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학대학원에 4번 도전해 낙방
- “철학? 어려운 게 아니고 머리에 쥐가 난다니까”
- 토익시험 보는데 편지 놓고 가는 감독관…“환장하는 줄 알았어요”
- 결혼 전 남편과 호적등초본, 건강진단서 주고받아
- 결혼 초 유산, 20여 번의 시험관 아기 시술, 입양도 생각
- 다음 목표는 반듯한 대중음악 전문학교 설립
50년 동안 노래를 했고 연예계를 누볐지만, 하춘화는 연예인이라기보단 예술가 혹은 학자의 느낌을 준다. 지난 50년 세월도 그저 강처럼 유유히 흘러간 느낌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한 여가수였지만 하춘화에겐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없었다.
2006년엔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해 관심을 끌었다. 1970~80년대 우리나라의 대중가요 역사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논문을 썼다. 하춘화는 기록도 여러 개를 가지고 있다. 일단 최연소 가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8000회가 넘는 공연기록은 기네스북에 올랐다. 2500개가 넘는 곡을 취입했고 히트곡 70여 개. 1985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에서 공연을 했다. 새해가 되면 가수생활 50년을 맞는 하춘화를 가을이 깊어가는 남산자락에서 만났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이 느껴졌다.
예술철학 박사
“동아일보와는 제가 참 인연이 깊어요. 첫 매니저가 동아방송 출신이었고, 데뷔했을 땐 동아일보 김상만 회장님이 저를 너무 예뻐하셔서 수양딸로 삼으시기도 했어요.”
▼ 그랬군요. 하 선생님을 좋아한 유명인사가 아주 많았죠.
“제 노래를 좋아할 수 있는 연배시니까. 그래서 부모님뻘 되시는 분들이 많이 귀여워하셨죠. 왜 그러냐면, 나이도 가요계에서 가장 어린 막내인데 그렇게 나와서, 그분들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게 애릿애릿해가지고 청승스럽게 노래를 잘한다’고 하셨어요.”
▼ 몇 년 전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어요. 1970~80년대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분석하셨는데요.
“네, 전문가들과의 인터뷰, 설문을 통해서 선정한 80곡을 대상으로 분석했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70~80년대는 한마디로 격변기죠. 산업화와 서울드림이 있던 때잖아요. 고향을 등진 사람들, 애틋함, 이런 게 공존했던 때란 말이에요. 그런 게 당시 유행했던 가요에 다 녹아 있는 거죠. 국민의 정서가, 우리의 역사가, 그 당시 노래를 통해서 증명이 돼요. 그걸 분석한 논문이죠. 대중가요를 통해 우리 역사를 실증했다고 보면 돼요.”
▼ 80곡 중에 선생님 곡은 몇 곡이나 포함됐나요?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닌데, 한 5~6곡정도 돼요. 그래도 많죠?”(웃음)
▼ 논문 쓰면서 옛날 생각 많이 하셨겠네요.
“그렇죠. 그러니까 오히려 더 정확할 수가 있는 거예요. 왜냐면 난 현장에서 뛰었기 때문에, 제가 그냥 공부만 하는 사람이었으면 수박 겉핥기식이 될 수도 있었겠죠.”
▼ 예술철학 박사를 받으셨는데, 처음엔 법학대학원에 가려고 하셨다죠?
“그랬어요. 4번 도전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손가락을 펴 들며) 무려 4번이나. 지방공연 다니다가 막 올라와서 면접하고 시험 치고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떨어졌어요. 외국만 해도 로스쿨이 따로 있잖아요. 자기가 전공한 분야를 더 깊이 연구하려고 로스쿨을 가죠. 학부에서 법학을 공부했던 안 했던 관계없이, 그런데 제가 응시할 당시엔 꼭 학부나 석사에서 법학을 전공한 사람만 법대를 가는 걸로 그렇게 교수들이 인식하고 있었어요. 지금은 좀 많이 깨졌는데, 그래서 교수님들이 저에게 그랬다니까요? ‘학부에서도 전공을 안 하고 어떻게 여기 와서 하려고 그러느냐’고. 법대 가면 ‘Entertainment in Law’를 하려고 했는데, 저작권법이라든가. 엔터테이너들의 권익을 위해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안 받아주더라고, 교수님들이.”
