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리즘<br>강상중 지음/ 임성모 옮김<br>이산/ 224쪽/ 1만2000원
과거 역사를 둘러싸고 동아시아 삼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으로도 사용된 ‘내셔널리즘’의 작용과 반작용 때문이다. 재일교포 신분으로 일본 도쿄대학 정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내셔널리즘’ 일반이 아니라 메이지유신 이래 국민 동원 논리로 사용되고, 전후 미국과의 담합으로 재생산되어 냉전 해체 이후 새로운 논리로 재등장한 일본의 ‘국체(國體) 내셔널리즘’의 허구성과 기만성을 폭로 해체하려 한다.
이 책의 1부에서는 내셔널리즘이란 서구에서 국민국가가 등장한 근대 이후 나타난 특유의 현상으로서 국민/조국을 창출하는 ‘구원’의 논리이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는 ‘가짜 자국민’으로부터 강박관념적으로 ‘진짜 자국민’을 창조하는 ‘병리적’ 현상이라고 파악한다. 일본의 경우 내셔널리즘은 “근대로의 전환기에 한반도의 왕권보다 우월하고 그것을 종속시킨 왕권으로서 ‘천황’ 칭호를 붙인” 공동체인 ‘국체’를 중심으로 구성되면서 ‘국체 내셔널리즘’이 성립됐다.
만들어진 ‘국민’
2부에서는 ‘국체 내셔널리즘’의 흐름을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누고 있다. 제1계기는 18세기 후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에 의한 원형 창출기다. 그의 국학은 ‘타고난 진심’을 본성으로 하는 ‘감성적 낙관주의’를 취하고 있으며 고유 일본어로서 야마토말의 원형을 추출하여 일본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제2계기인 1880∼90년대의 ‘대일본제국헌법’ ‘교육칙어’ 등을 통해 천황을 창출하는 기초적 원리로 원용됐다.
제3계기인 1930∼40년대에는 국체가 광신적인 ‘비종교적 종교’로 등장하는데 이때의 국체 담론은 ‘서양의 개인본위사상’을 거부하고 국체의 순화를 통해 국가공동체의 결속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국체 명징’ 담론은 서구화=문명개화에 대한 맹종만 비판한 것이 아니라 완고한 ‘국수주의’도 비판하면서 구미문화의 섭취 순화에 힘쓰자고 해 오히려 ‘진보’ 또는 ‘진화’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제4계기는 패전 이후 1980년대까지다. 현인신(現人神)으로까지 받들어졌던 천황=국체는 패전과 항복으로 단절된 듯하지만, 미국과의 담합적 협조에 의해 ‘천황제 민주주의’라는 ‘상징적 군주제’ 형태로 ‘국체’ 전통을 존속시켜 국민의식 속에 제국의식의 잔존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국체’는 전후에 다양한 내셔널리즘 담론을 형성하게 만들었고, 저자는 이를 서너 명의 대표적 지식인의 담론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첫째, 일본 국민의 실체는 동일한 언어·습속·역사·신념 등을 가진 문화공동체로서 늘 천황의 형상으로 살아 있는 전체성을 표현해왔다는 문화공동체적 국체론. 둘째, 천황제는 일본 민족의 결합을 근원적으로 지탱해왔으며 군민(君民) 일체의 일본 민족공동체가 지닌 불변의 본질이라고 보는 공동체 민주주의적 국체론. 셋째, 점령국 미국에 의해 국체가 조직적으로 파괴되어 허위의 역사를 살게 되었다는 국체 파괴론. 넷째, ‘국체’의 생리와 병리를 철두철미 비판하면서도 ‘허구의 민족성’으로서의 일본인의 역사적 정체성을 견지하고 좀더 순화된 근대를 민주주의에 의탁하는 형태로 실현하려 한 영구혁명론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국체 파괴론은 제5계기인 1990년대 이후 냉전 해체와 세계화 담론이 지배하는 현재까지 살아남아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합리화하는 네오내셔널리즘을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1990년대 이후 공공의 기억으로서의 국사를 신사참배 등의 기념의식을 통해 재현하려는 내셔널리즘과 국민 통합을 내부에서 잠식할지도 모르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체계가 서로 모순되는 데도 일본 정부가 이를 동시에 외치는 현상을 타개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 같은 ‘국체’의 족쇄를 푸는 동시에 세계화의 폭력에 대항할 회로로서 저자는 동북아시아에 다극적이고 지역적이면서 개방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 지역이 중심이 되어 국경을 넘는 교류의 중층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 분권화를 국가가 뒷받침하는 동시에 국가주권을 상호 공유하는 시스템을 구축해나갈 것을 주장한다.
