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헤밍웨이를 주저앉힌 달콤 쌉쌀한 칵테일

‘아바나’와 다이키리

  • 김원곤│서울대 흉부외과 교수│

    입력2009-04-03 14: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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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은 영화를 보고도 사람에 따라 기억하는 대상이 다르다. 주인공의 빼어난 외모와 연기를 최고로 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영화의 배경에 홀딱 반하고, 또 어떤 이는 영화음악이 귓가에 맴돈다고 얘기한다. 여기에 영화를 볼 때마다 ‘술’에 꽂히는 이가 있다. 알고 보면 영화의 재미가 더하고, 보고 마시면 술맛이 달라지는 ‘영화 속 술 이야기’, 그 첫 번째는 1950년대 격정의 쿠바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아바나’와 칵테일 다이키리다.
    헤밍웨이를 주저앉힌         달콤 쌉쌀한 칵테일

    영화 ‘아바나’

    영화 ‘아바나(Havana)’는 시드니 폴락 감독과 로버트 레드퍼드 콤비의 7번째 작품으로 1990년에 제작됐다. 이 영화는 1958년 쿠바의 친미(親美) 독재자 바티스타가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혁명세력에 밀리다가 1959년 1월1일 끝내 아바나에서 도망치기까지 8일 동안 벌어지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카리브해의 진주’로 불리는 쿠바는 한반도의 절반만한 면적의 섬나라다. 역사적으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는 미-스페인 전쟁 이후 1902년 독립했지만, 미국 자본에 종속돼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토지는 미국 자본과 쿠바인 대지주들에게 집중돼 있었고, 독재정권의 부패가 심해 서민들은 궁핍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몇 차례의 민중봉기가 일어났으나 미국의 비호를 받은 정부에 의해 번번이 진압됐다. 1950년대 카스트로와 체 게베라의 반정부 게릴라 운동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났다.

    영화는 1958년 크리스마스이브, 아바나행 미국 페리여객선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이 미국인 남자에게 반입이 금지된 향수가 실려 있는 차를 대신 통관시켜달라며 돈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목적이 있는 여자는 적극적이고, 여자의 세련된 미모에 반한 남자는 그녀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남자는 미국과 환락의 도시 아바나를 오가며 도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전문도박꾼 잭 와일(로버트 레드퍼드 분), 여자는 스웨덴 출신이나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미국에 왔다가 공산주의자인 첫 남편을 만나 굴곡진 삶을 살아가는 바비(레나 올린 분)다. 바비는 첫 남편과 멕시코에서 헤어지고, 아바나에서 쿠바인 의사와 가정을 이루었다. 그녀의 남편은 대단히 부유한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독재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반감을 갖고 카스트로의 사화주의 혁명에 적극 동조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남편을 사상적 동지로 생각했다.

    짧은 만남, 운명적 이끌림



    사실 바비가 잭에게 부탁한 차 안에는 향수 대신 혁명 공작에 쓸 미국제 통신용 무전기가 들어 있었다. 잭도 이 사실을 알게 되나, 위험을 감수하고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다. 이튿날 아침 아바나에 도착한 후 차를 인도하기로 한 장소에서 잭은 바비에게 계속 만나고 싶다고 하지만, 바비는 ‘유부녀’라는 말과 함께 냉정하게 사라진다.

    그러나 의외에 장소에서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이 성사된다. 잭은 그날 저녁 여느 때처럼 쿠바에 여행 온 미국인 여자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남편과 함께 있는 바비를 만난다. 무전기 운반을 도와준 데 대해 호감을 가진 바비의 남편으로부터 쿠바의 현실과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만, 포커와 여자에만 관심 있는 잭에겐 자신의 삶과 무관한 얘기에 불과했다.

    잭을 만난 뒤 바비 부부는 혁명을 위한 거사가 사전에 탄로 나는 바람에 비밀경찰에게 붙잡힌다. 이 과정에서 남편은 죽고 바비는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이 잭에게도 전해진다. 잭은 갖은 노력 끝에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던 바비의 소재를 파악하고,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바비는 고마워하면서도 또다시 그를 피해 사라진다. 하지만 잭이 포화를 뚫고 그녀를 찾아낸다. 잭은 비록 짧은 만남이었으나 바비를 향한 운명과도 같은 이끌림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상실감에 휩싸여 있던 바비는 잭의 정성에 감동해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연다. 잭은 외국인인 바비에게 쿠바 혁명이 대수냐며 함께 쿠바를 떠나자고 설득한다.

