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전태일 정신 언제나 나에게 채찍”

전태일, 그 후 40년

  • 김지은| 신동아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s.com |송홍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

    입력2010-11-18 13: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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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순간의 나’를 기억해달라면서 전태일이 불타 죽은 지 40년.
    • 그의 바람대로 사람들은 ‘그 순간의 그’를 기억하고 있다.
    • 그를 항로표지(航路標識) 삼아 40년을 살아온 ‘그때 그 사람’들이 말하는 전태일 정신.
    “전태일 정신 언제나 나에게 채찍”

    전태일 수기(왼쪽)와 평화시장 르포를 실은 ‘신동아’ 1971년 1월호, ‘그 후의 평화시장’ 르포가 실린 1971년 3월호.

    “옅은 잿빛구름이 하늘을 우중충하게 뒤덮은 七○년 十一월十三일 오후 一시二十五분경 서울 音大로 들어가는 골목 平和市場 입구의 사람들 틈에 서 있던 한 靑年의 옷깃에서 검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강성재 기자(1939~2002)는 ‘신동아’ 1971년 3월호에 실린 르포 ‘그 후의 평화시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스물세 살 청년 전태일은 그을음과 불길로 얼굴은 새까맣게 뒤범벅이었으나 눈동자만은 쏘는 듯한 빛을 내면서 헐떡거리던 숨을 잡고 비틀거리는 상체를 가누면서 울음 같은 것이 섞인 목소리로 외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결코 기계가 아니다.”

    ‘신동아’ 1971년 1월호는 전태일 수기(手記)를 실었다. 수기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이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기억해주기 바라네.”

    ‘이 순간의 나’를 기억해달라면서 전태일이 불타 죽은 지 40년. 11월13일 마석모란공원(경기 남양주시)에서 열린 40주기 추도식은 경건했다. 지금껏 사람들은 ‘그 순간의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 사람들

    혜화동(서울 종로구) 옛 서울대 교정에서 남쪽으로 10분 남짓 걸으면 청계천이다. 학생들에게 전태일 분신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장기표(65), 조영래(1947~1990·변호사)가 몸담은 ‘사회법학회’, 김근태(63·민주당 상임고문)가 주축이던 ‘경제복지’ 회원들은 앞 다퉈 전태일을 추모하는 집회를 열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김문수(59·경기지사)는 수기를 읽고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1985년)으로도 일했다. 전태일 분신 40주년 소감을 묻는 ‘신동아’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사건이 일어났어요. 대단한 충격이었죠. 처음엔 청계노조 간부들에게 한자와 상식을 가르쳐주기로 했으나, 막상 노동자들을 만난 뒤부터는 오히려 내가 현장을 배워야 했어요. 그가 분신한 지 40년, 그동안 어려운 이들을 위해 정치를 해왔지만 치열함과 자기 헌신 부분에서는 항상 그에게 부끄러웠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전태일은 나에게 채찍 같은 존재였어요. 배우지 못해, 한자로만 쓰인 근로기준법을 읽지 못해,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하던 전태일의 아쉬움을 생각하며 어려운 노동형제들의 곁을 떠날 수 없었어요. 가난하면서도 더 가난한 미싱사, 시다를 돌보는 그의 사랑 실천은 언제나 나에게 채찍입니다. 그는 늘 일기를 적었습니다. 일기는 이웃 사랑 정신, 어려운 이를 돌보는 정신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그가 덧붙여 말했다.

    “더 이상 전태일을 1970년대 시각에서 바라보면 안 됩니다. 시대가 달라진 만큼 한국적 상황과 전태일의 시대정신이 결합돼야 해요.”

    김문수와 같은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도 전태일 정신을 품에 안고 있다.

    손학규(63·민주당 대표)는 11월13일 마석모란공원(경기 남양주시)에서 엄수(嚴修)한 40주기 추모 행사에 참석했다. 정치학도이던 손학규도 전태일 분신에 자극받아 노동현장에 몸을 던졌다. 탄광·공장 노동자를 거쳐 청계천에서 빈민운동을 했다.

