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호

권재현의 심心중中일一언言

“둠 스피로, 스페로! 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

베스트셀러 ‘라틴어 수업’의 저자 한동일 교수

  • 입력2017-10-0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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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호칭을 뭐로 해야 할까. 라틴어로 ‘트레스 페(3P)'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파테르(Pater·신부), 파트로누스(Patronus·변호사), 프로페소르(Professor·교수) 셋 다에 해당하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알파벳 P로 시작해서다. 지난 6월 말 출간돼 석 달 만에 5만 부 이상 판매되며 인문분야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책 ‘라틴어 수업’(흐름출판)의 저자 한동일(47·세례명 사무엘) 교수다.
     
    한 교수는 광주가톨릭대와 부산가톨릭대 신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2000년 사제 서품을 받은 신부다. 또 2001년 로마 유학길에 올라 교황청에서 세운 라테라노 대학에서 교회법 석사와 박사 과정을 최우등(숨마 쿰 라우데)으로 졸업하고 교황청 대법원인 로타 로마나의 3년 과정 사법연수원을 통과한 변호사이기도 하다. 한 교수가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가 된 것은 700년 역사상 930번째이자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다. 그리고 2010년~2016년 서강대에서 라틴어 강의를 진행했고 현재는 연세대 법무대학원에서 ‘유럽법의 기원’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이기도 하다.

    ‘라틴어 수업’은 그가 서강대에서 강의한 내용 중에서 젊은이들의 삶에 나침반이 될 28개의 라틴어 문구를 꼽고 그 의미를 감칠맛 나게 음미한다. 라틴어의 원리와 기본 문법 지식은 그 입맛을 돋우게 할 애피타이저에 가깝다. 딱딱한 라틴어 문법서가 아니라 라틴어에 응축된 로마와 중세유럽의 인문학적 성찰과 통찰을 맛보게 해주는 입문서에 가깝다.

    실제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첫 학기엔 24명에 불과하던 수강생이 마지막 학기엔 240여 명으로 10배로 불었다. 서강대 학생뿐 아니라 인근 연세대와 이화여대 학생도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데 메아 비타

    이는 한 교수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에게 3개 호칭 중에 가장 선호하는 호칭이 뭐냐 물었을 때 ‘프로페소르(교수)’를 꼽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신부가 된 게 특별한 사명감이 있어서였던 게 아니었어요. 교황청 변호사가 된 것도 계획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수가 돼서 연구하고 학생들 가르치는 보람이 가장 큽니다. 하느님이 저를 신부로 삼으신 뜻도 ‘공부해서 남 줘라’에 있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해봅니다.”



    한 교수의 수업에서 중간고사 과제는 늘 같았다. ‘나의 인생에 대하여’라는 뜻의 라틴어 ‘데 메아 비타(De mea vita)’를 주제로 A4 용지 한 장 분량의 리포트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책 말미에 수록된 제자들의 편지글에도 등장하지만 이 과제를 부여받은 학생들은 처음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번민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한 적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인생의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과제물을 작성하며 삶의 의미를 찾았다는 수줍은 고백을 만나게 된다.

    이를 읽으며 기자는 문득 한동일 교수의 ‘데 메아 비타’가 궁금해졌다. 책에서 단편적으로만 등장하는 그의 인생 역정부터 파고들었다.

    한 교수는 서울 제기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실향민이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뒤 3층 연립주택 옥탑 단칸방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폐인처럼 지내다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도라지를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살아야 했다. 그래서 학교 공납금 낼 때가 가장 힘겨웠단다. 중고생이 된 뒤에는 공납금 낼 때가 되면 14년 터울로 분가한 맏형의 직장을 찾아가 손을 내밀어야 했다. 그래서 억울한 마음에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성적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외국어 공부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중3 때 외고 진학을 희망했습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저를 불러 ‘너희 집안 형편에 등록금이 비싼 외고는 무리’라고 인문계 진학을 권하셨죠. 바로 그날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가 ‘차라리 상고로 진학하는 게 어떻겠냐’였는데 눈물이 핑 돌더군요.

