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비서방(秘書幇)이 간다! 권력 정점 치닫는 ‘王참모’들

링지화 당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판공청 주임, 왕후닝 당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 하종대│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전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입력2010-12-02 17: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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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지도자를 그림자처럼 보좌해온 최측근 막료와 핵심 이론가, 링지화와 왕후닝.
    • 주군(主君)을 빛내기 위해 주군 뒤에 꼭꼭 숨어 정교한 밑그림을 그려온 두 ‘王비서’가 18기 지도부 출범을 2년 앞두고 대륙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일벌레’와 ‘꾀주머니’의 오랜 도광양회(韜光養晦)는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될 것인가.
    비서방(秘書幇)이 간다! 권력 정점 치닫는 ‘王참모’들

    링지화(왼쪽) 왕후닝(오른쪽)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참모장(幕僚長)’과 ‘중난하이(中南海)의 제1 브레인(智囊頭)’. 각각 링지화(令計劃·54)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판공청 주임과 왕후닝(王?寧·55) 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을 이르는 말이다. 링 주임은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가 주임을 맡고 있는 중앙기구편제위원회 위원 겸 중앙기구편제위원회판공실 부주임도 맡고 있다.

    1956년 10월과 1955년 10월생으로 꼭 한 살 차이인 두 사람은 적잖은 공통점을 지녔다. 우선 후 주석의 최측근(身邊人)으로 ‘비서방(秘書幇)’이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비서방이란 당 최고지도자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직책을 오래 맡아온 사람을 통칭하는 말로, 상하이방(上海幇)이나 중국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출신의 퇀파이(團派)처럼 계파의식이 뚜렷한 것은 아니다. 서로 모셔온 주군이 다르고 정치적 성향이나 지향도 다르기 때문이다.

    링 주임은 후 주석을 15년 넘게 보좌해온 정치참모다. 후 주석의 ‘수석막료’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왕 주임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브레인으로 발탁돼 후 주석에 이르기까지 2대에 걸쳐 정책 브레인으로 뛰고 있다.

    후 주석의 ‘정치 연출’은 이들 두 사람에 의해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왕 주임은 후 주석의 두뇌와 정책을, 링 주임은 후 주석의 모든 일상사를 책임진다. ‘얼런주안(二人轉)’은 2명의 배우가 가무와 재담으로 관객을 웃기는, 중국 동북지역의 전통 만담극이다. 링 주임과 왕 주임을 얼런주안 배우로 일컫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지방 제후’ 무경험이 약점



    또 하나의 공통점은 2012년 10월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구성될 제18기 중앙위원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서 당과 국가의 최고지도부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링 주임은 9인으로 구성된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링 주임을 상무위원으로 가장 강력하게 미는 사람은 후진타오 주석이다. 홍콩 언론과 중국 정치에 정통한 학자들에 따르면 후 주석은 지난해 10월 열린 제17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에서 링 주임을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올리려 했다가 다른 계파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장쩌민 전 주석이 당 총서기 시절 자신의 책사이자 최고 정치참모인 쩡칭훙(曾慶紅)을 5차례나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밀었으나 실패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당시 후 주석은 링 서기를 후보위원으로 선출할 수 없다면 시진핑(習近平·57) 국가부주석의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선출안도 안건으로 올리지 말자고 제안해 관철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시 부주석이 스스로 준비가 덜 됐다며 고사했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중국의 정치권에 정통한 소식통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한다.