    손학규는 10년 전 전태일 30주기 때 ‘신동아’ 인터뷰에서 지금의 정치 지향과는 다르게 말했다.

    “1970년대는 노동문제가 가장 뜨거운 화두였지만 지금은 국가경쟁력의 시대입니다. 노동의 내용과 질이 달라졌기 때문에 양극화된 투쟁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이 필요해요.”

    “전태일 정신 언제나 나에게 채찍”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 세워진 전태일 동상.

    김문수는 전태일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갔다면 손학규는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이다.

    손학규는 40주기 추도사에서 “40년간 노동자 권리를 위해 싸웠지만, 이뤄진 게 무엇인지 자괴감이 든다. 지금까지도 노조를 무력화하고 탄압하는 일이 자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참여당 김영대 최고위원은 10월 청계광장의 버들다리 위에서 유시민 의원과 나란히 서서 버들다리의 이름을 ‘전태일다리’로 바꾸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청계피복공장의 평범한 노동자였던 그를 노동운동가로, 민주노총의 부위원장과 민주노동당 창립멤버를 거쳐 현재의 국민참여당 최고위원로 이끈 정신적 지표가 된 인물이 바로 전태일이다.

    “전태일의 희생정신은 노무현의 그것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기본을 지키기 위해, 희망을 알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 바로 전태일과 노무현입니다.”

    “대통령, 국회의원이 성공한 겁니까?”

    민주노총을 조직하고 스스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그가 최근 가장 고민하는 것은 범야권의 통합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통분모를 찾아 힘을 합하는 것, 그것은 비단 범야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사관계에서도 정치권에서도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전태일 정신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청계피복노조위원장을 지낸 민종덕(58)은 1974년 청계천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든 3년 묵은 ‘신동아’(1971년 1월·3월호)를 읽고 삶의 행로가 바뀌었다.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었어요. 노조가 뭔지 잘 몰랐지만 뭐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이소선 어머니를 찾아가 전태일 뒤를 따르겠다고 말했어요.”

    장기표의 삶도 민종덕처럼 전태일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전태일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는 전태일의 친구로 기억된다. 얼마 전까지 그는 전태일재단 이사장으로 일했다. 그 자리가 못내 불편했다고 한다. “왜?”냐고 물었다.

    “나는 정치를 해야 할 사람이에요.”

    그는 1989년 이재오(65·특임장관), 김문수와 함께 민중당을 창당하면서 재야인사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그는 내년쯤 신당을 창당한다고 했다.

    “정치적 열망과 소신이 또렷해요. 사람들은 내가 인간해방을 말하니 사회주의자인가보다 하지만 나는 사회주의에 반대합니다. 시회주의로는 이 시대에 걸맞은 인간해방을 실현하지 못해요.”

    정치권에서 연거푸 실패한 그가 또 창당을 하겠단다.

    “누가 성공했습니까? 대통령 되고, 국회의원 되면 성공한 겁니까? 아닙니다. 그게 성공이라면 그들이 주장하는 살기 좋은 세상이 왔어야죠. 그들이나 나나 아직 실패를 거듭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여의도의 낡은 빌딩에 터 잡은 신문명정책연구소에서 일한다. 장기표도 비정규직·실업을 한국이 풀어야 할 난제로 꼽았으나 노동계, 진보 진영의 주장과는 결이 달랐다.

    “전태일 정신 언제나 나에게 채찍”


    “노동자 100명이 하던 일을 컴퓨터 한 대가 해치웁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자동화시스템은 늘어나죠. 사라지는 일자리가 더 많은 데 고용 창출을 조금 한다고 전체 일자리가 늘어날 리 만무해요. 비정규직 문제도 회사가 무조건적으로 폭리를 취하려고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고용하지 않으면 회사를 유지해나가기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요. 전태일이 외친 것은 내 임금을 올려 달라거나 내 노동조건을 개선해달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버리면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즐겁게 일하게끔 해달라는 게 그의 외침이었습니다. 정부·기업을 향한 발언이지만 노동자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건 인간에 대한 사랑, 즉 휴머니티예요. 전태일은 순수한 인간성의 원형입니다.”

