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차세대 항암치료제‘쎄라젠’ 개발한 재미의학자 김재호

“췌장암 이긴 힘은 ‘99% 실패보다 1% 성공 가능성’ 믿은 것”

  • 이남희│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입력2010-12-03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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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수재’로 통하던 스물네 살 청년은 ‘국비 유학생 1호’로 미국에 갔다.
    • 저명한 암 전문의로 성장한 그에게 청천벽력같이 내려진 암 선고.
    • 췌장, 위, 소장, 담낭 조직을 떼어내는 대수술을 받으며, 그는 2년만 더 살 수 있기를 기도했다. 수술 후 17년. 기적처럼 살아남은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저 작은 희망을 보며 달려왔다”고.
    차세대 항암치료제‘쎄라젠’ 개발한 재미의학자 김재호
    성성한 백발과 꼿꼿한 품새는 좀처럼 흐트러짐이 없다. 도전과 고난, 성취로 이어진 지난 인생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도 않는다. “보너스 인생을 살고 있다”는 이 70대 재미(在美)의학자는 은퇴를 모른 채 오직 항암치료제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미국 디트로이트 헨리포드병원 방사선종양학과 책임자인 김재호(75) 박사의 얘기다.

    51년째 미국에 머물고 있는 김재호 박사가 10월 한국을 찾았다.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 진행 중인 차세대 유전자 항암 치료제 ‘쎄라젠’의 임상 실험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쎄라젠은 복제 가능한 아데노바이러스를 운반체로 이용해 CD와 TK 등 2개의 유전자를 암세포에 주입하면 두 유전자가 암세포와 ‘동반 자살’ 해 암세포를 죽이는 ‘이중자살 유전자’ 원리를 이용한 치료제다. 국내 바이오 벤처기업 뉴젠팜과 헨리포드병원은 1999년부터 쎄라젠을 공동 연구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헨리포드병원과 존스홉킨스 암센터 등 전립선 환자들을 대상으로 쎄라젠 2/3상 임상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900만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할 만큼 기대가 높은 임상실험 프로젝트다. 한국의 이대목동병원(담당 서현숙 교수·현 병원장)과 중앙대병원(담당 김세철 교수·전 병원장)에서는 전립선암 환자 86명을 대상으로 쎄라젠 2상 임상이 진행 중이다. 이 임상이 성공한다면, 수술하지 않고 전립선암을 치료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기자가 김 박사의 삶에 주목한 것은 이 연구 성과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비 유학생 1호’인 그가 학자로서 걸어온 길은 후학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3기 췌장암을 극복한 그의 기적 같은 사연은 귀가 번쩍 뜨이게 했다. 김 박사를 기자에게 처음 소개한 지인도 그의 투병 사실을 몰랐다.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조용한 성품 탓이다.



    “여생을 암환자를 위해 공헌하고 싶다”는 김 박사를 이틀에 걸쳐 만났다. 개인사를 털어놓기 주저하던 그에게 ‘암 극복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듣기 위해서였다. “암을 이겨낸 경험이 많은 난치병 환자에게 희망이 될 것”이라는 기자의 설득에 그는 공감했다.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 김 박사의 인생 여정은 커다란 울림을 남겼다.

    우리나라 국비 유학생 1호

    김재호 박사는 1935년생이다. 국문학자인 고(故) 김사엽 경북대 대학원장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사엽 선생은 한국 고전문학에 정통한 ‘국문학의 선구자’로 통한다. 한일문화교류에 앞장서며, 일본문화와 세시풍속의 원류가 한국에서 유래했음을 밝힌 업적으로도 유명하다.

    ▼ 부친께 영향을 많이 받으셨지요?

    “부친께서 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제일 좋다’고 강조하셨어요. 그 모토는 제가 우리 집 애들에게도 강조하는 것이지요.”

    ▼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일제강점기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일본말로 하면 ‘마지메(眞面目)’였어요. 말썽 안 부리고 착실한 학생이었죠. 초등학교에서 월반을 하고 자격시험을 봐서 경북중에 들어갔어요. 경북고에 입학하던 해 6·25전쟁이 터졌죠. 경주 쪽으로 피난 가 인민군 밑에서 4개월을 살았어요.”

    ▼ 전쟁 기억이 생생하시겠어요.

    “인민군과 미군의 총격 와중에 포탄을 맞아서 구사일생으로 살았죠. 다리 한쪽에 포의 파편을 맞았어요. ‘쉬익~’ 하고 포탄 날아오는 소리가 지금도 잊히질 않아요. 지금도 겨울에 바람 부는 소리만 들려도 겁이 나더라고요.”

