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서울 → 필리핀 → 가봉 → 미얀마 15년 이어진 질긴 암살극의 끝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 오세영| 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

    입력2010-12-06 15: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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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년 1·21사태로 시작된 북한의 남한 대통령 암살 기도는 무려 15년간 거듭되다 1983년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로 막을 내린다.
    •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 과정에 대통령 영부인과 여러 수행원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 국내와 필리핀, 가봉, 미얀마로 이어지며 대한민국 국가원수의 목숨을 노린 무모한 도발의 실체를 추적했다.
    서울 → 필리핀 → 가봉 → 미얀마 15년 이어진 질긴 암살극의 끝

    1983년 10월9일 아웅산 테러 당시 묘소에 도열한 각료들. 진혼 나팔이 울리면서 천장에 장치된 폭탄이 폭발하기 몇 분 전의 모습이다.

    1981년 5월. 오스트리아 빈.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던 제임스 최와 찰스 스티븐 야노버는 호텔 방문이 열리자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그렇지만 곧 경계를 풀었다. 들어온 사람은 둘이서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두 달 만이군요. 잘 지내셨소?”

    방으로 들어선 사람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 빈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직함을 가진 그는 ‘35호실’로 불리는 대외정보조사부 소속으로 제임스 최와는 구면이었다.

    “평양에서 재가가 떨어졌소.”



    공작원이 초조하게 기다리던 두 사람을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북한 공작원과 전문 킬러 야노버는 지금 반한(反韓)활동을 벌이고 있는 캐나다 교포 제임스 최의 중재로 한국 대통령을 암살할 계획을 모의 중이다.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남조선 대통령은 7월에 필리핀을 방문할 예정이오.”

    공작원이 가능하겠느냐는 얼굴로 야노버를 쳐다봤다.

    “7월이면 시일이 촉박한데…그렇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오.”

    야노버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니 자세한 정보를 주시오.”

    “그야 물론이오. 지금 알려진 사실은 7월 중에 필리핀을 방문할 것이란 사실뿐이오.”

    “착수금은….”

    제임스 최가 중재하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음 달에 마카오에서 한 번 더 만나기로 합시다. 그때 자세한 정보와 착수금을 전달하겠소.”

    공작원은 그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北, 국제 킬러와 손잡다

    민주정에 조종을 울린 유신체제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그 끝을 맞았다. 그렇다고 강권통치가 종식된 것은 아니다. 서울의 봄은 짧았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실세로 부상하면서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980년 8월27일에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유신헌법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은 국민에게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12·12와 ‘광주’라는 ‘원죄’를 안고 있었다. 자연히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해외 교민들은 격렬하게 반정권 활동을 벌였다.

    안에서 잃은 인기를 밖에서 만회할 셈으로 전두환 대통령은 다른 대통령보다 부지런히 해외 순방에 나섰다. 미국은 현실을 인정하고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1981년 3월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번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선출됐지만 인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남과 북은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이후로 이렇다 할 큰 충돌 없이 지내고 있었다. 전쟁에 의한 통일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남은 군사정권 유지가, 북은 후계자를 굳히는 게 더 시급한 문제였다.

    그렇게 남과 북의 대결이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던 동안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동구권이 급속하게 몰락하면서 냉전체제로 대표되던 국제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소련과 중국은 개혁과 개방의 대세를 받아들이며 새로운 체제에 순응했지만 북한은 사정이 같을 수 없었다. 북한에 개방은 곧 체제 붕괴를 의미했다. 초조해진 북과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남. 먹구름이 다시 한반도를 향해 몰려왔다.

    인기가 없는 한국 대통령을 제거하는 것은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북한은 그렇게 판단하고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1981년 전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했을 때 반한 교포들이 암살을 모의한 적이 있다. 모의 단계에 그친 일이지만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북한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

    장소는 역시 외국이 좋을 것이다. 전 대통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외국을 순방하고 있었다. 북한은 공작원을 직접 파견하는 대신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키로 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그쪽이 위험부담이 덜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캐나다의 반한 인사 제임스 최를 통해 국제 킬러 야노버와 손을 잡았다. 제임스 최와 야노버는 무기 밀거래를 통해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냄새’ 맡은 캐나다 경찰

    휘황찬란한 빛이 도박과 환락의 도시 마카오의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빈에서 헤어진 세 사람은 한 달 후 이곳 마카오에서 재회했다. 이번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나하고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요.”

    야노버가 동료 알렉산더 마이클 제롤을 소개했다. 북한 공작원은 살피듯 제롤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소란스러운 외부와 철저하게 격리된 호텔 방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조선 대통령의 필리핀 방문 일정이 7월6일에서 8일까지로 확정됐소.”

    북한 공작원이 입을 열었고 제임스 최가 즉시 통역했다. 야노버와 제롤 두 사람의 얼굴이 흐려졌다. 중순도 아니고 초순이면 시일이 너무 촉박했다.

    “미리 현장을 살피고 예행연습도 해야 하는데 시일이 너무 촉박하오.”

    “알고 있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그리 알고 준비를 철저히 하시오.”

    북한 공작원이 딱 잘라 말하자 야노버와 제롤은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정보에 의하면 양국 정상은 방문 둘째 날에 푸에르토 아줄이란 곳에서 골프 회동을 할 예정이오.”

