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호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습관 기르세요”

투자은행 업계 1세대 윤경희 맥쿼리증권 회장

  • 글·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2012-12-28 16: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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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습관 기르세요”

    “새해 좀 더 나은 삶을 바란다면 각오하고 바뀔 준비를 하라, 매 순간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건강해라.”

    ‘위기를 기회로 바꾼 영원한 현역’

    한국 투자은행(IB) 업계 1세대인 윤경희 맥쿼리증권 회장(66)은 ‘영원한 현역’이다. IB업계에선 50대 초반이면 현역에서 떠나는 게 일반적인 일이지만 60대 중반인 윤 회장은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의 주요 역할은 기업의 인수합병(M·A) 자문.

    2012년에도 그는 여러 건의 대규모 거래를 성사시켰다. 대우인터내셔널의 교보생명 지분 24% 매매, SK텔레콤의 하이닉스 인수도 그의 작품이다. SK텔레콤의 인수액은 3조4000억 원대로 2012년 M·A 가운데 가장 큰 거래 중 하나였다.

    2012년 11월 30일 오전 10시경 경기 광주시 곤지암 컨트리클럽에서 윤 회장과 라운드를 함께 했다.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고,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아 티오프 시간이 조금 지체됐다. 코스 주변엔 잎들을 털어낸 나무들과 억새, 적송이 겨울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파5, 1번 홀에서 티샷하기 전에 그가 기자에게 물었다.

    “올해 나이가 몇인가요?”



    우리 나이로 마흔여덟이라 하자 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번졌다.

    “아주 좋을 때군요. 아직도 창창한 나이니.”

    대부분의 마흔여덟 중년은 이 말에 “네?”라고 되받을지 모른다. 오십을 바라보고, 육체도 조금씩 시들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 그가 다시 덕담을 했다.

    “모든 일에는 늦을 수는 있어도 너무 늦은 시기는 없습니다. 각오하고 바뀔 준비를 하세요. 시작하려는 그 시점이 가장 빠른 때입니다. 그리고 성공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그것을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하십시오.”

    ‘굿히트(Good hit).’ 그의 드라이버샷은 장타는 아니었지만 깔끔했다. 공은 페어웨이 왼쪽에 예쁘게 앉았다. 세컨드, 서드 샷도 힘의 낭비가 없는 압축적 스윙이었다. 스리 온에 10m 퍼팅도 침착하게 마무리해 파 세이브.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습관 기르세요”

    윤 회장은 훌륭한 CEO의 조건으로 전문성, 전략적 사고, 솔선수범, 비전 제시와 추진력을 꼽았다.

    그가 마흔여덟이던 1995년, 그의 회사는 파산을 맞이했다. 베어링증권 서울지점에서 근무하던 그는 불법거래로 회사 파산의 원인을 제공한 싱가포르지점의 딜러 닉 리슨 때문에 본사가 단돈 1파운드에 ING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였다. 다른 직장을 찾아볼 생각을 하고 있는데, ING베어링은 그에게 서울대표 자리를 제안했다. 회사가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이후 몇 년간 그는 오히려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포스코, KEPCO, 주택은행 등 주요 기업의 증시 상장을 이끌자 외국계 IB로부터 영입 제의가 잇따랐다.

    윤 회장은 5~7번 홀에서 연속 파를 기록하더니 8, 9번 홀에서 연이어 더블보기를 했다.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는 게 골프다. 골프란 겉으로는 비폭력적인 게임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매우 폭력적이라고 골프 교습가 봅 토츠키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놓곤 어느새 화나게 하고, 비참하게 한다. 그러나 윤 회장은 낙심하지 않고 후반에 잘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골프는 잘 안 될수록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어차피 잘되지 않다가도 다음 홀에서 또 살아나기도 하고, 한두 홀 잘돼도 18홀을 다 돌고 나면 자신의 핸디캡이 그대로 나오는 게 골프입니다. 무리할 일이 아닌 겁니다. 참 정직한 운동입니다.”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습관 기르세요”

    버디 퍼팅에 성공하고 환호하는 윤경희 회장.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습관 기르세요”
    ▼ 골프백 들여다보니

    윤 회장은 드라이버로 GTAC를 쓴다. 아이언은 Beres, 하이브리드는 Kasco 3.5. 이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클럽은 Beres 아이언 7번. 퍼터 끝에는 공을 쉽게 집을 수 있도록 만든 ‘컬렉팅 툴’이 달려 있어 퍼트한 다음 공을 멋지게 집어올리곤 했다.