이 책은 일본의 근대와 내셔널리즘이 가진 허구성과 기만성을 해체하려는 결연한 대결의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주목을 요한다. 자민족 중심적인 국민국가와 그 ‘국사’의 족쇄로부터 해방되는 것만으로는 초국가적인 ‘제국’의 유력한 기둥으로 전환되고 있는 글로벌 파워로서 ‘일본’=‘국체’를 해체하지 못한다. 그래서 ‘국체’ 내셔널리즘 해체는 동시에 ‘제국’ 체제의 비판으로 이어지는 투쟁 거점을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도문제, 고구려사 문제,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문제 등을 둘러싸고 일어난 한국인의 격렬한 민족주의적 정서에 비추어, 저자의 문제의식 중 ‘제국’ 체제 해체의 필요성은커녕, 국민국가와 그 ‘국사’의 족쇄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그러기에 이 책이 한국민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어려우리라는 판단이 든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소개된 일본 내셔널리즘의 다양한 담론은 한국의 민족주의 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18세기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일본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점은 조선 후기 이래 개화기와 일제시기를 거쳐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또 ‘교육칙어’ ‘대일본제국헌법’ 등에서 드러나는 천황 중심의 국체 이데올로기 역시 1910년 전후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 논리나 박정희 정권기의 ‘국민교육헌장’과 다를 바 없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서양의 개인 본위주의를 비판하고 국가공동체를 강조하는 상황 역시 1970년대 유신체제의 ‘한국적 민주주의’ 담론을 연상하게 한다. 또 전후에 나타난 다양한 국체 담론들도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열린 민족주의’ ‘세계사에 기여하는 민족주의’ 등등의 담론과도 친연성(親緣性)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국체 내셔널리즘과 한국의 민족주의가 유사한 담론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면, 남북한의 정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민족주의, 그리고 그때의 ‘민족’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고구려 역사를 둘러싼 중국과 한국의 ‘역사 전쟁’, 친일파 청산을 둘러싼 논쟁과도 연관된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만주지역과 지금의 함경도 평안도 북부지역은 거란족, 여진족 등 조선왕조가 오랑캐라고 여겨온 종족집단이 거주해왔기에 한번도 조선의 역사 지도 안에 편입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말의 역사가 신채호가 조선 민족을 창출하고 그 발상지로 고구려 강역을 논한 때부터 고구려사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과거를 상징하는 기억으로 재창조될 수 있었다.
친일파 청산의 당위성을 말할 때 ‘민족정기의 수립’을 명분으로 든다. 그러나 ‘민족정기’란 단어는 이 책에서 말하는 ‘국체’와 마찬가지로 그 실체가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의 비판대상인 ‘국체’ 또는 ‘국체 명징’ 등의 담론과도 유사하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 책은 이처럼 현재의 남북한 민족주의 담론 비판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지만, 내셔널리즘 파악 방식에 의문스러운 점도 지니고 있다. 저자는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근대국민국가 일반의 내셔널리즘과는 조금 다른, 허구와 기만으로 가득찬 악의 화신인 양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1930년대 일본 강좌파 학자들이 일본 자본주의를 ‘군사적 봉건적 절대주의적’ 성격으로 파악하고 그 상부구조로 천황제가 존재하며 종국적으로는 파시즘으로 귀결됐다고 주장했던 논리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 제기된 국민국가론이나 동아시아론에서는 천황제를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상징적 요소로 파악하거나 혹은 국민국가를 만들 때 나타나는 각 지역의 고유화 작용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저자와 같은 내셔널리즘 파악 방식은 일본의 특수성을 지나치게 절대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