    공작원의 말이 이어졌다. 푸에르토 아줄은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70㎞ 떨어진 곳에 있는 고급 휴양지로 해안을 따라 조성된 골프 코스는 경관이 빼어나 명문 코스로 통했다.

    캐나다 연방경찰수사국(RCMP) 국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찰스 스티븐 야노버

    극우 백인폭력집단인 쿠 클랙스 클랜(KKK)에도 관계한 백인 우월자로 전문 살인청부업자. 카리브의 도미니카공화국 전복 음모에도 가담했던 적이 있음. 최근에는 국제 무기 거래에도 관여하고 있음.

    알렉산더 마이클 제롤

    야노버의 오랜 동료로 그와 함께 테러에 여러 차례 가담한 적이 있음.

    제임스 최

    부친은 한국군 예비역 장성으로 캐나다에 체류 중인 반한 인사. 제임스 최는 합법적인 사업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은 여러 종류의 불법 거래에 가담하고 있음. 야노버와는 석탄 거래를 이유로 토론토에서 여러 차례 회동한 적이 있음. 지난달에 그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했음. 이번 달에는 야노버 외에 제롤까지 대동하고 마카오를 다녀왔음.

    공작조가 설치하는 폭약은 두 종류. 하나는 베트남전쟁에서 그 실용성이 입증된 클레모어이고 또 하나는 소이탄이다. 지향성 지뢰로 구분되는 클레모어는 화약의 힘으로 700여 개의 쇠구슬을 날려보내는 무서운 무기. 클레모어가 폭발하면 유효살상거리 50m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벌집이 된다. 그리고 소이탄은 순간적으로 엄청난 고열을 일으켜 모든 것을 녹여버린다. 북한 공작조는 증거를 깨끗이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야 해.”

    진 소좌가 클레모어를 설치하는 신기철 대위에게 주의를 줬다. 클레모어는 지향성 지뢰여서 앞에 있으면 벌집이 되지만 뒤에 있는 사람은 별다른 해를 입지 않는다. 그러니 남조선 대통령이 설 자리를 정확하게 조준해야 한다. 신 대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익숙한 솜씨로 설치를 끝냈다. 이제 수신기를 달 차례다. 클레모어는 통상 유선으로 폭발시키지만 북한 공작조는 원격조종장치를 이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유선은 발각될 염려가 작은 반면 매복 위치와 수신기 사이에 장애물이 놓이면 안 된다는 단점이 있다.

    주변을 면밀히 살핀 신 대위가 손을 들었다. 마땅한 장소를 찾았다는 표시다. 이제 여기서 꾸물댈 이유가 없다. 경비병이 순찰을 돌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망을 보고 있는 강민철 대위가 아무도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세 사람의 공작조는 얼른 묘소를 빠져나왔다.

    폭발…수행원 17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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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웅산 사건의 총책임자로 알려진 장성우 당시 소장. 최근 북한의 최고실세로 자리매김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의 친형으로 지난해 8월 사망했다.

    1983년 10월9일 오전 10시.

    인야레이크 호텔을 출발한 수행원 일행은 아웅산 묘지에 도착하자 서석준 부총리를 필두로 차례로 도열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영접을 맡은 미얀마 외상이 도착하지 않아 영빈관에서 출발이 늦어지고 있었다. 외국 국가원수 영접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수행원들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지만 미얀마 외상의 지각은 결과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목숨을 구한 셈이 됐다.

    시간의 흐름이 멈춰선 것과 같은 풍경, 그리고 왠지 나사가 빠진 것같이 허술한 일처리. 그러나 미얀마는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였다. 한국이 아직 유엔에 가입하지 못했을 때 이미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으며 축구는 아시아를 호령하고 있었다.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의전담당관의 통보에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던 정부 요인들이 다시 도열하기 시작했고 기자들은 취재준비를 서둘렀다. 의전서열대로 서석준 부총리가 맨 오른쪽에 섰고 이어서 이범석 외무부 장관과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국무총리비서실장, 그리고 이기백 합참의장이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만 도착하면 된다.

    “저기 대사가 오는군요.”

    대통령이 당도하기 전에 대사가 와야 할 텐데 하며 초조해하던 의전담당관이 반색을 했다. 과연 태극기를 매단 대사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묘소로 다가오고 있었다. 승용차에서 내린 이계철 대사는 얼른 대열로 끼어들었다. 이 대사의 위치는 의전서열에 따라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과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사이. 공교롭게도 대열의 딱 한가운데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최상급자로 오인할 수도 있는 자리였다.

    시곗바늘은 벌써 10시2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조선 대통령의 도착이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몸을 숨기고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공작조는 자꾸 초조해졌다.

    “차가 들어옵니다.”

    강민철 대위가 반색을 했다. 그의 말대로 태극기를 단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묘소로 들어서고 있었다. 뭔가 사정이 있어서 예정보다 30분 정도 늦었지만 아무튼 이제라도 도착했으니 다행이었다. 진 소좌는 시한폭탄 대신 원격조종장치를 사용하기를 역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한폭탄을 사용했다면 벌써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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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웅산 사건을 일으킨 북한 공작원들에 대한 특별재판(1983년 11월). 왼쪽에서 두 번째가 진모 소좌이고,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강민철 대위다.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공판정 구내와 외곽에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고 진 소좌 옆에는 9명, 강 대위 옆에는 8명의 교도관이 배치됐다.

