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잔혹한 영화에 이 달콤한 술이 왜 나왔을까.
- 타란티노 감독 영화의 대사들처럼 그저 ‘이유 없는 등장’일까. 아니라면, 아무리 좋은 술도 과음하면 ‘데스프루프’를 보장할 수 없다고 경고하기 위함일까.
- 아름다운 연둣빛 그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가 된 샤르트뢰즈엔 프랑스 산속 수도원의 1000년 비기(秘技)가 담겨 있다.
‘데스프루프’(Death Proof)는 그의 2007년 작품으로 이른바 ‘B급 영화’의 전형을 이루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어느 네티즌의 평처럼 ‘최고의 짜증과 최고의 쾌감을 동시에 선사’하는, 타란티노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덕분에 상당한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주인공 마이크(커트 러셀 분)는 자동차 액션 전문 스턴트맨이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타이틀일 뿐 사실 그는 자동차를 이용해 젊은 여자들만 전문적으로 살해하는 변태 살인광이다. 그는 텍사스 주의 오스틴 시에서 매력적인 여자 3명을 표적으로 삼고 따라붙는다. 그들은 지방 방송국 DJ인 줄리아를 중심으로 모인 친구들이다. 여느 평범한 미국 처녀들처럼 그들은 끼리끼리 남자친구 이야기도 해가며 즐거운 자동차 나들이를 떠난다. 도중에 들른 단골 바에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고 술도 마시며 즐겁게 논다. 그들은 바로 그곳에서 은밀히 자신들을 노리던 마이크와 비극적으로 조우한다.
대반전…살인마의 최후
마이크는 바에서 만난 줄리아의 또 다른 친구인 팸이란 여자와 함께 술을 마시다 그녀를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나선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칸막이가 있는 그의 차를 보고 의아해하는 팸에게 마이크는 ‘스턴트용’이라며 자기의 차는 탑승한 사람이 절대로 죽지 않는(데스프루프·Death Proof) 차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팸은 마이크의 의도적인 난폭운전과 급제동으로 조수석의 유리 칸막이에 사정없이 부딪히다 죽고 만다. 숨을 거두기 전 팸은 ‘데스프루프는 운전석에만 통용되는 말’이라는 마이크의 히죽거림을 듣게 된다.
마이크의 다음 표적은 바에서 나와 호숫가로 향하던 3명의 줄리아 일행이었다. 그의 살인 방법은 놀랍게도 자신의 차를 전속력으로 몰아 그들의 차와 정면충돌하는 것. 자기 생명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무모한 방법이지만, 스턴트 차의 견고함에 대한 자신과 살인마적인 광기가 어우러져 이 살인 계획은 그대로 실행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의 의도대로였다. 세 여자는 현장에서 무참하게 즉사하고, 그는 복합 골절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로부터 14개월 후 무대는 테네시 주의 레바논 시로 바뀐다. 부상에서 말끔히 회복된 마이크는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나선다.
그런 그의 눈에 4명의 아리따운 젊은 여자가 들어온다. 이 살인마 앞에 이들 처녀의 생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신세로 보였다. 그들은 우연히 휴가가 맞아떨어져 한 차로 나들이를 나와 있었다.
살인마 마이크의 무서운 계획을 알 리 없던 그들은 일행 중 조이의 제안으로 닷지 챌린저라는 튼튼한 차를 빌려 신나게 드라이브를 즐겨보기로 했다. 마침 중고차 판매로 나온 닷지 챌린저를 한 대 물색해 시운전을 명목으로 타고 나온다. 대신 친구 중 한 명을 ‘담보’로 맡길 수밖에 없어 나머지 셋이서 차를 몰고 나섰다.
그런데 조이의 목표는 보다 화끈한 것이었다. 즉 주행 중에 조이가 끈에 의지한 채 자동차 밖으로 나가 보닛 위에 매달려 가는 스릴을 맛보는 것이었다. 과거에 그런 아찔한 모험을 경험한 바 있는 친구는 처음엔 거절하지만 결국 그녀의 원을 들어주게 된다.