    장기표가 전태일과 마주한 때는 전태일이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 있을 때다. 재단사가 몸에 불을 질렀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그를 맞은 이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다시 살아온 듯 장기표의 손을 꼭 잡았다. 장기표는 청계천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참담한 현실을 목도한다. 조영래가 ‘전태일 평전’을 쓰게끔 독려하고 자료를 제공한 것도 그다.

    장기표를 언급하면서 이광택(63·국민대 교수·법학)을 빼놓을 수 없다. 전태일과 동갑인 그는 장기표와 함께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로서 노동운동에 투신, 노조 교육에 앞장선 인물이다. 이광택도 전태일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그는 전태일 40주기를 앞두고 수업시간에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이 영화의 메이킹 필름 격인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상영했다. 학생들에게 11월13일에 있을 ‘전태일 다리’현판식과 추도식에 대해 소개하면서 뜻있는 자리이니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뜻도 전했다. 1970년대 아니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이런 말을 하기 어려웠다. 1970년대에는 ‘노동자’라는 단어조차 사용하기가 께름칙했다. 학생신분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내란음모죄로 조영래와 함께 강제 입영당했고 복학조차 되지 않아 제대 후 재입학해 학기를 남보다 더 이수하고서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강의를 듣다가 강사로 발탁됐다. 당시 그의 사수가 신영일 선생이고 그때 함께 아카데미를 거친 사람들이 최순영, 박순희 등 노동운동계를 주름잡던 걸출한 인물들이다. 독일 유학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떠났다. 그때 일을 두고 이광택은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고 회고한다. 이마에 ‘빨간 딱지’가 붙은 그에게는 취업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모교인 서울대 조교(당시 국립대 조교는 교육 공무원이었다고 한다)에 지원해 합격했지만 발령이 나지 않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몇년 몇월 며칠 어느 강의실에 뛰어들어와 학생들을 선동하는 유인물을 낭독하고 담을 넘어 도주 어쩌고’ 하는 식의 내역이 깨알같이 적힌 문건을 내밀더란다.

    “당시만 해도 조국을 떠나면 반역자라는 인식이 팽배했지요. 시국이 하도 어수선하다보니 어리석은 생각도 많았습니다.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한데 장학금에 가족의 생활비까지 준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내 조국은 나에게 직장조차 못 가지게 하는데 타국이 저에게 손을 내민 셈이죠.”

    그는 독일 유학시절 처음으로 ‘사람 사는 게 이런 거구나’ 느꼈다고 한다. 70여 평의 집에서 가족들과 지내기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생활비까지 꼬박꼬박 통장으로 입금받으며 하고픈 공부를 마음껏 했다. 그리고 10년 후, 돌아온 조국은 변해 있었다. 10년 전 그를 빨갱이라고 욕하고 잡아다 고문하던 이들이 그에게 강연을 요청해왔다. 한 집 건너 한 집 몽둥이를 들고 서 있던 첨예한 노동현장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적어도 10년 후에는 한국이 변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고 한다.

    “시대에 따라 노동법의 쟁점도 변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전태일이 호소했던 것은 있는 법만이라도 제발 지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1990년대는 산업재해와 산업안전이 가장 큰 이슈였습니다. 2000년대는 고용문제로 핵심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는 같은 생산라인에 서서 같은 노동 강도로, 똑같은 일을 해내면서도 한쪽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정규직의 절반도 되지 않은 임금을 받으며 일해야 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21세기 노동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노동조합운동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사회 개혁운동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이광택의 생각이다.