    왕 주임 역시 2년 뒤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링 주임처럼 9인의 상무위원회에 진입하진 못하더라도 25인의 정치국 위원에는 무난히 뽑힐 것으로 보인다. 왕 주임은 특히 차세대 지도부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장 전 주석과 후 주석에게서 모두 신임을 받고 있어 호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링 주임과 왕 주임은 약점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지방 제후’ 즉 지방의 당 서기나 성장(省長)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다. 심지어 지방 정부에서 관료로 일해본 경험도 극히 짧거나(링 주임) 아예 없다(왕 주임). 이는 국가대사를 논의하고 나아가 국가를 이끌어가는 당 중앙정치국 이상의 국가영도자가 되기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후 주석과 장 전 주석이 2012년 가을 이전에 링 주임과 왕 주임에게 경력 보완 차원에서 지방 당 서기 자리를 줄 것이라는 예상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별 움직임이 없다. 장 전 주석은 2004년 초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후 주석에게 물려주기 직전 왕 주임을 푸젠(福建)성 서기로 내려 보내는 방안을 적극 검토했다. 왕 주임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이론을 직접 현장에서 실행해보고픈 생각이 굴뚝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번 내려가면 베이징으로 영원히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우려와 함께 부패가 심하기로 유명한 푸젠성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과거 사례를 살펴보면 지방 제후 경력이 없다고 모두 최고지도부에 진입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당 대외연락부와 중앙판공청 중앙서기처에서 오래 일한 차오스(喬石·86)는 13, 14기 모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냈고,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 장쩌민 등 3명의 주군을 모셨던 원자바오도 지방 제후의 경력이 없지만 정치국 위원과 상무위원, 나아가 권력서열 3위의 국무원 총리에까지 올랐다. 후 주석, 원 총리와 더불어 제4세대 지도부에서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한 쩡칭훙 전 국가부주석 역시 장 전 주석의 비서 출신이다.

    링 주임과 왕 주임의 또 다른 약점은 둘 다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데다 두 사람을 지지하는 세력기반이 없다는 것이다. 후 주석의 행동거지를 많이 닮은 링 주임은 언론 앞에 나서는 것도 극구 꺼린다. 왕 주임은 정책 연구가 아니라면 대학으로 돌아가 학자의 길을 걷기를 더 바란다. 치열한 권모술수와 다툼이 난무하는 중국의 정치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다.

    ▼ 링·지·화

    현재 중국 정계에서 후 주석의 측근은 적지 않다.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지낸 후 주석에겐 공청단 출신의 측근이 특히 많다.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선 권력서열 7위의 리커창(李克强) 상무위원이 대표적이다. 중앙정치국 위원 중에도 리위안차오(李源潮) 중앙조직부장, 류옌둥(劉延東) 국무위원, 왕양(汪洋) 광둥(廣東)성 당 서기 등 공청단 출신이 5명이나 된다.

    하지만 후 주석을 15년 이상 보좌한 사람은 링지화 주임, 그리고 후 주석을 25년째 보좌해온 수행비서 격인 천스쥐(陳世炬·50) 당 총서기 판공실 주임 겸 국가주석 판공청 주임뿐이다. 링 주임은 1999년 중앙판공청 부주임을 맡은 이후 국내외 행사장에 나서는 후 주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가 나타난 장소엔 20~30분이 지나면 어김없이 후 주석이 나타난다. 그는 행사장의 안전부터 마이크의 높이가 후 주석의 키에 맞는지까지 사전에 철저히 점검한다. 그래서 이들 두 사람은 ‘후 주석의 그림자’로 불린다.

    링지화는 2007년 9월 제17차 당 대회를 앞두고 당 중앙판공청 주임에 임명됐다. 중앙판공청은 중국의 최고 권력기관인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직속기관으로 가장 중요한 중추기관 중 하나다. 공산당 고위 영도자의 연설문 작성, 회의 보좌 업무와 공산당 중앙정치국이 하달하는 각종 문건과 원고의 기초 및 개고, 교열, 고위 영도자들의 안전과 의료까지 책임진다. 한마디로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와 중앙정치국의 일상 업무를 모두 보좌한다고 할 수 있다. 5년마다 열리는 당 대회에서도 중앙판공청이 세세한 업무를 챙긴다.

    중국에서는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이라 해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측근을 중앙조직부장과 중앙판공청 주임 자리에 앉히지 못하면 최고실권자로 인정받기 어렵다.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인민해방군을 통솔하는 군 최고권력자의 자리. 중앙조직부장은 2008년 말 현재 7593만명으로 집계된 중국 공산당원 중 각 성의 당 서기와 성장 등 4100여 고위직을 포함해 640만 간부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당내 최고 핵심 요직이다.

