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호

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 - 송상현 회고록

‘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 서울법대에서의 35년

“국무총리 제의 거절한 건 安分知足할 나이였기 때문”

  • 입력2018-04-1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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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년 서울대 창립 50주년 기념행사 때 추억거리 물품전시회가 있었다. 출석부, 성적표, 교과서, 학적부,학생들이 동숭동 캠퍼스 앞에 있는 중국집 ‘공락춘’에외상값 대신 잡혀놓았던 시계나 학생증 등 흥미진진한 품목이 많았다. 단과대학 학장단이 일반에 공개하기 하루 전 먼저 관람하던 중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의 학적부가 보였다. 

    • 김영삼 학생의 본적(거제)과 주소(중구 회현동)가 기재돼 있고,서울대 철학과 청강생이라는 기록이 보였다. 청강생을 한자로썼는데 들을 청(聽)자 대신 관청 청(廳)이라고 오기했다.당황한 교무처장이 이를 곧 치워버린 후로그 문서의 행방은 알 수 없다.


    1972년 10월 17일 악명 높은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청명한 가을날의 날벼락이었다. 느닷없이 사이렌이 울리면서 “조기 통행금지가 실시되니 시민들은 오후 5시까지 귀가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버스에서 이 방송을 들은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귀가했다.

    청명한 가을날의 날벼락

    1997년 5월 1일 ‘법의 날’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왼쪽에서 두 번째가 나다.)

    1997년 5월 1일 ‘법의 날’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왼쪽에서 두 번째가 나다.)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된 후 학교는 문을 닫고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법대 교수들은 출근한 후 김증한 학장실에 모여 소문과 시국담을 교환하면서 나라와 학교의 장래를 걱정했다. 교수들은 강의실을 잃은 채 방향 없는 삶을 이어갔다. 참으로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여론 주도층인 교수들을 달래고자 시작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종필 국무총리와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보급한 교수 테니스가 시작된 게 이즈음이다. 당시 나온 교수 사회의 유행어 중 하나가 ‘주테야테’(낮에는 테니스, 밤에는 TV 시청 외에는 교수들이 할 일이 없다는 자조적인 말)다. 

    대학본부와 각 단과대학에는 중앙정보부, 서울시경찰청, 보안사, 관할 경찰서 등 온갖 사복 정보원이 교수와 학생의 동태를 감시하고자 무시로 드나들면서 날마다 정보보고를 올렸다. 또한 이들에게 매수된 내부나 외부의 끄나풀도 많았으므로 교수들은 상호간에도 항상 말을 조심해야 했다. 교수회의에서 나온 발언이 10분 뒤 정보기관에 들어갈 정도였다. 

    10월 유신이라는 억지 정치노름이 먹혀들지 않는 듯하자 정부는 교수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유신의 정당성을 홍보하게 했다. 특히 법대 교수는 이용가치가 많았다. 언론 인터뷰는 물론 공개 강연에 참여해 유신의 당위성을 설명하라는 게 정권의 요구였다. 나도 무척 시달렸으나 헌법은 내 전공 분야도 아니고 긴장된 순간에는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어 TV 인터뷰에는 응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 



    이상과 꿈을 품고 시작한 학자 생활은 이렇듯 험난했다. 법대 학생 시절부터 군인 집단이 국회를 대신해 1분마다 법률안을 한 개씩 통과시키는 코미디를 보면서 자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에 찬 고민도 많이 했다. 법이 권력에 눌리거나 아첨해 곡학아세하는 세상을 한탄하면서 법학을 공연히 전공하지 않았나 하는 회의심이 강하게 들 때가 많았다. 처참한 민주주의 형해화(形骸化)의 현장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유신時代의 ‘인질정책’

    박정희 정권은 서울대를 학생 시위의 온상으로 여기고는 박해했다. 시위의 중심이 되는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의 이른바 ‘문제학과’ 정원을 대폭 줄이는 바람에 법대는 학년당 300명이던 정원이 하루아침에 160명으로 줄었다. 또한 학교를 멀리 시외로 내보낸다는 계획 아래 관악산 아래의 관악컨트리클럽 부지에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해 1975년 이사하게 했다. 관악캠퍼스에서 학생들이 아무리 떠들어보았자 시내에서는 알 수도 없고 최루탄을 발사해도 매운 연기는 관악산 언저리에 머무를 뿐이라는 계산이었다. 