    “전태일 정신 언제나 나에게 채찍”


    참 신나는 옷

    “전태일 정신 언제나 나에게 채찍”

    11월 13일 열린 ‘전태일 다리’ 연판식.

    그렇다면 지금, 노동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공동체 의식을 꼽았다. 개별 노동자 역시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장, 이웃, 그리고 세계인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전태일 역시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공들을 걱정하고 그들의 노동환경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을 많이, 오래하는 것이 미덕이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잡 셰어링, 즉 내 일감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부터가 전태일 정신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61)은 40주기 추도식이 열리기 전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묵묵히 술잔을 따르고 봉운의 마른 잔디를 쓰다듬고 있었다. 건강이 부쩍 나빠진 어머니를 모시고 형 앞에 서는 게 죄스럽다. 부인이 운영하는 이주노동자 쉼터 일을 도울 때 외엔 항상 어머니 곁을 지킨다.

    전태일이 죽은 후 그의 삶은 형이 못다한 일을 하는 데 바쳐졌다. 그는 피복공장에 재단 보조사로 취직해 노동운동에 나섰다. 1981년 청계피복노조가 강제 해산될 때 구속돼 징역도 살았다. 지금은 동생 전순옥(57·노동사회학 박사)이 운영하는 ‘참 신나는 옷’ 공장(종로구 창신동) 근처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어머니를 보면서 못내 가슴 아픈 일은, 고생을 덜어드리지 못한 것이다. ‘태일이 곁에 갈 날’에 대한 말씀이 부쩍 잦아진 어머니의 곁에서 전태삼은 감정이 자꾸만 사무친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82). 그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다. 장기표는 이소선 여사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한다.

    “내 손을 덥석 잡으시곤, 아들이 생전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제야 친구를 만났구나 하시더군요.”

    아들이 죽음으로 대신한 일을 남은 사람들이 살아서 계속해야 한다는 신념이 그를 살게 했다.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살아 있는 동안 소임을 다해야 할 텐데 누군가 또 분신했다거나 좋지 못한 일로 싸움이 났다 하면 내 책임인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저세상 가면 아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할 것인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태일이가 원하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할 일은 아직도 너무 많은데, 지금에야 젊은 시절 육신을 함부로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문당하고, 투쟁 현장에서 숱하게 맞으며, 한데서 생활한 후유증이 오는군요. 인권이라는 것은 필시 모두가 똑같이 타고난 것인데 어째서 어떤 사람은 물건 취급받고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목숨을 버려야 합니까. 고도성장이다, 세상 살기 참 좋아졌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전태일 여동생 전순옥이 밑그림을 그린 옷 회사는 ‘적게 만들고 적게 소비하기, 일하는 사람은 즐겁게 일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옷을 입는 사람 역시 좋은 기운을 전달받아 옷을 입을 때마다 행복해지기’가 모토다. 사회적 기업을 지향한다. ‘참 신나는 옷’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창업 때 진 빚도 안고 있고, 사회적 기업도 ‘회사’이기에 크고 작은 문제가 불거져 나온다.

    ‘참 신나는 옷’을 꾸리기 전까지 전순옥에게 ‘전태일의 동생’이라는 꼬리표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오빠가 바라던 모범 기업, 모범 공장을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전태일이 오롯이 노동자의 삶만 살았던 것과 달리 그는 ‘사용자’로서 회사를 운영한다. 잘못하면 오빠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고민에 빠지거나 밤잠을 설치곤 했다. 그는 조금씩, 아주 천천히 오빠의 꿈을 이뤄나가고 있다.

