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호

“순화교육, 특수교육에 골병…33년 만에 절반의 승리”

‘삼청교육대 저항’ 민주화운동 인정받은 이택승

  • 김진수 기자 | jockey@donga.com

    입력2013-07-23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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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미래 가늠할 만한 판결”
    • “총 맞아 죽은 고교생 남일홍도 민주화운동 인정해야”
    • “피해자 측 대응 따라 ‘제각각 보상’ 괴리”
    • “특별법 제정해서라도 전두환 다시 가둬라”
    “순화교육, 특수교육에 골병…33년 만에 절반의 승리”
    굵디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쏟아지던 7월 8일 오후. 어렵사리 찾은 그의 집도 장맛비 속 물안개에 온통 감싸여 있었다. 인천 강화군 하점면 신봉리.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 사이로 어지럽게 널린, 케케묵은 가재도구와 생활쓰레기. 그 한가운데 자리한 허름한 농가의 대문 틈을 비집고 70대 노인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이택승(74) 씨. 그는 최근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에 끌려가 저항한 사실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7월 2일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부장판사 최주영)는 ‘삼청피해자동지회’ 대표인 이 씨가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김성기, 이하 심의위)를 상대로 낸 재심결정 기각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밝혔다. 선고는 6월 28일 내려졌다.

    이 씨는 1980년 8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뒤 이른바 ‘순화교육’에 여러 번 저항하다 군인(교관)들의 집단구타와 가혹행위로 허리와 왼쪽다리에 장애를 입어 10개월 만에 퇴소했다.

    이번 판결은 생존한 삼청교육 피해자가 민주화운동을 인정받은 첫 사례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또한 지금도 비자금 은닉 의혹으로 논란에 휩싸여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원죄’ 중 하나인 삼청교육대 사건이 오래도록 잊혔다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많은 이의 눈길을 끌고 있다. 몇몇 언론매체는 ‘민주화운동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한 판결’이라는 비판적 내용의 사설과 칼럼을 내놓기도 했다.

    짤막하게만 전해진 이 씨의 승소 소식 이면엔 어떤 복잡한 속사정이 숨어 있을까.



    “소송만이 대안”

    ▼ 심의위를 상대로 소송을 한 경위는.

    “2001년 12월 심의위에 1999년 12월 국회에서 제정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민주화운동보상법)이 정한 민주화운동 관련자에 나도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보상금 지급을 신청했다. 그러나 삼청교육대 입소가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게 아니란 이유로 기각당했다. 그때가 2006년 9월이다. 신청 후 무려 4년 9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심의위는 2004년 1월 ‘삼청교육대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삼청교육피해자보상법)이 제정되고 그 해 7월에 시행됐으므로 그 법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삼청교육피해자보상법의 보상금 지급 신청 기한은 ‘법 시행 이후 1년’이었다. 기한을 넘겨 보상받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06년 11월 심의위에 재심의를 신청했는데, 5년 3개월 만인 2012년 2월 다시 같은 이유로 기각돼 같은 해 5월에 소송을 낸 것이다. 생각해보라. 소송이 아니면 대체 무슨 방법이 있었겠나.”

    ▼ 소송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나는 법을 잘 모른다. 게다가 변호인을 선임하려니 ‘심의위가 국무총리 직속기관인 데다 승소 가능성이 낮아 자신 없다’며 다들 한사코 고사하더라. 대한법률구조공단을 통해 가까스로 소송대리인을 구했다. 심의위는 기각 결정을 내리기 전 내게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항거성을 입증할 인우보증서 등 추가자료를 요구했다. 삼청교육 당시 피해자들이 죄다 격리 수용돼 있었는데 어떻게 입증자료를 스스로 구할 수 있겠나. 그래서 삼청교육대 출소 이후 삼청피해자동지회 대표로서 삼청교육의 부당성을 알리려고 행한 활동에 관한 자료들을 제출했다.”

    삼청교육대에서 나온 뒤 이 씨는 삼청교육 피해자 모임인 삼청피해자동지회를 발족하고 대표를 맡아 1989년 12월 전 전 대통령 등을 직권남용, 불법체포, 감금, 폭행 및 가혹행위, 살인 및 살인교사죄로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이에 대해 검사가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리자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했다.

    “순화교육, 특수교육에 골병…33년 만에 절반의 승리”

    이 씨는 요즘도 적지 않은 종류의 약을 복용한다.

    1993년 4월 재정신청이 기각되자 대법원에 재항고를 하는 한편, 헌법재판소에 입법부작위 위헌확인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95년 4월 시민사회단체인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이후 ‘참여연대’로 명칭 변경)와 공동으로 유엔 인권이사회에 삼청교육대 피해에 대해 제소하는 등 삼청교육의 부당성 및 인권유린을 국내외에 꾸준히 고발하고, 삼청교육 피해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주장해왔다.