    강남 개발이 본격화하기 이전이므로 서울의 중심인 강북에 사는 교수들의 관악캠퍼스 출퇴근은 도로 사정은 물론 교통편 연결 등에 비춰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논의 끝에 채택된 대책 중 하나로 교수들에게 구반포에 지어진 32평 아파트를 학교 당국의 알선으로 융자받아 분양받을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아파트 분양이 인기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사람도 없었던 때인데 구반포 32평 아파트의 분양가격이 750만 원 전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수들은 원하면 정부에서 50만 원의 보조금을 받고 300만 원 한도로 융자를 알선받았으며 나머지는 본인의 부담으로 처리했다. 나는 나머지 400만 원이라는 거액을 마련할 방법이 전연 없었다.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양가의 어른들이 보조해주셨다. 돈암동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4대가 함께 하는 신혼생활을 한 우리 부부는 최초로 나의 이름으로 등기된 아파트로 이사해 분가했다. 비슷한 경로를 거쳐 구반포 32평 아파트에 입주한 교수가 많았다. 이것이 구반포 아파트단지 101동 이하를 교수아파트라고 부르게 된 연유다. 

    나는 당시 몇 안 되는 해외 유학생 출신 교수였다. 그래선지 강의와 연구 외에 불려 다니는 경우가 많아 이를 면해보고자 1974년 10월 독일 훔볼트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함부르크대에 가서 1년간 방문학자로 체재한 일이 있다. 교무처장이던 물리학과의 김철수 교수의 배려로 이 같은 일이 가능했다. 

    이 무렵부터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망명하는 해외 주재 공무원이 자꾸 생겨나자 정부는 ‘인질정책’을 도입해 외국에 나가는 공무원이 배우자를 동반하려면 자녀를 국내에 둬야 하고, 자녀를 동반하려면 배우자가 국내에 남아 있어야 했다. 서울대 교수도 공무원이므로 세 살이던 어린 아들 재혁이는 돈암동에 사는 부모님에게 맡기고 6개월 된 딸 유진이만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독일로 갔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어린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확하고, 빈틈없고, 부지런한 독일人

    함부르크 생활은 미국, 영국 외의 또 다른 서양 사회, 즉 유럽대륙에 눈을 뜨게 해준 기회였다. 미국에서 수년간 유학했고 영국에서 1년을 수학했지만 관념적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서양이란 사실 미국과는 아주 다르며 상당히 다양하고 각국 나름의 독자적 역사와 전통을 유지하는 여러 개의 선진 문명사회다. 특히 독일은 그 나름대로 독특한 면이 있음을 많이 배우고 생각했다. 그들은 정확하고, 빈틈없고, 규율을 준수하면서도, 부지런해 저절로 존경심이 들었다. 한국은 근대의 법제를 일본을 통해 독일로부터 계수한 나라이므로 법률가로서의 관심도 깊었다. 

    미국이라는 신세계의 자유와 창의, 그리고 이중적 잣대와 우월의식에도 불구하고 인류 사회의 표준이 되는 찬란한 역사 및 문화와 몸에 밴 공정의식(fairness)을 자랑하는 영국을 겨우 이해할까 말까 한 나에게 독일은 또 다른 거대한 발견이었다. 독일인들의 질서 의식과 능률 지향, 정확성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자주 감탄했다. 또한 어려서 무심코 불렀던 상당수의 노래가 한국의 동요가 아니고 독일 노래임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 지금도 남아 있다. 

    독일인들은 아돌프 히틀러 집권 시기 저지른 만행을 그대로 인정하고 늘 겸손하게 사죄하면서 지금까지도 꾸준히 여러 가지로 피해자에게 배상하고 나치 시대 악행을 저지른 자를 시효 없이 체포해 재판함으로써 정의가 살아 있고 진정한 속죄가 무엇인지 세계만방에 보여주고 있다. 자연히 식민지 시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오리발을 내미는 일본과 비교가 된다. 

    나는 1977년 10월 부교수로 승진했다. 정교수가 된 것은 1982년 11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임명에 의한 것이었다. 1989년, 1995년 교수 재임용을 받아 2007년 정년퇴직 때까지 무사히 학자의 일생을 마감했다. 

