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많은 한국인은 한국이 세계경제의 주역으로 떠오른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썼다. 이는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다소의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G20 회의에 협조한 한국인의 깊은 속내를 잘 모르고 한 소리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G20 회의의 성과를 내세우고 싶은 대통령과 정권 측에는 야속한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많은 한국인’이 G20 회의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G20 회의는 보고 즐길 수 있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축구가 아니다. 환율과 경상수지는 그렇다 쳐도 ‘양적 완화’ ‘환율의 유연성’ ‘예시적 가이드라인’ 등에 이르면 무슨 소리인지 선뜻 알아듣기 어렵다. 일상의 삶이 고단한데 무슨 뜻인지도 모를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백수에게, 노후가 불안한 장년에게, 개발도상국과 빈국의 지속성장이 무슨 관심사이겠는가. 하여 정부가 앞장서 “자랑스러워하고 자부심을 느끼자”고 해도 심드렁했을 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G20 회의의 경제효과가 수조원(또는 수십조원)에 달하고 국격(國格)이 높아진다고 해봐야 대중의 피부에는 와 닿지 않는 얘기다.
이 같은 대중적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대중은 역사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다. 일상적 삶의 존재다. 그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그들이 관여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문제에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국가적 행사의 성과(당장 이뤄진 것은 없다고 해도)가 나라의 인지도(認知度)를 높이고, 나라의 성장발전에 이익이 되고, 길게 보면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 ‘국격 상승’ 같은 과도한 의미 부여는 오히려 대중을 소외시킬 수 있다. 그 어떤 국가적 행사도 ‘정권의 잔치’가 되면 대중은 소외된다. 대중이 소외된 잔치는 ‘그들만의 잔치’가 된다.
이번 정상회의 기간에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과의 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을 일단 중지하는 결단을 내렸다. 미국 측이 당초 한국 정부가 재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기로 했던 쇠고기 개방을 추가로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우리 정부는 쇠고기 문제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지만 미국 측의 압박으로 재협상 테이블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이 2년 전 ‘촛불시위’에서 학습효과를 얻었든, 그것과는 상관없든 잘한 일이다. 그야말로 국격을 높인 일이다. 우리 정부가 또다시 미국에 일방적으로 끌려갔다면 국민의 소외감은 분노로 바뀌었을 것이다. 국민이 소외되지 않는 잔치가 되려면 구체적으로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뒷받침돼야 한다. 쇠고기 수입개방 협상을 일단 중지시킨 것은 그 좋은 예다.
아무튼 잔치는 끝났다. 잔치 뒤에는 그동안 잔치의 스포트라이트 뒤로 밀려나 있던 여러 문제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대통령의 외교적 성과가 내치(內治)의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판가름 날 것이다.
미국인으로 일본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더글러스 러미스는 저서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김종철·이반 역, 녹색평론사)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는 민중, 또는 인민에게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력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큰 모순입니다. 민주주의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공동생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결정이나 선택을 모두가 의논해서 한다, 그러한 힘입니다. 모두가 결정한다, 모두가 참가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생활의 세세한 면보다 큰 틀에 대하여, 즉 어떠한 공동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논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정치권력의 본래 의미입니다.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인민 자신, 국민 자신이 그러한 결정을 한다, 또는 적어도 참가한다,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즉 그 사회의 기본적 구조, 가장 기본적인 경향을 국민이 바꾸지 못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모두가 결정하고 참가하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기에 대의(代議)민주주의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대표성이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예컨대 정치 혐오, 의회 불신이 만연한 현실에서 국민 참여의 협치(協治)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국민이 무력감을 갖게 해선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그의 말은 깊은 통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국민이 무력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 이것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피할 수 있는 의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경우 그 중심에 소통의 부족과 형평성의 결핍, 상식에 맞지 않는 권력의 행태 등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수 국민이 마땅히 순리에 맞게 처리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안들,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 정책과 우선순위 등이 상식에 반할 때 국민은 무력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무력감이 쌓여간다면 제아무리 G20의 의장국이 된다 한들 국민의 자랑스러움과 자부심이 높아질 수 없을 것이다. “많은 한국인은 한국이 세계경제의 주역으로 떠오른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외신 보도가 국민의 무력감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국민에게 무력감을 안겨주는 예를 들어보자. 검찰은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사건 수사 결과 청와대는 무관하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청와대 행정관이 공직윤리지원관실 사찰팀에 감청을 방지할 수 있는 ‘대포폰’까지 만들어준 사실이 드러났다. 불법사찰의 결정적 증거인 공직윤리지원관실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파괴하기 위해 컴퓨터 전문 업체와 접촉하면서 이 대포폰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검찰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사결과 발표 때는 이 사실을 숨겼다. 사찰 관련자 수첩에서 ‘BH(청와대) 지시’라는 메모가 여러 개 발견됐는데도 검찰은 ‘대포폰’을 만들어준 청와대 행정관의 직속상관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재수사는 한사코 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야당은 물론 여당의 최고위원들도 재수사를 요구하지만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양새다.