    소년 한동일에겐 공부를 깊게 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대학 진학을 위해 인문계 고교로 진학했는데 배정받은 학교가 제기동에서 멀리 떨어진 혜화동에 있는 동성고였다. 가톨릭재단 학교인 동성고는 김수환 추기경이 졸업한 학교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김수환 추기경에게 세례까지 받게 됐다. 하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게 아니어서 세례만 받고 미사 참석을 멈췄다. 그러다 그 자신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고2 때 수학 수업시간에 칠판에 ‘신부가 돼라’는 글씨가 보이는 거예요. 제 눈에만 보이는 거였죠. 미친 놈 취급받을까 말도 못 하다가 가까운 수녀님에게 털어놨습니다. 그분께서 가만히 웃으시더니 한참 뒤 ‘아무래도 하느님께서 너를 신부로 삼으시려는 계시 같다’ 하시더군요. 농담으로만 받아들였는데 고3이 되면서 신부가 되면 좋아하는 공부도 맘껏 할 수 있으니 승부를 한번 걸어보자는 결심이 서게 됐습니다.”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

    신부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이적일까. 대부분은 아니란다.

    “제가 신학교를 재수해서 들어가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신학교 입학의 마지막 관문이 면접인데 그때 왜 신부가 되려 하느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기도와 봉사, 헌신이라는 고귀한 사명의식을 들고 나왔지만 제 대답은 ‘전 모르죠. 하느님만 아시겠죠, 저는 울림을 받고 왔으니 이제부터 알아가야죠’였습니다. 결과는 탈락, 그래서 재수 끝에 수도회 소속 신학교에 간신히 들어갔습니다.”

    계시에 따라 간신히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눈치 보지 않고 돌직구 질문을 날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학교 성적은 ‘시들시들했지만(C 아니면 D학점만 받았다는 은어)’ 향학열은 더 뜨거워졌다. 아마 그 시절 그를 견디게 해준 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뜻의 라틴어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Hoc quoque transibit)’ 아니었을까.

    석사 과정을 마칠 무렵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열린다. 교회법을 가르치는 교수님의 눈에 들어 교황청 직속 라테라노 대학에서 유학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라테라노 교회는 313년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를 허용한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고 서방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입니다. 라테라노 대학은 그 부속건물에 세워졌고요. 그곳에선 교수님과 1대 1 면접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해당 사안에 대한 제 의견을 묻더군요. 한국에선 그럴 때 솔직한 제 의견을 말씀드렸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기 일쑤였기에 잔뜩 몸을 사렸죠. 그러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는데 그때마다 당황할 정도로 칭찬이 쏟아지는 거예요. 더욱 신이 나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렇게 석사 과정을 2년 만에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박사 과정에 진학한 그는 또다시 ‘사고’를 친다. 빨라야 2년은 걸리는 박사 학위 취득을 불과 10개월 만에 마치는 진기록을 세운 것.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었다.

    “저도 처음엔 2년 정도를 염두에 뒀었죠. 그런데 제 박사 학위 논문 주제를 들은 지도교수가 ‘끝낼 수 있으면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도 재능’이라며 제 재능을 썩히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신부들 학자금이 결국 신도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인데 그걸 쓸데없이 낭비하지 말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코피까지 흘려가며 ‘세븐 일레븐’(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으로 공부에만 몰두한 끝에 2004년 라테라노 역사상 최단기간에 그것도 최우등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죠.”



    딜리제 에트 팍 쿼드 비스

    짜릿한 성취에는 그만큼의 희생도 따르는 법. 한 교수는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그때부터 제 인생이 꼬인 거죠.”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학교에서 바로 인근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병원비 걱정에 빨리 퇴원하려 했더니 의사가 그러더란다. “당신이 병원에 들어오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나가는 것은 우리가 오케이할 때까지 안 된다.” 이탈리아에선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는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치료비가 무상이었다. 그래서 정밀진단을 받은 결과 선천적 심장 이상이 발견됐다.

    “처음엔 안 믿었죠. 30개월간 전방에서 군복무까지 마친 사람에게 선천적 심장 이상이라뇨. 그런데 관상동맥이 선천적으로 좁아서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은데 너무 무리하면 심장마비가 온다는 설명을 듣고 납득이 갔습니다. 어릴 때부터 손발이 저리고 소화가 안됐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거죠.”