    1996년에는 서울법대 학장선거에 출마해 다른 교수를 큰 표차로 물리치고 당선된 바 있다. 2년이라는 짧은 임기 동안 큰 업적을 남길 수는 없었으나 선우중호 총장을 모시고 대과(大過) 없이 임기를 마쳤다. 매주 학장회의에 참석하면서 다른 대학 학장과 교수를 알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

    YS의 ‘서울대 청강생’ 학적부

    학장 임기 중 1996년 서울대 50주년 기념행사에 관여한 것과 법대 100주년 기념관을 준공한 게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서울대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다양하게 전개한 가운데 서울대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추억거리 물품 전시회도 있었다. 옛날의 출석부, 성적표, 교과서, 학적부, 배지(badge), 학생들이 동숭동 캠퍼스 앞에 있는 중국집 ‘공락춘’에 외상값 대신 잡혀놓았던 시계나 학생증 등 흥미진진한 품목이 많았다. 단과대학 학장단이 총장을 모시고 일반에 공개하기 하루 전 먼저 관람하던 중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YS)의 학적부가 보였다. 김영삼 학생의 본적(거제)과 주소(중구 회현동)가 기재돼 있고, 서울대 철학과 청강생이라는 기록이 보였다. 청강생을 한자로 썼는데 들을 청(聽)자 대신 관청 청(廳)이라고 오기했다. 서울대 동문임을 자랑하면서 서울대 학장단을 청와대로 초청해 칼국수로 오찬을 베풀던 김영삼 대통령에 관해 정식 학생이 아니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 시절이고, 이는 당시 정부의 예민한 금기 사항 중 하나였는데 그만 현실적 증거를 목격한 것이다. 당황한 교무처장이 이를 곧 치워버린 후로 그 문서의 행방은 알 길 없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서울대는 많은 논의 끝에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의 역사를 무시하고 1946년 발족한 종합국립대학 때부터 역사를 계산하는 데 비해 법대는 1895년 설치된 한성법관양성소를 서울법대의 효시로 삼아 100주년의 역사를 주장했다. 같은 대학교 내에서 이상하게도 다른 역사 인식에 따라 학교의 역사가 차이가 나는 것이 우습다. 한성법관양성소는 구한말 고종 황제 시절에 설립돼 식민지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 효시로 삼았고 그후 일제강점기에 존속하던 경성법전이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도 포함해 서울 법대의 전신으로 삼아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오래전에 착공했으나 자금 고갈로 중단 상태에 있던 100주년 기념관을 이석희 동창회장과 함께 서울법대와 별 인연이 없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설득해 20억 원이 넘는 그의 기부로 이를 완공하고 개막식을 성대하게 주최했다.

    서울법대생은 천하제일이었으나, 교수는…

    나는 총장선거에 두 번 출마해 모두 낙선한 경험이 있다. 개인 소신으로는 총장직선제에 반대하지만 서울대를 개혁함에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처음 출마했을 때 투표 결과는 3등이었는데 공대의 이기준 교수가 총장으로 당선됐다. 나에 대한 기대를 표시하는 교수가 증가하고 내게 신임을 주는 동료가 많음에 힘입어 다음번에 출마하려고 생각했는데 거의 대부분의 예측이 다음번에는 내가 틀림없이 당선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선거에서 정운찬 교수에 이어 2등으로 득표해 낙선했지만 헌신적으로 참여해 도와준 선거팀 교수들과 외부의 졸업생 및 기타 후원자들께 지금도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 

    1972년 9월부터 정년으로 퇴임한 2007년 2월까지 35년간 모교에서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나 나름대로 한눈팔지 않고 학자의 한길을 대과 없이 걸었다. 서울대에 입학한 1959년 3월부터 사법대학원을 수료한 1964년 9월까지의 기간을 포함하면 40년 넘게 서울대에 몸담았는데 이는 군대와 유학 시절을 제외한 나의 전 생애를 서울대와 함께 보낸 셈이다. 이 기간은 나에게는 후회 없고 행복하고 보람 있는 내 생애의 황금 기간이다. 우수한 제자들을 가르쳐낸 보람과 자부심은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의 원천이다. 

    예전의 서울법대는, 학생은 천하제일의 수재들이 입학했음에 틀림없으나 교수진은 반드시 천하제일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면이 좀 있었다. 법대 교수진에는 학생 때부터 국가시험에는 관심 없이 학문의 길로 매진한 소수의 교수도 계셨지만 여러 해 사법시험에 실패한 후 오갈 데가 마땅치 않은 중에 학문적 업적보다는 여러 인간관계를 정치적으로 잘 이용해 들어온 교수도 있었다. 천하제일이라는 서울법대는 최고의 실력을 가진 교수들을 골라서 뽑아야 마땅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더군다나 내가 몸담고 있던 법대의 분위기는 교수 간의 공동 연구를 통해 활발하게 업적을 내거나 동료 간의 인간적 유대의식이 보편화된 분위기는 아니었다. 독창적 연구는 어디로 가버리고, 여기저기에서 베껴다가 교과서를 출간하거나 월간 수험 잡지에 200자 원고지 30매 정도의 원고를 게재하는 것을 학문 활동으로 여기는 풍조마저 있었다. 심지어는 승진 심사를 위한 업적으로 교과서를 제출하거나 연구논문 목록에 수험 잡지에 실린 글을 포함하는 젊은 교수도 있었다.