    그러나 실상 바비의 남편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이 영화가 준비해둔 반전이다. 비밀경찰 책임자의 집에 갇혀 있던 그를 이번에도 잭이 구해낸다. 남편의 생존 소식을 접한 바비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고 남편에게 돌아간다.

    마침내 1959년 새해 첫날을 기념하기 위해 전날 저녁부터 연회장에 모인 아바나 유력인사들에게 바티스타가 도망쳤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대혼란 속에서 미국인과 구정권 인사들이 앞 다퉈 아바나를 탈출한다. 영화 종반부, 미국행 페리여객선 선착장에서 잭과 바비가 마지막으로 재회한다. 그러나 잭은 아바나를 떠나고, 바비는 남는다.

    4년 후 1963년, 쿠바에 가까운 마이애미 해변을 찾은 잭은 배가 보일 때마다 바비를 처음 본 순간의 설렘을 추억한다.

    한편 ‘다이키리(Daiquiri)’는 럼주와 라임(또는 레몬)주스에 설탕을 탄 간단한 레시피의 칵테일이다. 쿠바는 20세기 초 독립했으나 미국으로부터 각종 기술 원조를 받았다. 쿠바 남부지역의 다이키리 광산에도 미국 기술원조단이 들어갔다. 이들에게 더운 지방에서의 작업이 쉬울 리 없었다. 쿠바 광산지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럼주와 라임주스, 설탕으로 만든 칵테일이 탄생한 배경이다. 손쉽게 만든 칵테일의 청량감이 피로회복에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기술진 총감독이던 제닝스 콕스가 광산의 이름을 따서 다이키리라고 부른 것이 이 전설적인 럼주 칵테일의 유래다. 다이키리는 1920년대부터 아바나를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다.

    다이키리 광산의 미국인 노동자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이키리의 명성을 드높인 이는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문호 헤밍웨이(1899~1961)다. 미국인 헤밍웨이가 쿠바를 미치도록 사랑했다는 건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1939년부터 20여 년간 쿠바에 정착하면서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20세기 문학사를 대표하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헤밍웨이는 늘 특유의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쿠바산 시가를 입에 문 채 아바나의 플로리디타(Floridita) 바에 나타났다. 바텐더는 헤밍웨이가 나타나면 그가 사랑하는 칵테일 다이키리를 큰 잔에 담아냈다. 이 바는 헤밍웨이의 유명세 덕분에 널리 알려져 아바나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가 됐다.

    영화 ‘아바나’에서는 쿠바에 도착한 잭이 차를 넘겨주기 위해 바비를 만난 호텔에서 처음 등장한다. 다이키리를 추천하는 잭에게 바비는 진저에일을 마시겠다고 한다. 이때 잭의 발음에 귀기울여보면 재미있다. 다이키리(Daiquili)를 ‘데키리’라고 발음한다. 쿠바의 수도도 흔히 ‘하바나’라고 하지만 현지에선 ‘아바나’로 발음한다. 결국 외국어 발음은 상대방이 알아듣기만 하면 되는 모양이다.

    이 영화에서도 다이키리가 빛을 발하는 곳은 플로리디타 바다. 미국에서 관광 온 두 여자와 나누는 대화에서 잭의 친구가 잭을 헤밍웨이라고 소개하자 여자들이 웃으면서 ‘그럼 수염은 어디 갔느냐’고 반문한다. 다이키리와 헤밍웨이 그리고 플로리디타 바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수염은 어디로 갔죠?”

    영화에서 등장하는 바 외관에는 ‘다이키리 원조집(cuna del Daiquiri)’이라는 흥미로운 수식어와 함께 플로리디타 대신 ‘플로리다(Florida)’라는 상호가 씌어 있다. 이는 점점 늘어나는 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의미가 같고 발음은 더 쉬운 상호로 바꾼 탓이다.

    헤밍웨이를 주저앉힌         달콤 쌉쌀한 칵테일
    金元坤

    1954년 출생

    서울대 의대 졸업, 의학박사(흉부외과학)

    우표, 종(鐘), 술 수집가

    현 서울대 흉부외과 교수


    스페인어의 ‘-ito’나 ‘ita’는 작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접미사다. 그러니까 스페인어의 플로리디타와 영어의 플로리다는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다이키리를 변형한 칵테일 종류가 여럿이다. 기존의 다이키리에 얼음을 넣은 다음 갈아서 내놓는 프로즌 다이키리가 그중 잘 알려져 있다. 이 영화에도 가끔 나오는 모히토는 다이키리 레시피에 탄산수와 민트를 넣은 것이다.

    자, 이제 다이키리를 한잔 들고 수십년 전 쿠바혁명의 격정과 헤밍웨이의 열정을 음미해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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