    후 주석은 2004년 9월 장 전 주석으로부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집권 5년 만인 2007년 가을에야 링지화를 중앙판공청 주임에 임명하고 핵심 측근인 리위안차오를 당 중앙조직부장에 임명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당 중앙조직부장은 태자당(太子黨)의 영수인 쩡 전 국가부주석의 측근이자 범상하이방으로 분류되는 허궈창(賀國强) 상무위원이 맡았다. 또 중앙판공청 주임은 장 전 주석의 측근인 왕강(王剛) 정치국 위원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왕강 주임에게는 장 전 주석을 대신해 후 주석을 감시한다는 뜻의 ‘대리 감시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비서방(秘書幇)이 간다! 권력 정점 치닫는 ‘王참모’들
    ‘공작기기(工作器機)’가 별명

    링 주임은 공청단에서만 20년 남짓 근무했다. 1975년 고향인 산시(山西)성 핑루(平陸)현 공청단 위원회 간부와 부서기로 시작해 공청단 중앙선전부 이론처 부처장, 공청단 중앙서기처 판공실 주임을 거쳐 1995년 공청단 중앙선전부 부장을 마지막으로 떠날 때까지다. 30여 명에 달하는 중국의 국가영도자급 인사 가운데 공청단 재직 기간이 그만큼 긴 사람은 없다.

    그가 23세이던 1979년 공청단 중앙서기처로 자리를 옮긴 뒤 얼마 되지 않아 맡은 일은 선전 담당 서기인 가오잔샹(高?祥)의 비서 업무. 가오잔샹은 1982년 12월 개최된 제11차 당 대회를 앞두고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임명된 왕자오궈(王兆國)에 의해 서기에서 갑자기 밀려났다. 가오잔샹은 이듬해 허베이(河北)성 당 위원회로 자리를 옮기면서 링 비서에게 함께 갈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링지화는 장고 끝에 완곡하게 거절했다. 만약 그때 가오 서기를 따라갔다면 지금의 링 주임은 없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정치적 좌절을 맛본 가오는 그 뒤로도 제대로 승진하지 못하고 2001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정협) 상무위원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링 주임은 공청단에서 20년 이상 근무했지만 후 주석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와 제1서기로 재직하던 1982~85년 후 주석과 얼굴을 맞대고 일한 적은 없다. 링 주임은 1983~85년 중국 공청단 소속 학교인 중국청년정치학원에서 정치교육을 전공하며 연수를 마쳤다. 졸업식에서 당시 공청단 교장이던 후 주석을 겨우 볼 수 있었다.

    교육을 마치고 공청단 중앙선전부 이론처 부처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공청단 핵심 멤버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링 주임은 무슨 일을 시켜도 당차고 야무지게 해냈고 특히 그가 써낸 연구보고서는 상급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공청단의 서기로 있던 리커창, 리위안차오, 류옌둥 등 후 주석의 공청단 측근들로부터 재능과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후 주석의 지근거리에서 일한 것은 1995년 중앙판공청 조사연구실 3조 책임자로 발탁되면서부터다. 그는 이후 조사연구실 조장과 부주임, 주임을 거쳐 중앙판공청 부주임에 이어 2007년 9월 대망의 중앙판공청 주임 자리를 거머쥐었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출세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후 주석의 후원이 큰 힘이 됐다. 또한 한잉(韓英)을 비롯해 왕자오궈, 후 주석, 쑹더푸(宋德福), 리커창 등 공청단 중앙 제1서기 출신의 ‘5대 원로’로부터 모두 좋은 평가를 받은 것도 출세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 자신의 민첩한 사고와 타고난 근면성이 없었다면 이런 출세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하루 서너 시간 잠자는 것을 빼고는 오로지 근무에 전념한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어쩌다 탁구 몇 판 치는 게 전부다. 주위 사람들이 그를 ‘일벌레(工作機器·근무기계라는 뜻)’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할 만하다.