▼ 그래서 방향을 바꾸신 거군요. 철학으로.
“포기할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억울한 거예요. 내 앞에 이렇게 담이 하나 탁~ 막고 서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이걸 포기해야 하나’ 하는 오기도 생기고. 그러던 차에 우리 막내동생이 성균관대 철학과를 소개하면서 ‘예술철학으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민 하다가 지원했죠. 대학에서도 저를 아주 흔쾌히 받아주셔서. 11년 만에 박사 받았어요. 그리고 우리 집에 딸이 넷인데, 나를 포함해서 3명이 박사예요.”
하춘화는 딸만 넷인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 무용을 전공한 언니는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아 강단에 섰고 막내동생은 복지행정학과 노인복지학에서 박사학위를 2개나 받았다. 공부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했던 아버지 하종오씨의 억척 덕분이었다.
기왕 공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하춘화는 당대 최고 인기가수로 활동하면서도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할 만큼 학구적인 삶을 살았다. 하춘화씨조차 “의지가 약했으면 벌써 포기했을 것, 이겨낸 게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다. ‘물새 한 마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학교 다니기 힘들어지자 아예 가정교사를 데리고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공연이 끝나면 이동하는 차에서 공부하고 또 공연장에 나갔다.
가정교사 데리고 다녀
“원래 계획은 음반만 내다가 대학을 완전히 졸업한 이후에 정식으로 활동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본의 아니게 ‘물새 한 마리’가 히트를 한 거예요. 그러고 나니까, 학교로 기자들이 찾아오죠, 방송사에서 오죠. 아주 학교가 들썩들썩하고 다른 학생들까지 동요돼서 공부가 안 됐어요. 하루는 교장선생님이 아버지를 불러다가 ‘공부를 시킬지, 노래를 시킬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하시라’고 했을 정도예요. 근데 그때는 어느 것도 포기할 수가 없었거든요. 이미 히트가 났으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학교를 옮겼어요, 내가. 배구로 유명했던 일신여상으로.”
▼ 그나저나 철학 공부 어렵지 않았어요?
“어려운 게 아니고 머리에 쥐가 난다니까? 저는 처음 들어가서 ‘내가 죽는다’ 그러고 했어요, 공부를. 제가 그동안 무슨 철학을 했겠어요, 안 그래요?”
▼ 그러니까요.
“똑같은 말이라도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어려워져요. 그리고 내가 책에도 썼는데,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영어점수가 필요하거든요. 토익점수가 700점. 그것 땜에 또 엄청 고생했어요. 아주 생각하기도 싫다니까.”
▼ 토익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토익 학원에 다녔어요. 처음엔 멋모르고 그냥 시험을 봤는데 500점이 나왔어요. 처음에 가서 시험을 봤는데.”
▼ 첫 시험 500점이면 괜찮은데요.
“그렇게들 얘기하더라고요. 저 보고 잘 나왔다고.(웃음) 그런데 그게 봐보니까, 요령이 필요하더라고. 실력이 아무리 있어도 요령이 없으면 점수를 낼 수가 없더라고요. 예를 들어, 리스닝(Listening) 1번 설명이 나온다고 하면, 이미 보기는 두 문제, 세 문제 앞서서 봐야지, ‘아~ 이거 내가 아는 건데 뭐더라?’ 뭐 이러고 있으면 그냥 10문제를 놓쳐버려요. 그러니까 잘 모르겠다 싶으면 그냥 딱 포기하고 과감하게 넘어가야지. 요령이죠. 그래서 이건 안 되겠다 해서 토익 전문학원에 가서 수련을 했지요.”
▼ 수련? 그래서 몇 번 만에 700점을 넘기셨어요?
