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과의 협상을 고민하는 미국의 딜레마는 외교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이는 더 큰 선(善)을 위해서 민주국가 지도자들이 테러와 폭정을 일삼는 독재자들과 마주하고 협상을 해나가야 하느냐는 문제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이런 고민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은 구소련과 리비아 등을 두고 이 같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이때의 경험은 북핵(北核)이라는 난제를 마주한 미국과 한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을까. 최근 저서 ‘Getting to Yes in Korea’를 통해 이 문제에 천착한 관련 전문가의 글을 번역, 소개한다. <편집자>
이 모든 질문에 대해 회의론자들은 “아니오”라고 답한다. 독재자 대부분의 생각은 제로섬 게임(zero-sum game)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고, 평화를 촉구하는 유권자의 압박을 아예 무시해버린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또 독재자가 조약에 서명을 한다 해도 상황만 허락한다면 언제라도 그 조약을 파기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신중하면서 좀 더 희망적 시각의 분석가들은 위의 질문에 대해 제한적 의미로 “그렇다” 라고 답한다. 즉 생존을 비롯한 기타 안보 문제가 걸려 있다면, 민주주의 국가 못지않게 독재정권 또한 무기 및 기타 협정 체결 및 준수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경고에 동의한다. “신뢰하되 검증하라(Doveryai no proveryai).”
‘상황이 변해도 그대로?’
사실 미국 역대 대통령 대부분은 ‘악당’들과 대화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첫 임기 동안 예외였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이란, 북한 독재정권의 변화를 촉구하면서 사실상 모든 협상 가능성을 배제했다. 이전에 보여줬던 대(對)러시아, 중국, 리비아 정책과는 달리 미국은 과거의 사슬을 끊고 바깥세상과 손을 잡고자 하는 북한 내 세력을 찾아내 이들을 지원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2009~10년 오바마 행정부의 태도는 북한에 다음과 같은 프랑스 격언을 생각나게 해주었을 것이다. “상황이 더욱 변할수록, 상황은 더욱 그대로다(Plus 괶 change, plus c’est la meme chose).”
미국과 러시아 간 군축 및 기타 안보 문제에 관한 협상은 1940년대에 시작됐고 21세기까지 계속됐다. 양국 협상은 1950년대 말에야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1963년과 1964년에 몇몇 제한적인 합의안을 이끌어냈다. 이는 1968년 핵확산 금지조약(NPT)으로 이어졌고, 1970년대 대탄도탄 요격 미사일 및 기타 전략적 무기 조약, 1987년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 1990년 유럽 재래식 무기 감축 조약, 그리고 1991년과 1993년에는 두 개의 전략 무기 감축 조약이 체결됐다.
10년 넘게 으르렁대며 싸움과 협상을 되풀이하던 미국과 리비아는 2003년 리비아의 대량 살상 무기 포기를 담은 합의안을 타결했다. 미국과 영국 및 국제단체의 시찰단이 리비아의 장거리 탄도 미사일과 화학무기 및 핵무기 프로그램 해체에 나섰다. 2005년 5월2일 미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보였던 스티븐 래더메이커는 핵확산방지 검토회의에서 리비아의 선택은 “지금과 같은 핵확산방지 규범이 지배하는 세상에 핵확산방지조약 준수 국가가 되는 것은 결코 늦지 않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리비아는 그 결정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1981년 중단됐던 미국과 리비아의 외교 관계는 2006년 복원됐다.