    우려할 수준이던 법학계의 일본 의존

    2001년 4월 18일 유니세프 친선대사인 안성기(맨 왼쪽) 씨 등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나다.

    2001년 4월 18일 유니세프 친선대사인 안성기(맨 왼쪽) 씨 등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나다.

    학술지마다 원고가 부족해 허덕이는 통에 한 곳에 게재한 논문을 다른 곳에서 가져다가 또 발간하는 이른바 ‘자기표절’도 자주 있었다. 교수가 고의적으로 한 논문을 이중으로 써먹는 경우라면 지탄받을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게재할 원고가 부족하다 보니 집필자보다 학술지의 출판사가 떼를 쓰고 사정해 이중으로 게재되는 일이 더 많았다. 

    나는 논문을 쓰면 이를 반드시 서울대 법대 발행 ‘法學(법학)’이라는 전문잡지에만 기고했고 여간해서는 다른 잡지에 싣는 일이 없었다. 다만 교수 생활 초창기에 다른 대부분의 동료가 하는 대로 별생각 없이 수험 잡지에 한두 번 짧은 수험생용 글을 싣고 원고료를 몇 푼 받아 챙긴 일이 있으나 나는 곧 이것이 학문 연구를 좀먹는 아주 부당한 일임을 자각하고 그만뒀다. 

    법학 부문의 낙후성은 이루 다 말하기도 창피하지만 이제는 이런 엉터리 인식과 풍토가 대부분 바로잡혔을 것으로 생각한다. 후일 하버드대 법대에서 가르칠 때 상종한 그곳의 한 동료 교수가 생활이 곤궁한 나머지 경찰관 훈련교재를 출간해 상당한 인세를 받아 자녀들의 교육비를 충당했다고 하면서 이 같은 비학문적 활동을 몹시 후회하는 말을 한 것이 아직도 내 기억에 진하게 남아 있다. 

    나는 학생 때부터도 법학계의 일본 의존도가 중독의 정도를 넘었음을 걱정했다. 광복 및 전쟁 등 어렵고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잘 참고 극복하면서 중단 없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신 은사들께 지극히 고마운 마음을 가졌지만 내가 장래에 교수가 된다면 일본 법학을 모방하는 수준을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나 같은 신세대 교수의 첫 번째 임무라고 굳게 믿었다. 일본인들이 서양의 소스를 이용해 일본에 맞게 응용 연구한 것을 한국의 법률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대로 베껴 소개하면서 업적으로 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신세대 교수의 두 번째 임무는 일본 중독을 근절함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독자적 법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지 않으면 학문 분야에서도 한국은 원동력 역할(prime mover)은 언감생심이고 잘해봐야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를 면치 못할 것이었다. 이 같은 엉뚱한 야심은 금방 한계에 부딪혔다. 막상 교수가 되니 막내라고 어처구니없는 심부름이나 행정적 잡일을 계속해야 했다. 소장학자가 고심해 발표한 논문에는 적막강산으로 아무 반응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논문이나 교과서를 매끄럽게 베껴 자기 논문인 양 소개한 것보다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0년간 해상법 전문가를 키워내다

    더구나 감시와 탄압이 무서운 세태에서 정치적으로 시비가 걸리지 아니할 사법(私法)을 전공하려는 이는 많고 집권 당국이 정치적으로 트집 잡거나 의사에 반해 협력을 강요할 수 있는 공법(公法) 분야, 즉 헌법, 형법, 노동법, 환경법 등을 전공하려는 이의 수는 아주 적었다. 존경받는 헌법학자 김철수 교수가 유신 시절 당한 탄압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야말로 분야별 전공 편향이 극심했으며 학생들이 무작정 고시 준비에 매달리는 통에 황폐화된 법학 분야의 학문 풍토는 우려스럽기도 하고 외국에 내놓기가 창피하기도 했다. 