    “저는 선전하지 마세요”

    링 주임의 이름 ‘지화’는 한자 그대로 ‘계획(計劃)’이라는 뜻이다. 그의 맏형은 루셴(路線)이고 둘째형은 정처(政策·58)다. 바로 위 누나는 팡전(方針)이고 그는 셋째아들이다. 남동생은 완청(完成)이다. 링 주임의 둘째형 정처에 따르면 산시성의 처장급 간부이던 부친은 신문 읽기를 매우 즐겨했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이 막 건국됐을 당시 신문에 가장 많이 나오던 단어를 활용해 자식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노선’ ‘정책’ ‘방침’ ‘계획’이 나왔고 막내는 ‘다 이뤘다’는 뜻의 ‘완성’으로 지었다.

    하지만 노선과 정책, 방침과 계획이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며 범위가 갈수록 구체화하고 좁아지는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단순히 신문에서 본 글자 중 활용빈도가 높은 단어를 골라 이름을 지었다고 보긴 어렵다. 나름대로 뭔가 목표의식을 갖고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맏형 루셴은 세상을 일찍 떴다. 둘째형 정처는 산시성 발전개혁위원회 주임이다. 누나 팡전은 산시성 윈청(運城)시 의원 원장이다. 막내 완청은 신화(新華)통신이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랴오왕(瞭望)’의 내참부(內參部)에서 근무하다 얼마 전 인터넷 부문으로 옮겼다. 내참부는 중국 신문사, 통신사에만 있는 조직. 기자가 수집한 정보를 내부참고용 문서로 만들어 당정 간부에게 보고하는 부서다.

    부성장급 대우를 받는 링 주임의 부친 링후예(令狐野)는 이미 100세가 넘었다. 그는 젊을 때 산시(陝西)성의 지역 의약국장을 거쳐 산시성 화칭(華淸)간부요양원 원장을 지냈지만,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산시(山西)성 핑루(平陸)현의 궁핍한 산골로 들어왔다. 링 주임의 모친 역시 산부인과 의사였다. 그의 조상은 소수민족의 후예로, 당초 성은 ‘링후(令狐)’였다. 하지만 조상들이 훗날 한족화하면서 성을 한 글자 ‘링’으로 바꿨다.

    링 주임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매우 예의바르고 남과 잘 화합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전한다. 그는 좀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내외신 기자들은 그가 2007년 9월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임명됐을 때 얼굴사진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17차 당 대회 이후 인터넷에 올라온 것도 겨우 명함 사진 한 장이다. 그는 후 주석이 기자들에 둘러싸이면 곧장 멀리 자리를 뜬다. 어떤 질문을 해도 그의 답은 단 한마디 “기자 여러분, 고생 많습니다”다. 어쩌다 한 마디 더한다고 해야 “저는 선전하지 마세요”다.

    그는 과연 2년 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수 있을까. 정치권과 언론이 가장 주목하는 대목이다. 현재까지 거론되는 정치국 상무위원 예상 명단엔 그의 이름도 자주 오른다. 25명의 정치국 위원 예상 후보엔 거의 늘 낀다. 적어도 정치국 위원 자리는 확실하다는 얘기다. 게다가 18차 당 대회가 끝나면 리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에게서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후씨 천하에 링씨 당’

    중국에서는 벌써부터 ‘후씨 천하에 링씨 당(胡家天下令家黨)’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국민당 시절 장제스(蔣介石)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천궈푸(陳果夫)·천리푸(陳立夫) 형제를 중용했을 때 유행한 ‘장씨 천하에 천씨 당(蔣家天下陳家黨)’이란 말에 빗댄 표현이다. 후 주석이 링 주임을 그만큼 중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때문인지 링 주임은 항우(項羽)의 책사인 범증(范增), 유방(劉邦)의 장량(張良) 또는 한신(韓信), 장쩌민의 쩡칭훙, 수양대군의 한명회에 비유될 만하다. 링 주임이 없었다면 어느 행사장에 나와도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는 후 주석의 활동 역시 쉽지 않았으리라는 의미에서다.