공화당 및 민주당 지도자 대다수는 구소련과 맺은 무기 관련 조약을 승인하는 반면, 고위급 공화당 의원들은 북한과의 거래가 갖는 가치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1994년의 ‘기본 협정’이 2002년에 파기됐을 때 공화당 일각에서는 “이미 경고했던 것이다”며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협정을 체결할 때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주요 요인들은 다음표에 정리돼 있다. 구소련과 리비아의 경우 대부분의 요인이 군축 협정 체결에 긍정적으로 작용했거나 적어도 중립적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구소련과 리비아의 경우와는 달리 같은 요인도 북한의 군축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봉쇄와 포용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은 구소련에 대해 포용보다는 봉쇄 정책을 택했다. 하지만 구소련과 유럽 국가들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냉전체제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58년 미국과 구소련은 광범위한 문화 과학 분야 교류를 시작했다. 미국은 구소련의 독재적이면서도 때로는 위협적인 정권에 대해 완화하고 변형시킨다는 대 원칙 하에 봉쇄 정책과 포용 정책을 병행해나갔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독재자들에게 당근보다는 채찍을 휘둘렀다.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부시 전 대통령이 2009년 8월1일 오후 제주의 한 호텔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게 만일 소련이 리투아니아의 독립운동을 억압한다면 미국은 소련과 맺은 경제 협력관계를 동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기에는 수출입 신용보증, 미국 상품금융공사 신용보증, 소련의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 특별 부회원 지위 획득에 대한 지원, 그 외 다수의 기술 지원 프로그램이 포함돼 있었다.
구소련의 마지막 10년간 미국이 소련과의 관계에서 얻은 경험은 현재 미국과 한국의 대북 관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80년대 중반까지 소련은 노쇠한 정치 지도자 3명이 이끌고 있었고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과는 거의 협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5년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여러 차례 회담을 통해 중대한 합의안을 이끌어냈고, 1988년에서 1991년까지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그 기조는 유지됐다. 그 연장선상에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 말 소련은 해체됐다.
자칭 현실주의 진영과 신(新)현실주의 진영에서는, 레이건이 주창한 전략적 방어 구상(SDI)이 소련을 굴복시키고 무너뜨린 주 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이러한 분석이 맞다면, 미국은 북한을 굴복시키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사실은 이러한 역사 해석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미국 전역의 미사일 방어 체제 구축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긴장 완화를 주창하는 소련인들의 목소리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소련 지도부가 전략적 방어 구상의 위협이 얼마나 요원한 것인지 인식하고 나서야 고르바초프는 중거리 핵전력 조약과 기타 군축 조약에 합의하게 된 것이다.
서방 국가들과 민간단체들은, 정례화된 교류 이외에도 소련권역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에게 ‘정신을 위한 마셜 플랜’을 제공했다. 이 원조 계획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조지 민덴(George C. Minden)은 서방 세계가 “(구소련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진공상태”를 마주했고 이제는 서방 국가들이 나서서 “좌절과 무의미, 그리고 누락으로 가득 찬 삶에 맞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원조 계획이 시행된 37년 동안 민덴이 이끌고 CIA가 재정 지원하는 국제문학센터는 서유럽 도서와 잡지 등 1000만권을 동유럽과 소련으로 전달했으며, 1991년에는 전달 권수가 약 30만권에 달했다.
북한 사람들이 사고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하기 위해 (미국의) 아시아재단은 북한에 12만권의 책을 보냈다. 이는 연간 9000권에 달하는 양이다. 북한 당국자들은 과학과 영어 교육 관련 책을 선호하지만 아시아재단은 인문학, 사회과학, 법학 관련 서적들도 함께 보내고 있다. 하지만 책 대부분이 국립 중앙도서관 격인 평양 인민 대학습당에 비치되거나 일부는 다른 기관에 보내진다고 한다. 해당 기관 직원들은 아주 쉽게 이 책들을 접할 수 있지만 학생들의 경우는 불확실하다. 미국은 2008년 2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북한에 보냈지만, 북한은 이에 대한 답례를 하지 않았다. 또 유엔 주재 북한 외교관들은 미국 학생들과 학자들의 토론회 초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리비아와의 협상이 주는 교훈
미국이 공산주의 정권뿐 아니라 리비아와 협상해본 경험은 국제무대에서 적대 국가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그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대(對)리비아 정책은 크게 3단계로 나뉜다. 먼저 레이건 행정부는 리비아 정부를 위협하고 아마도 최고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를 살해하기 위해 폭격을 포함한 강경책에 의지했다. 이후 조지 H W 부시 및 클린턴 행정부는 다자 외교와 강압책을 병행했다. 이 병행책을 통해 미국과 영국은 리비아와 비밀 협상에 돌입할 수 있었고, 1999년에 이에 대한 긍정적인 결과물을 받아볼 수 있었다. 이 기조는 2003년 조지 W. 부시 행정부까지 이어졌다.