    나는 수십 년간 잠자던 과목 중 해상법 강의를 처음으로 개설해 30년 넘게 가르침으로써 많은 전문가를 길러냈다. 그들이 실무계와 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은 나의 보람이요, 기쁨이다. 해상법은 보험법과 함께 고시과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천대를 받아왔고 이를 가르칠 만한 교수도 없었는데 나로 인해 다시 햇볕을 쪼이게 됐다고나 할까. 오늘날에는 해상법을 전공한 졸업생이 많이 배출됐고, 3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이 분야의 중요성이 인식돼 기쁜 마음이다. 

    나는 상법 중 특히 회사법과 해상법 강의를 선진국 동향과 수준에 맞춰가는 동시에 민사소송법을 가르치면서도 점차로 민사소송법의 몇 가지 개별적 주제에 대해 학문적 관심을 갖게 됐다. 첫째는 법률구조 문제, 둘째는 법과 사회(Law and Society)의 문제, 셋째는 재판절차와 재판문서의 전산화 문제, 넷째는 대체적 분쟁해결절차(ADR)에 관한 문제다. 이에 더해 다섯째로 법경제학 분야, 여섯째로 도산법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다. 

    나 나름대로 파악한 법학계의 고질적 문제는 하나둘이 아니다. 그중 하나가 분야별로 또는 개인 학자별로 철옹성을 쌓고 나도 너의 분야를 침범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내 분야에 간섭하지 말라는 식의 배타적 전공 분야 지키기의 분위기가 확고하게 지배하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학문의 통섭은커녕 학제적 공동 연구조차 불가능하고 전반적으로 학문의 질이 퇴보하게 마련이다. 누군가 행여라도 자기 분야에 관해 건드리면 야단이 나곤 하는데 아마도 공부를 안 한 나머지 자기의 실력 없음이 드러날까 봐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왕성하게 가르친 모든 분야에 모범적인 교과서나 주석서를 반듯하게 출간하지 못하고 학자 생활을 마감한 것이 아쉽다. 1976년 민사소송법 교과서 초판을 출간한 이래 여러 번 개정한 바 있는데 내가 은퇴한 후 이를 애제자인 박익환 교수가 이어받아 수정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이 그지없었으나 그는 얼마 전 타계하고 말았다. 또한 대한변협회장 김현 변호사와 함께 1993년 해상법 원론을 출간해 여러 판을 수정 출판한 바 있으며 해외에서의 한국법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1983년에 영문으로 ‘Introduction to the Law and Legal System of Korea’를 출판했다가 1996년 내용과 체재를 바꾸어 ‘Korean Law in the Global Economy’를 간행한 바 있다. 이것은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한국법을 영어로 출간한 사례다.

    ‘소크라틱 메소드’가 부족한 한국 로스쿨

    1990년대 중반 로스쿨 도입을 통한 법조개혁이 큰 화두가 됐다. 1996년 김영삼 정부의 정책기획수석인 고(故) 박세일 교수가 불쑥 터뜨린 것이 효시인 것 같다. 그는 구체적 실천 방안이나 정부의 방침도 없이 화두만 던져놓은 셈이다. 그해에 나는 하버드대 법대에서 한 학기 동안 강의하고 있었는데 박세일 수석의 언급 후 갑자기 미국의 법학교육 실태를 시찰한답시고 수많은 한국 인사가 하버드대로 나를 찾아왔다. 

    특히 박세일 수석의 알선으로 대우그룹의 여비 협찬을 받아 여행길에 올랐다는 교육부 관리들은 나로부터 간단히 답을 들을 수 있는 문제에도 큰 소란을 떨면서 아무 성과도 없이 미국의 많은 로스쿨을 주마간산으로 돌아다녔다. 지리멸렬하던 이 문제는 2002년 법조인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삼아 대선에서 당선되면서 무시할 수 없는 정책과제가 됐다. 나는 당시까지만 해도 사법고시에 합격하고도 교수가 된 희귀한 경우이고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 변호사 실무는 물론 미국 법대의 학생과 교수 생활을 모두 경험해본 유일한 존재였으므로 자연히 나의 견해를 묻는 일이 많았다. 