    이번 소송에서 재판부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것도 이 씨가 ‘개인적 권리구제 차원을 넘어 권위주의적 통치에 직접 항거해 민주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키는 활동을 하다 상이를 입은 경우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같은 피해, 다른 보상

    ▼ 2004년 삼청교육피해자보상법에 의한 보상금 지급 신청은 왜 하지 않았나.

    “심의위가 기각 결정을 장기간 지체해 원천적으로 보상금 지급 신청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이유는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 인권탄압 사례인 삼청교육대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선행된 후 피해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금전적 보상은 부차적 문제라 여겼다.”

    ▼ 다른 피해자 상당수는 삼청교육피해자보상법에 의해 보상받지 않았나.

    “그 점이 안타깝다. 삼청피해자동지회 결성 초기, 나와 삼청교육 당시 사망한 전정배, 남일홍 씨의 유족 2명이 공동대표를 맡았는데, 이후 전 씨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반면 남 씨는 삼청교육피해자보상법에 따라 보상금 몇 푼만 지급받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피해 당사자가 아닌 유족들이 삼청교육 당시의 소상한 상황을 어찌 알겠나. 그러니 비슷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피해자 측이 어떤 대응을 하는지에 따라 각기 다른 보상을 받는 괴리가 생겼다.”

    실제로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00년 10월 출범해 2004년 6월까지 활동한 대통령 소속 한시적 기구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삼청교육 피해자인 전 씨와 박영두 씨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해 유족들은 해당 법에 의한 보상을 받았다. ‘신동아’가 입수한 서울행정법원의 이 씨 사건 판결서에도 그러한 대목이 명시돼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1980년 8월 삼청교육대에 강제 입소된 전 씨는 이듬해 사회보호법에 의한 감호처분까지 받아 같은 해 5월 삼청교육대 감호분소에 수용됐다. 6월 20일 경비부대 장교들에 의한 감호생 폭행사건이 발생하자 감호생들이 감호처분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정식재판 회부, 처우개선, 사회복귀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경비부대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위 대열 맨 앞에 있던 전 씨는 총상을 입고 사망(당시 28세)했다.

    역시 감호처분을 받은 박영두 씨는 시위 참가 이후 군법회의에 회부돼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84년 10월 경북 청송교도소에서 복역 중 재소자 처우개선과 감호법 철폐를 요구하는 집단투쟁에 참가했다가 집단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해 사망(당시 29세)했다.

    하지만 남 씨의 경우는 결과가 전혀 달랐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1981년 10월 감호소에서 감호생들이 벌인 시위 때 총에 맞아 숨진 남 씨(당시 19세)는 삼청교육피해자보상법에 의해 보상을 받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 씨는 남 씨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1988년 국회 국정감사에 따르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순화교육 기간에 총상, 구타 등으로 숨진 사람만 54명이다. 교육 중 폭행 등으로 인한 후유증 사망자도 397명에 달한다. 정부는 삼청교육에 저항하다 숨지거나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는 데 매우 인색하다. 대한민국은 그동안 힘의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돼왔다. 마땅히 토해내야 할 은닉 비자금조차 내지 않으면서 골프나 치고 다니며 호의호식하는 전두환을 보라.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둬야 한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 처벌할 대상을 처벌하지 못하는 게 힘의 논리 아니고 뭔가.

    나는 이번 재판이 사회정의 대신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돼온 대한민국의 미래를 가늠할 척도가 될 것이라 본다. 아직은 1심 판결만 나왔지만, 이제야 조금이나마 사회가 바로잡혀가나 하는 희망을 갖는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12·12군사반란을 일으키고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해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발령 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계엄포고 13호’를 내려 같은 해 8월 1일부터 이듬해 1월 25일까지 6만755명을 영장 없이 검거했다. 이 가운데 3만9742명이 범죄자·불량배 소탕 명목 하에 순화교육 대상으로 분류돼 전국 각지 군부대에 설치된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검거자의 35.9%는 전과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까다로운 보상규정 때문에 삼청교육피해자보상법에 의한 명예회복 신청자는 4600여 명에 그쳤다. 보상금액도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 수준이었다.

    질문 3개로 끝난 조사

    “순화교육, 특수교육에 골병…33년 만에 절반의 승리”

    이 씨가 목발에 의지해 걷고 있다.

    ▼ 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나.

    “1980년 7월 28일로 기억한다. 그날 오후 내가 살던 하점면 경찰지서에서 물어볼 게 있으니 오라고 했다. 갔더니 경찰관 한 명 빼곤 아무도 없어 ‘왜 그러냐’고 물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한참 뒤에 헌병 2명과 경찰관 2명이 나타나 나를 강화경찰서로 연행해 보호실에 놔뒀다. 아무 조사도 하지 않기에 ‘왜 불렀느냐’고 따졌더니 묵묵부답이었다. 그런데 나 말고도 하나둘씩 사람들이 붙잡혀 오더라.