    불쑥불쑥 말을 내뱉기를 좋아하는 신구이즈(辛桂梓·54) 공산당 윈난(雲南)성 위원회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은 차세대 지도부에서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될 후보로 시진핑(당 총서기 예상), 위정성(兪正聲·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예상), 리커창(국무원 총리 예상), 장더장(張德江·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예상), 링지화, 리위안차오(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예상), 왕양 등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중국을 다녀온 소식통에 따르면 리커창이 총리 후보에서 밀리면서 형식적으로는 권력서열이 한 자리 앞인 전국인대 상무위원장으로 가고, 총리 자리는 왕치산(王岐山) 부총리가 거머쥘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7월생인 왕치산은 총리직에 오르더라도 2018년 3월엔 나이 제한에 걸려 총리직을 내놔야 한다. 당 총서기와 전국인대 상무위원장, 국무원 총리는 중국 최고지도부의 핵심 요직으로 10년씩 임기를 보장해왔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나이 제한 역시 최근 들어서야 굳어지기 시작한 관행이라는 점에서 이렇게 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중국 학계와 정계에서는 그동안 9인의 상무위원회에 진입할 유력한 후보로 시진핑, 리커창, 왕치산, 리위안차오, 보시라이, 왕양과 함께 링지화를 들어왔으나 근래 들어 보시라이의 이름은 자주 빠지고 있다.

    ▼ 왕·후·닝

    왕후닝 당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은 당초 장쩌민 전 주석의 막료이자 ‘꾀주머니(智囊)’였다. 장 전 주석의 정치 이념과 기본 정책은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 전 주석의 대내외 이미지도 그의 손으로 만든 것이다. 장 전 주석의 해외 순방 때는 늘 ‘주석 특별 조리’라는 직제에 없는 직함을 달고 수행단에 합류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1995년부터 2002년 말까지 왕후닝의 직책은 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 조장에서 부주임으로 달라졌지만, 그의 역할은 시종일관 장 당시 주석의 ‘화장사’였다. 이미지 메이커였다는 얘기다. 왕 주임이 시나리오 작가 겸 연출감독이었다면 장 당시 주석은 주연배우였다. 그래서인지 2002년 가을 후 주석이 집권할 때 많은 사람은 그가 학교로 되돌아가거나 최소한 당 중앙정책연구실에서 밀려날 것으로 예상했다. ‘조정이 바뀌면 신하도 바뀐다(一朝天子一朝臣)’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하지만 그는 후 주석이 집권한 이후에도 ‘주석 특별 조리’ 직함으로 여전히 후 주석의 해외 방문을 수행하고 있다. 후 주석이 집권한 지 7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는 오히려 후 주석이 집권하면서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 승진했고, 후 주석의 집권 2기(2007~12)부터는 국가영도자로 불리는 당 중앙서기처 서기로까지 승진했다.

    중앙정책연구실은 새로운 노선과 정책을 연구하는 중국 공산당의 싱크탱크다. 중앙정치국의 정치 이론 및 정책 연구와 문건의 기초 작업은 모두 이곳에서 이뤄진다. 이곳 주임은 그만큼 막중한 자리다. 그래서 한때 나돌던 후 주석의 정치 노선을 감시하는 ‘장 전 주석의 원단(文膽·핵심 막료)이자 대리 감시인’이 아니냐는 얘기도 이젠 쏙 들어갔다. 일각에서는 그가 이미 자신의 성을 ‘장(江)’에서 ‘후(胡)’로 갈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장의 책사’에서 ‘후의 막료’로 완벽하게 변신했다는 뜻이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중국의 정치 개혁 및 민주화와 관련한 장 전 주석의 발언은 모두 왕 주임의 머리에서 나왔다. 정치 민주화에 관한 그의 독특한 이론은 장 전 주석 시절부터 시작해 후 주석이 7년째 집권한 현재까지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고수하는 지도노선이다.

    중국 최고의 정책 브레인

    왕 주임 이론의 핵심은 ‘정치체제는 일정한 역사·사회·문화적 조건에 맞아야 하고, 민주정치는 절대로 현 중국의 역사적 단계와 조건을 뛰어넘어 이뤄질 수 없다’는 것. 그에 따르면 중국은 다당제와 국민의 선택에 따른 정권 교체, 국민에 의한 지도자 직접 선출을 핵심으로 하는 서구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실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생산력(경제) 발전을 먼저 이루고 이를 주축으로 민주정치를 발전시켜야만 실질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질 수 있지, 나무를 접붙이듯 시도해서는 정치개혁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이다.