    나는 사법시험을 통한 법조인 양성에서 착실한 법학교육을 통한 법조인 양성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데에는 일단 찬의를 표했다. 고시낭인의 대량생산은 인력의 효율적 활용이라는 면에서 큰 낭비이기 때문이다. 미국식 로스쿨 제도를 도입하는 것의 적정성만 찬반의 주제가 된 모양새였으나 미국의 로스쿨은 법학교육에 엄청난 민간투자를 하고 있으며 교수들은 법전의 조문순서에 따른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전달 강의가 아니라 자기들의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한 튼튼한 학문적 바탕 위에서 소크라틱 메소드(Socratic Method·질문과 답변 토론을 통해 이뤄지는 수업 방식으로 의문이 없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변한다)에 의한 문답식 강의를 했다. 나는 정부가 엄청난 법학 교육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정책의지가 있고 모든 법학 교수들이 지금까지의 해석법학식 훑어주기의 주입식 교육에서 미국식 교육 방법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할 수 있을지 큰 의문이 들었다. 요컨대 로스쿨의 도입과 그 성공적 운영은 이와 같은 두 가지 대전제가 충족되지 않는 한 실패할 것은 명약관화했다.

    로스쿨 삐걱거리는 소리에 마음 무거워

    내가 출간한 저서들.

    내가 출간한 저서들.

    정부는 물론 어느 법학교수도 로스쿨의 도입과 함께 새롭게 등장하는 많은 문제점을 제기하거나 관심을 표명하는 분이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나는 한국법학교수회장의 자격에서 그 사업의 일환으로 로스쿨이 도입될 경우 법학의 각 분야별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주제로 교수 세미나를 연속적으로 열었으나 문제의 심각성과 준비의 필요성을 깨달아 이러한 세미나에 진지하게 호응하는 교수가 적었다. 참석률은 말하기조차 창피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세미나를 한 뒤 그 결과를 책으로 인쇄해 각 법과대학에 송부했다. 다른 대학들의 반응을 기대했으나 돌아온 답변은 전무했다. 

    사법개혁을 공약의 하나로 내세우고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로스쿨 도입 등 중요한 사법 개혁을 위해 2005년 사법개혁추진대통령위원회(사개추)를 발족하면서 나를 위원으로 임명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제형사재판소(ICC) 재판관으로 근무 중이었으므로 ICC의 사전승인을 받아 임명을 수락하고 매달 회의가 열릴 때마다 자비를 들여 한국에 입국해 거의 당일치기로 회의에 참석했다 되돌아가곤 했다. 한 번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있던 중 사개추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고 비행기표 값을 자담하면서 국제회의 도중 자리를 떠 급거 귀국한 일도 있었다. 내가 이처럼 나의 모든 노력을 쏟아부은 것은 법학교육의 중요성과 사법부의 건전성이야말로 법치를 토대로 한 국기의 근본이고 심지어 외국 투자 유치의 가장 확실한 유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학생 및 교수로서의 경험을 통해 미국 법학교육의 실상을 가장 잘 아는 유일한 경우가 나였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 의지를 받들어 진지하게 나의 의견을 개진했으나 당연직인 약 10명의 국무위원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민간위원들도 로스쿨에 관한 이해가 없으므로 알맹이 있는 발언을 하는 이가 아주 적었다. 나는 그 당시 예상되는 문제점과 그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했으나 대개는 이해 부족이나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논의가 진척되지 못했다. 지금도 내가 걱정한 바와 같이 정부의 엄청난 투자와 교수들의 의식구조 및 교수방법의 전환이라는 두 가지 전제요건이 충족되지 아니한 채 준비 없이 도입된 로스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이인표 어린이도서관’

    1959년 서울대에 입학한 후 대학의 현황에 실망하고 자유당의 부정선거 항의 등 시국의 불안정 등으로 학교에 열심히 나가지 못했다. 다른 동기생들은 입학하자마자 모두 산속으로 고시공부를 하러 들어가 만나기조차 어려웠다. 우리는 마침 안암동 한옥을 팔고 1959년 성북경찰서 앞길 건너편 뒤쪽에 오래된 일본식 가옥을 샀는데 곧 이를 헐고 1960년 벽돌로 된 양옥 2층집을 지어 입주했다. 이 공사 현장에서 나는 인부들과 함께 땀을 흘리면서 현장감독을 했다. 나로서는 생전처음 이른바 노가다판의 현장을 보고 배우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 이 집에서 고시 양과를 합격하고 대학을 순탄하게 마치는 등 16년간 잘 살다가 구반포 교수아파트로 분가해 나갔다. 