    학업으로 지쳐 있던 한 교수는 귀국해 스탠스 수술을 받고 2005년부터 한국에서 보좌신부로 사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에겐 엄청난 고민이 숨어 있었다. 로마를 떠나기 전 로타 로마나 대법관으로부터 사법연수원 과정 입학제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을 포함해 한국인 그 누구도 그 진가를 알지 못했기에 박사 학위를 받고 또 공부하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2006년 타클라마칸 사막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의사 출신 여행객이 인공호흡과 심장 마사지를 해주지 않았다면 불귀의 객이 될 뻔한 사고였다.

    “사막에서 절대적 자연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저 자신과 마주친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떠오른 성경 구절이 마태오복음 18장 18절이었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란 구절입니다. 죽어서 하느님을 만날 때 제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못 해서 나쁜 기억을 품고 가기보다는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충실히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라틴어 수업’ 26강에 소개된 ‘딜리제 에트 팍 쿼드 비스(Dilige et fac quod vis·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구절에 녹아 있는 그의 체험이었다. 어쩌면 이 역시 하느님의 뜻이었을까.


    둠 스피로, 스페로

    그래서 그는 아시아인에겐 전인미답의 길을 걷기 위해 로마로 돌아온다. 이번엔 자비 유학이었다. 그만큼 불확실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로마의 수레바퀴’라는 뜻의 로타 로마나는 세계 가톨릭교회의 민·형사 소송과 행정소원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리는 상설법원이다. 프랑스 아비뇽에 교황청이 있던 1309년부터 기원해 유럽법의 원천이 된 교회법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로타 로마나라는 호칭은 전통적으로 이곳의 재판이 재판장이나 원고 피고 모두 평등하다는 취지로 원탁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붙었다. 이곳의 사법연수원 입학이 ‘좁은 문’을 통과한 것이라면 최종 합격은 ‘바늘구멍’을 통과한 것이라 할 만했다. 이를 몸소 체험한 한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체 3년 과정인데 수업과 발표, 시험이 철저히 라틴어로만 이뤄집니다. 매달 200~300쪽 분량의 실제 소송자료를 읽고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원고 측. 피고 측, 판사 역할을 맡아 A4용지 16장 분량의 변론서 또는 판결문을 작성해야 합니다.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로 써 있는 소송자료를 요약하면서 법리 논쟁까지 담아야 하는 과제물은 라틴어로만 작성해야 합니다. 여기서 단순 오탈자를 포함해 문법적 오류가 10개 이상 나오면 과락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죠. 이를 통과하면 발표를 시키는데 여기선 법리 적용과 해석의 오류가 없는지를 꼼꼼히 평가합니다. 그렇게 7차례의 평가를 통과해야 진급 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집니다. 30점 만점에 18점을 통과해야 다음 학년 진급이 가능합니다. 17점부터 유급인데 두 번 유급이면 바로 제적입니다. 그렇게 3학년 진급 시험을 통과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다시 4일간 매일 오전 9시~오후 1시까지 4시간씩 보는 변호사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버드법대의 공부벌레들’ 뺨칠 정도의 살인적 경쟁이다. 실제 한 교수도 1학년 과정 자격 시험에서 17점을 맞아 1점 부족으로 1년 유급을 당하기도 했다. 이를 악물고 다시 도전해 4년 만에 변호사자격증을 획득했다. 입학할 당시 40명이었지만 최종 시험에 응시한 인원은 3명이었고 그중 합격자는 단 2명이었다고 하니 ‘하늘에서 별 따기’에 성공한 셈이다.

    한 교수는 ‘라틴어 수업’에서 이때의 체험을 통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는 지혜를 깨쳤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렇게 미루려는 게 남과 좀 다르다. 오늘 절망하고 낙담하고 포기할 것을 내일로 미루고 다시 도전해보자는 역설의 지혜다. 그는 이를 라틴어 명구로 이렇게 압축했다. 둠 스피로, 스페로(Dum Spiro, Spero). ‘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는 뜻이다.



    숨마 쿰 라우데

    한국에서 삶과 반대로 로마에서 그의 삶은 최우등을 뜻하는 숨마 쿰 라우데(summa cum laude)의 연속이었다. 그는 현재 한국 천주교 소속 신부가 아니라 바티칸 교황청 소속 신부다. 로타 로마나 소속으로 유럽 각지에서 활약하는 변호사의 숫자는 300명가량 되지만 이들 중 신부는 10명이 채 안 돼 교황청에서 직접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티칸에선 그가 로마에 오래 머물길 바라지만 한 교수는 한국에 더 오래 머문다.