    “지금도 청계천 일대에는 수많은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대부분이 중년을 넘긴 베테랑이지만 전문가, 기술자라는 자긍심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저 이른 아침부터 자정이 넘도록, 하루 16시간 넘게 재봉틀 앞에서 코를 박고 일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죠. 그러면서도 그렇게 일해서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켰다며 자신의 일에 감사하는 아이러니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전태일 정신 언제나 나에게 채찍”

    이소선 여사와 전순옥, 전태삼씨(왼쪽부터)

    전순옥은 노동시장·노동운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87년 유학길에 올랐다. 영국 유학을 끝낸 후 일본에서 한 달, 독일에서 두 달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독일 체류 경험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1960년대에 활발하게 일하던 사람들에게 한국은 자신들이 일하던 회사가 싼 노동력을 찾아 공장을 옮겨간 땅이었다. 한국의 싼 노동력이 독일 노동자 일자리를 빼앗아갔다는 것이다. 지금은 한국 노동자들이 제3세계 국가의 싼 노동력에 밀려 일자리를 잃고 있는데도 젊은 사람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일자리가 있어도 선뜻 취업하려고 나서지 않는다. 힘들고 고달프고 임금은 적은 일자리가 반가울 리 없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적 기업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근로기준법에 준하는 하루 8시간, 주 5일의 근무조건을 지키는 것, 4대보험과 퇴직금을 보장하는 것, 정규직으로서의 권리를 지키는 것 등 법으로 보장한 것들을 철저하게 지키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1차적 목표다. 직원들이 스스로를 ‘공돌이’‘공순이’라고 생각하며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직업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꾸준히 교육하고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는 것, 주어진 일만 하는 미싱공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전문가로 스스로 발전해나가는 것, 직원들이 노동자면서, 주인이 되어 자발적으로 회사 운영에 참여하는 것 등 지금까지 기계처럼 일만 하던 미싱공들에게 일하는 즐거움과 권리를 찾아주려고 한다. 사회적 기업으로 인정받긴 했지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회사가 주문제작방식만으로 대량생산이 일반화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옷을 만드는 데도 숱한 자원과 에너지, 인적 자원이 투입되지만 만든 옷이 소비되지 않았을 때 그것을 처리하느라 낭비되는 자원과 에너지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1970~80년대까지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던 수많은 피복노동자가 지금은 그들보다 더 적은 임금으로 착취당하는 제3세계 국가들의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싼 노동력으로 차고 넘칠 만큼 많이 만들어 결국에는 소비되지도 못하고 버려지는 옷에 대해 소비자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만든 사람들이 어떤 환경, 어떤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지 더듬어보는 것은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예의 아닐까요.”

    예수, 전태일

    “전태일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은 미국에서였습니다.”

    향림교회 목사이자 현 전태일재단 이사장인 조헌정(57)은 민주화운동이 거세던 1970~80년대를 해외에서 보내며 신앙생활을 했다. 막연히 하나님의 뜻을 쫓아가던 그의 신앙관을 바꾼 것 역시 전태일이었다. 그는 전태일의 이야기를 접한 후 민중신학에 심취했다.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태일은 신실한 기독교인이다. 그가 실천하려 했던 것 역시 하나님의 인간사랑이었다는 것이 조헌정의 생각이다.

    “예수는 언제나 가난하고 헐벗은 자의 곁에 있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그의 행보는 많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고 그 때문에 결국 정치적 모략에 휩싸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요. 당시 로마의 십자가는 정치범에게만 행해지던 극형의 방식이었습니다. 권력자들, 부자들, 강한 자들을 향한 예수의 비판과 호소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겁니다. 전태일 열사의 뜻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세의 사람들이 종교를 왜곡하면서 오히려 종교를 사이에 두고 벽을 쌓고 분열하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당신의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리라 했던 예수의 뜻은 간 곳없고,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세상으로 나아가 약자를 보호하고 평등을 이루라는 가르침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종교는 세상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하고자 존재하는 것인데 자꾸만 세상과 분리된다면 종교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에 있었던 전태일문화제 작품 철거 사건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전태일 정신 언제나 나에게 채찍”

    11월13일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린 40주기 추도식.

