내’라는 소리도 듣는다. 쉬지 않고 움직이고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케리는 이런 평에 대해 “내가 하는 일은 내 능력 안에서 완벽하게 컨트롤된다”고 말한다.

    “자극만 쫓아다니지는 않는다. 명상 그 이상의 것이다.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곧 쉬는 것이고, 내가 내 자신에게 보상하는 것이다. 즐겁게, 즐겁게, 또 즐겁게.”

    억만장자 부인과 재혼

    그는 늘 도전한다. 자신에 대한 도전이다. 성취욕과 실현욕이 그만큼 강하다는 이야기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을 받기 위한 예비선거전을 준비하면서도 그는 스페인 고전 기타 음악을 배우기 위해 짬짬이, 그러나 집착하다시피 기타에 매달렸다.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케리의 부인 테레사(Teresa Heinz Kerry)는 그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1995년에 결혼했다. 둘 다 재혼이다. 두 사람의 결혼은 한동안 미 정가에 큰 화제였다. 재력 있는 여성 활동가와 상원의원의 만남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에너지가 넘치고 야망이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둘의 결혼은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케리는 스물일곱 살 때 줄리아 손과 첫 결혼을 했다. 12년 결혼 생활 끝에 둘은 헤어졌다. 케리가 39세 때였다. 첫 부인은 정치가 그를 집어삼켰다고 했다. 케리가 지금의 부인인 테레사를 만난 것은 1990년이다. 당시 테레사의 남편이던 존 하인즈 상원의원이 테레사를 케리에게 소개시켰다. 테레사와 케리 둘 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됐다.

    테레사는 미 정가에서 케리 못지않게 유명세를 타는 여걸이다.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명예 박사학위만 해도 10개나 된다. 일찌감치 억만장자 소리를 들어왔거니와 자선사업가이며 여성운동가이고 환경운동가다.

    그녀는 모잠비크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와 스위스에서 공부한 후 유엔에서 일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1966년 존 하인즈 상원의원과 결혼해 아들 셋을 두었다. 1991년 결혼 25주년 기념식을 치른 뒤 얼마 되지 않아 비행기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상원의원 남편과 사별한 2년 후 그녀는 케리와 데이트를 시작했고 2년 후인 1995년 5월 케리의 두 딸과 자신의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자기 도전과 성취욕이 넘치는 케리지만 정작 정치인으로서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마디로 복잡하다는 것이다. 명료한 맛이 없다고도 한다. 구시대 진보주의자 소리도 듣지만 신세대 민주당원 소리도 듣는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로 반전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사람이 부시의 이라크전에는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고는 부시 대통령이 외교에서 실패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민주당 대통령후보였다가 중도 하차한 조지프 리버만 상원의원은 케리에 대해 ‘애매모호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공화당의 전략가인 리처드 갈렌은 “앨 고어가 민주당 후보로 나왔을 때 실망한 사람들이 이제는 또 다른 앨 고어(케리)가 나타났다고 비웃는다. 왜? 케리도 분명한 메시지가 없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케리의 참모들도 그에게 연설할 때 이리저리 말을 돌리지 말라고 강권하다시피 이야기한다. 정책 현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케리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민주당원 모임에서도 케리는 종종 뒷말을 듣는다. 미국 안보에 대한 선거 공약을 주제로 꺼내놓고는 의료보험에서부터 에너지 독립, 진보적 국제주의, 일자리 창출, 환경 보호 등 그의 평소 주제를 모두 꺼내 주욱 늘어놓곤 하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연설은 지루하고 장황하다. 한 민주당 전략가는 참모들의 선거 전략 모임에서 참다못해 케리에게 쓴 소리를 했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부시를 꺾지 못한다. 부시는 한 가지 주제에만 매달리는 사람이다. 듣는 사람 귀를 망치로 내리치는 사람이다. 비록 그것이 틀렸다 해도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케리의 대답. “간단명료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똑똑한 민주당원들 앞에서 얘기를 하고 있다.”

    공화당도 이런 케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케리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번 붙어볼 만한 상대라고 말한다. 이길 확률이 절반일 때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선거의 확실한 승리 전략이다. 결국 ‘한번 붙어볼 만한 상대’라는 말은 이길 자신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공화당이 보기에 케리는 딱 떨어지는 맛이 없다. 민주당 내에서조차 그런 평이 나오는 판이다. 케리는 민주당 후보 토론에서도 시원시원한 구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정책 현안을 거론할 때도 그렇고, 말을 이끌어가는 방식도 그렇다. 오죽하면 대통령선거에 나온 사람이라기보다 상원의원에 한 번 더 당선되려는 사람이 하는 유세 같다는 말까지 나올까.

    상대방과 토론을 할 때도 적극 공세형이라기보다 소극 대처형이고, 상대방을 날카롭게 제압하기보다는 감싸 안으면서 넘어가려 들 때가 더 많다.

    물론 케리에게는 케리다운 카리스마가 있다. 누가 뭐래도 끝을 볼 사람은 바로 나라는 배짱이 있고,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무게가 느껴진다. 4선 상원의원의 정치 관록이기 이전에 도전과 성취의 삶에서 다져진 자신감이다.

    뜻 모를 선거구호 ‘리얼 딜’

    그에게는 늘 중복된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야심과 야망의 정치인으로 몽상가로도 불리지만 한편으로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불린다. 그를 오래 지켜본 정치 담당 기자들도 그에 대한 평에서는 상반된다.

    ‘매끄러운 정치인.’ 좋은 뜻으로만 하는 말은 아닌 듯 싶다. ‘너무 깔끔한 사람’. 점수는 주고 싶은데 너무 후했다가는 뒷소리 들을까 싶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놓은 평이다. ‘야심가’. 아니라면 대통령선거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기회주의자.’ 워싱턴 정치판 경력 20년이 넘는 사람인데 안 해도 될 소리다.

    하지만 기자들이 케리를 향해 정작 던지고 싶은 말은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냐?’라는 의문이다. 케리의 선거 구호 가운데 ‘리얼 딜(Real Deal)’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은데 사실 미국인들도 아직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 선거 분석가들은 “케리의 이 ‘리얼 딜’이 ‘정말(real)’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케리에게 직접 물어보았지만 아직까지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나에 대해 너무 빨리 알려고 하지 말라.” 케리는 이미 대답을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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