“꽤 봤어요. 한 7~8번 본 것 같아요, 내 기억으로는. 왜냐하면 그게 한 달에 한 번 무슨 중학교인가를 빌려서 일요일에 하잖아요. 아~, 정말 그 시험 끝나면 밥도 먹기 싫고 아무 생각이 없어.(웃음) 그리고 제가 더 환장하는 건 뭔 줄 알아요? 토익시험 땐 에어컨도 꺼버리잖아요, 리스닝 시험 칠 때는. (갑자기 달리기 자세를 취하며) 완전무장을 하고 달리기 선수가 그 선에서 이렇게 있는 거거든요. 옆에다 주민등록증 딱 올려놓고. 그런데 하춘화가 이게 본명이거든요. 그러니까 감독관들이 처음엔 이렇게 주민등록증 대조할 때 나를 본다고요. 그럼 아는 얼굴이거든. ‘아~ 본인이시네’ 그런다고. 그러고는 내가 시험 보는데 뒤에 딱 서 있어요.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어요. 그래서 막 놓치는 거예요.”
첫 토익시험에서 500점
▼ 감독관들 입장에선 희한한 광경일 테니까요.
“심지어는 어떤 감독관은 편지도 놓고 가요. 그러니 내가 무슨 시험을 보겠어요. 나랑 시험 본 학생들은 나한테 항의하라고 하더라고요, 본부에다. 감독관 땜에 도대체 시험을 볼 수 없다고. 어떤 감독관은 한창 시험 보는데 책상 밑으로 (얼굴을 숙이며) 이렇~게 얼굴을 들이밀면서 내가 진짜인가 보는 감독관도 있었어요. 미치는 거지. 신경이 조금만 빠시락해도 안 되는 시험인데, 별 웃기는 일이 다 있었다니까요.”
▼ 어학에 소질이 좀 있으신가봐요.
“원래 음악 하는 사람들이 귀가 좋거든요. 그래선가 전 오히려 리스닝이 쉽더라고요. 문법이 약하지.”
▼ 그런데 외국어 점수가 필요하시면 일본어 시험을 보시죠. 일본어는 원래 잘하시잖아요?
하춘화는 1985년 일본에 진출해 3년가량 일본에서 활동했다. 당시 한국에서 최고 가수였던 하춘화의 일본 진출은 그 자체로 화제였다. 일본에서도 하춘화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제가 일본어로 말은 해요. 그런데 일본어도 문법 같은 거 들어가면 어려워요. 뭐냐면, 동사가 변형이 돼요. 한문에 우리가 보통 쓰는 생(生)자 있잖아요? 이게 일본에서는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다르게 작용해요. 그래서 막 헛갈려요. 그리고 영어는 이제 제2의 국어니까. 무조건 해야 하는 언어잖아요.”
대화 주제가 잠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로 옮아갔다.
▼ 일본어 배울 때도 고생을 많이 하셨겠어요.
“제가 일본에서 3년 살면서 랭귀지 스쿨을 다녔거든요. 그 랭귀지 스쿨은 얼마나 하드(hard)하게 공부를 시키느냐면, 첫 시간 딱 시작하면 시험이에요. 시험을 그렇게 좋아하는 나라가 일본이에요. 그래서 집에 가서 오늘 것 복습하고 내일 시험 준비까지 안 하면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만날 집에서 복습하다 2시 넘어 자고 6시에 일어나서 학원 가고…, ‘나는 왜 이렇게 힘들고 고달프게 살까’하고 고민했을 정도니까. 사실은 저는 일본에 안 갔어도 됐거든요. 한국에 이미 내 위치가 다 있으니까.”
▼ 그렇죠.
“저는 있잖아요. 어느 목표가 있어서 이걸 달성하잖아요? 그러면 그걸 달성한 것으로 만족해야 되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또 새로운 목표를 세워요. 그러니까 인생이 점점 고달픈 거죠, 지금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만난 톱가수들도 그랬어요, 저한테. ‘넌 한국에서도 톱인데 왜 여기까지 와서 하나부터 다시 시작하느냐’고. 내가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고 개척하고 싶다’고 하니까 일본 가수들이 ‘정말 훌륭하다, 우리도 너한테 배워야겠다’ 그런 말을 했죠. 외국어 얘기하다가 이상한 데로 빠졌는데, 전 지금도 일본 가면 회화 같은 건 전혀 거리낌없이 하지요. 영어도 그렇고요. 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세계일주도 가이드 없이 했어요.”
