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말 많고 탈 많은 한약 믿고 먹어도 될까?

세 번째 르포 : 서울약령시

  •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0-03-03 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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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많고 탈 많은 한약 믿고 먹어도 될까?
    눈이 흩날린다. 낡은 소파 옆 난로가 열기를 내뿜는다. 이대서(69) 할아버지가 쌍화차를 내왔다. 숙지황 천궁 계피 감초를 탕기에 넣고 뭉근하게 달였다. 기혈이 허하고 찬 것을 다스리는 탕약(湯藥)이란다. 노신사의 몸에서 약재 냄새가 난다. 그는 이 골목에서 12년째 ‘한약방’을 지킨다.

    서울시장은 이 골목을 지금껏 세 번 찾았다. 그때마다 시장은 ‘한의학의 세계화’를 외쳤다. 이 골목은 2005년 ‘한방산업특구’로 지정됐다. 덕분에 ‘서울약령시’라는 현판을 내건 대문이 올라서고, 전신주가 땅 밑으로 들어갔다. 마구 널려 있던 간판도 나무재질로 바뀌어 거리가 말쑥해 보인다.

    서울약령시는 동대문구 제기1동 제기2동 용두동에 걸쳐 있다. 경동시장은 한약재를 파는 서울약령시와 농산물을 파는 경동신시장, 경동구시장으로 나뉜다. 1960년대 한약재를 파는 보따리상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한약거리가 조성된다. 보따리상은 귀향 열차를 기다리면서 ‘전농동 588번지’에서 몸을 풀었다.

    길 건너엔 18층 높이 ‘동의보감타워’가 서 있다. 이 한방백화점은 2007년 망했다. 수지를 못 맞춰 사람이 떠난 건물은 텅 비어 있다. 싸구려 등산복을 파는 노점상이 건물 앞 광장을 점령했다. 한약업계는 세계화는커녕 생존을 걱정할 만큼 불황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릴 즈음이 마지막 호시절이었다고 상인들은 말했다.

    “경동시장만 욕먹어”



    지하철1호선 제기역 2번 출구로 나와 1분 남짓 걸어가면 서울약령시 대문을 만난다. 노점상이 펼쳐놓은 구기자 산수유에 눈이 내려앉는다. “잘 팔리느냐”고 묻는 게 면구스러울 만큼 손님이 없다. 노점상 아주머니가 “기골이 약하면 남자 노릇 못한다”면서 소주병에 담긴 홍화씨 농축액을 권했다. 홍화씨는 뼈를 튼튼하게 한다.

    콧물이 흐르고 재채기가 나오던 터라 감기 몸살에 좋다는 살구씨 농축액을 한 병 샀다. “살구씨 가루를 넣어 죽을 쑤어 먹으면 감기가 낫는다”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이틀 동안 살구씨 기름을 먹었더니 감기가 뚝 떨어졌다. 이대서 할아버지가 내준 쌍화차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송현한약방’ 원장이다. 모직코트와 중절모가 잘 어울리는 이 노신사는 금융감독원 분쟁조정국장을 지냈다. 1971년 재무부에서 공직을 시작해 금융감독원에서 잔뼈가 굵었다. 1999년 은퇴한 뒤 이곳에 한약방을 냈다. 할아버지는 “요즘 젊은이들은 한약의 효능을 잘 안 믿는다”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성제약업사’의 ‘50대 남자’가 서울탁주에서 만든 장수막걸리를 반주로 밥을 먹는다. 찌개 속 돼지고기 목살과 김치를 보자 군침이 돌았다. 박정환(57)씨가 동석했다. 그는 ‘고려식품제분소’란 간판을 내걸고 오미자 같은 식품을 갈아 판다. “돈벌이가 잘 되느냐”고 묻자 ‘50대 남자’가 열변을 토한다.

    “특구는 무슨…. 얼어 죽을. 특구만 지정한다고 사람이 오나. 시스템을 바꿔야지. 무슨 일만 나면 경동시장이 욕을 먹어. 가짜 한약재니 농약이 나왔다니 하면서 방송에서 떠드는데….”

    서울약령시 가게들은 대로변에 위치한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 권리금이 없다. 보증금 2000만원, 월세 50만~60만원 수준. 그만큼 벌이가 안 된다는 거다. 새로 오는 사람은 없고 떠나는 사람은 많다. 10년 전 1500곳에 달하던 업소 수는 반으로 줄었다. ‘50대 남자’는 ‘보사부’ 탓이라고 했다.