그런 검찰이 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청목회)의 국회 로비 사건에는 여야 의원 11명의 후원회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등 전격 수사에 나섰다. 정치권의 반발이 일자 김준규 검찰총장은 “국민은 검찰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물론 후원금을 빙자한 불법 로비자금이라면 여야 가릴 것 없이 엄정하게 수사해 의법처리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국민은 검찰이 국회의원 수사에서뿐 아니라 청와대 관련 수사에서도 흔들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청와대 행정관이 대포폰까지 건네준 불법사찰 건은 어물어물하면서 여야 의원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만 엄정 수사를 외쳐서야 설득력이 있겠는가.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검찰 수사는) 야당에 대해, 국회의원에 대해 국민이 혐오감을 갖게 만들고 정치인은 나쁜 사람들이란 것을 각인시키려는 청와대의 고도의 공작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도 “검찰은 스폰서 검사 사건, 그랜저 검사 사건, 민간인 사찰과 관련한 대포폰 부실 수사 등으로 국회의 질책을 받아왔다. 이번 강제 수사는 이에 대한 보복수사 또는 물타기 수사라는 의혹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비난했다.
대통령의 오랜 친구라는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은 은행대출 청탁 명목으로 한 기업으로부터 수십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천 회장은 검찰이 본격 수사에 착수했던 8월 일본으로 출국한 뒤 귀국하지 않고 있다. 천 회장이 검찰 수사를 피해 도피한 것은 여러 정황상 분명하다. 검찰은 천 회장에게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통보를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체류 중인 나라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는 등의 적극적인 수사 의지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니 검찰이 대통령 친구인 천 회장의 도피를 사실상 방조한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생기는 것이다. 검찰에 대한 야당의 비난 및 의혹의 진위 여부를 떠나 검찰이 ‘살아 있는 권력’에는 한없이 약하다는 인상을 불식하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수사의 형평성 이전에 상식에 반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제창한 ‘공정 사회’와는 멀어도 한참 멀기 때문이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은 녹색성장을 위한 미래 투자라는 찬성론과 국토를 망치는 반(反)환경적 토목공사라는 반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경남도) 간 알력도 심각하다. 야 5당은 내년도 예산심의에서 4대강 사업예산을 삭감할 것을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서둘러 공정을 앞당기면 반대한들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는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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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습은 많은 국민에게 무력감을 안겨줄 수 있다. 대통령이 신념을 갖고 추진하는 사업이라면 왜 대통령이 직접 나서 그 필요성을 설명하고 반대론자들을 설득하지 않는가?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세 번 하면 되지 않는가? 어느 쪽이 옳고 그르든 우리는 왜 논의과정에서 무력하게 소외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의 뜻은 무시되어야 하는가?
이 대통령은 이런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이 무력감을 가지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통찰을 곰곰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민이 주인으로서 활력을 찾을 때라야 국격도 높아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