    승용차에서 내린 남조선 대통령이 대열의 복판에 서자 예식의 시작을 알리는 진혼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 지체할 이유가 없다. 진 소좌는 신기철 대위에게 폭발시킬 것을 명령했다.

    진혼 나팔소리가 울리자 도열한 사람들의 얼굴에 ‘뭐야, 이제 와서 예행연습을 하나…’ 하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매끄럽지 못한 의전절차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미얀마의 서툰 일처리로 전두환 대통령은 또 한 차례 위기를 넘기게 됐다.

    그때 클레모어가 폭발하면서 묘소가 일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때는 10월9일 오전 10시28분. 그 시각에 전두환 대통령을 태운 승용차는 아웅산 묘지에서 1.5㎞ 떨어진 곳을 달리고 있었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날아갔고 일대는 전쟁터로 변했다. 시신이 사방에 널브러졌고 부상자들은 피를 흘리며 구조를 요청했다.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해서 수행원 17명이 사망했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전 대통령은 순방을 전면 취소하고 급거 귀국했다.

    15년 암살 기도 종지부

    미얀마는 경호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후속조치는 그런대로 신속했다. 즉각 범인 수색에 나섰고, 탈출하려던 북한 공작조를 모두 검거했다. 소이탄이 불발하면서 현장에 남은 증거가 공작조 체포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검거 과정에서 신기철 대위는 사살됐고, 진 소좌와 강민철 대위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됐다. 진 소좌는 다음 해에 사형이 집행됐지만, 신문과정에서 순순히 자백을 한 강민철 대위는 종신형으로 감일등됐고 미얀마 감옥에서 25년을 복역하다 2008년 5월에 병사했다.

    1968년 1·21사태로부터 시작된 북한의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 기도는 1983년의 아웅산 묘지 폭사사건으로 끝을 맺는다. 이후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대통령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리고 치열하던 외교전은 대한민국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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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세 영

    1954년 충남 홍성 출생

    경희대 사학과 졸업

    1993년 역사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글쓰기 시작

    저서 : ‘만파식적’ ‘화랑서유기’ ‘창공의 투사’ ‘소설 자산어보’ ‘구텐베르크의 조선’ 외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은 군부독재를 끝냈고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국제 정세에도 큰 변화가 있어 소련이 해체되면서 동서냉전과 이념의 대립은 역사의 유물이 됐다. 산업화를 달성한 한국은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한 민주화를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고 그러는 동안 남과 북의 경제력 격차는 계속 벌어졌다. 남과 북의 오랜 대립은 자유와 개방을 선택한 대한민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국장은 아무래도 캐나다 합동수사본부(CFSEU)에 통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캐나다 연방경찰수사국은 야노버와 최가 자주 회동하는 이유가 무기 불법 거래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며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의 행적으로 보니 아무래도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았다. 무기 거래라면 굳이 빈이나 마카오까지 가지 않아도 됐다. 제롤이 합류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국제 테러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합동수사본부에 통보하고 공조수사를 펼치는 게 좋을 것이다. 합동수사본부에 통보하면 미국 FBI와 CIA도 수사에 나설 것이다.

    “야노버를 철저하게 감시해.”

    수화기를 든 국장은 담당 수사관에게 야노버를 밀착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까다로운 타깃

    1981년 7월1일. 푸에르토 아줄 앞바다. 보트 한 척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가롭게 떠 있었다.

    “타깃은 제대로 들어오는데 도주로가 마땅치 않아.”

    지형지물을 살피던 제롤이 얼굴을 찌푸렸다. 난코스로 유명한 푸에르토 아줄의 골프 클럽은 숲으로 이어지는 아웃코스와 바다로 이어지는 인코스로 나뉘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마땅한 저격 장소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주일 전 마닐라에 도착한 야노버와 제롤은 푸에르토 아줄 휴양지의 호텔에 숙소를 잡고 며칠째 코스를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야노버가 코레히돌 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표가 마피아 두목이라면 이쯤에서 저격하고 보트를 타고 전속으로 코레히돌 섬으로 도주하면 그런대로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번 타깃은 일국의 원수다. 마피아 두목과는 경호의 차원이 다르다.

    그럼 아웃코스에서 노릴까. 그 쪽도 문제가 있다. 제대로 조준하려면 300m까지 접근해야 하는데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거기까지 접근할 자신이 없었다. 설사 요행히 접근했다 해도 무성한 숲과 수행인들 때문에 타깃이 조준선 안에 들어오는 시간이 너무 짧아 저격할 자신이 없었다.

    “폭탄을 쓰면 어떨까?”