아버지 고향에 고등학교 설립
하춘화가 1976년 가수 생활을 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아버지의 고향인 영암(낭주)에 고등학교를 세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당시 이 학교의 개교기념식에는 무려 2만명이 모였다. 고 이주일씨가 사회를 보고 하춘화는 기념공연을 했다.
▼ 1976년 사재를 털어 전남 영암에 고등학교를 설립하셨죠. 낭주고등학교라고.
“아버지 뜻에 따랐을 뿐이에요. ‘물새 한 마리’를 막 내놓고 나서니까, 1973년인가 그랬어요. 영암의 옛날 이름이 낭주거든요. 제가 유명해지니까 고향에서 아버지께 이런저런 소식을 보낸 모양이에요. 그런 중에 ‘낭주에 학교가 없어서 시골 학생들이 광주, 목포로 유학을 가야 한다’고, ‘그걸 좀 해결해주면 좋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저야 무슨 결정권이 없었죠. 아버지가 다니면서 추진하신 거예요. 학교 부지 얻고, 인가받고 영암 출신으로 성공한 분들 협찬 얻어서 학교를 설립했죠.”
▼ 개교식 사진이 당시 신문에도 실렸는데….
“학교운동장에 무대를 설치하고 개교식을 했어요. 사회를 본 코미디황제 이주일씨는 그때 무명이었죠. 저의 전속 사회자로 있었거든요. ‘하춘화팀’. 제 전속 밴드, 무용단 다 데리고 가서 제가 공연을 해줬어요. 집 몇 채 안 되는 지역에 2만명이 모였죠. 김대중 대통령이 오셨을 때 모인 기록을 제가 깼대요. 사람들이 앉을 데가 없어서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고 막 그랬는데 그 사진이 실렸죠. 시골 어른들이 ‘영암아리랑’ 들으며 막 울고 그러셨어요. 그 지역에선 ‘하춘화 고등학교’라고 불렀어요.”(웃음)
▼ 영암으로선 은인이시네요.
“그래서 제가 국회의원 출마하라는 유혹도 무지하게 받았다니까요. 그런데 저는 국회의원보다 ‘가수 하춘화’가 좋다고 생각했죠.”
▼ 한번 해보시죠, 왜.
“이미지 버려요. 제 이미지를 버린다고요. 가수 하춘화는 만인의 연인이지만 정치인이 되면 100명은 아군이고 100명은 적이 되잖아요. 적을 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 만인의 연인으로 남겠다.
“예, 그게 전 좋습니다.”
▼ 이주일 선생님과는 베트남에서 처음 만나셨나요? 이리(현 익산)역 폭발사고 때 일은 이미 유명한 일화죠.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하춘화를 구해준 사람은 이주일이었다. 지방 순회공연 중이던 하춘화는 이주일씨의 머리를 밟고 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이주일은 “하춘화가 내 머리를 밟은 순간부터 머리카락이 나지 않았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하춘화는 이주일을 ‘털보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분이 월남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참 친절했어요. 내가 한국에서 콘서트를 할 때, 서울에서는 당시 최고 MC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씨가 사회를 봐줬는데, 지방 공연 때는 곽규석씨가 못 가니까 대신 이주일씨가 맡았던 거죠. 그분이 처음 하춘화쇼 사회자로 오디션을 볼 때, 무릎이 깨질 정도로 열심히 하니까 우리가 오케이(OK)를 한 거죠. 그래서 그때 이주일씨께 보너스로 양복도 해주고요. 그게 인연이 돼서 줄곧 같이 다녔어요.”
▼ 이주일씨가 하춘화쇼 사회를 얼마나 보셨나요?