    사실 신부로서 그가 누리는 특권은 최소 매년 한 차례는 교황을 직접 알현한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매년 1,2월에 이뤄지는 로타 로마노 시무식 때 소속 변호사들은 빠짐없이 교황 앞에서 비밀 서약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전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에 이어 프란치스코 교황을 매년 알현하는 영광을 누린다.

    “전임 교황님은 방에 그랜드피아노가 있었는데 연주 실력이 전문 연주가급이셨죠. 재임 시 베를린필 등 모국(독일)의 유명 오케스트라 초청 연주회를 바티칸에서 자주 열어주셔서 귀가 호강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신도들 앞에선 한없이 자애로우시지만 저희들 앞에 서면 호랑이로 돌변하신답니다. 허튼짓하면 가만 안 놔두겠다고 얼마나 겁을 주시는데요.”

    정작 한 교수는 그런 특권엔 무심해 보였다. 그는 지금도 성직이나 변호사 활동보다 공부를 더 좋아하고 그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있다. 자신이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한국에 머물며 교회법 사전과 라틴어 사전을 집필하거나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자신이 접한 서구문명 최고 수준의 고갱이를 한국에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공부해서 남 줘라’의 실천인 셈이다.

    그는 이런 공부를 ‘남보다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전보다 더 잘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지금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이탈리아 학교에서 채택하고 있는 성적 평가는 넷으로 나뉜다. 최우등을 뜻하는 숨마 쿰 라우데, 우수를 뜻하는 ‘마그나 쿰 라우데(Magna cum laude)’, 우등을 뜻하는 ‘쿰 라우데(Cum laude)’ 그리고 ‘잘했다’는 뜻의 ‘베네(Bene)’다. 넷 다 ‘잘했다’는 긍정 평가의 스펙트럼 위에서 살짝 그레이드 변화만 준 것이다.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

    우리는 숨마 쿰 라우데를 상대평가에서 단 한 명뿐인 1등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절대평가를 채택한 유럽에선 일정 기준을 뛰어넘은 학생에게 모두 부여하기에 복수인 경우가 많다. 한 교수는 이런 관점에 설 때 비로소 타인을 나의 잠재적 경쟁자가 아니라 감탄과 경이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고 말한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이런 사상은 ‘라틴어 수업’에서 다양하게 변주돼 강조된다. 라틴어로 편지를 쓸 때 첫 인사말로 등장하는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Si vales bene, valeo)’가 대표적이다.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란 뜻의 이 표현은 나의 안녕이 곧 당신의 안녕과 직결돼 있다는 진한 연대의식이 담긴 표현이다. 원래는 ‘시 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오(Si vales beve est, ego valeo)’를 줄인 것으로 ‘당신이 잘 계시다면, 잘되었네요. 저는 잘 지냅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축약하는 과정에서 나의 안부에 앞서 타인의 안부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강조된 것이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를 뜻하는 ‘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Hodie mihi, cras tibi)’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로마의 공동묘지 앞에 새겨졌다는 이 문장은 죽음 앞에선 나와  네가 모두 평등함을 일깨우는 문구다. 한 교수는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 문구를 떠올렸다면서 이를 미래지향적으로 새롭게 해석해내기도 한다. “오늘의 내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내가 새로운 의미와 향기를 간직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한 교수는 ‘내 안에 너 있고 네 안에 나 있다’는 이런 공동체주의가 오늘날의 이탈리아 사회에서도 발견된다며 이같은 사례도 들었다. “한국에서는 경치가 좋고 전망이 좋은 곳이면 어김없이 호텔이나 고급 주택, 레스토랑이 들어서지만 이탈리아에선 그게 불가능합니다. 그런 곳에선 반드시 장애인을 위한 학교나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을 먼저 짓도록 우선권을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날부터 강서구 장애인특수학교 문제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이 혐오 시설이라는 이유로 그 설립을 막아서며 대신 땅값을 올려줄 한방병원 건립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주민 공청회에서 무릎까지 꿇고 읍소하는 장애인 학부모를 외면하거나 막말을 해대는 이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라는 인사말을 주고받을 자격이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라틴어 수업’을 읽어보면 복잡한 문법 이야기보다는 고도의 합리성을 추구한 고대 로마인과 이를 기독교 신앙에 적용해 미묘한 뉘앙스를 끌어올린 중세인의 사유 방식으로 안내하는 내용이 훨씬 많다. 오늘날 영어 표현 ‘기브 앤드 테이크’의 원형이자 서구 상호주의 사상의 기원이 된 ‘도 우트 데스(Do ut des·네가 주기 때문에 내가 준다)’와 이를 정교분리의 원칙에 적용한 듯하지만 실제론 신앙 우위로 풀어낸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로 변용한 예가 대표적이다. 히브리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가 중세 이후 유럽에서 사과로 고착된 이유가 ‘사과’를 뜻하는 라틴어 표기 ‘malum’이 동시에 ‘악’을 뜻하는 추상명사이기도 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추론 또한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기자가 8월 중순 한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 요청을 한 것은 이러한 ‘라틴어의 고상함’에 대한 담화를 펼쳐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한 교수는 정반대로 ‘한국 사회의 천박함’ 때문에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다.