    나중에 형사가 와서 3가지 질문을 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과 다툰 적이 있느냐’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 찾아가 아들이 축구부 활동을 못하게 한 일이 있느냐’ ‘술에 취해 넘어져 농협 유리창을 깨뜨린 적이 있느냐’. ‘그렇다’고 답하니 그걸로 조사는 끝이었다. 아는 경찰관이 강화경찰서에 있어서 캐물어보니 ‘당신은 B급이니 순화교육 좀 받아야겠다’고 했다. ‘농사일도 바쁜데 무슨 교육을 받느냐’니까 ‘국가 시책이라서 어쩔 수 없다’더라. 그게 전부다.”

    계엄포고 13호에 의거해 연인원 80만 명의 군·경이 투입된 일명 ‘삼청작전’으로 검거된 6만755명은 시·군·구 관할 경찰서에서 군·경·검 합심제에 의한 등급 분류심사를 통해 A, B, C, D 4등급으로 분류됐다. A급은 군사재판 회부, B급은 순화교육 후 근로봉사, C급은 순화교육 후 사회복귀, D급은 경찰 훈방조치로 처리됐다.

    강화경찰서를 거쳐 8월 2일 이 씨가 끌려간 곳은 경기 부천시의 한 군부대. 그의 나이 41세였다. 현재 거주 중인 신봉리에서 4남1녀 중 차남으로 나고 자란 그는 강화군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한때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연로한 부친의 농사일을 도우려 신봉리를 1년 간격으로 찾곤 했다.

    부친이 작고하자 서울로 가서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 신학교를 다녔고, 1976년부터는 고향에 내려와 정착했다. 생계수단은 농사와 돼지 사육. 결혼도 해서 아내와 초등학생 아들, 딸과 단란하게 살림을 꾸렸다. 비록 가세가 기울어 방 23칸짜리 큰 집에서 부유하게 보낸 어린 시절만큼은 못했지만, 그 나름대로 소소하게 사는 재미를 느낄 무렵이었다. 군 복무도 육군 수송부대에서 행정요원으로 착실히 마쳐 문제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 삼청교육대에선 어떻게 저항했나.

    “부대에 도착하니 군인들이 머리부터 빡빡 깎았다. ‘왜 그러냐’니까 자기들은 지시대로 하는 거라면서 허름한 군복을 던져줬다. 이후 그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법치국가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근거도 없이 잡아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하니 ‘여기 공자님 같은 사람 하나 왔네’ 하면서 대뜸 주먹질이었다. ‘국민 혈세로 운영되는 군대의 군인들이 왜 무고한 국민을 건드리느냐’며 다시 대드니 ‘이런 XX는 맛 좀 봐야 한다’며 우루루 몰려들어 다구리(몰매)를 쳤다. ‘너 같은 놈은 죽여도 보고서 한 장 쓰면 그만이다’며 마구 때리고 차길래 악을 쓰면서 달려드니 안 되겠다 싶은지 특수교육대로 끌고 갔다.”

    ▼ 어떤 곳이었나.

    “한마디로, 고문 장소였다. 사람을 열 십(十)자로 자빠뜨려놓고 군인 여럿이 군홧발로 밟고 차고 집단구타했다. 그러다 축 늘어지면 다시 순화교육 장소로 보냈다. 그날그날 수시로 끌고 갔다가 고문하곤 내보내는 식이었다. ‘이게 전두환 정권과 군의 합작 아니냐,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며 저항하다 네댓 번 특수교육대를 갔다 왔다. 특수교육대에서 고문당하면 다들 히야시가 돼(바짝 겁을 먹어) 아무 소리도 못했다.”

    ▼ 다른 입소생 중에도 저항한 이들이 있었나.

    “4명쯤 있었다. 집단구타를 당한 뒤 널브러지자 군인들이 그 위에 거적을 덮어놨다. 몸이 회복되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 거다. 그중 몇은 죽었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군인들도 무술 유단자 위주로 선발했다더라. 상부에서 ‘입소생들은 깡패 중 깡패들이다. 걔네들을 못 다스리면 너희들이 다친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더 가혹하게 대했다. 상황이 그러니 단체기합을 받을까봐 다른 입소생들은 나를 기피했다. 요즘 말로 왕따를 당한 거다.”

