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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박영순의 커피 인문학

계몽魂 불사른 지식인 아지트 ‘다방’

구한말-일제강점기 숨은 커피史

  • 박영순 |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twitnews@naver.com

계몽魂 불사른 지식인 아지트 ‘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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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외교’는 계속되고

정동구락부를 중심으로 펼쳐진 조선의 외교는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며 일본을 상대로 거대한 전선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 벽에 부딪혔다. 일본이 1904년 2월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키며 유발한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우위를 점하는 조건으로 러시아와 휴전하면서 손탁호텔의 주고객이 러시아인과 미국인에서 일본인들로 바뀌었다.

설상가상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조건으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으면서 정동구락부는 설 땅을 잃는다. 든든한 친구로 알았던 미국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루아침에 한반도를 일본에 넘긴 것이다. 일본은 영국마저 우군으로 만들었다. 영국과 일본은 각기 인도와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동맹을 맺었다. 이로부터 4개월도 못 돼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친구도 손쉽게 팔아먹는 구미 열강의 저속한 행태는 신의를 소중히 여기는 정동구락부 인사들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손탁호텔에 상주하며 정동구락부의 핵심인물이던 이완용을 포섭해 몸종처럼 부리며 결국 나라까지 팔아먹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동구락부의 정신은 계승됐다. 주요 멤버들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위한 계몽운동에 나섰다. 한국에 들어온 커피가 정동파의 외교적 수단으로 애용된 데 이어, 마침내 정동구락부 회원들로 하여금 독립협회를 결성케 함으로써 국민에게 시대적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에 나서게 한 것이다.

고종이 손탁을 헤이그 밀사로 파견하려 추진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은 이런 움직임을 사전에 감지하고 1909년 손탁을 사실상 추방한다. 손탁이 고종의 밀명에 따라 정동구락부와 카페를 중심으로 펼친 국권 수호 ‘커피 프로젝트’는 이로써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목숨을 바쳐 그 불씨를 이어간 인물이 고종이다.





고종 승하와 ‘문화통치’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본색을 드러냈다. 헌병을 앞세워 우리 국민을 쥐어짰다. 긴 칼을 차고 다니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각 처단하는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무단통치’의 악랄한 기세를 꺾어버린 게 고종의 승하다. 고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본의 독살설이 가시지 않는다. 다른 한편에선 ‘자살’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그 속뜻을 살펴보면 고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게 아니라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일본이 당신을 죽이려는 걸 알고도 의연했다는 것이다. 드라마틱한 관점이긴 하나 완전한 허구는 아니다. 관련된 증언이 적지 않다.

식민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규모의 3·1운동을 벌인 날이 고종의 장례일이라는 게 우연일까. 일제는 3·1운동에 화들짝 놀라 우리 민족을 회유하는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치안담당 세력이 헌병에서 순사로 바뀌고 한글 신문 간행도 허용됐다. 물론 순사는 헌병만큼이나 악랄했고, 일제 치하 신문에 정론을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기세가 한풀 꺾인 건 분명했다.

그 단서를 일제강점기 다방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문화통치로 인해 조선인도 문화예술을 영위하는 데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커피 문화와 관련해선, 지식인들이 다방을 열 수 있게 된 것이 큰 소득이었다.

고종의 숭고한 죽음과 거국적인 독립만세운동, 국민적 저항정신의 표출을 겨우 다방과 연결 짓느냐고 생각한다면 식민사관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언론이 우리 지식인에 대해 좋게 써줬을 리 없다. 통치에 방해가 될 성싶으면, 없는 것도 만들어낸 일제가 아닌가. 일제는 언론을 통해 지식인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그들이 운영하는 다방을 단지 잡담거리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됐다.

일제는 1909년 경성역(현 서울역)에 조선 땅 최초의 다방으로 기록되는 남대문깃사텐을 연다. 그들은 조선보다 한발 앞서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덕분에 커피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방을 독점해 한 밑천 잡아보겠다고 욕심을 냈겠지만, 3·1운동 이후 조선인에게도 다방업이 허용된다.

1920년대 일본인이 몰려 살던 청계천 이남 충무로와 명동 일대엔 ‘후다미’ ‘금강산’ 등 다방이 즐비했다. 일본은 여성 접대부를 두고 술을 팔며 춤도 추게 한 곳을 ‘카페’라고 불렀다. 그래서 조선 지식인이 커피를 팔던 곳은 카페라 칭하지 않고 ‘다방’이라 불렀다. 1920~30년대 명동과 충무로는 밤이면 카페로 불야성을 이뤘다.

우리 지식인들은 프랑스 대혁명 때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카페에 진을 치다시피 하면서 시민들과 커피를 나누며 혁명의 기운을 키운 사실을 잘 알았다. 이런 기대감에 조선인으로선 처음으로 다방을 차린 인물이 영화감독 이경손(1905~1977)이다. 그는 1927년 안국동 네거리쯤에 ‘카카듀’라는 다방을 연다. 영화 ‘밀정’에서 카카듀가 재현됐지만 현실에선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종로 관훈동 3층짜리 벽돌 건물의 1층이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언론매체들은 카카듀에 하와이 출신의 ‘미쓰 현’이란 여인이 있었으며, 이경손과 수상쩍은 관계였다는 식의 가십 거리나 부정적인 내용만 보도해 분노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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