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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노갑 비자금 미스터리

200억 현금화 과정, 계좌추적 결과 현대측 진술과 달라

  • 글: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권노갑 비자금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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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노갑 비자금 미스터리

2003년 11월 서울중앙지법 앞마당에서 진행된 현대비자금사건 현장검증.

그런데 앞서 지적한 대로 계좌추적 결과 이 진술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 말하자면 200억원은 처음부터 현금화가 쉽도록 현대상선의 타은행 계좌로 분산 입금됐다가 억대 단위로 쪼개져 인출된 것이다.

3000만달러 미스터리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정 회장은 검찰에서 권노갑씨에게 2000년 1월경과 2월 말에 각각 3000만달러와 200억원을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이중 이익치씨가 먼저 발설한 3000만달러 수수혐의는 검찰이 두 사람의 진술만 받아놓고 기소하지는 않았다.

베일에 싸인 3000만달러 수취인

그렇지만 3000만달러와 200억원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정 회장 진술에 의하면 2000년 2월말 신라호텔 커피숍에서 권씨로부터 200억원을 ‘추가로’ 요청받을 때, 권씨가 “지난번엔 고마웠다”며 3000만달러를 받은 데 대해 감사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000만달러가 권씨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면 200억원이 건네졌다는 진술의 신빙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3000만달러가 권씨에게 전달되는 데도 김영완씨가 개입했다. 관련자들 진술에 따르면 정몽헌 회장은 이익치씨로부터 김영완씨가 알려준 해외계좌번호를 받아 김충식씨한테 주면서 송금을 지시했다. 김씨는 현대상선 미주법인 지사장 박재영 전무에게 지시해 정 회장이 일러준 해외계좌로 송금하도록 했다.



이 3000만달러는 나중에 2500만달러로 바뀌었다. 까닭은 이렇다. 당시 김충식씨는 대북송금 사건에 연루돼 출국금지 상태였다. 검찰은 “미국에 가 송금영수증을 갖고 오겠다”는 김씨의 요청을 받아들여 출국금지를 일시 해제했다.

김씨는 7월31일 출국했는데, 법무법인 김&장 소속의 조준형 변호사가 대동했다. 일종의 귀국보증이었다. 조 변호사는 미국에서 한국시각으로 일요일인 8월3일 오후 4시경 유재만 대검 중수2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찰은 두 사람이 통화한 내용을 ‘진술청취서’라는 제목의 문서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조 변호사는 통화에서 “김충식 사장과 함께 송금영수증을 보관하고 있는 미국인 지인을 만나 송금영수증을 확보하고 내가 직접 확인했다”고 말했다. 검사(유재만 과장)가 송금액이 얼마냐고 묻자 2500만달러라고 대답한다. 조 변호사에 따르면 김충식씨 등이 2500만달러를 3000만달러라고 진술한 것은 2500만달러가 한화로 약 300억원이므로 당사자들이 3000만달러로 착각했기 때문이라는 것.

조 변호사가 통화에서 밝힌 송금일자는 2000년 2월26일이고 송금은행은 스위스 연방은행이다. 정 회장과 김충식씨 등은 송금시기를 2000년 1월경이라고 했으므로 이 또한 ‘착각’에 의한 거짓진술인 셈이다.

이 통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다. 계좌번호와 송수신인을 묻는 검사의 질문에 조 변호사는 “한국 시간으로 8월4일 아침 9시10분에 다시 통화한 후 사무실로 팩스 송부하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검사는 “그렇게 하라”면서 “송금영수증 원본을 갖고 조속히 귀국하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다음날 아침 6시경 정 회장은 투신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됐고 조 변호사는 3000만달러 송금영수증을 팩스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정 회장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김충식씨가 ‘현대상선 보호’를 내세워 송금영수증 제출을 거부한다는 게 이유였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지난번엔 고마웠다”

8월6일 조 변호사는 혼자 귀국했다. 원래 검찰과 약속하기로는 송금영수증과 더불어 미주 지사장 박재영 전무의 자술서도 받아오기로 했으나 박 전무 또한 현대상선에 피해가 있다는 이유로 진술을 거부하는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후 3000만달러(2500만달러) 수사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검찰은 조 변호사를 통해 김충식씨에게 여러 차례 귀국을 종용했으나 김씨는 응하지 않았다. 조 변호사는 김씨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검찰의 요구에 대해 김씨가 원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박재영 전무도 검찰의 소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 모든 내용은 검찰 수사보고서에 담겨 있다. 이상한 것은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이를테면 현대상선 장부를 압수하면 2500만달러의 수취인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기자는 조 변호사에게 8개 항목의 취재질의서를 보냈으나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했다. 사무실 직원을 통해 통화를 원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전하고 심지어 방문까지 했으나 그는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현대상선 미주지사에도 전화를 걸어 박재영 전무에게 메시지를 남겨놓았으나 역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정 회장, 이익치씨 등의 진술에 따르면 권노갑씨가 200억원을 요구한 시점은 2000년 2월 말이다. 2500만달러는 그보다 며칠 앞선 2월26일 김영완씨 계좌로 보내졌다. 권씨가 200억원을 요구하면서 “지난번엔 고마웠다”고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권씨는 2500만달러를 받은 지 며칠 만에 다시 200억이라는 거액을 요구했고 정 회장은 그 부탁을 들어준 셈이다. 아무리 당시 권씨가 실세였다지만 상식 밖의 일임에 틀림없다.

현대상선 미주법인이 스위스 연방은행의 김영완씨 계좌로 2500만달러를 송금했다는 2000년 2월26일은 토요일이었다. 한국은 그날(2월27일)이 일요일이라 입출금 확인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남는 날짜는 2월28일과 29일뿐이다.

“지난번엔 고마웠다”는 말은 적어도 돈이 입금된 사실을 알고 하는 말이다. 아무리 빨라도 권씨는 2월28일 오후 4시(스위스 시각 오전 9시)에야 돈이 입금된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만나 “지난번에 고마웠다”고 말하는 건 코미디다. 29일엔 몹시 바빴다. 점심 때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선거대책을 논의하고 오후엔 네 군데의 지구당 개편대회에 참석했다. 그 와중에 시간을 내 정 회장을 만났다 치자. 2500만달러가 입금된 사실을 안 다음날 만나 “지난번에 고마웠다”면서 다시 200억원을 요구한 셈이다. 그때까지는 2500만달러를 쓰기는커녕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다. 여기서 정 회장의 진술은 심각한 모순에 빠진다.

신동아 200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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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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