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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출판, 새로운 그림을 그리자

서적 도매상 2위 업체 송인 부도 그 후

  • 장은수 |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위기의 출판, 새로운 그림을 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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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0여 거래 출판사 중 500여 곳엔 직격탄
  • ● 도서정가제 도입 때문이란 것은 오해
  • ● 통합전산망으로 거래 투명성 높여야
위기의 출판, 새로운 그림을 그리자

송인서적 파주 본사 [동아일보 신원건 기자]

오늘날 출판의 운명을 이야기하자니, 자크 데리다의 ‘고슴도치’가 먼저 떠오른다. 데리다는 이 동물을 통해 문학(시)의 운명을 환기한다. 그 고슴도치는, 지금 이 순간, 고속도로 한복판에 멈춰 있다. 어떤 우연한 이끌림에 따라,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광포한 속도로 차들은 달린다. 어느새 닥쳐올 사고를 예감하는 고슴도치는 고개를 가슴께 처박고 잔뜩 웅크린 채 온몸의 털을 세워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목숨을 보전하려는 이 행위 탓에 고슴도치는 스스로 장님 상태가 된다. 사고가 닥칠 것이라는 예감으로 고슴도치는 가장 낮은 장소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로 절박하게 호소한다. “기억해주세요(apprendre par coeur)!”

프랑스어로 기억한다는 것은 ‘심장(coeur)을 통해 배우는 것(appr endre)’이다. 심장의 언어로 존재를 다시 쓰는 것이다. 잊지 말아달라고, 잊지 말아달라고, 제 심장을 들여다보면서, 솟구친 가시의 목소리로, 출판은 세상을 향해 뜨거운 호소를 발신 중이다. 오늘날 출판이 맞닥뜨린 사태는 그만큼 심각하고, 도무지 앞날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위기다.

2017년, 한국 출판은 희망에 부푸는 마음이 아니라 절망의 눈물로 얼룩지는 한 해를 출발했다. 업무 시작일인 1월 2일,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서적 도매상인 송인서적이 만기 어음을 막지 못하고 부도를 냈다. 송인서적이 밝힌 채권 및 채무 규모는 부도어음 100억 원, 은행대출 50억 원, 보유재고서적 40억 원, 서점매출채권 210억 원, 출판사채권 270억 원이다. 부실 규모가 조 단위에 이르는 다른 산업과 비교하면 미미해 보일 수 있어도, 영세 규모 출판사와 서점 수천 군데가 이 부실을 고스란히 나누어 부담할 것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송인서적과 거래하는 출판사는 2000여 곳. 그중 송인서적을 통해서만 지역 서점과 거래하는 이른바 ‘일원화 출판사’만 따져도 무려 500여 군데나 된다.



중소출판사 연쇄 도산 우려

 사정이 나은 몇 곳을 제외하면, 이 출판사들 전체가 송인에서 떼인 돈으로 인해 경영이 위축될 것이고, 자금 압박을 견디다 못한 출판사의 연쇄부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인쇄소와 제본소, 디자인사무소와 지업사(종이 공급 업체)가 차례로 법적 책임을 떠안으면서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 송인서적을 통해서 책을 공급받던 지역 소매서점 쪽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초래될 수도 있다.

출판계가 정부에 공적 개입을 긴급하게 요청하고, 문화체육관광부는 그 고리를 끊고자 출판계 긴급 지원에 나선 것은 일단 다행이다. YTN에 따르면 출판문화진흥재단을 통해서는 1%대 금리, 중소기업청을 통해서는 2%대 금리의 융자가 가능하다. 문제가 발생한 출판사는 최다 2000만 원 정도 지원받을 수 있고 다시 중소기업청을 통해 2%대 금리로 최다 10억 원까지 융자를 받을 수 있다.

상당수 피해 출판사는 송인서적의 어음과 재고를 정부가 일단 매입한 후 나중에 구상권을 행사하는 방식의 완전한 피해복구를 원한다. 하지만 정부자금의 일반적 성격과 송인서적의 자산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을 고려하면, 탄핵정국이 계속돼 사실상 국정의 컨트롤타워가 실종된 현재 이런 지원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송인서적의 질서 있는 청산을 통한 피해의 최소화, 책과 독자를 연결할 수 있는 임시 물류 시스템 가동, 이 사태로 예견되는 구조조정의 압력이 노동자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전가되지 않도록 할 관리감독의 강화, 그리고 ‘출판유통 현대화’라는 근본대책 마련이 아마도 현실적 방안일 것이다.

송인서적 사태와 관련해서 주목할 일 중 하나는 ‘송인서적’이라는 키워드가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 순위에 노출된 일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기업이 폐업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사실이 하나의 희망으로 느껴진다. 약간은 아전인수일 수 있지만, 시민들이 위기에 빠진 책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표하면서 출판에 닥친 컴컴한 어둠 속에서 촛불을 들었다고까지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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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 |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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