    서울약령시 사람들은 보건복지가족부를 옛 이름인 ‘보사부’라고 했다. ‘보사부’ 시절 일을 시작했기 때문일 게다. 그리고 ‘보사부’ 얘기만 나오면 역정을 냈다. 아는 건 많은데 할 수 있는 일은 적어서다. 박정환씨는 “경동시장서 약 만지는 사람 중 약 못 짓는 이는 없다”고 했다.

    한약의 딜레마

    북한산, 중국산 ‘짝퉁 담배’의 유통 경로를 알고자 중국 웨이하이(威海) 옌타이(煙臺)를 다녀온 적이 있다. 두 도시는 한국과의 교역으로 먹고산다. 시장 골목마다 약재를 파는 상인이 그득했다. 호객도 한국말로 한다. 옌타이발 인천행 페리에 오른 보따리상의 짐마다 장뇌삼을 비롯해 밀반입하는 한약재가 가득했다.

    서울약령시에서는 원산지를 표시해 약재를 판다. 암을 억제하는 강황은 인도산, 자궁경부암을 예방하는 상황버섯은 캄보디아산이 많다. 감초는 국산이 없다. 색이 노랗고 부드러운 놈을 중국 몽골에서 수입한다. 불신은 상인들이 자초했다. ‘불법·불량 한약재 퇴치운동 궐기대회’가 서울약령시에서 열린 적도 있다. 일부의 악덕 상혼 탓이다.

    중국산 약재는 한의학계의 말썽꾸러기. 농약이 검출되거나 이산화황이 잔류해 문제가 되곤 한다. 식품으로 수입해 의약품으로 뒤바뀌는 약재도 적지 않으며, 중국산 국산을 섞어서 팔기도 한다. 중국산 약재는 딜레마다.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거나 공급량이 부족한 약재가 많아 중국산을 쓸 수밖에 없다.

    이산화황은 독성이 강하다. 공기에 포함된 이산화황 비율이 0.003%가 넘으면 식물이 죽고 0.012%를 넘어서면 사람한테도 치명적이다. 천식 환자가 이산화황을 먹으면 기관지 수축이 일어나 호흡이 멈출 수 있다. 이산화황이 나오는 까닭은 벌레 먹는 걸 막고 보존기간을 늘리고자 연탄연기나 유황을 약재에 쐬기 때문이다.

    “약효는 국산이 더 좋아요. 재배하지 않는 약재가 많은데다 값이 비싸 국산을 못 쓰는 거죠.”

    ‘50대 남자’가 막걸리를 권하면서 말했다. “그 많은 약재의 쓰임새를 어떻게 익혔느냐”고 묻자 “아버지가 한약방을 했다”면서 웃는다. 취급하는 약재가 250종. 서랍이 달린 장롱 모양의 나무장에서 강활, 당귀를 내온다. 강활은 진통 항염증에 쓴다. 당귀는 피를 만드는 걸 돕고 심장을 튼튼하게 한다. 어혈(瘀血)을 푸는 데도 좋다.

    그가 당귀, 강활을 똑바로 들여다보라고 한 뒤 섞었다. 둘은 똑같았다. 구분을 못하자 “한의사들도 젊은 사람은 구별을 잘 못해요”라면서 웃는다. 그러곤 잽싸게 두 약재를 구분해 오동나무로 만든 약장(藥欌)에 넣었다. 나는 약장 서랍마다 한자로 적힌 약재 이름을 읽는 일도 버거웠다.

    엘크뿔을 팔다

    말 많고 탈 많은 한약 믿고 먹어도 될까?
    서울약령시엔 ‘없는 약재가 없다.’ 초오, 부자를 파는 곳도 많다. 초오, 부자는 조선왕조 때 비상과 함께 사약에 넣던 독성이 강한 약재다. 초오, 부자 같은 약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파는 건 불법이다. 한의사 한약사 한약업사만 초오, 부자 같은 약재를 다룰 수 있다. 상인들은 “우리가 전문가”라면서 ‘보사부’를 탓했다.

    약재의 ‘꽃’은 몸을 보하는 인삼, 녹용이다. 홍삼 백삼 영지버섯을 파는 ‘영보인삼’엔 일본어로 쓴 현수막이 걸려 있다. 서울약령시는 인삼을 한국에서 가장 싸게 파는 곳이다.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난 정용경(53) 사장은 30대 초반부터 삼을 팔아 밥을 먹었다. 직원으로 일하다 주인한테 가게를 넘겨받았다.

    “한약 인기가 예전만 못한 게 아니라 확 줄었어요. 예순 넘은 분들만 한약을 찾습니다. 일본인 관광객요? 이따금 오기는 하는데 삼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비타민제 가격쯤을 생각하고 왔다가 값을 말해주면 둘러보고 온다면서 그냥 나갑니다. 특구로 지정만 해놓았지 외국에 홍보하는 건 뒷전입니다. 경동시장이 전통의학을 체험하는 관광코스가 되면 좋을 텐데….”