    제롤의 말에 야노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한폭탄은 타깃을 정확하게 노려야 하는 요인 암살에는 무용지물이다. 원격조종 폭탄을 작동시키려면 지근거리까지 접근해야 하는데, 이 경우 저격보다 탈출이 더 힘들다. 폭탄 탐지견을 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로서는 환영객으로 가장하고 가까이 접근해 권총으로 저격하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념에 따른 저격이라면 모를까, 돈을 받고 암살하는 살인청부업자에게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서울 → 필리핀 → 가봉 → 미얀마 15년 이어진 질긴 암살극의 끝

    1982년 8월 아프리카 순방길에 오르는 전두환 대통령 부부.

    “일단 호텔로 돌아가자.”

    야노버가 보트를 돌리라고 했다. 막상 현장을 둘러보고 일을 시작하려니 두 사람은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국제 킬러라고 하지만 두 사람이 여태 처리해본 타깃은 기껏해야 폭력단 두목이나 극렬단체 지도자들이었다. 경호가 삼엄한 국가원수는 사정이 같을 수 없었다.

    호텔로 돌아온 제롤과 야노버는 입맛이 썼다. 아무래도 일을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제임스 최를 통해서 착수금으로 이미 60만달러를 받은 터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고심하고 있는데 캐나다에 있는 한 패로부터 전화가 왔다. 캐나다 경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FBI도 개입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벌써 꼬리를 잡혔단 말인가. 야노버와 제롤의 안색이 일시에 창백해졌다. FBI가 개입했다면 추적의 손길을 피하기 어렵다. 어쩌면 필리핀 당국에도 이미 통보됐는지 모른다. 당장이라도 필리핀 경찰이 들이닥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야노버와 제롤은 서둘러 짐을 꾸렸다.

    “이번엔 우리 손으로 직접…”

    1982년 2월 말. 평양 노동당 중앙청사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실. 대남사업을 관장하는 노동당 작전부와 통일전선부, 그리고 대외연락부는 평양시 대성구역 합장동에 신축한 3호 청사로 옮겨갔지만, 대외공작을 전담하는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는 조선노동당 중앙청사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3층 5호실을 쓰는 관계로 통상 35호실로 호칭되는 대외정보조사부에 인민군 정찰국 소속의 젊은 군관 세 사람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으로부터 긴급호출을 받고 달려온 길이다.

    “작년에 우리는 서양인에게 남조선 대통령 암살을 맡겼다가 실패했소.”

    부부장이 세 사람을 차례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야노버와 제롤에게 맡긴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전에 정보가 샜는지 양국 정상은 급히 골프 회동을 취소했고, 야노버와 제롤은 1982년 2월24일 캐나다 경찰에 체포됐다. 북한은 돈만 날린 꼴이 됐다.

    “남조선 대통령이 8월에 아프리카를 순방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했소. 이번에는 우리가 직접 손을 쓰겠소.”

    국제 킬러를 고용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지 1년의 세월이 흘렀다. 북한은 직접 공작조를 파견하기로 방침을 수정하고 정찰국에서 최정예 공작조 3인을 선발했다.

    “잘 알겠습니다. 기필코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조장이 비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동건애국호를 보내 동무들을 지원하겠소. 구체적인 계획은 그쪽 일정이 알려지는 대로 수립할 테니 그리 알고 준비하시오.”

    부부장이 공작조 3인과 차례로 굳은 악수를 나눴다. 동건애국호는 나중에 아웅산 사건이 발생했을 때 미얀마 수역에 머물고 있던 바로 그 공작선이다. 대외정보조사부는 조총련이 1976년에 기증한 6000t급 화물선 동건애국호를 해외 공작선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해외 순방 계획이 확정됐다. 1982년 8월17일 동아프리카의 케냐를 시작으로 19일 나이지리아를 거쳐 22일 가봉을 순방하고 24일 세네갈에 들른 다음에 대서양의 어업전진 기지 라스팔마스 섬에 기착했다가 28일에 캐나다를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열대우림 속 北 공작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그치질 않는 가운데서도 한국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어갔다. 국내에선 혼란이 이어졌지만 해외에서의 평가는 조금씩 회복됐고, 마침내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면서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드높이게 됐다.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가 된 한국을 보는 세계의 눈이 달라졌다. 전 대통령의 1982년 아프리카 순방은 대한민국 외교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남한이 경제력에서 북한을 추월했다고 하지만 군사력은 여전히 북한이 우세했고 외교에서도 앞서가고 있었다. 당시 아프리카 대륙은 남과 북 외교전쟁의 최전선이었다. 국력은 보잘것없지만 유엔에서 당당하게 한 표씩을 행사하는 아프리카의 국가 원수들을 남과 북은 경쟁적으로 초청하고 극진히 대접하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남한은 가봉에 백화점을 지어줬고 북한은 앙골라와 콩고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면서 그들의 환심을 사려했다.

    순방 일정이 확정되자 청와대와 관계 부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챙겨야 할 것이 하나둘이 아닌데 그중에서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대통령 경호다. 국가원수의 해외순방시 경호는 공식 방문이면 초청한 나라에서, 비공식 방문이면 대통령 경호실에서 담당하는 게 관례다. 아프리카 순방은 공식 방문이어서 경호는 해당 국가의 소관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경호실이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남북대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한은 수차 한국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다. 1970년 6월에는 대통령의 국립묘지 참배를 노려 현충문에 폭발물을 설치하려다 실패했고, 1971년 7월과 1974년 4월에도 청와대 폭파를 시도하다 미수에 그친 바 있다. 그리고 1974년 8월15일에는 육영수 여사가 암살범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고, 전두환 대통령도 미국 뉴욕과 필리핀에서 각각 한 차례씩 암살 미수를 겪은 바 있다.