    “국가를 찬양하는 예술만 해야 합니까. 이곳은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입니다. 민주주의는 찬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도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정부가 아쉽습니다.”

    전태일 40주기 기념주간이 정해지면서 다양한 문화행사가 기획·진행된 것에 대해 그는 젊은이들의 특권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정의롭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은 젊은이들만의 특권이며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나가는 것 또한 젊은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 시대 젊은이들에게 맞는 형식으로 그들의 재능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전태일 정신의 또 다른 실천이다. 그는 비록 죽음으로 엄숙하게 자신의 뜻을 펼쳤지만 전태일이 바란 세상은 즐겁고 행복한 것이었다는 것을 젊은이들이 다시금 되새겼으면 한다는 말을 그는 덧붙였다.

    전태일 40주기 기념행사는 문화제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40년 전의 전태일은 지금의 스물세 살 청년들의 모습으로 밝고 친근하게, 다시 태어났다. 만화가이자 교수인 최호철(45)의 작품인데, 그와 함께 만화가 이동수(51)의 활약도 컸다. 시사 만화가이자 라이브 캐리커처를 그리는 이동수가 전태일을 알게 된 것은 인하대 학보사 시절 선배들을 통해서였다. 그 전까지 그는 사회문제에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며 구로공단 여공을 특집기사로 취재했다. 모두 자기 또래의, 혹은 자기보다 어린 여자들이었다. 그 여공들의 실상은 그에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취재 기사는 검열에 걸려 신문에 게재되지 못했다고 한다. 학보사 기자들이 모두 사퇴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그 일을 겪은 후 사회문제를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한겨레’에 만화를 연재한 적도 있다. ‘한겨레’는 그나마 박재동 화백이 시스템을 잘 다듬어놓아 일하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실은 다른 신문사들은 광고주의 눈치를 보고, 정치인들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자체 검열에 걸려 할 말을 제대로 못하기 일쑤였다. 만화를 통해 할 수 있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궁무진했지만 그걸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 단병호 선생을 그리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군요. 역대 대통령의 얼굴은 눈 감고도 그리는데, 단병호 선생처럼 그리기 쉬운 얼굴을 그려볼 기회가 없었다는 걸 깨달으면서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노동 현장, 투쟁 현장을 찾아다니며 현장 캐리커처 작업을 통해 희망을 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만화는 글과 그림의 결합입니다. 그림보다 쉽고, 글보다 편하게 자기 생각을 전달할 수 있지요. 기륭전자에서도 그림을 그렸는데 그때는 정말 이런 분들이 행복하게 살게 되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작업했습니다. 거친 현장에 있는 모습이 아니라 그분들이 순박하고 우직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전태일문화제 일환으로 청계천에서 열린 작품 전시가 하루 만에 철거되는 소동을 겪으면서 그는 말할 수 없는 설움과 울분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작품 주제는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청년 노동 문제와 같은 요즘 핫이슈가 되는 것들이었다. 이미 언론 등의 매체를 통해 발표했던 작품이고 전시에 대한 사전 합의도 마친 상태였기에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처박힌 작품을 마주한 그의 분노는 더욱 컸다.

    “처음에는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라 안 된다 하더니 그 뒤에는 설치 허가 지역이 아니다, 서류를 다시 갖춰라, 공문을 다시 보내라 하며 이런저런 핑계를 대더군요. 담당자 분이 예전에 안면이 있던 분이라 13일까지만 걸어놓아달라, 제발 부탁한다고 사정하기도 했죠.”

    그는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보이지 않는 압박 탓에 사람들이 스스로 지레 겁먹고 움츠러드는 예가 있음을 아쉬워했다. 작품 철거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이 땅에 노동하지 않는 사람 있나?”

    “전태일 정신 언제나 나에게 채찍”

    박철민

    영화배우 박철민(44)에게 추모행사 홍보대사 자리를 수락할 때 고민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손사래를 친다. 홍보대사 자리가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정치와는 무관한 사람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처지에서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다양한 의견을 포용할 줄 아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냐고 반문하는 그에게 그가 생각하는 전태일을 물었다.