“7000회 이상이죠. 그분은 무대에 워낙 충실했어요. 개인적으로야 술, 담배를 좋아해서 저희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지만, 아버지도 자식같이 아끼셨거든요. 술, 담배 때문에 결국 병을 얻은 거예요. 나중엔 후회 많이 하셨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하춘화는 유독 대통령들과 인연이 깊었다. 일단 역대 대통령 4명이 하춘화의 열렬한 팬이었다. 크고 작은 국가행사에도 여러 번 참석해 노래를 불렀다. 스스로 ‘하춘화의 가요외교’라고 할 정도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 얽힌 일화가 많다.
▼ 박정희 대통령과는 아주 가까우신 걸로 압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제가 그분 대통령 시절에 유명해졌고, 또 그분이 대통령을 제일 오래 하셨고, 그러니까 뵐 기회도 더 많았고, 저를 유독 귀여워해주셨어요. ‘우리 보배’라고 불렀으니까. ‘대한민국 보배’라고. 이리역 폭발사고 때도 대통령 전용헬기 타고 이리에 와선 전북도지사한테 가장 먼저 물은 말이 ‘하춘화는 어떻게 됐어?’였대요. ‘하춘화 행방불명’이라는 신문기사를 읽으신 거죠. 그 뒤에 제가 큰 국가 행사에서 대통령을 다시 뵈었는데 그러시더라고요. ‘야, 네 노래 못 듣는 줄 알았다. 이리사고 때 죽은 줄 알았다’고 말이죠. 그리고 육영수 여사 돌아가시고 박 대통령이 박근혜 의원하고 같이 다녔어요, 퍼스트레이디로. 그런데 저도 아버지랑 같이 많이 다니잖아요. 그러니까 ‘야, 너도 아버지하고 다닌다며? 나도 우리 딸하고 같이 다닌다.’ 뭐 이런 말씀도 하시고, 그렇게 귀여워해주셨죠, 딸처럼. 그래서 지금도 그 얘기를 해요, 박근혜 의원이. ‘어머님 계실 때 어머님 하시는 사업에 많이 협조해줘서 감사했다’고.”
박 전 대통령의 애창곡은 하춘화의 히트곡 ‘강원도아리랑’이었다. 한번은 하춘화를 불러 “노래를 부를 때, 어느 대목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단다. 하춘화는 또박또박한 서체로 직접 가사를 적어주고 숨 쉴 곳도 알려드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죄’와 ‘영암아리랑’을 즐겨 불렀다. 데뷔 40주년과 45주년 기념공연 때도 전 전 대통령은 가족, 재임 시절 참모들과 함께 공연을 보러 왔다. ‘베사메무초’를 좋아한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하춘화의 공연장을 찾아 ‘목포의 눈물’을 신청했다. 1999년 3월 김종필 국무총리는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 내외 초청 만찬을 준비하며 “다 필요없다. 하춘화만 있으면 된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하춘화의 ‘날 버린 남자’를 즐겨 불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춘화와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한번은 공연 초대장을 들고 대통령을 찾았는데 “나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데”라는 말을 듣고 민망했다고 한다.
“세월이 야속해~”
하춘화는 최근에는 예능프로에도 출연해 감춰뒀던 끼를 맘껏 발산하고 있다. 데뷔 50년을 맞은 원로가수의 포스보단 발랄한 새내기 예능인 같은 느낌마저 준다. 무엇보다 열심히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시청자는 ‘하춘화의 재발견’이라며 환호하고 있다. 방송가에선 ‘하춘화의 방송 매너를 배워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그에게 ‘프로 연예인’이란 표현을 쓰는 사람도 생겨났다.
“전 그래요, 경력이 오래됐고, 대선배고, 그래서 권위를 내세워야 한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직업에 대한 제 가치관은 그게 아니에요. 오래됐고 나이가 많아도 일단 대중 앞에 나가서는 최선을 다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대가 변했잖아요. 변화에 빨리 적응해야죠. ‘내가 최고다’ 그러고 있으면 안 되죠. 그리고 저는 과거 얘기하는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내가 왕년에 어쨌었는데’, 이런 거 제일 싫어해요. ‘세월이 야속해~’로 뜬 D통신사 광고도 그래요. 처음에는 그 콘티가 아니었어요.”