    전두환 대통령의 측근 장세동이 경호실장에 임명되면서 대통령 경호실은 더욱 막강해졌고, 대(對)테러를 전문으로 하는 특수부대도 창설됐다. 외국에선 국가원수 암살 시도가 정신 이상자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벌이는 시위성 행사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한국은 경우가 달랐다. 대통령 경호는 군 작전의 일환이었다.

    철통같은 경호 때문에 이런저런 불만이 나오긴 했어도 대통령 암살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해외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해외 순방의 경우는 대한민국 경호실이 상황을 주도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아무리 호전적인 북한이라 해도 해외에서 테러를 감행하는 경솔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의 경호 시스템이 선진국에 비해서 많이 뒤떨어진다 해도 시위성 수준의 테러라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경호실 관계자들은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비행기에 올랐다. 그 시각 북한 공작원이 아프리카의 열대우림을 내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제3의 루트’

    도요타 랜드크루저 한 대가 8월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콩고의 열대림을 헤치며 질주하고 있었다. 탑승 인원은 모두 5명. 북한에서 급파한 공작조 세 사람과 현지에서 채용한 안내원 2명이 그들이었다. 세 사람의 공작조는 외국인 행세를 하며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했다. 콩고에 입국할 때도 일본과 니카라과 여권을 사용했다.

    콩고 브라자빌의 북한대사관에서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과 재회한 3인의 공작조는 그동안 현지 사정을 면밀히 살피고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아프리카는 넓다. 그리고 국가원수의 공식 방문엔 삼엄한 경호가 따라붙는다. 공작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또 나중에 문제가 될 것과 관련해서 공작원의 탈출도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검토에 검토를 거듭한 결과 공작조는 테러 장소로 가봉을 택했다. 해상을 통한 탈출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현지에 접근하느냐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동양인은 금세 눈에 띈다. 더구나 남한 대통령이 순방하는 나라에서는 동양인을 더 철저하게 검색할 것이다. 그러니 공항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공작조는 육로를 이용해서 가봉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탈출은 때맞춰 가봉에 입항할 동건애국호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육로로 가봉에 들어가는 방법으로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브라자빌에서 음빈다까지 기차를 타고 간 다음에 그곳에서 가봉의 프랑스빌까지 산악 택시를 타고 가는 방법이다.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은 프랑스빌에서 650㎞ 떨어졌는데 프랑스빌에서 트랜스가봉 철도를 타면 11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다. 이 루트를 택하면 전체 일정은 5일 정도 소요된다. 제일 쉬운 이동이지만 단점은 트랜스가봉 철도의 검문이 까다로운 편이라는 점. 둘째 방법은 브라자빌에서 기차를 타고 루보모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트럭을 타고 두살라를 거쳐 느덴데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리브르빌행 기차를 타는 방법이다. 검문은 비교적 느슨한 편이지만 한시가 아쉬운 마당에 일정이 하루 더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외교전 승리의 상징국 가봉

    마지막 루트는 직접 지프를 몰고 프랑스빌로 가서 인접국 적도기니로 우회한 다음에 바다를 통해 리브르빌로 침투하는 것이다. 지프를 몰고 무려 4000㎞의 험로를 달려야 하는 위험한 루트지만, 검문을 받을 염려가 없는데다 오웬도 항에서 동건애국호를 만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 공작조는 마지막 루트를 택한 것이다. 테러 예정일은 8월22일. 방법은 원격조종장치로 폭탄을 터뜨리는 것. 그리고 신속히 오웬도로 이동해서 동건애국호를 타고 공해상으로 빠져나가면 임무 끝이다.

    “속도를 더 높여!”

    서울 → 필리핀 → 가봉 → 미얀마 15년 이어진 질긴 암살극의 끝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 조장은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속도를 높일 것을 요구했다. 조금만 더 가면 가봉 남동부 오토코우 주의 주도이자 가봉 제3의 도시인 프랑스빌이 나온다. 국경도시 프랑스빌에 도착하면 브라자빌의 북한대사관에 최종 연락을 해야 한다. 3인의 공작조는 덜컹거리는 지프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 험로가 계속됐지만 사실 아프리카 열대림은 그들에게 그리 낯선 곳이 아니었다. 북한은 자이레(콩고민주공화국)의 까마뉼라 사단과 짐바브웨의 폭풍여단에 북한 정찰국 소속의 교관들을 파견해서 군사훈련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3인 공작조는 그들 교관 중 엄선된 요원들로 구성됐다.

    조금만 더 가면 프랑스빌에 당도한다. 시계를 들여다보던 조장은 갑자기 중심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앗!”