    두 아이가 성장한 데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남대교 건너 논현동 초입의 대지를 매입해 1979년 벽돌양옥집을 지었다. 이 당시 강남의 풍경은 부자들이 좋은 집을 지으면 자기네는 위층에 살면서 지하 또는 반지하층을 어려운 사람에게 세를 주어 서로 집을 지킨다든지, 일을 품앗이한다든지 하는 상호의존의 살림 형태가 주류를 이뤘다. 골목 안에서 관찰해보니 당시 강남에 집을 짓고 살 수 있는 세대는 나이를 먹고 재산이 좀 있는 분들이므로 초등학생 자녀가 없는 데 비해 지하층에 세 들어 사는 젊은 세대의 어린이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책을 읽을 기회가 없고 특히 학교에서 밤낮으로 독후감을 써오라고 하는데도 매번 책을 사서 읽고 독후감을 써갈 경제적 형편은 못되는 것이었다. 당시 책 한 권 값이 대략 2000원 정도인데 이는 부모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안사람과 나는 우리 집 차고를 개조해 골목 안 동네 어린이들의 도서실을 열어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기로 했다. 도서 대출 기록을 만들어 개별적 독서 빈도수를 기록했다가 책을 열심히 많이 읽은 어린이에게는 상으로 연필과 공책을 줬다.

    ‘세계 1위’ 자랑하는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평소에 존경하던 에스콰이어 구두회사의 이인표 회장께서 차고 속 도서실을 방문해 설명을 듣더니 영감을 얻었는지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 사업으로 어린이도서관을 선택했다. 이분은 참으로 진실하고 정직한 자수성가형 기업인인데 이 사업을 널리 펼쳐 전국 각지의 달동네마다 도서관을 개관해 가정형편이 어려운 많은 어린이에게 큰 혜택을 베풀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만주, 러시아, 사할린 및 중앙아시아의 한국인 거주지에까지 20여 개의 ‘이인표 어린이도서관’을 건립하고 자율적 운영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과 시청각교재를 제공하고 재정적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아내와 나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어린이를 돕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임을 경험을 통해 자각했다. 나는 1993년부터 유니세프(UNICEF)에 몸을 담았고 아내는 친정의 전통에 따라 장인과 장모님의 뒤를 이어 적십자인으로서 묵묵히 봉사하고 있다. 

    나는 2012년부터 현재까지 유니세프한국위원회장으로서 어린이와 여성의 교육, 보육, 건강, 위생, 질병 및 권리 문제에 국내외적으로 전력투구하고 있다. 세계 200여 국가에 유니세프의 사무소가 있으나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 34개 나라는 자국의 유니세프위원회를 조직해 독자적으로 운영한다. 1994년 문을 연 한국위원회는 매년 1년 모금총액에서 세계 3위를 점하지만 정기후원자의 수, 개인후원자의 평균기부액, 본부에 송금하는 절대액, 모금액에 대한 경비의 비율 등의 기준에서 세계 1위를 자랑한다. 개인 후원자들이 한국 유니세프의 정직성 및 신뢰성을 믿고 후원금을 계속 보내준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후원자들은 국내 어린이도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왜 기부금의 대부분을 본부에 송금하느냐고 묻는다.

    교수가 휴직하고 출사(出仕)하는 관례 종식해야

    나는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 어렵게 공부할 때 유니세프가 보낸 공책, 연필, 지우개 등의 학용품을 받고 기뻐했고, 강냉이죽이나 분유 등을 얻어먹으면서 고난을 극복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났지만 우리가 이제 살만하게 됐으니 옛날의 도움을 잊지 않고 이를 갚는 의미가 있음을 역설하곤 한다. 설사 그러한 과거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이제는 일반적으로 좀 먹고살 만하게 됐으니 세계적 안목으로 상대적으로 빈곤과 질병에 더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유니세프본부에 보내는 송금액은 사전에 합의된 비율에 따르며 그중 상당히 많은 부분은 우리가 목적을 지정해 보내므로 결국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용되는 게 현실이다. 또한 국내사업을 안 하는 것도 아니다. 유니세프는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의 놀이터 설치 사업을 지원하며, 아동친화도시 지정을 통한 어린이 중점 사업, 마음껏 놀이터 설치 등은 물론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 유족, 동료 학생, 교사 등 각종 피해자의 정신건강을 상담하고 치료하는 일에 참여한다. 