▼ 하춘화씨를 흉내 내는 개그맨 김영철씨를 오히려 흉내 낸 광고로 유명해졌죠.
“원래 계획대로 촬영이 끝나고 나서 감독이 ‘이제는 하 선생님이 하고 싶으신 대로 애드리브를 해주세요’ 그러더라고요. (개그맨) 김영철씨 버전으로 ‘세월이 야속해~’를 한번 해주실 수 있느냐고요. 그래서 뭐 하자고 그랬죠. 어떤 사람은 자기 흉내 내면 굉장히 기분 나빠하고 싫어한다고 그러던데. 저는 제 흉내를 내서 그 흉내 낸 사람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냥 재밌게 애드리브를 한 거예요. 스태프들이 웃고 막 그랬죠. 근데 광고주들이 이게 더 좋다는 거예요. 원래 콘셉트로 찍은 것보다. 일이 끝나고 나서 김명민씨도 ‘선배님하고 찍게 돼서 참 다행이었다’고 그러고.”
▼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고민스럽진 않으셨어요?
“우선 사람들이 날 원로로 취급을 안 해요.(웃음) 제가 얘기했잖아요. 그게 저의 가치관이라고. 그러니까 항상 시대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게, 권위주의 내세우는 걸 제가 제일 싫어한다고. 그리고 전 요즘 흐름이 예능이다, 그러면 예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가면 뭐가 또 주류가 될지 모르죠. 난 프로잖아요. 대중의 사랑을 먹고사는 대중가수, 직업 연예인.”
하춘화의 이런 성격은 그가 개그맨이자 MC인 김제동을 높이 평가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왜 김제동인가? 라고 물으니 “성실하잖아요”란 답이 나왔다. 데뷔할 때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그 사람의 자세가 좋다고. 하춘화 역시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
유산과 인공수정
▼ 50년 가수생활 하시면서 스캔들 한 번 없으셨어요?
“그것도 이유가 있어요. 일단 아버지, 어머니가 항상 옆에 있었죠. 결혼 적령기 땐 ‘야, 제발 엄마, 아빠 좀 떼어놓고 다녀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결혼 빨리 못 한다고. 정말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았어요. 솔직히 후회도 되고 그래요. 저도 과잉보호를 받은 셈인데, 안 좋은 점이 있죠. 그렇다고 탓할 수는 없어요.”
2010년 10월29일 하춘하는 사단법인 한국가요작가협회가 수여한 ‘대한민국 가수 왕중왕상’을 수상했다.
“요즘 연예인들이 막 이 사람도 사귀고 저 사람도 사귀고 그런 거 보면 솔직히 깜짝깜짝 놀라요. 사귄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떳떳하게 여행 가고, 전 다방에서 차 한 잔도 제대로 못 했는데. 그런 게 솔직히 후회되죠.”
▼ 결혼이 좀 늦으셨죠.
하춘화씨는 39세에 결혼했다. 언니의 친구가 다니던 방송국의 직원을 소개받아 6개월 정도 연애한 뒤 결혼에 골인했다.
“전 결혼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결혼 적령기도 지났고, 또 음악하고 결혼했나보다 그랬죠, 내 운명이. 그런데 결혼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되더라고요. 생각지도 않게, 중매로.”
▼ 결혼을 전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셨던 건가요.
“나이 많아서 만났는데 결혼을 전제로 만나야죠. 당연하죠. 서로 재볼 것 다 재보고. 우리는 서로 ‘건강진단서도 가지고 와라’ 이럴 정도였어요. 저희 남편도 늦었고, 저희 남편이 방송국 출신인데 회사에서 노총각 천연기념물로 놔두려고 했을 정도였대요. 주변에서 장가보내려고 굉장히 애도 쓰고. 우린 결혼하면서 ‘혹시 애 숨겨놓은 거 없냐’ 이런 거 다 확인하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호적등초본 가져와라’ ‘건강진단서 가져와라’ 그랬어요. 난 그리고 뭐든 정확한 게 좋아요.”