    “공자님 같은 사람 왔네”

    순화교육의 위법성과 교육과정의 폭력에 대해 수차 항의하던 이 씨는 결국 가혹행위로 허리와 왼쪽다리에 장애가 생겨 10개월 만에 삼청교육대를 퇴소했다. 다리가 마비돼 감각이 전혀 없어 ‘남의 살’ 같다고 했다. 보건소에선 다리도 문제지만 허리가 더 문제라고 말했다. 애초 허리부터 상해서 다리까지 마비됐다는 것.

    이 씨는 지금껏 진통제와 목발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동안 먹고살기 바빠 병원에서 진단을 제대로 못 받은 탓에 정확한 병명도 모른다고 했다. 다행히 장애 인정을 받긴 했다. 그는 현재 지체장애 5급이다.

    ▼ 삼청교육대에서 함께 지낸 이들 중 지금도 만나는 사람이 있나.

    “한동안 몇 명과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이젠 모두 뿔뿔이 헤어져 연락이 잘 안 된다. 심의위에 낼 인우보증서 때문에 몇 사람에게 부탁 전화도 해봤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번 승소 소식을 듣고 지금은 목사가 된 ‘삼청교육대’ 책 저자에게서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마산의 한 동료에게서도 안부 전화가 왔다.”

    이 씨의 하루 일과는 ‘평범’의 소중함을 잃어버린 간난(艱難)의 연속이다. 누렇게 찌든 러닝셔츠와 헐렁한 파자마 차림. 가뜩이나 장마철이라 곰팡내가 풀풀 진동하는 퀴퀴하고 눅눅한 집 안. 그동안 열심히 일해 마련한 논 2000평을 경작하지만 혼자라 힘에 부치기 일쑤다. 농번기엔 일꾼을 사지만, 그럴 수 없는 요즘은 논흙에 삽을 박은 뒤 거기에 몸을 지탱하며 요리조리 조금씩 김을 매는 정도다. 목발을 짚으면 논흙에 푹푹 빠져 일을 할 수 없다. 끼니도 밥만 짓고, 서울 사는 딸이 매주 가져다주는 반찬으로 해결한다.

    삼청교육대 퇴소 후 인고의 세월을 함께하며 농사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아내는 2010년 10월 세상을 떴다. 이 씨가 몰던 트랙터가 승합차와 충돌하면서 짐칸에 탔던 아내가 도로로 떨어져 뇌진탕으로 숨졌다. 충격과 죄책감으로 이 씨는 4년째 정신과 약까지 먹고 있다. 아직도 한밤 도로에서 차량 불빛을 보면 자기에게 덤벼드는 것 같아 무섭다고 한다.

    심의위 “항소할 것”

    ▼ 심의위가 이번 판결에 불복하면 재판이 2심으로 이어질 텐데.

    “아직 1심 판결만 나온 거니 고등법원 항소, 대법원 상고도 남아 있다. 향후 재판에서 내가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 어차피 판결은 법관이 내리는 것 아닌가. 다만 법관들이 힘의 논리를 따를지, 정의에 입각한 판단을 내릴지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됐다고 본다. 나는 정의가 이긴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심의위 관계자는 7월 12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심의위가 절대 질 수 없는 사건이라 생각한다. 1심 판결에 불복해 조만간 항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 일부 언론매체는 이번 판결을 두고 법원이 민주화운동의 개념을 불합리하게 확대 해석했다고 비판했다. 과거 삼청교육피해자보상법에 따라 한시적으로 보상이 이뤄진 만큼, 그와 별도로 민주화운동보상법을 또 적용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게 요지다.

    “잘못된 생각이다. 피해 당사자가 이미 직접 보상을 받았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사망자의 유족이 잘 알지도 못하고 받은 보상엔 문제가 있다. 고작 몇 백만 원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의 목숨의 대가인가, 가축 값인가. 삼청교육대 끌려간 게 하도 억울해서 한때 나는 자살로 세상을 등지려 했다. 병신이 돼서 가족 부양도 못하고 짐이 될 바에야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살아남아서 시대의 증인이 돼야 한다고 마음을 다졌다. 신학교 시절의 백일기도 경험도 큰 도움이 됐다. 이번 판결서를 제대로 읽어봤는지 몰라도 그렇게 수박 겉핥기 식으로 보도하는 건 언론의 자세가 아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이 세상이 밝아질 때까지,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삼청교육 피해자들의 온전한 명예회복을 위해 싸울 것이다. 경제 수준보다 한참 뒤떨어진 정신적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화운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33년간 싸워 이제 겨우 ‘절반의 승리’만 얻었을 뿐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거센 빗줄기가 몇 시간이 지나도 좀체 숙질 기미가 없다. 까랑까랑하게 말을 이어가는 이 씨의 마음속에도 오래도록 비가 내리는 듯했다. 어쩌면 그 비는 33년간 단 한 번도 그친 적 없는 한 서린 눈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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