    “누가 현수막의 글귀를 썼느냐”고 물었더니 아내를 가리킨다. “이 사람이 외국산이거든요”라면서 웃는다. 정 사장의 부인은 일본인. “삼이 좋아 삼 파는 사람과 결혼했다”면서 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도 웃는다.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 “좋으시겠다”고 하자 아저씨는 “주택복권 당첨된 기분으로 산다”고 했다.

    녹용은 한의학계의 골칫거리다. 지금도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국내에 유통되는 러시아산 녹용이 실은 북미에 주로 사는 엘크의 뿔이라는 사실이 2007년 드러난 뒤 지금껏 제 살 깎아먹는 다툼이 이어지는 것. 러시아 고르나이알타이공화국에서 수입하는 녹용은 약효가 훌륭한 것으로 알려져 값이 비싸다.

    말 많고 탈 많은 한약 믿고 먹어도 될까?
    서울약령시에서 한방병원을 운영하는 어떤 한의사는 “원용의 약효가 100이라면 엘크는 20쯤 된다”고 임상 경험을 소개했다. 엘크뿔을 한의원에 공급한 곳은 한의학계의 실력자가 모여 세운 약재회사다. 북미산 엘크는 사슴만성소모성 질병(CWD·광녹병) 때문에 수입할 수 없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광녹병에 걸린 사슴을 사람이 먹거나 가축 사료로 쓰지 말라고 권고한다. 엘크뿔을 판 이들은 “고르나이알타이공화국에도 엘크가 자란다. 사슴은 품종이 아니라 원산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유전자 검사도 벌였으나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국회 국정감사 때도 갑론을박만 나왔을 뿐이다. 불신은 의심에서 비롯된다. 그들이 판 녹용의 진실은 모르겠으나 북미산 엘크가 중국에서 원산지 세탁을 거친 뒤 한국에 들어온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금은 엘크뿔과 러시아산 사슴뿔의 약효가 ‘같다’ ‘다르다’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힘센 사람들의 입김 탓인지 한의사들의 임상 경험이 잘못됐다는 쪽으로 논의가 나아간다. 원용의 약효가 다른 녹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다.

    얼마 전 보약을 한 제 지어먹으려고 지인이 소개한 서울 강남구의 어떤 한의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식사조절을 한 적도 없는데 80kg 넘던 체중이 63kg으로 준 뒤 오랫동안 게걸음해서다. 한의사가 진찰을 마친 뒤 “특별한 병은 없는데 양기가 허하다”면서 녹용 한 상자를 꺼내왔다.

    “이게 으뜸 원자를 쓰는 ‘원용’이라는 건데 러시아에서 수입한 겁니다. 우리 병원은 다른 곳과 달리 이것만 써요. 그래서 약값이 비싼 겁니다. 다른 병원은 중국산 녹용을 씁니다. 잘 찾아오셨어요.”

    한의사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스레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약을 짓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이다.

    “선비가 하던 일”

    경동시장 한약거리에 둥지 튼 업소의 업태는 다양하다. 한의원 한약국 한약방 약재소매상 약재도매상이 있다. 서울약령시 사람들은 ○○물산 ○○무역 같은 간판을 내건 곳은 피하라고 조언한다.

    한의원은 대학에서 한방의학을 전공하고 한의학사 학위를 받은 이가 운영한다. 한약국은 대학에서 대통령령이 정한 관련 과목을 이수하고 졸업한 뒤 한약사국가시험에 합격한 이가 운영한다. 한약방은 한약업사가 주인이다.

    금감원 출신의 이대서 할아버지는 한약업사다. 한약업사는 보약과 치료약을 지어 팔 수 있다. 약재를 파는 상인이 약을 지어 파는 건 불법이다. 하지만 모두 법을 지키는 건 아니다. 대학물 먹은 경험 없는 젊은 한의사보다 약을 더 잘 쓴다면서 ‘보사부’를 탓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대학에서 배우지 않았을 뿐 경험만 보면 한약업사가….”

    할아버지도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한약업사는 동의보감 같은 의서에 나온 대로만 약을 짓는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 할아버지의 명함엔 ‘서울특별시한약협회 회장 이대서’라고 적혀 있다. 재무부, 금감원 경력 덕분에 한약업사 사회에서 존경받는다.

    “33년 전 딴 자격증을 은퇴 후에 써먹네요. 1967년 10월일 거야. 자격을 얻은 게….”

    전라도 정읍이 고향인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한의사’였다. 한약방은 시골의 ‘병원’이었다. 사람들은 한약업사를 ‘한의사’로 여겼다.