▼ 첫사랑 여쭤봐도 될까요?
“첫사랑? 글쎄, 누굴까, 나는 첫사랑이 신성일씨예요, 영화배우. 부인 되는 엄앵란씨한테도 얘기하는데, 막 웃고 그러는데. 솔직히 연애할 기회가 없었어요. 제가 일방적으로 좋아했던 것밖에는. 저한테 프러포즈한 사람은 많이 있지만…, 사업하시던 분도 있고 연예인도 있고, 뭐 의사 등등, 많지요.”
▼ 몇 살 때부터 남자들의 프러포즈가 시작됐나요?
“열아홉 살? 방송국 PD도 있었고. 우리 매니저를 통해서 얘기를 전하고 그랬죠.”
▼ 그 사람들 중에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이 없었어요?
“없었어요. 심지어는 저희 아버지가 부산에서 사업하시면서 알게 된 친구 아들하고도 맞선이 잡혔는데 안 봤어요. 너무 바쁘고 그땐 또 그런 생각도 없었고.”
▼ 2세를 낳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신 걸로 압니다. 그런데 실패하셨다고.
“그럼요, 3년 전까지만 해도 엄청 노력했어요. 결혼해서 얼마 안 있다가 아기를 잃었거든요.”
▼ 유산됐나요?
“그게 4개월 정도 됐을 때죠.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은 ‘자연스럽게 가질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안 생기니까. 시험관 아기 시술도 많이 했어요. 한 20번 이상 했죠.”
▼ 20번 이상?
“예.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되더라고요. 그게 확률이 25%밖에 안 되니까. 그래서 노력도 굉장히 많이 하고 육체적으로 힘도 많이 들고, 그런데 세월이 자꾸 흐르고 나이를 먹으니까 입양할까 이런 생각도 했는데 이제는 키울 자신이 없는 거예요. 제가 너무 바쁘니까, 제가 입양을 하면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을 100% 져야 되잖아요. 뭐, 교육부터 건강까지 홀로 서게 다 해줘야 되고. 그런데 그게 자신이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또 입양하신 분들도 ‘입양보다는 그런 마음이 있으면 차라리 고아원이나 이런 데를 많이 도와줘라’ 그러시더라고요. 실제로 입양하신 분들이. 그래서 저도 그 뜻을 따르기로 했죠. 지금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예요.”
▼ 아쉬움이 많이 남으시겠어요.
“그래도 이 세상에 자기 갖고 싶은 거 다 갖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제게 아이를 안 주신 대신 그외에 다른 것을 다 저한테 줬는데, 제가 그것까지 욕심을 낸다면 욕심이 너무 많은 거죠.”
골 썩던지, 때려치우던지
그의 책을 읽었는데, 골프 얘기가 많았다. 물어보니 좋아하는 운동이며 열심히 했고, 또 잘한다는 것이다. 배운 지 5년 만에 싱글 수준이 됐고, 지금도 ‘공 한번 치자’는 사람이 줄을 잇는단다.
“정신 건강에 좋다고 아버지가 저한테 권유하셨어요. 이주일씨도 저에게 골프하라고 계속 그랬고.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예요.”
▼ 진짜 5년 만에 싱글이 되셨어요?
“예, 내가 그러잖아요? 저는 뭐든 하나를 시작하면 최선을 다해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빨라요. 그리고 제가 운동신경이 있대요. 요즘은 잘 안 하는데, 그래도 1년에 3~4번 나가면 80대 초중반은 쳐요. 연습 안 해도. 그리고 저는 처음부터 남자들하고 같이 쳤어요. 지금도 골프 치자는 초대가 많은데 그거 다 하다가는 일을 못할 정도예요.”
▼ 골프를 잘 치는 요령이 있나봐요.