    ‘영어학원 하루 세 번 다니며 공부’

    그의 삶은 곧 노력의 삶이었다. 충북 옥천에서 7남매 가운데 2남으로 태어났다. 4형제 중 3명이 서울대에 들어갔다. 그는 서울대 법대(65학번)를 졸업했지만 사법고시에 연거푸 낙방한 뒤 방황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서울대 법대 65학번은 대법관 5명,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강만수 KDB회장, 황우여 새누리당 원내대표, 고 조영래 인권변호사 등 쟁쟁한 동기생들을 배출했다. 그는 고시를 포기하고 1972년 농협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일반 행원으로 몇 년을 보내던 어느 날 한 신문광고를 보고 한국종합금융에 원서를 냈다. 영국 라자드브라더스그룹이 설립한 투자은행이었다.

    “법학, 경제학 등 필기시험은 잘 쳤는데도 영어면접 점수가 형편없었어요. 그런데 당시 저를 좋게 본 한 면접관이 1년 뒤 영어 실력을 일정 수준으로 쌓을 수 있다면 뽑겠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지요.”

    입사 뒤 그는 출근 전, 점심시간, 저녁 시간 등 하루 세 번 영어학원을 다녔다. 그런 노력 끝에 1년 만에 말문이 트이고, 영어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그렇게 IB 경력을 쌓아가던 중 1993년 영국계 투자은행인 베어링증권에 스카우트된 것이다.

    윤 회장은 IB에서 일하면서 고객 관리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골프를 접하게 됐다. 구력이 30년이 넘는다. 그러나 일의 연장선으로 여길 뿐 골프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내왔다고 한다. 그러다 골프의 참맛을 느끼기 시작한 건 근래에 와서다.

    “2008년 ABN암로증권에서 일하다 맥쿼리로 옮기기 전 3개월간 ‘재취업 유보 휴가(Gardening Leave)’를 받았어요. 월급을 받으며 집에서 편히 쉴 수 있었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때 골프 교습을 다시 받았고, 열심히 노력하자 나름대로 안정적인 플레이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파5, 10번홀. 윤 회장의 세컨드 샷이 약간 빗맞으면서 공이 많이 굴러가 그린 110야드 앞에 멈췄다. 10번 아이언을 든 그가 깃대를 바라보다 리드미컬하게 스윙하자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갔다. 순간 공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서 보니 공이 깃대 10cm 가까이에 바싹 붙었다. 이글이나 다름없는 버디였다.

    “공을 칠 때 기분이 굉장히 가볍고 좋았어요.”

    ‘명사와 골핑’란에 나와 달라는 요청에 그는 자신이 “홀인원도, 이글도 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며 망설였다. 그러나 막상 라운드를 같이하면서 보니 그는 언제든 ‘사고’를 칠 수 있는 골퍼였다.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습관 기르세요”

    윤 회장의 스윙은 힘의 낭비가 없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고 깔끔하다.

    아내 사별 뒤 공허감 극복 위해 詩 창작

    성공한 윤 회장에게도 깊은 상처가 있다. 직장에서의 치열한 삶 외엔 별 관심사가 없던 2003년의 일이다. 글로벌 투자은행에서 엄청난 연봉액수를 제시하며 영입을 제의해온 날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아내는 수화기 저편에서 울고 있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것이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국내 병원에선 희망이 없다더군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의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1년 만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부인과 사별한 뒤 그는 엄청난 고립감에 시달렸다. 그해 그는 어머니를 여의고, 큰딸을 시집보냈으며, 둘째와 셋째를 외국에 유학 보냈다.

    “그때 혼자 사는 공허감을 정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말도 못하게 울었지요, 하하. 그때 저는 모든 것을 가진 인간은 결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구나 한두 가지씩 어려움을 갖고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사는 게 현명한 인간 아닌가 생각해요.”

    공허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도 ‘전투적으로’ 썼다. 몇 번의 낙선 끝에 그는 황금찬 시인의 추천으로 시인이 되었다. 아내를 잃은 뒤 그 절망감을 승화시킨 ‘어둠 속에 눈을 뜬들 무엇이 보이랴’제하의 시집도 출간했다. 지금은 모 여대 음대 교수와 재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날 차가운 날씨에도 선전해 81타 싱글을 기록한 윤 회장은 오랜만에 성적이 좋다며 매우 즐거워했다.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습관 기르세요”

    IB업계에선 거래를 성사시킬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기념 조각을 만드는데, 그것을 ‘툼스톤’(tombstone·묘비명)이라 한다. 그의 사무실에는 이 툼스톤이 150여 개나 진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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