이 성공적인 접근 전략의 특징은 믿을만한 수준의 강제력(군사 위협과 경제 제재 조치)과 능수능란한 외교술의 절묘한 조화였다. 그리고 언제나 다음 세 가지 기준에 철저하게 부합했다. 비례의 원칙, 호혜의 원칙, 강제력의 원칙이다. 미국이 당시 요구한 것은 리비아의 정권 교체가 아니라 정책 변화였다. 미국은 당시 국제사회로 편입하고 싶어하는 리비아 내 엘리트 계층의 욕구를 ‘전달 벨트’로 적극 활용해 카다피를 압박했다.
2009년 7월, 한때는 레이건이 ‘미친 개(mad dog)’라고 부르기도 했던 카다피가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G8 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불과 두 좌석 떨어진 자리에서 파스타를 즐겼고 심지어는 오바마 대통령과 악수까지 했다. 당시 카다피는 아프리카연합 의장으로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8월 스코틀랜드 소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로커비 상공 여객기 폭파사건의 범인이 인도주의 차원에서 풀려났을 때, 리비아는 범인을 자국민이라는 이유로 영웅으로 환대했다. 이 때문에 카다피는 또다시 많은 서구인의 눈에 불량아 중 불량아로 비쳤다.
수십 년간 미국은 소련을 비롯해 중국, 쿠바, 리비아, 이란 등 요주의 국가들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시도를 해왔지만 이들의 정책이나 정권의 확실한 성격 변화를 가져오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미국이 포용 전략으로 소련, 중국, 리비아와 관계가 개선되면서 서로 매우 유용하면서도 폭넓은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거의 반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끊임없는 압박은 미국과 쿠바 국민의 무수한 잠재 이익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북한, 소련·리비아보다 어려운 이유
군축 협상과 관련, 표에 나와 있는 요인들을 살펴보면, 왜 북한이 소련과 리비아보다 합의에 도달하기 힘든 상대인지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군사적 균형
소련은 1950년대 중반 이래 신뢰할 만한 수준의 핵 억지력을 보유해왔고 1960년대 말 이후부터는 많은 무기를 폐기할 여유가 충분했다. 이와는 반대로, 리비아는 포기할 수 있는 무기가 거의 없었다. 자체적으로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거나 조립할 수 있는 능력도 거의 없었던 리비아는 테러 행위 외에는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북한은 비록 리비아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이지만, 상대적으로 강한 군사력 즉, 협상에서 유리한 ‘에이스 카드’를 보유하고 있다. 북한은 국방, 억지력, 협박, 협상, 국가 위상, 이 모든 것을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다.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선제 공격 혹은 보복 공격을 통해 남측을 불구로 만들 수 있도록 배치돼 있다. 북한은 최소한 두 개의 공군 저격여단과 강습 부대를 남측 후방 깊숙이 침투시킬 수 있는 운송기 및 헬리콥터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또 북한은 근 20년간 핵무기를 만드는 재료 및 노하우 확보에 근접해 있었다. 북한은 2006년과 2009년 핵장치 실험을 감행했고 보유 플루토늄의 일부를 ‘무기화’했다고 주장했다. 핵실험의 실패 여부, 운반 가능한 핵무기 보유 여부에 관계없이, 북한은 자신들이 핵무기 보유국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주장한 것이다. 북한이 확실한 보상 없이 자신의 핵무기 및 미사일을 포기한다면 북한 정권의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고 지배층 내의 반발을 키우게 될 것이다.