“그냥 열심히 하는 수밖에는 없어요. 무슨 요령이 있는 건 아니고, 골프는 정직해요. 자기가 한 만큼 나와요. 골치 썩어가면서 그냥 하든지, 아니면 때려치우든지 해야 해요. 어차피 마인드 컨트롤이니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니까요. 그거 컨트롤 못하는 사람은 못 쳐요. 아무리 시간이 오래돼도 못 쳐요. 주변을 보면 다 그렇더라고요. 제가 골프 배울 때는 3년간은 거의 매일 공을 친 것 같아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습을 했으니까.”
▼ 이주일 선생님보다 늦게 시작했는데 나중엔 이주일 선생님보다 잘 치셨나요?
“그렇죠. 내기 골프해서 돈도 많이 땄죠. 200만원 정도를 딴 적도 있어요. 그 분도 연습을 열심히 했지만, (저하고만 치면) 노상 지니까, 나가기만 하면 지니까,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근데 솔직히 그 분이 운동신경이 좀 없어요. 그분이 잘하는 건 딱 한 가지, 축구예요. 우리가 지방 공연 갈 때도 공연 중간 중간에 축구를 했을 정도니까. ‘하춘화 공연팀’이라고 해서 내가 유니폼도 해줬어요.”
매니저가 된 여중생
워낙 인기가 많은 가수였던지라, 하춘화를 죽자사자 쫓아다니는 팬도 많았다. 스토커처럼 집 앞에 계속 서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연 때마다 똑같은 자리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상사병이 나서 병원에 있으니 얼굴을 한 번만 보여달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산에 가서 도를 닦고 나왔는데 나한테 마(魔)가 끼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랑 결혼하면 그 마가 없어진다는 거야. 공연 때 입으라고 드레스를 보내주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 건 기분 좋은 기억이죠. 정말 부모, 형제보다 저를 더 생각해 주는 팬이 많았어요. 한마디로 ‘하춘화교’였다니까. 요즘 아이돌 가수들 인기는 저리가라였죠.”(웃음)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현재 하춘화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이OO씨도 하춘화의 오래된 골수팬이다. 이야기가 드라마틱하다.
경기도의 한 시골마을에 살던, 하춘화의 열성팬이던 여중생 이씨는 어느 날 하춘화를 만나겠다며 용돈을 털어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하춘화의 아버지를 찾아가 “평생을 하춘화 언니 곁에서 언니를 도우며 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그러나 하춘화의 아버지는 그 여학생을 돌려보냈다. “열심히 공부한 후 성인이 되어 찾아오면 그때는 꼭 기회를 주겠다”고 말하며. 그러고 나서 10여 년 뒤, 거짓말처럼 그 여학생은 다시 하춘화씨를 찾아왔다. 약속을 지키라며. 그리고 현재까지 10여 년째 매니저로, 친구로 하춘화씨의 일을 보고 있다. 이씨와 관련된 얘기는 하춘화의 책에도 들어 있다. 하춘화씨와 인터뷰할 때도 이씨는 곁을 지켰다. 책에서 읽은 얘기의 주인공을 직접 만나니 조금 신기했다. 이씨는 “(하춘화 언니가) 왜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냥 좋은 거예요, 무조건. 올해로 13년 됐네요. 언니 일을 본 지가…”라고 말했다.
하춘화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자신의 남은 목표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 얘기했다.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에 대해. 그의 얘기 곳곳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반듯한 대중음악 전문학교를 하나 설립해서 제가 직접 운영하려고 해요. 대한민국 대중가요를 책임지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인재를 양성하는 거죠. 몇 십 년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에요. 지금은 기회를 보고 있고요. 이게 어제, 오늘 생각해서 될 일은 아니거든요. 음~ 제일 먼저 인성교육을 시키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우리 대중예술인을 공인(公人)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공인이 뭐냐. 많은 사람한테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적어도 자기의 어떤 사적인 행동에도 책임을 져야 해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학벌은 좋고 공부는 많이 했는데 인간성은 빵점인 거 있잖아요? 2년제는 좀 짧을 것 같고, 욕심 같아서는 대학원 과정도 만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