    “한약방을 하던 아버지한테 배웠지. 아버지가 시험을 봐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어.”

    말 많고 탈 많은 한약 믿고 먹어도 될까?
    돌아가신 나의 외할아버지도 한약업사였다. 초등학교 때 나는 ‘서산군 서산읍 읍내리’(현 서산시 읍내동) ‘회화당한약방’의 약장에서 한자를 배웠다. 서랍에 한자로 쓴 약 이름을 다 읽으면 맛난 걸 준다고 말씀해서다. 방학이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약재 이름을 다 외웠다. 선물은 달콤한 맛이 나는 절인 약재 한 움큼.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걸 먹으면 취기가 돌았다.

    대학 문턱도 못 가본 ‘한약방 한의사’는 맥 짚고, 침놓고, 뜸 뜨고, 약 짓는 법을 도제식으로 배웠다. 한약업사는 지금의 의사처럼 돈을 잘 벌었다.

    “내가 어릴 적엔 나라에 의사가 적었어. 무의촌이 허다했지. 그래서 도지사 재량으로 한약업사 시험을 치러 자격을 주는 제도가 생겼어요. 무의촌에서 의사 노릇하면서 국민 보건을 책임지라고. 읍내마다 한약방이 들어섰지.”

    서울에서 일하는 한약업사는 할아버지를 포함해 70명이 생존해 있다.

    “나도 젊은 축에 들어. 계산해봤더니 평균나이가 73세야. 60~80대가 대부분이고 50대도 있기는 해.”

    그는 ‘보사부’에 할 말을 다했다. 며칠 전 할아버지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부에 한 말은 글로 옮기지 말란다. 그래서 조금만 적는다.

    “한약업사는 예전에 선비가 하던 일이야. 그런데 우리한테는 융통성을 안 줘. 의서에 나온 대로만 지으라는 게지. 한약이 뭔가. 그 안에 우리의 얼이 담겨 있어. 한약 소비량이 해마다 줄어. 대학은 대학대로 한의학을 발전시키고 전통의학은 전통의학대로 계승 발전해야 해. 왜 어르신들의 경험을 사장하는지 모르겠어. 시험도 다시 부활했으면 좋겠어.”

    융통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의서마다 증세에 따라 다른 약재를 넣어도 무방하다는 구절이 적지 않다. 의서와 다르게 약을 짓더라도 들킬 일은 거의 없다.

    어떤 국회의원이 ‘한약업사’라는 이름을 ‘전통한약사’로 바꾸는 법안을 낸 적이 있다. 그 국회의원은 2005년 약사법 개정안을 제출하면서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농어촌, 오·벽지를 비롯한 의료취약 지역에서 사실상의 의료 인력으로 활용하고자 국가가 한약업사 제도를 두었고, 한약업사들은 국민의 보건 복지 향상에 기여했다. 1983년 이후 한약업사 자격 취득시험이 중단되면서 더 이상 한약업사가 배출되지 않고 있으나 이들은 최소 경력자가 24년의 임상 경험을 가진 한약 전문가다. 따라서 직능인으로 대우할 필요가 있다.”

    한의사협회, 약사회의 반대로 이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한약업사가 전통한약사로 직함을 바꾸면 한의사, 약사가 피해를 본다는 거다.

    “아들이 더 낫겠죠”

    서울약령시에서 ‘남영한약방’을 운영하는 유해성 원장은 1954년생이다. ‘27년 임상 경험’을 가진 ‘최연소’ 한약업사.

    “1983년 마지막 기수예요. 한약업사 모임에 가면 제가 잔심부름을 해요. 후배가 없어요. 경력으로도, 나이로도 막내거든요.”

    그는 한의사 아들을 둔 한약업사가 많다고 했다. 전라도 말씨를 쓰는 ‘미주당한약방’ 한기섭(65) 원장의 아들도 한의사다. 광주의 한약방을 한의대 나온 아들에게 넘기고 7년 전 서울약령시에 한약방을 냈다. 1971년부터 한약업사로 일한 40년 경력의 숙련가. “아들이 아버지보다 약을 잘 쓰나요”라고 물었다.

    “하하. 글쎄요. 아무래도 한의대에서 6년을 배웠으니 더 낫겠죠.”

    이대서 할아버지가 달인 한약을 넣는 비닐봉투에 쌍화탕을 싸줬다. 쌍화탕 6봉을 들고 어둠이 깔린 골목을 쏘다녔다. 눈이 흩날린다. 감기 탓인지 춥다. 한의사 말대로 양기가 허한가보다. 여름이 오기 전 보약 한 제 먹어야겠다. 제기역 승강장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면서 차갑게 식은 쌍화탕을 마셨다. 온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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