    “제가 아는 바는 많지 않지만 이 땅에 노동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이 건방지다, 너무 세상을 쉽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 얘기는 삼국시대 때도 있었던 거 아닙니까. 저는 젊은이들이 가진 밝고 희망찬 에너지를 믿습니다. 전태일과 비슷한 또래인 젊은이들이 쉽고 친근하게 전태일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되새겨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못 배우고 가난한 노동자가 지식인조차 머리로만 알고 있던 근로기준법을 온몸으로 시민에게 호소했다는 점은 대학 시절의 그에게 큰 감명과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사회운동을 한 사람도 아니고 노동운동과는 더더욱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지만 그는 자신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전태일의 용기만큼은 늘 본받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 청소년이 그의 용기와 당당함을 가슴에 새기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어둡고 암울한 이미지의 전태일이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젊은이가 바로 전태일이니까요. 즐겁고 재미있게 일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희생정신을 통해 세상을 조금씩 아름답게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전태일 정신은 모두의 가슴속에 이어져나갈 것입니다.”

    최광리(49)는 우연한 기회에 전태일과 인연을 맺은 노숙인이다. 한때 잡지 편집장으로, 시인으로 활동하던 그가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건강 악화와 갑작스러운 사고, 이혼…. 악재가 겹치면서 사회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요양 생활 끝에 몇 푼 안 되는 재산을 탕진하면서 거리에 나앉았다고 한다. 사고로 머리를 다쳐 기억력마저 가물가물해진 그는 오랜 요양 생활로 지인들과의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던 터에 노트북과 마지막 몇 푼의 돈마저 도난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거지가 됐다. 그의 일과는 남산도서관에 드나들며 책을 읽고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것이 거의 전부다. 가끔 그에게 들어오는 원고청탁이나 그의 경력을 기억한 이들이 의뢰하는 잡지 창간 컨설팅 작업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건강이 좋지 않아 그마저 쉽지 않다.

    그가 전태일문학상에 지금까지의 노숙생활을 기록한 글을 보낸 것은 우연이었다. 도서관에서 웹서핑을 하다 공모 마감을 코앞에 두고 공모 관련 글을 발견한 그는 그간 머릿속으로 정리해두었던 생각을 부랴부랴 글로 옮겨 마감 직전 원고를 보냈다. 당선은 됐지만 가난한 재단에서 주는 상금은 많지 않았다.

    “재기를 꿈꾸지 않는 노숙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죠. 쪽방촌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포기하거나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는 사는 데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아픈 몸을 치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약값, 삼시 세끼 굶지 않을 정도의 돈, 추위를 날 수 있는 방 한 칸이면 족하다. ‘욕심’이라는 단어는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려는 도둑놈 심보처럼 보여 싫고 ‘밥’이라는 말은 숭고해서 좋다고 했다. 칼바람 몰아치는 길거리에 서서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하루 한 끼 제공되는 밥을 먹으며 느끼는 한기를 아는 사람에게 ‘식도락’ 따위의 단어는 사치다.

    “자활근로라는 게 있습니다. 한 달에 30여만원을 받고 일하는 건데 아는 노숙자 하나가 그걸 했다가 통장에 입금된 돈을 땡전 한 푼 못 만져보고 밀린 의료보험료로 차압당했어요. 일을 조금이라도 하면 기초 수급이 끊기고, 생계를 이어나갈 수가 없는 게 현실입니다. 노숙 생활은 단순한 글감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 순간의 그

    ‘그때 그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삶의 행로를 바꿔놓은 전태일 정신을 잊지 않고 있다. 누군가에겐 채찍이고, 누군가에겐 지표(指標)다. 전태일을 항로표지(航路標識) 삼아 40년을 살아온 이들은 ‘그 순간의 그’를 앞으로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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