▶유혈 분쟁의 경험
소련과 리비아는 미국과의 다툼에서 인명 피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6·25전쟁 당시 100만명 이상의 민·군 사망자가 발생했다. 간헐적인 미국의 핵무기 공격 위협과 예방 전쟁의 위협으로 전쟁의 기억은 더욱 굳어졌고, 이는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을 신뢰하거나 핵무기 포기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과거의 깊은 상흔은 미국의 탐욕을 부각하는 선전 활동을 통해 더욱 부풀려졌고 계속해서 남아 있게 되었다. 북한 대중은 6·25전쟁 발발의 진짜 원인, 전쟁이 남긴 여파 혹은 유산에 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경제적 압박
과거의 소련과 현재의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뿐만 아니라 석유, 가스, 각종 희귀 금속 물질 등 서구 세계가 필요로 하는 자원을 이용해 협상에 임할 수 있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미국의 석유 생산량은 1970년대부터 감소하기 시작했고, 또 같은 시기에 유럽의 수입가스 수요는 매우 절박한 상황에 있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러시아와 유럽 사이의 가스관 건설을 방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오늘날 러시아가 가스관 밸브를 잠그면 유럽 전체가 사시나무 떨 듯한다. 리비아 역시 서방 세계가 필요로 하는 석유와 가스를 보유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북한은 이렇다 할 경제적 지렛대가 없다. 광물 자원이 있긴 하지만 모두 다른 곳에서 조달이 가능한 것들이다. 수십 년간 북한은 달러 위폐와 마약 거래를 통해 돈을 벌었다. 평화 상태만 유지된다면 북한은 시베리아와 한국, 중국 사이의 석유 및 가스 송유관 통로로 활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시간과 돈을 요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북한에 더 많은 경제특구를 조성해 그곳에서 한국 및 외국 기업들이 북한 노동자들의 저렴한 기술력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북한은 경제특구를 통해 경화를 끌어 모았으면서도, 이러한 기회들을 아무렇지 않게 거부해버리기도 했다. 2008년 북한은 많은 한국인을 추방했고 한국인의 북한 관광도 억제했다. 소련과 리비아보다 훨씬 어려운 경제 사정이었음에도 북한의 지도부는 기존의 경제 논리를 거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기술 외에도, 소련은 서구로부터 식량 공급을 받아야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첫 핵군축 합의가 1963년에 있었는데 당시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밀을 수입했다. 존 F. 케네디 행정부는 미국산 밀을 소련에 수출하는 것을 소련과의 핵군축 합의에 대한 양보 조치로 여겼다. 이후의 미-소 군축 합의안들은 모두 공교롭게도 소련의 농작물 흉작과 맞물렸다. 인과관계까지는 아닐지라도 굉장히 흥미로운 상관관계로 볼 수 있다.
북한은 구소련과 현 러시아연방보다도 식량 수입 의존도가 훨씬 높다. 1950년대 이후로 많은 북한 주민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빠져 있었다. 1990년대 수 년간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고 21세기 초에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시설 난방과 공장 및 자동차 구동에 필요한 석유 또한 크게 부족했다. 1963년 작황이 좋지 않아 소련이 결국 핵실험 금지 협약에 조인하게 된 것처럼, 북한 내 흉작 사태가 1994년 북한이 미국과의 기본 합의안에 서명하는 상황을 불러왔다.
북한의 이런 절박한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6자회담에서 북한이 보여준 비타협적인 자세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북한이 때론 몇 발 물러서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세우면서 입장을 뒤집기도 했다.
북한 지도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았다. 주체사상에 입각해 국가의 자립성을 자화자찬했다. 북한 정권은 모든 재원 분배에 있어 선군(先軍) 논리를 내세웠다. 이로 인해 일반 대중은 굶주림에 빠지게 되었고, 반면 지배 계층은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국내 정치
어떤 독재자는 다른 독재자들보다 훨씬 더 독재적일 때가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독재는 전제주의적이면서 무자비했다. 하지만 크렘린 독재는 이후 좀 더 집단적이면서, 전체주의적인 색채나 참혹함의 정도는 덜했다. 1953년 라브렌티 베리야가 처형된 이후에는 정권 승계를 위한 투쟁 중 죽임을 당한 지도자는 없었다. 스탈린은 근 30년, 흐루시초프 10년, 브레즈네프 18년, 유리 안드로포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 각 2년 미만, 고르바초프는 6년을 통치했다. 보리스 옐친은 거의 10년 동안 통치했고, 푸틴은 10년 넘게 정권을 유지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석유 산업 활황과 불황이 구소련/러시아와 리비아의 국내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오일 달러가 넘치면 민심을 얻을 수 있었고, 오일 달러가 빠져나가면 반(反)정부 목소리가 높아졌다.