    비서방(秘書幇)이 간다! 권력 정점 치닫는 ‘王참모’들
    왕 주임은 앞서 1980년대 중반 ‘중국의 경제개혁은 반드시 중앙권력의 집중을 필요로 하고 정부의 역량에 의해 추진돼야 하며,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4마리 용(龍)은 이런 과정을 거쳐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신권위주의 이론’을 발표해 중국 학계와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역시 중국 공산당이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부 주도의 경제개혁에 나서는 이론적 기반이 됐다.

    장 전 주석은 1995년 9월 제14기 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왕 주임의 이론을 인용해 중국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개혁과 발전, 안정의 3자 관계’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된 가운데 개혁과 발전을 추진해야 하고, 개혁과 발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만 정치와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 한마디로 안정의 기초 위에서 정치개혁을 추진할 때만 중국의 진보와 발전을 담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이론은 이후 중국 공산당이 정치개혁과 민주화 조치를 미룰 때마다 논리적 근거로 사용됐다. 장 전 주석에 이어 후 주석까지 왜 정치개혁에 미온적인지, 왜 서구 정치제도는 절대로 본뜨지 않겠다고 외치는지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장 주석 시절 왕 주임은 장 주석의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카리스마가 없는 장 주석을 국제감각이 있고 대중친화적인 지도자로 부각함으로써 중국 지도자에 대한 서방의 부정적 편견을 걷어내려 한 것이다. 1997년 11월10일 장 당시 주석이 중국을 방문한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온몸으로 껴안은 것, 미국 방문 중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예고 없이 수영을 한 것, 하와이 주지사의 만찬장에서 즉흥연주를 한 것 등은 왕 주임이 장 주석을 정력적이고 현대적 감각을 지닌 세련된 중국 지도자로 보이도록 기획한 것이다.

    2000년 2월 장 전 주석이 발표한 ‘3개 대표론’도 왕 주임이 창안한 것이다. 3개 대표론은 중국 공산당이 선진 생산력의 발전 요구와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 광대한 인민의 근본 이익을 시종일관 대표해야 한다는 것으로, 공산당이 개혁개방 이후 급속히 사회세력으로 자라난 자본가 계급까지 끌어안으려 한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후 주석이 2007년 6월25일 공산당 중앙당교에서 처음 제시한 ‘과학발전관’도 왕 주임과 그가 지도하는 중앙정책연구실에서 만든 것이다. 이후 조화사회(和諧社會)론, 신농촌 건설,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기술혁신을 강조하는 창신형(創新型) 국가, 당의 집정(執政)능력 건설 등 후 주석 집권 이후 제시된 일련의 정치 구호와 이론 역시 모두 그가 이끄는 정책연구실에서 나왔다.

    2005년 베이징行 이후 벼락출세

    왕 주임의 조적(祖籍·조상의 원적)은 산둥(山東)성 라이저우(萊州)지만 그는 1955년 10월6일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철학을 좋아했고 정치적 사고를 즐겨 하는 경향을 보였다. 1974년 화둥(華東)사범대에서 3년간 프랑스어를 전공했지만 외교 계통으로 나가지 않고 상하이 푸단(復旦)대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꿔 석사를 마쳤다. 개혁개방 뒤 제1세대 정치학 연구생이던 그의 지도교수는 ‘자본론’ 연구로 권위가 높은 천치런(陳其人)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푸단대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1980년대 중반 쩡칭훙 당시 상하이 선전부장의 눈에 띄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춘제(春節·중국 설날)를 앞두고 상하이 시 지도부는 각 대학으로 나뉘어 가서 교수들과 다과회를 열었다. 이때 쩡칭훙은 푸단대로 향했고, 그곳에서 정치 민주화와 정치체제 개혁 등 중국이 당면한 문제에 관한 왕후닝의 온건하고도 조리 있고 새로운 신념과 방법으로 충만한 이론에 매료됐다. 당시 40대 중반이 넘은 쩡 부장과 30세를 갓 넘긴 왕 교수는 15세 이상 나이차가 있었으나 이날부터 완전히 의기투합했다.