그들이 그런 모험을 즐기고 있을 때 마이크의 차가 어디에선가 나타난다. 그러고는 그들의 차에 마구 부딪히며 조이의 생명과 함께 차를 전복 직전까지 몰고 간다. 이것으로 모든 상황이 끝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마에게 이들 평범한 여자들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바로 이때 타란티노적인 반전이 이뤄진다. 절박하게 쫓기던 조이 일행 중 한 명인 흑인 여성 킴이 호신용으로 지니고 있던 총으로 마이크의 왼쪽 어깨를 맞히면서 그 뒤부터는 오히려 여자들이 마이크를 추적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의 종반부에선 조이 일행이 마이크에 대해 철저하게 복수한다. 마이크는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이 통쾌함을 느낄 정도로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매혹적인 풀빛 리큐어
이 영화는 ‘킬빌’과 마찬가지로 잔인한 여성 복수극의 범주로 볼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그 규모나 작품성에서 ‘킬빌’의 축소판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타란티노 감독의 또 다른 개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 간의 대화가 대부분 단순한 수다에 지나지 않아 관객으로서는 영화의 줄거리와 어떤 연관도 짓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평자는 이를 타란티노 감독 특유의 ‘아무 이유가 없다’라는 한 마디로 압축하기도 한다. 극중 대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술 샤르트뢰즈(chartreuse)도 타란티노 감독이 의도한 ‘이유 없는 등장’일지도 모른다. 샤르트뢰즈는 영화 전반부에 등장하는 텍사스 오스틴의 여자들이 술집에 들렀을 때 나온다. 샤르트뢰즈는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술이지만 영화에 나온 것으로는 아마 이 장면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술집 주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 술을 소개하면서 워낙 맛있고 유명해 술 이름 자체가 색깔을 가리키는 이름이 됐을 정도라고 자랑한다. 이는 샤르트뢰즈의 풀잎과도 같은 술 색깔이 무척 매혹적이라 ‘샤르트뢰즈’라는 말이 연두색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데서 비롯된 설명이다. 리큐어의 한 종류인 샤르트뢰즈는 아직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 깊이 있는 맛으로 흔히 ‘리큐어(liqueur)의 제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샤르트뢰즈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리큐어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 리큐어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술에 과일, 초목, 향신료 등을 혼합해 특유의 향을 낸 뒤 당분을 가미한 술이다. 리큐어에 사용하는 술은 증류주가 원칙이며, 가미하는 당분의 양이 적어도 전체 술의 2.5%를 넘어야 한다. 리큐어의 정의는 이렇게 간단하지만 혼합 성분이 워낙 다양한 데다 혼합하는 방법에도 차이가 많아 세상에는 실로 다양한 리큐어가 존재한다. 이 때문에 술을 분류할 때 리큐어는 양조주, 증류주와 더불어 제3의 범주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리큐어는 요즘 시중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가향 보드카(flavored vodka)나 가향 진(flavored gin) 같은 술과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술은 향료를 가미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별도로 당분을 가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또한 리큐어는 단맛이 강하다는 점에서 흔히 보는 디저트 와인 종류와 비슷하지만, 이 경우에는 향료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 리큐어와 다르다. 일반적으로 리큐어의 알코올 도수는 15~30%로 그렇게 높지 않으나 50%가 넘는 제품도 있다.
2명의 修士만 아는 제조법
리큐어는 술에 약초 성분을 섞는다는 점 때문에 일찍이 건강증진용이나 치료약으로도 관심을 받아왔다. 유럽에선 중세 시대에 이미 수도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리큐어가 개발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중국에서는 동물 성분까지 포함하는 많은 리큐어가 만들어져 애용됐으며, 오늘날까지 보건주(保健酒)라는 개념으로 널리 음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설탕을 넣고 만드는 ‘담금술’의 개념도 근본적으로는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리큐어를 만드는 방법에는 크게 침출법(maceration), 여과법(percolation), 증류법(distillation) 세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침출법과 여과법은 제조 과정에서 열을 사용하지 않아 콜드 방식(cold method)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증류법은 핫 방식(hot method)이라고 한다.
침출법은 차를 우려내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이해하면 된다. 즉 찻잎을 물에 넣어 그 성분을 천천히 우려내듯이 향료 성분을 술에 넣고 천천히 그 향을 우려내는 것이다. 주로 복숭아, 살구, 체리 같은 과일을 씨째로 증류주 안에 넣고 우려낸다.
여과법은 커피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즉 커피 가루에 물을 통과시켜 커피를 만드는 것과 같이 주로 약초와 같은 재료에 지속적으로 술을 통과시킴으로써 그 성분과 향을 여과해내는 것이다.