리비아의 국내정치는 부족 간, 도농 간, 세속적인 현대주의 세력과 전통주의세력 간, 소수 부유층과 다수 빈곤층 간 격차로 인해 복잡한 양상을 띤다. 세대 간 격차 또한 심화되고 있는데, 교육을 받은 실용주의 노선과 종교 중심 노선 간의 불화로 인해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게다가 카다피는 1969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거의 40년이 되었다. 카다피의 친(親)서양 성향은 아들들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1991년 이라크전쟁 당시 미국과의 연합을 조심스럽게 지지한 대목이다. 하지만 미국의 압박에도 아랑곳없이, 리비아 정권은 내부 반대 세력들을 계속해서 탄압했다.
카다피와 마찬가지로, 김일성 또한 정치 라이벌들을 제거하고 숙청해야 했다. 하지만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북한을 반세기 넘게 통치해왔다. 현대 기술이 북한의 중앙 통제를 뒷받침해줄 수도, 혹은 약화시킬 수도 있긴 하지만, 김일성 왕조의 독재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북한 최고 지도자들과 다른 독재 국가 지도자들을 비교해보면, 과거 소련과 중국 지도자들보다 북한 지도자들이 군축과 데탕트에 반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 많다.
▶문화적 요인
미국의 입장에서는, 상이한 문명에서 비롯된 언어와 문화를 향유하는 나라보다는 소련의 지도자들을 이해시키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다. 물론 러시아의 그리스 정교 유산은 서구 기독교와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리비아나 북한이 걸어온 역사보다는 서구 문명에 더 근접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대학생 대부분이 러시아 고전 문학을 접했고 일부는 러시아의 발레와 고전 음악도 접했다. 하지만 리비아나 한국의 문화에 노출된 학생은 아주 미미한 숫자다. 교육을 받은 러시아인 대다수가 외국에 다녀본 적은 없지만 서구 문화에 상당히 친숙하다. 하지만 서구 문화에 노출된 리비아인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고 북한은 그보다 더 적은 상황이다.
미국인들은 협상 환경과 맥락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최종적인 결론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다. 미 외교관 크리스토퍼 힐은 외교관들을 농구 선수에 비유했다. 선수들 각자 골을 넣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리비아와 북한은 전체적인 맥락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개개인 사이의 유대감에 의지한다. 힐이나 로버트 L. 갈루치, 그리고 이들을 상대한 북한의 외교관들 같은 전문가들은 아마 이러한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상호 특수성을 이해하는 방법을 파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적 ‘체면’을 존중하지 않고 북한을 노골적으로 모욕한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 합의에 도달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들과 거래하기를 꺼린 미국은 합의점 도달을 향한 계기 마련을 스스로 방해하고 만 것이다.
또 다른 문화적 차이는 미국 외교관들이 독재 국가 외교관들보다 문제 해결에 더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이다. 미국은 모든 당사국이 진실하다면, 서로에게 이로운 합의안을 도출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보다 폭넓은 협력을 향한 문을 열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많은 독재자는 상호 이익을 기대하기보다는, 모든 정치 행위를 제로섬 게임으로 본다. 이러한 관점은 오랜 세월 동안 구소련과 리비아를 지배했었고, 북한에서는 여전히 그러하다.
독재자와 만찬을?
이런 상황을 이해한 다음 다시 한번 의문을 가져보자. 민주주의체제의 최고지도자들이 독재자들과 일대일 협상에 나서야 하는가? 전문가들에 따르면 협정의 세부 사항은 외교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이후에 국가 지도자들이 만나 최종 문서에 서명하는 방식이 현명하다고 지적한다. 둘째 만일 민주주의 국가 정상이 독재자, 특히 대량 살상 행위를 저지른 자들을 동등하게 대우하면, 도덕적 위상에 금이 간다는 우려가 있다.