    이후 줄곧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그가 1995년 베이징의 중앙정책연구실로 오게 된 것은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던 쩡 부장과 상하이 당서기를 지낸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힘이 컸다. 한때 왕 주임을 정치고문으로 삼으려 한 우 위원장은 1994년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중앙서기처 서기로 옮긴 뒤 장쩌민 당시 주석에게 “왕후닝을 베이징으로 불러와야 한다”고 여러 차례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주석은 그를 중국 최고지도부의 사무실과 관저가 있는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로 불러올린 후 그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이번에 너를 불러올리지 않았으면 나와 우리 계파 사이가 틀어질 뻔했다”고 후일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1987년 13차 당 대회 때부터 15차 대회까지 학자로는 유일하게 세 차례 연속 정치보고 기초 작업에 참여했다. 16차 당 대회 때 장 전 주석은 정치보고 기초 작업의 실무 책임을 아예 그에게 전담시키다시피 했다. 그만큼 장 전 주석의 신임이 두터웠다.

    하지만 1995년 베이징으로 올라온 뒤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 조장을 거쳐 1998년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 2003년 4월 주임으로 벼락출세하자 그는 학계에서 적잖이 입방아에 올랐다. 특히 주임 자리는 상급자인 텅원성(藤文生·68) 주임을 중앙문헌연구실 주임으로 쫓아내고 차지한 것이어서 ‘하극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부단한 자기 혁신

    왕 주임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만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그의 제자인 푸단대 일본연구중심 궈딩핑(郭定平) 부주임은 “푸단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마다 그의 서명이 없던 책이 없었다”고 했다. 푸단대에서는 책을 빌려가는 사람이 반드시 도서열람 카드에 서명하도록 돼 있다.

    그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저우치(周琪)에 따르면 결혼 직전 그에게 결혼식에 사용할 물건과 생화(生花)를 사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저녁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가 가져온 것은 한 아름의 책이었다. 어느 정도의 ‘책벌레’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도 “저는 그냥 독서인(讀書人)일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일생에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좋은 책 몇 권 읽고, 좋은 학생 몇 명 가르치고, 좋은 책 몇 권 쓰는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책을 폭넓게 읽어서인지 그의 논문은 심도 있으면서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논문은 특히 중국의 당대 지도부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를 다룬 데다 친절하게 대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학문이 깊으면서도 금도(襟度)를 아는 성격과 이론으로 벼슬길은 형통했지만, 그의 가정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1978년 베이징 호적의 동년배 저우치와 결혼해 10여 년을 함께했으나 그리 행복하지 못했고 아이도 없었다. 결국 1990년대 초 이혼했다.

    그후 1998년 12세 연하의 후난(湖南)성 출신 푸단대 학생 샤오자링(蕭佳靈)과 극비리에 결혼했다. 이 결혼을 안 것은 가족, 친지 외에는 장 당시 주석뿐이었다고 한다. 샤오자링은 푸단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뒤 박사 후 과정(Post Doctor)을 밟기 위해 일본 도쿄대로 갔으나, 일본 정보기관에서 그를 이용한다는 정보가 탐지되면서 8개월 만에 급히 강제 귀국조치됐다. 후일 왕 주임은 샤오와도 헤어졌다.

    왕 주임이 2년 뒤 차세대 지도부가 구성되면서 당 중앙정치국 위원에 진입할 지 여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링 주임과 함께 중국 정계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참모라는 점이다. 게다가 왕 주임의 장점 중 하나는 자신의 생각이나 이론이 한곳에 머물지 않고 상황의 변화에 따라 부단히 변화,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곡학아세(曲學阿世)라고 비판하지만, 또 다른 일각에서는 고정되거나 정체되지 않고 부단히 새롭게 혁신하는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공산당 최고지도부가 바뀌더라도 여전히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정책 브레인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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