    라틴어 과외를 금하라

    당시 그는 영국 에든버러에 있었다. 그럼에도 상기된 목소리로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했다. “웬만하면 언론 인터뷰를 사양하려 했는데 이번에는 진짜 꼭 할 말이 있어 인터뷰를 해야겠습니다. 8월 28일 한국에 들어가는데 기자님이 편한 날짜에 만납시다.”

    그렇게 9월 5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북카페에서 만났을 때 그는 ‘라틴어 과외’ 이야기부터 꺼내 들었다. ‘라틴어 수업’이 많이 읽히면서 강남 학부모들 사이에서 “애들 머리 똑똑해진다더라”는 소문이 나면서 라틴어 과외 붐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던 순간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는 설명이었다.

    실제 ‘라틴어 수업’에서 살짝 맛만 보여준 라틴어의 문법 체계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문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예를 들어 ‘주다’라는 뜻의 do동사(원형은 dore이지만 라틴어 사전에선 1인칭 주격단수인 do가 표제어가 된다)의 경우 남성 여성 중성 3가지 성변화에 1~3인칭별 단·복수가 다르고 다시 능동형과 수동형, 6개 시제까지 합치면 160개나 되는 변화를 보인다. 형용사의 경우도 주격 속격 여격 대격 탈격 호격 6개의 격변화에 1~3인칭 단·복수를 합치면 36가지 변화가 발생한다.

    무엇보다 라틴어는 가톨릭 용어나 학술 용어를 제외하면 일상에선 사용되지 않는 사어다. 그래서 발음도 한국에서 익숙한 고전 발음과 가톨릭교회에서 주로 사용하는 로마 발음 2가지가 존재한다. 이 때문에 20세기 영국 최고의 정치가이자 군인이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윈스턴 처칠조차 학습을 포기했던 언어다.

    그런 점에서 한 교수는 어쩌면 지구상에서 현재 라틴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 100인 안에 들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한국의 중고생들에게 머리 좋아지라고 라틴어 공부를 시키겠다는 소식에 폭발한 것이다.

    “제가 책에서 ‘라틴어 공부를 꾸준히 하다보면 평범한 두뇌를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로 활성화하고 사고체계를 넓혀준다’고 한 것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라틴어에 대한 호기심 많은 대학생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한 거지 성장기 어린이나 청소년을 겨냥한 말이 아닙니다. 공부할 여가와 여력을 갖춘 은퇴자면 또 모를까, 안 그래도 공부에 치여 사는 어린아이들에게 그 어려운 공부를 시키겠다는 건지. 그건 고문이에요, 고문.”

    울컥해서 열변을 토하는 한 교수를 보는 순간 이탈리아 소설 ‘신부님 우리 신부님’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잘못된 일이라 생각되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열혈남아지만 마음만큼은 비단결같이 고운 돈 카말로 신부. 물론 우악스러운 돈 카말로 신부와 달리 ‘우리의 사무엘 한 신부님’은 교황님도 인정한 최고의 엘리트 신부님이라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불가에서 말하는 ‘견지망월(見指忘月)’이란 표현도 떠올랐다. 달을 보라 했더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느라 정작 달 보는 것을 잊는다는 표현이다. 라틴어 표현에 담긴 고상함과 미묘함을 음미하는 법을 배우자 했거늘 그 본뜻은 못 읽어내고 ‘라틴어 공부하면 머리가 좋아진대’라는 곁가지에만 집착하는 세태 앞에서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난감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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