만일 오바마를 인류의 희망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오바마가 김정일, 블라디미르 푸틴, 무아마르 카다피,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 같은 독재자들과 악수하는 모습을 본다면 인상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정상끼리의 만남은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첫째, 위험한 적대관계에서는 상호 위협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관계 정상화의 길을 열기 위해서 최고위급 회담이 필요할 수 있다. 독재자는 흔히 외교관의 역할을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다. 독재자는 최종 결정을 자신이 하길 원하고 그에 관한 홍보효과도 모두 차지하길 원한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 모두 미국 대통령과의 협상 의지를 자주 내비쳤다.
1994년 북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는 북한과 전쟁으로 치닫는 분위기를 잠재웠다. 일반 시민 신분으로 카터는 1980, 90년대를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적인 중재자로 알려졌다. 카터는 협상 참가자들에 대한 선입관은 회의실 밖에 두고 와야 한다고 믿었다.
“분쟁 당사자들은 분쟁을 끝내거나 적어도 현상의 변화에 대해 얘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이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건 간에 이들 사이에서 얘기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내 역할이다.”
카터의 활동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 현재의 정무에 간섭하고 독재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으려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 기록을 본다면, 카터가 개입하면서 니카라과는 민주주의로 평화적인 체제 이동을 이뤄냈고, 아이티 군사 정부도 평화로운 방식으로 정권을 인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터의 최대 업적은 미국과 북한 사이의 전쟁을 막고 1994년 공식 기본 합의문의 틀을 잡은 것이다.
카터와 김일성 모두 고위급 접촉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만일 김일성이 현직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면, 과거 주한 미군 감축을 이끌어낸 전직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했을 것이다. 파트타임 침례교 목사인 카터가 공산주의 독재자와 친밀한 관계를 일궈낸 것을 지켜본 많은 사람이 놀라움을 표했다. 하지만 카터는 종교를 통해 완벽한 인간도, 완벽한 정권도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김일성은 장로교 교인인 자신의 할머니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김일성은 북한 정권의 정치·경제 정책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북한 내 일부 기독교 의식을 허용했다.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김정일을 만난 당시, 김정일은“북한과 미국 양측이 서로 진실되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희망했다.
일부 지도자들은 상대 지도자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대화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지 W. 부시는 김정일에 대한 혐오감을 피력했지만 2007년 12월 김정일에게 보낸 서신에서 ‘김 위원장 귀하’라는 표현을 쓰면서 감정을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카터의 중재 능력 배워야
현명한 대북 협상에는 “외교, 경제, 군사, 정치, 법,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온갖 종류의 도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적합한 도구를 쓰거나 혹은 여러 도구를 묶어 활용하는 것이다.” 효과적인 대북 협상을 위해서는 미국 내 관계 기관 간의 공조, 동맹국 및 이해 당사국들과의 공조도 필요하다.
환경이 전체 맥락을 결정하긴 하지만, 협상을 진행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다. 미국과 북한이 협상에 동참하는 4개국의 협조를 통해 당사국들의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미-북 관계 구축에 매우 중요하면서도 실현 가능한 일일 것이다. 중국, 한국, 일본, 러시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확보하는 기본 틀 안에서 미국과 북한이 양자 협상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외교 전문가들은 세부적인 사항들을 마련해야 한다. 6자회담 당사국 외교 장관들이 관련 조약 문서에 서명을 하게 되면, 민주주의 국가에 도덕적인 혼란도 주게 될 것이다. 정상회담이 평화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면, 미국 대통령이 북한 최고지도자를 만나서 합의를 확실하게 종결지어야 한다.
서두에서 내놓은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Yes)’이다. 민주체제 지도자는 독재자와 협상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한 전직 미 대사의 생각처럼, 독재자에게 ‘동의(Yes)’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도덕성 혹은 역사를 설교하기보다는 실제 합의가 어떻게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 ‘Global Asia’는 동아시아재단이 발간하는 국제문제 전문 계간 영문저널이다. ‘21세기 아시아가 열어가는 세계적 변화의 형성과정을 주목한다’는 기조하에 아시아 지역 주요 현안에 관한 공론의 장(場) 역할을 맡고 있다. 웹사이트는 http://globalasia.org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