    비명과 함께 지프는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1982년 8월17일. 케냐의 조모케냐타 공항. 전두환 대통령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도착하면서 한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이 시작됐다. 북한은 그동안 전통적으로 반미세력이 강한 아프리카에서 외교 우위를 점했지만 이제 전세가 역전될 처지가 됐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한국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봤고, 한국의 경제성장 모델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한국 대통령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전 대통령의 케냐 방문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방문 일정을 마친 전 대통령은 다음 순방국인 나이지리아로 향했고 그곳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동안 북한은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고 선전했는데, 한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을 통해 한국은 미국의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해서 훌륭하게 경제자립을 이룩해낸 모범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나이지리아를 이륙한 비행기는 다음 방문국인 가봉의 리브르빌의 레옹음바 국제공항을 향해 기수를 높였다.

    가봉 강 북쪽 어귀에 위치한 오웬도 항은 광석을 비롯한 가봉 천연자원 수출의 전진기지이자 고급 호텔과 호화 요트가 즐비한 고급 휴양지다. 호화 요트의 주인은 대부분 수출입업에 종사하는 프랑스 사람들인데, 1978년에 가봉 횡단 철도가 개통되면서 리브르빌과 코코비치, 메두노, 캉고, 그리고 내륙의 은졸레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며 오웬도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오웬도 항에 동건애국호가 조용히 입항했다. 무역선을 가장했으나 테러를 감행한 공작조를 태우고 가봉을 빠져나오는 것이 주임무다. 남한 대통령이 방문하는 때에 리브르빌에서 10㎞밖에 떨어지지 않은 오웬도에 북한 배가 입항하는 것은 충분히 주의를 끌 만했지만, 가봉 당국은 선원은 상륙하지 않고 물자만 하역하고 출항하겠다는 동건애국호의 입항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과 북의 첨예한 대립은 남의 나라 일이었다.

    1960년에 프랑스에서 독립한 가봉은 아프리카 중서부 해안에 위치한 나라로 석유, 망간, 우라늄, 원목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외국인 투자가 활발해서 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잘사는 편에 속하는 나라다. 수도는 인구 25만명의 리브르빌. 적도기니와 카메룬, 콩고인민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한국과는 1962년, 북한과는 1974년 수교했다.

    가봉은 아프리카 외교전의 최전선이었다. 남과 북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제3국가들로 구성된 AA그룹을 주도하고 있는 가봉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국은 가봉공화국 봉고 대통령의 방한을 기념해서 우표와 담배도 발매했고, 새로 개발된 승합차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봉고’로 정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리브르빌에 15층짜리 백화점도 지어줬다. 당연히 가봉에서 가장 높고 가장 좋은 시설을 갖춘 빌딩이었다. 공을 들인 결과 가봉은 유엔에서 한국을 지지했고 한국은 외교전의 승자가 됐다.

    아프리카 순방에서 외교전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가봉을 빠뜨릴 수는 없다. 가봉에 당도한 전두환 대통령은 봉고 대통령의 영접을 받았다. 그런데 다가오고 있는 위협을 예고라도 한 것일까. 가봉 의장대가 애국가 대신에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공작조, 국경을 넘다

    검문소에 당도한 공작조 3인은 바짝 긴장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면했지만 지프가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도보로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게 됐는데 검문이 예상보다 삼엄했다. 가방을 열면 무기와 폭탄, 그리고 원격기폭장치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달리 방법이 없다. 조장은 태연한 척 심사대로 향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안녕하시오.”

    조장의 입에서 능숙한 일본말이 나왔다. 공작조는 일본 상사원으로 신분을 가장하고 있었다.

    “우라늄.”

    조장이 우라늄 사업으로 입국하는 것임을 밝히면서 여권을 들여다보는 경비병에게 슬쩍 달러를 찔러줬다. 경비병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얼른 통과 스탬프를 찍어줬다. 공작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른 검문소를 빠져나왔다.

    “무사히 국경을 통과해서 한시름 덜었지만 이제 어떻게 합니까? 겨우 50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조원이 걱정을 했다. 지프가 구르는 바람에 예정대로 계획을 진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기차를 타면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조원이 기차를 탈 것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조장은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지금 리브르빌은 경계가 엄중할 것이다. 기차로 이동하는 동안 수차 검문을 거쳐야 할 텐데 그때마다 무사히 피해간다는 보장이 없었다.

    “예정대로 적도기니를 통해 들어간다. 공항으로 가자.”

    잠시 생각하던 조장이 손을 들고 택시를 불렀다. 공작조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제발 비행기 시간이 맞아야 할 텐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공항에 도착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적도기니의 음비니로 향하는 비행기 편이 있었다.

    “음비니에서 자동차로 코코비치로 이동한 다음에 코코비치에서 피로그(모터가 달린 통나무배)를 빌려서 무니 강을 건넌다. 가봉의 코고에 상륙하면 시간 안에 리브르빌로 갈 수 있다.”

    조장이 수정된 계획을 두 조원에게 알렸다. 과연 비행기가 제 시각에 이륙할지, 자동차와 배를 제때 빌릴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지만 예정대로만 움직이면 예정된 시간에는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루트가 복잡해지면서 신분이 노출될 염려가 커진 점이다.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신분을 노출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다.