    나는 교수 생활 중간에 정부 또는 외국 기관으로부터 이런저런 자리에 대한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물리쳤다. 법학과 같은 실용학문의 전공자가 학교를 잠시 떠나 정부 등에 봉사하는 것을 꼭 변절 또는 나쁜 유혹에 넘어간 것으로 보거나 거절하는 것만이 학자의 지조를 지키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절한 기회가 오면 전문 지식을 국가를 위해 활용할 수는 있겠으나 그런 경우에는 처신을 분명하게 해 최소한 학교나 다른 동료 및 학생들에게 폐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국회의원이나 정부의 높은 자리에 출사(出仕)하는 동안 자기 자리를 휴직으로 처리해 수년간 공석으로 두었다가 벼슬이 떨어지면 다시 돌아오는 것은 학계 발전의 장애 요인이고 양심이 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빈자리에 훌륭한 다른 소장 학자를 채용하지도 못한 채 시간강사를 고용해 무책임하게 그 과목의 강의를 땜질하므로 결국 학교와 학생 모두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손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같은 양다리 걸치기 관례는 당장 종식해야 한다고 본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 결원이 생길 때마다 구성의 다양성을 위해 직업 법관이 아닌 학계 인사 중에서도 그 자리를 임명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됐다. 당시 학계에서는 나밖에 법관 자격자가 없었기 때문인지 내 이름이 항상 지상에 오르내렸다. 

    5공화국 때부터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과 같은 책임이 무거운 구체적 자리를 제시하면서 접촉도 실제로 여러 번 있었으나 이를 모두 거절하고 서울법대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보람 있고 행복한 학자의 길을 걸었다. 

    어느 정부에서는 그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나를 국무총리에 강력하게 천거한 일도 있었다. 국제형사재판소장의 자리에서 물러나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2015년 5월 갑자기 국무총리의 제의가 와 이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분수를 알면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할 나이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잊지 못할 스승 송상현 선생’

    2015년 제자들이 출간한 ‘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 표지.

    2015년 제자들이 출간한 ‘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 표지.

    2002년 1월 8일 나의 회갑기념논문집 ‘21세기 한국민사법학의 과제와 전망’ ‘한국삼사법학의 과거와 전망’ 증정 행사가 제자들의 분에 넘치는 후원으로 신라호텔에서 성대하게 진행됐다. 행사를 기획한 제자들이 계획한 대로 사진으로 본 나의 일생이 배경으로 비춰졌으며 여러 분이 분에 넘치는 덕담을 해주셨다. 

    나는 2007년 2월 말 서울대를 정년퇴직하면서 국제형사재판소 업무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됐다. 2003년 문을 연 국제형사재판소는 사실심공판은 진행됐으나 상고심에는 사건이 없다가 이때 막 첫 상고사건이 계속 중이었므로 정년퇴직 후 국제형사재판소의 상고사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기적으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대학에서 물러나기에 앞서 학내외 동문과 후학, 제자들이 성대한 행사를 여러 차례 마련해줬다. 이장무 서울대 총장이 참석해주신 퇴임기념강연, ‘法學’에 실린 장문의 인터뷰, 퇴임기념 논문집 증정식과 만찬 및 퇴임의식 등 실로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회갑기념논문집을 증정받은 것과 서울법대 모의법정을 ‘송상현홀’로 헌정해준 것도 분에 넘치는데 정년퇴임 시 제자들이 편집해 출간한 ‘心堂 法學全集(심당 법학전집)’ 3권은 내가 평생 저술한 논문을 분야별로 나눠 집대성한 문헌이어서 아주 감사하기도 하고 큰 애착이 가기도 한다. 

    국제형사재판소장을 두 차례 연임하고 2015년 3월 22일 12년 만에 영구귀국했을 때 김건식, 정상조 두 전임 법대학장이 주도해 나의 퇴임 및 귀국을 기념해 여러 제자가 쓴 글을 모아 문집을 출간했다. 나와의 관계에 관한 가벼운 에피소드를 모은 것이다. ‘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 - 잊지 못할 스승 송상현 선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국제형사재판소장 시절 보좌관들이 고맙게도 한 편씩의 에피소드를 영어로 작성해 제출함으로써 이 계획에 참여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2015년 3월 14일자에서 나를 전면으로 인터뷰한 기사를 부록으로 첨부했으며 옛날을 회상하게 하는 사진을 삽입해 아주 근사한 책이 탄생했다. 분에 넘치는 영광이요 기쁨이다.

    송상현
    ● 1941년출생
    ● 경기고, 서울대 법대 졸업
    ● 고등고시 행정과(14회)· 사법과(16회) 합격
    ● 미국 코넬대 법학박사
    ● 서울대 법대 교수
    ● 서울대 법대 학장
    ●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 現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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