증류법은 글자 그대로 술과 향료 성분을 같이 넣고 증류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향료 성분이 술의 알코올 성분과 함께 기화하면서 완전히 섞이게 된다. 증류 과정을 거치면 그 증류액에는 색깔이 없어지므로 이렇게 만들어진 술에 색깔을 넣으려면 증류 후 별도의 과정이 필요하다. 증류법은 주로 과일 껍질, 식물 씨앗, 꽃과 같은 재료로 리큐어를 만들 때 사용한다.
종류가 다양한 리큐어는 향을 내는 재료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가장 손쉽다. 즉 허브나 향신료로 만든 리큐어(Herb and Spice Liqueurs), 씨앗이나 초목으로 만든 리큐어(Seed and Plant Liqueurs), 과일로 만든 리큐어(Fruit Liqueurs)로 나눠볼 수 있다.
‘그린’과 ‘옐로’가 기본 제품
허브나 향신료로 만든 리큐어에는 ‘베네딕틴’(Benedictine), ‘드람부이’(Drambuie), ‘야겐마이스터’(Jagenmeister)와 같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유명 리큐어가 있다. 씨앗이나 초목으로 만든 리큐어로는 ‘아마레토’(Amaretto), ‘베일리 아이리시 크림’(Bailey′s Irish Cream), ‘골드쉬라거’(Goldschlager), ‘칼루아’(Kahlua) 등이 있다. 과일 리큐어로는 ‘코인트로’(Cointreau), ‘큐라소’(Curacao), ‘미도리’(Midori) 등이 대표적이다.
리큐어의 제왕 샤르트뢰즈는 이 분류법의 첫 번째 군(群)에 해당된다. 이 술은 1084년 독일 태생의 브루노(Bruno)란 사람이 프랑스 샤르트뢰즈 산속에 있는 수도원 ‘라 그랑드 샤르트뢰즈’(La Grande Chartreuse)에서 만든 데서 유래했다. 지금은 수도원에서 25㎞쯤 떨어진 브와롱(Voiron)이란 마을의 증류소에서 생산한다. 샤르트뢰즈는 지금도 전통적인 제조법으로 만들고 있는데, 수도원의 수사(修士) 중 단 2명만이 그 제조법을 알고 있다고 한다.
샤르트뢰즈는 현재 11가지 종류의 제품이 생산되고 있다. 이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상표의 색깔을 딴 그린(Green)과 옐로(Yellow) 제품이다. 그린 제품(알코올 도수 55%)은 1764년에 소개된 최초의 공식 제품으로, 130종의 식물과 꽃을 혼합 증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짙은 약초향과 함께 강한 알코올 농도로 묵직한 느낌을 준다. 옐로 제품(40%)은 1838년에 소개됐는데 그린에 비해 상대적으로 순하고 단맛이 강하다.
샤르트뢰즈는 그린과 옐로 제품의 성공에 힘입어 최근 현대인의 다양한 기호에 맞춰 여러 가지 추가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이 중 ‘VEP(Vieillissement Exceptionnellement Prolonge)’ 제품은 ‘초장기 숙성(aged exceptionally long)’이란 뜻으로 증류 후 오크통에서 장기 숙성한 제품이다. 표준 제품과 마찬가지로 그린(54%)과 옐로(42%)의 두 종류가 있다. 그리고 ‘Liqueur du 9 Centenaire’는 ‘900년 리큐어’라는 뜻인데 이 제품은 1984년 샤르트뢰즈 수도원 설립 900주년 기념으로 출시한 47% 제품이다.
그밖에 Genepi(40%)는 알프스 산맥에서 나는 허브들을 재료로, 그리고 Eau de Noix(23%)는 호두를 재료로 만든 제품이다. 또한 과일을 재료로 만든 제품이 4가지가 있는데, black currrant(Cassis, 20%), raspberry(Framboise, 21%), blueberry(Myrtille, 21%), bilberry(Mure Sauvage, 21%) 제품이 그것이다.
술을 마시다보면 간혹 예상치 못한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물론 ‘데스프루프’에서와 같이 잔인한 상황이 찾아올 리는 만무하지만, 샤르트뢰즈의 이유 없는 등장처럼 이유 없는 일들이 찾아올 가능성에는 누구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