    “철수한다”

    공작조는 일단 프랑스빌 시내로 돌아가기로 했다. 비행기가 출발하려면 아직 시간이 있는 데다 변경한 계획을 상부로부터 승인받아야 했다. 프랑스빌로 돌아와 호텔을 잡은 조장은 얼른 브라지빌의 주(駐)콩고 북한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부부장은 자기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며 회답을 줄 테니 호텔에서 대기하라고 했다. 조장이 생각해도 부부장이 단독으로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여긴 조용하군. 짐바브웨는 온통 난민들로 들끓었는데.”

    조원이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지난해 군사고문단으로 짐바브웨에서 폭풍여단을 이끌고 군사작전을 벌인 바 있다.

    “동건애국호는 예정대로 오웬도 항에 들어왔겠지요?”

    다른 조원이 물으나마나한 것을 물었다. 불안하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다. 평양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까. 설사 암살에 성공하고 무사히 동건애국호로 도피하더라도 국경검문소와 공항을 거치면서 드러난 행적으로 인해 꼬리가 잡힐 위험이 큰 상황이다. 북한의 소행임이 드러나면 대가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가봉은 물론 아프리카의 47개 국가와 전부 단교할 각오를 해야 한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조장은 겁이 덜컥 났다. 새삼 지프가 뒤집힌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최종 결정은 어디에서 내려올까. 김일성 주석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갈까, 아니면 김정일 조직지도부장이 결정을 내릴까. 조장은, 김일성 주석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가면 중단 지시가 내려올 것이고 김정일 조직지도부장이 최종 결정을 한다면 결행을 불사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조장은 숨을 크게 내쉬고서 천천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두 조원이 긴장해서 조장을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지시사항은 간단명료했다. 조장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철수한다.”

    조장의 입에서 짧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마지막 기회는 미얀마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군부 철권통치에 의한 인권탄압은 계속되고 있었다.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번영이 뒤엉키면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국내와 해외에서 정반대로 나타났다.

    전두환 대통령은 국내의 불만을 외교의 성공으로 만회할 생각으로 계속해서 해외 순방에 나섰다. 1982년에 아프리카 순방을 성공리에 마친 데 이어 1983년에는 서남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오세아니아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기로 했다.

    첫 순방국은 미얀마. 미얀마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지만 비동맹국가회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순방에서 빼놓을 수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미얀마를 시작으로 스리랑카와 인도, 호주와 뉴질랜드를 차례로 돌 예정이었다. 한국은 5년 후 올림픽을 치른다. 그런데 아직 한국의 안보와 내정을 우려하는 나라들이 많이 있다. 적극적인 외교와 홍보를 펼칠 필요가 있었다.

    평양 인민무력부 정찰국. 장성우 소장은 세 사람의 공작조와 차례로 악수를 나눈 뒤 앉으라고 했다.

    “남조선 대통령이 다시 해외 순방에 나선다. 이번에는 절대로 실수해선 안 된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실패는 이동경로가 너무 길어 돌발상황에 대처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얀마에서는 그런 일이 생기기 않을 겁니다.”

    공작조장 진모 소좌가 자신 있는 얼굴로 대답했다. 정찰국에는 공작조가 여럿 있는데 그들끼리 묘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만하지 마라! 이번에도 위대한 지도자 동지를 실망시켜 드려서는 안 되니까.”

    장성우 소장이 조장 진 소좌를 비롯해서 조원 신기철 대위와 강민철 대위에게 차례로 눈길을 줬다. 세 사람의 공작조는 정찰국에서 추리고 추린 최정예 공작원이다. 이들은 미얀마를 순방하는 전두환 대통령을 수도 양곤에서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장성우 소장이 상을 찌푸렸다.

    서울 → 필리핀 → 가봉 → 미얀마 15년 이어진 질긴 암살극의 끝

    1974년 8월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의 공판 광경.

    “역시 저격이 확실하지 않을까? 폭약보다는 그쪽이 확실할 것 같은데.”

    공작조는 폭약을 이용해서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할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장성우 소장은 별로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동안 북한은 여러 차례 한국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다. 전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가장 성공에 근접한 것은 문세광의 저격이었다. 비록 대통령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가까이 접근해서 총탄을 날렸던 것이다. 그에 비해 폭약에 의한 암살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설치하기도 쉽지 않지만 제때 터뜨리는 건 더 어렵다. 이미 국립묘지 현충문에서 실패를 맛본 적이 있다.

    “여러 정황을 검토한 결과 폭약이 제일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시한폭탄이 아니고 원격조종으로 폭발시킬 생각입니다.”

    진 소좌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공작조도 저격을 고려했다. 하지만 원거리 조준저격을 하려면 주변에 고층건물이 있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미얀마의 양곤 거리에는 마땅한 고층건물이 별로 없었다. 성공 확률을 높이려면 근접 저격을 해야 하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근접사격을 하려면 환영객으로 가장해서 저격 대상에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데, 미얀마는 더운 나라라 두툼한 옷을 입을 수가 없기에 권총을 숨기기가 마땅치 않다. 그리고 무사히 빠져나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신분을 노출하면 안 된다는 것은 철칙이었다.

    “소이탄을 함께 터뜨릴 생각입니다. 그리되면 일대가 불바다로 변하면서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폭파 담당 신기철 대위가 보충 설명을 하고 나섰다.

    “그야 그렇지만…. 아무튼 현지에 당도하거든 지형을 잘 살피고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행여 전파가 차단당하거나 교란당할 우려가 없는지도 면밀히 살피고.”

