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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

순(順), 명(明) 황제 아들을 삶아 먹다

반란군에 무너진 조선의 ‘부국(父國)’

  • | 백범흠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순(順), 명(明) 황제 아들을 삶아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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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미군, 국군·인민군, 중공군 비율과 유사

일본은 1596년(정유년) 12월 14만2000명 대군을 동원해 조선을 다시 침공했다. 일본군은 경상·전라·충청 등에서 조·명 연합군과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였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598년 9월 명나라군 14만4000명과 조선군 2만5000명, 일본군 14만2000명(6·25전쟁 때 미군, 국군·인민군, 중공군 비율과 유사)은 울산, 순천, 고성 등 남부 해안을 중심으로 결전을 벌였다. 울산성 등지에서 악전고투하던 일본군은 1598년 9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의 조선 침공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충격을 가했다. 연인원 21만 명, 은(銀) 883만 냥 등 국력을 쏟아부은 명나라는 멸망을 향해 달려간 반면 일본은 100년간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면서 강화된 군사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력,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 등 명나라를 능가하는 국력을 갖게 됐다. 에도(도쿄) 중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군마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면 전쟁의 승패는 달랐을지 모른다. 당시 일본은, 인구는 조선의 2배인 2000만 명, 경제력과 군사력은 조선의 3배가 넘었다. 일본은 30만 정예군 가운데 절반인 15만 대군을 조선에 파병했다. 조선 정규군은 4만~5만 명에 불과했다. 일본은 세계 최강 육군국(陸軍國)으로 유럽대륙이 보유한 전체 총기 수를 능가하는 50만 정의 조총(鳥銃)을 갖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일 간 국력 차는 더욱 커졌다.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 에도는 18세기경 100만 인구의 세계 최대 도시였다. 당시 베이징과 파리 인구는 약 50만 명, 한양 인구는 3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19세기 말 일본이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데는 이러한 경제·군사적 배경이 자리한다.


누르하치, 만주를 석권하다

일본의 조선 침공은 몽골의 동진(東進)이라는 명·몽골 분쟁의 그늘에 숨어 세력을 키워온 여진 건주위(建州衛)에 드러내 놓고 숨 쉴 공간을 제공했다. 동아시아는 더 이상 명과 몽골, 조선이 아니라 변경의 만주(여진)와 일본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명나라는 몽골의 만주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요동 동부의 건주위를 강화했다. 당시 명나라는 요하 유역을 포함한 만주 일부만 직접 통치했다. 다른 지역 대부분은 자치 상태였다. 

여진족은 ①초기 고구려의 중심을 이루던 랴오닝성 동부-지린성 서부 건주여진 ②부여의 고토(故土)이던 창춘·하얼빈 지역 해서여진 ③수렵과 어로를 위주로 하던 헤이룽장성·연해주 지역의 야인여진으로 3분돼 있었다. 명과 조선에 가까운 건주여진은 상대적으로 발달한 문화와 경제구조를 가졌으며 해서여진은 예헤부, 하다부, 호이화부, 우라부 등 4부로 구성됐는데, 모두 금(金)의 후예를 자처했다. 그중 예헤부와 하다부가 해서여진의 패권을 놓고 다퉜다. 

거란의 후예로 보이는 예헤부는 내몽골에서 이주해온 부족으로 반명(反明) 의식이 매우 강했다. 명나라는 하다부를 지원해 예헤부를 누르려 했다. 하다부는 명나라에 반대해 봉기한 건주여진 출신 왕고(王杲)가 도망쳐오자 그를 명나라로 넘겨주는 등 친명정책(親明政策)으로 일관했다. 명나라는 몽골을 의식해 여진 여러 부족을 지원했으나 여진족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명 조정은 여진족 내부 상황을 잘 알던 요동 담당 이성량으로 하여금 여진족 대책을 총괄케 했다. 이성량은 여진 각 부족이 서로 싸워 지나치게 약화되자 1개부를 지원해 다른 부들을 적절히 통제하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이에 따라 선정된 것이 젊고 유능한 아이신고로 누르하치(1559~1626)였다. 이성량의 지원을 배경으로 강력해진 누르하치는 곧 소극소호, 혼하, 완안, 동악, 철진 등 5개 부를 모두 장악하고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예헤부와 하다부 간에 벌어진 해서여진 내란으로 인해 누르하치는 한층 강력해졌다. 해서여진 영향 아래 있던 국제시장 개성(開城)이 폐쇄돼 인삼과 모피 등 교역상품이 건주여진을 통과하게 된 것이다. 명, 조선, 몽골 각 부 상인들이 모두 건주여진에 모여들게 됐으며, 건주여진은 한층 부유해졌고 조선과의 직접 통상로도 확보했다.


탈레반 키운 미국처럼 누르하치 지원한 明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그들의 신앙 대상인 문수보살의 ‘문수(文殊)’에서 차용해 만주(滿洲)로 부르기로 했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 누르하치의 부상에 위협을 느낀 해서여진 4부가 예헤부를 중심으로 백두산 인근 여러 부족을 끌어들여 건주여진(만주)을 공격했다. 역시 거란의 피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시보족(錫伯族)도 만주에 반대하는 동맹군에 가담했다. 누르하치는 이들을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동맹군에 가담한 백두산 지역 수사리부와 눌은부를 합병하는 등 만주 전역을 통일해나갔다. 1597년 4년간의 싸움 끝에 만주와 해서여진 4부가 평화조약(和約)을 체결했으나 만주와 해서 간 균형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층 강력해진 만주는 1599년 기근에 처한 하다부를 합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후에야 명나라는 만주의 팽창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만주는 1607년 호이화부를 멸망시키고, 1613년에는 우라부마저 멸망시켰다. 이로써 예헤부를 제외한 해서여진 3부가 모두 만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누르하치는 산하이관(山海關) 이서(以西) 중국을 점령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미국이 혼란에 처한 아프가니스탄을 제압하기 위해 탈레반을 키웠다가 고생한 것처럼 명나라도 몽골의 강화를 저지하기 위해 누르하치를 지원했다가 나라가 멸망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도요토미는 누르하치를 잘 몰랐겠으나 조선을 침공함으로써 누르하치의 방패막이가 돼주었다. 

명나라의 쇠퇴는 선덕제, 홍치제를 제외한 중기 이후 황제 대부분이 무능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황제 독재체제 명나라는 어리석은 황제가 계속 집권하자 요동의 한 부족(部族)에 불과하던 만주의 공격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여기에다가 정덕제 시대 유근(劉瑾), 천계제 시대 위충현(魏忠賢) 등 대환관들이 잇달아 등장해 나라의 멸망을 재촉했다. 철학 과잉도 문제지만, 철학이 없는 무절조(無節操)한 황제와 고위 관료들은 더 큰 문제였다. 

명나라의 멸망은 황궁 뒷방에 틀어박혀 늘 마약에 취해 있던 만력제(萬曆帝)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으며 그의 손자들인 유약한 천계제(天啓帝)와 의심만 많던 숭정제(崇禎帝)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공예를 특히 좋아한 청소년 황제 천계제 시대 최대 권력자가 환관 위충현이다. 일자무식 위충현은 장래가 불투명하던 황손(皇孫) 주유교를 충직하게 모신 공로로 그가 천계제로 즉위한 다음 유모 객씨와 결탁해 비밀특무기관 동창(東廠)의 책임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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