    전시통에 그는 경북대 의대에 들어갔다. “전시 시국에 문학을 해서는 굶어 죽는다. 의대나 공대를 가라”는 부모님의 의견을 따랐다. 피난 중 공부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한 시절이었다. 새로운 기회는 1959년 찾아왔다. 이승만 정부가 최초로 국비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공고가 신문에 실렸다. 원자력 산업 전문가를 키워 과학을 진흥시키는 것이 유학생 선발의 목적이었다.

    “국비 유학생에 도전한 건 부친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앞으로 크게 되려면 외국에서 공부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죠. 1956년 하버드대 초빙교수를 지낸 부친은 넓은 시야를 갖고 계셨어요.”

    수많은 지원자가 몰린 가운데 그는 ‘대한민국 국비 유학생 1호’로 뽑혔다.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방사선생물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헤밍웨이나 토머스 하디의 소설을 즐겨 읽을 만큼 그는 영어 리딩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미국행은 ‘상상을 초월한 모험’이었다.

    “서울 여의도에서 프로펠러기를 타고 도쿄로 갔어요.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에서 내렸죠. 하와이 식당에 갔는데 아는 음식이 없는 거예요. 샌드위치, 햄버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유일하게 아는 음식인 아이스크림만 하루에 6번 시켜 먹었죠. 미국에만 오면 아이오와대에 자동적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하와이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 솔트레이크시티, 오마하, 디모인을 거쳐 버스를 타고 캠퍼스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5일이 걸렸어요.”

    ‘스트레이트 A 스튜던트’의 신화

    미국 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는 듣고 말하기였다. 친구들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 동양인을 마치 동물원 원숭이처럼 쳐다보는 시선은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했다. 많은 것이 어려웠지만, 그는 무엇보다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경북대를 1등으로 졸업하고, 한국에서 뽑혀왔지만 처음엔 저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죠. 같이 유학 온 송창원 미네소타대 의대 교수와 함께 매일 밤샘을 했어요. 기숙사에서 새벽 4시 이전에 잠든 적이 없어요. 카페테리아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 오전 6~8시 사이에 일어났고요. 그 덕분에 전례 없는 ‘스트레이트 A 스튜던트’가 됐죠.”

    그가 치열하게 공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1960년 4·19 혁명 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국비 유학생에 대한 지원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그가 ‘학비 보조’에 관해 영사관에 문의할 때마다,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무신경한 반응이 돌아왔다.

    “새로 들어선 정권이 이전 정부가 보낸 외국 유학생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거죠. 당장 학비와 체류비를 마련해야 했어요. 다행히 성적이 좋아서 장학금을 받았고, 연구실 조교로 들어가 리서치 펠로십(연구지원금)도 받았죠.”

    김 박사는 1963년 미국 코네티컷의 한 작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이오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던 해였다. 대구 고향집 뒷집에 살던 아가씨가 그와 결혼하기 위해 단신으로 미국에 왔다. 집안 어른들끼리 결정한 혼사였다. 남편 될 사람의 사진만 보고 이역만리(異域萬里)에 온 부인 신조희(69) 여사는 47년간 그림자처럼 김 박사의 곁을 지켰다.

    차세대 항암치료제‘쎄라젠’ 개발한 재미의학자 김재호

    건강한 모습의 김재호 박사는 “암 진행 상태보다 환자의 마음가짐과 퍼포먼스가 회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처남인 신일희 계명대 총장 부부와 합동으로 결혼식을 올렸어요. 당시 편도 비행기표 값이 800달러나 돼서 부모님도 미국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죠. 아내는 내 인생의 ‘크리티컬 모먼트’마다 용기를 북돋워줬어요. ‘당신이 원하면 가장 좋다’고 말해주면서.”

    김 박사는 신 여사와의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우건(미국 이름 앨버트 김)씨는 미국 지상파TV CW의 PD로 최근 드라마 ‘니키타’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차녀 우정씨는 결혼해 스위스 바젤에 살고 있다. 그는 “옛날에는 ‘김사엽 선생의 아들’로 불렸는데, 이제는 ‘앨버트 김의 아버지’로 불린다”며 웃었다.

    사실 김 박사의 연구 성과는 선친이나 아들의 명성 못지않다. 그는 1963년 뉴욕 슬론 케터링 암센터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았다. 미국 최초의 암병원인 이곳은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가 연구자에서 전문의의 길로 진로를 선회한 것은 1968년. 뉴욕 몬테피오레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시작했다. 기초 학문보다 환자에게 도움 되는 실용적 주제를 연구하는 것은 보람된 일이었다. 이후 20년 넘게 코넬대 의대, 슬론 케터링 암센터의 교수로 근무하며 암 치료법 연구에 매달렸다.