    장 소장이 꼼꼼하게 챙겼다. 폭파 공작에는 여러 변수가 따르게 마련이다.

    “잘 알겠습니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진 소좌가 그를 안심시켰다. 이 무렵 북한은 극도로 초조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동안 추진한 암살 계획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면서 미얀마가 마지막 기회가 될 확률이 높았다.

    동건애국호가 내려놓은 보트

    1983년 10월6일. 양곤 앞바다 시리암 섬. 동건애국호가 항구에 입항했다. 입항 목적은 시리암 섬에 있는 주석 제련소에 물자를 하역하는 것. 북한은 4년 전부터 시리암 섬에서 주석제련소를 가동하고 있었다. 미얀마 통관 당국은 동건애국호가 물자만 내려놓을 것이라 하자 순순히 입항을 허가했다. 남과 북은 40년째 첨예한 대립을 이어가고 있지만 외국인에게는 특별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주의하지 않으면 공식 행사에서 국기가 바뀌어 게양되고 상대의 국가가 연주되는 일도 빚어졌다.

    어둠이 깔리자 동건애국호에서 소리 없이 소형 보트가 내려졌다. 소형 보트에 승선한 5명은 신속하게 배를 저어 시리암 섬으로 다가갔다. 보트에 탄 다섯 사람은 정찰국 소속의 공작조 3인과 승무원 2인. 공작조 3인은 시리암 섬에 이르러 제련소 직원으로 위장하고 본토로 잠입할 예정이다.

    “여깁니다.”

    서울 → 필리핀 → 가봉 → 미얀마 15년 이어진 질긴 암살극의 끝

    1983년 아웅산 묘소 암살 시도 때 북측 공작원을 미얀마에 잠입시킨 것으로 밝혀진 북한 공작선 동건애국호.

    기다리고 있던 현지 안내원이 다가왔다. 조장 진 소좌와 두 조원이 날랜 동작으로 섬에 상륙했고 보트는 동건애국호로 돌아갔다. 공작조의 손에는 묵직한 가방이 들려 있었다.

    “어찌 됐소?”

    진 소좌가 가방을 챙기며 안내원에게 물었다.

    “남조선 대통령의 아웅산 묘지 참배는 9일 오전 10시로 예정돼 있습니다.”

    진 소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일정이 변경되지 않았다.

    “현지 경비는?”

    “특별히 강화된 것은 없습니다.”

    그것도 다행이었다.

    “작업복은 준비됐소?”

    공작조 세 사람은 주석제련소 직원을 가장하고 양곤 시내로 잠입할 예정이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닙니까?”

    “시간이 없소. 꾸물대다 경비가 강화되면 만사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오. 그런데 가방이 괜찮을까?”

    진 소좌는 폭발물과 원격조종장치가 들어 있는 가방이 자꾸 신경 쓰였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련소 직원이 외출 나가는 거라면 열어보지 않을 겁니다. 물자를 구입하러 종종 양곤 시내로 나가곤 하니까요.”

    안내원이 걸음을 서두르며 대답했다.

    천장에 클레모어, 소이탄 설치

    승용차를 살펴본 경호처장은 만족을 표했다. 티타늄과 강화 플라스틱으로 보강된 차체는 38구경은 물론 45구경 권총으로도 뚫을 수 없다. 혹 타이어가 터지더라도 옆으로 돌거나 전복되지 않도록 특수 서스펜션과 프레임이 추가돼 있었다. 솔직히 미얀마의 경호 능력에 회의적이었는데 둘러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적어도 근접저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원거리 조준저격은 현지 여건상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경호에서 가장 위험한 때는 환영 인파로 인해 차량이 서행하거나 경호대상이 답례하기 위해 몸을 노출할 때인데, 그것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퍼레이드는 모두 생략됐다.

    “1호 차량 앞뒤로 동일한 종류의 차량을 1대씩 더 배치하고 좌우로 경호원을 6명 배치하겠다고 하는군요.”

    미얀마 당국의 경호계획서를 살피던 경호부처장도 만족을 표했다. 장기 독재통치를 펼치고 있기 때문인지 경호만큼은 선진국 수준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북한 정찰국 공작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북한의 공작조가 침투한 마당에 한국 대통령 경호실은 직접 경호를 통제하는 위치에 있지를 못했다.

    어둠이 깔린 아웅산 묘지를 향해 검은 그림자 셋이 쏜살같이 접근했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아웅산의 석관묘가 안치된 건물의 천장에 폭탄을 설치했다. 아웅산은 미얀마 독립의 영웅으로 미얀마를 방문하는 외국 원수들은 반드시 그의 묘지를 참배하게 돼 있다. 전두환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어서 미얀마의 최고 실력자인 사회주의계획당 네윈 의장과 회담하기 전에 아웅산 묘지를 참배할 예정이었다. 북한 공작조는 그 시각에 맞춰 폭탄을 터뜨릴 계획이다. 어느 나라나 국립묘지는 교통편도 편리하면서 조용한 곳에 있게 마련이서 아웅산 묘지도 양곤 번화가와 고급 주택가 사이의 구릉 숲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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