    “연구 메인 테마 중 하나가 ‘암의 고열 치료’였어요. 온도를 높여 암을 치료하는 방법을 고민했죠. 1980년대에는 방사선 치료와 화학 요법을 어떻게 병용할 것인지를 연구했는데, 이 둘을 같이 하면 부작용이 생기는 게 가장 큰 문제였어요. 부작용을 줄이면서 치료 효과를 높이는 방법을 찾는 게 급선무였죠.”

    김 박사가 ‘유전자 치료법’에 눈뜬 것은 1989년 디트로이트 헨리포드병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다. 고통과 부작용 없이 암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게 유전자 치료법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분자생물학을 전공한 연구원과의 협업은 그의 연구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유전자 치료라는 건, 우편배달부 역할을 하는 바이러스에 암세포를 약하게 하는 ‘자살유전자(suicide gene)’를 넣어 암세포에 전달하는 방법이에요. 주위 정상 세포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게 장점이죠. 다른 곳에서는 자살 유전자를 하나만 사용하는데, 저희 팀의 경우 두 종류의 자살유전자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1999년까지 세포실험, 동물실험에 성공한 뒤 2000년부터 ‘유전자 치료제’ 1상 임상에 들어갔어요.”

    “암 전문의가 내 병을 왜 몰랐을까”

    ‘유전자 치료법’을 연구하던 어느 날, 그에게 위기가 닥쳤다. 1993년 8월 일본 도쿄 학회에 다녀온 그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보통 2~3일이면 회복되던 컨디션이 1주일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당장 피검사를 했다. 빈혈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추가 검사를 하자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췌장암 3기였다. 무시무시한 암 덩어리는 소장과 임파선까지 퍼져 있었다.

    ▼ 처음 암 선고를 받고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앞이 캄캄하더군요. 나는 다른 사람보다 병을 더 잘 알잖아요. 우리 집사람한테도 목이 메어 말도 잘 못하고…. ‘내가 암 전문의인데 왜 3기가 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어요. 자기 건강에 대한 지나친 확신을 갖고 있어서 몸을 소홀히 한 거죠.”

    ▼ 수술도 어려운 상태 아니었나요?

    “췌장은 물론 위의 3분의 2, 담낭, 소장 조직을 떼어내는 어려운 복부 수술이었어요. 우리 병원에서 가장 경험 많은 주치의 2명이 8시간 동안 저를 수술했어요. 수술을 받다가 사망할 확률이 10~15% 됐죠.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더라도 암이 재발하거나 전이되기 때문에, 저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 생명을 유지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 정말 건강해 보이시는데…. 암환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얘기 안 하면 아무도 몰라요.”

    ▼ 신체 장기의 중요한 부분을 떼어내셨는데, 식사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나요?

    “수술 후 적응하는 데만 2, 3년이 걸렸어요. 일단 먹는 양이 반으로 줄어들었죠. 담즙이 안 나오니까 기름기 있는 음식은 소화를 못 시켜요. 몸을 회복하기 위해 면역 기능을 높이는 음식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주로 버섯을 달여 차로 마셨어요.”

    ▼ 암 환자가 회복하는 데 좋은 음식을 더 추천해주세요. 브로콜리도 암 치료에 좋다고 들었습니다만.

    “브로콜리는 암 예방에 더 좋다고 알려져 있어요. 음식을 택할 때 ‘암 예방에 효과가 있는지, 암 전이를 방지하는 데 좋은지’ 구별하는 게 좋아요. 암 치료 중인 환자가 회복하는 데 비타민이나 미네랄이 좋습니다. 암을 없앨 때 정상 조직도 많이 손상되거든요. 정상 세포 재생을 극대화하려면, 균형 잡힌 식단으로 음식물을 섭취해야 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 종합 비타민을 먹는 거예요. 비타민B나 비타민C가 손상된 조직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 적정 섭취량은 얼마나 됩니까?

    “‘비타민C를 얼마나 섭취해야 하는가’는 전문가마다 의견이 다른데, 치료를 위한 메가 도우즈(mega dose·대량 투여)는 10~20g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 복용하기 힘들어요. 비타민C는 물에 녹기 때문에 한 번에 섭취하면 다 빠져나옵니다. 천천히 먹거나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에 나눠서 먹는 것이 좋아요.”

    연구를 통해 배운 인내

    암환자에게 먹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일지 모른다. 지난한 항암 치료 과정은 고통과 공포의 연속이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의 탄력은 떨어진다. 기력이 쇠해 한곳에 집중하기조차 어려운 상태. 그는 일에 매달리며 이 시기를 버텼다.

    “병원에서는 수술 후 6개월 동안 집에서 쉬라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방사선 치료가 6주 만에 끝나자마자 업무에 복귀했어요. 다른 사람이 보면 ‘유 머스트 비 크레이지(you must be crazy)!’라고 할 만했죠. 일을 하면 좋은 건 잡념이 적게 생긴다는 거예요.”

    ▼ 남다른 마인드 컨트롤 방법이 있었나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했어요. 사람은 생각하기에 달려 있잖아요. 죽을병이라고 생각하면 우울해지니까. 디프레스(depress) 되면 염증을 만드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많이 생겨요. 미래를 바라보면서 ‘1, 2년 더 살더라도 주어진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자’고 생각했어요.”

    ▼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세상을 원망하신 적은 없습니까. 주변사람들에게 짜증이나 화를 낸다거나….

    “신기하게도 투병하는 동안 ‘내가 암을 극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매일, 매주, 매월 강해지더라고요. 1년 지나니까 몸에 자신이 붙었어요. 예를 들어 힘차게 진찰실에 걸어 들어온 말기암 환자와 부축을 받아 걷는 초기암 환자를 비교해보죠. 의사는 전자의 경우를 더 예후가 좋다고 말합니다. 암 진행 상태보다 환자의 퍼포먼스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몸에 지장이 없더라도 정신적으로 우울하면 퍼포먼스가 나쁘더라고요. 이걸 잘 아니까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었어요.”

    ▼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게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제가 걸린 암은 100명 발병하면 99명이 죽는 병으로 알려져 있죠. 사람들이 대개 빨리 포기하는데, 저는 연구를 통해 희망을 배웠어요. 연구하다보면 99%가 실패잖아요.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1% 가능성에 매달렸어요. 그렇게 얻은 성공은 최고의 만족감을 주죠. 투병과정도 마찬가지였어요. 큰 병에 걸렸지만, 작은 희망을 향해 노력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지독한 인연이 있을까. 학자로서 암을 평생 연구하는 것도 모자라, 병의 고통을 온몸으로 체득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환자에게 건네는 그의 조언은 그 어떤 의사의 말보다 힘과 진정성이 넘친다.

    “직접 겪었으니까 환자들에게 좀 더 개인적으로 다가갈 수 있죠. 희망을 줄 때도 좀 더 리얼리스틱한 얘기를 해줄 수 있고요. 암환자가 느끼는 고통, 부작용, 공포감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 ‘다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김 박사는 암과의 인연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고 한다. 엄청난 시간과 비용, 노력이 드는 항암치료제 개발 과정은 그에게 인내를 가르쳤다. 그는 연구원을 지망하는 후학들에게 “호기심이 없다면, 기나긴 연구 과정을 견딜 수 없다”고 조언한다. 암 투병 경험은 세상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바꿔놓았다.

    “생사의 기로에 서다보니 세상을 초월해 보게 됐어요. 예를 들어 누가 시간 약속에 늦는다면, ‘무슨 이유가 있겠지’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사소한 문제로 마음 상하는 일이 사라졌어요.”

    “항암치료제 개발은 사명”

    암이 발병한 지 17년이 흘렀지만, 그는 건강하다. 특별한 병치레도 없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67㎏에서 58㎏까지 내려간 몸무게는 현재 63㎏으로 회복한 상태다. 건강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줬다.

    “수분을 많이 섭취해야 해요. 이건 암환자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특히 60~70대 병원 입원 환자의 60% 이상은 탈수증 때문에 병원에 옵니다. 물을 충분히 마시지 않으면 산성 계통의 염증이 많이 생겨요. 만성 염증은 만성병의 근원이 될 수 있고요. 소변 색깔이 짙으면 물 섭취가 적다는 뜻입니다. 소변이 맑아질 때까지 물을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김재호 박사의 항암치료제 개발은 현재진행형이다. 남들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암을 초전박살 낸 그의 의지라면 못할 게 없을 듯하다. 긍정의 힘을 보여준 그의 삶이,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그의 연구가 우리에게는 희망이다.

    “저는 축복받은 사람이에요. 암 수술을 받은 뒤 내게 주어진 인생은 보너스 같은 것이죠. 남들은 이 나이에 좀 더 쉽게 사는 방법을 찾지만, 항암치료제 개발을 완료하는 것은 제 사명이에요. 남은 임상에 대한 예감도 좋습니다. 제 연구로 고국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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