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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 ②

‘변신의 귀재’ 야설록

고독, 허무, 퇴폐로 무장한 자학적 반항의 변주곡

  • 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변신의 귀재’ 야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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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보자면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은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기성 질서이다. 고아원 시절부터 점원 생활을 하기까지 겪었을 못 가진 자의 설움을 통해 주인공 능조운은 그 기성 질서의 부당성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를 학대하는 주루의 장방(帳房)이 그 부당성을 대표한다.

능조운이 사파 무림인이 된 뒤로 기성 질서의 부당성은 주로 정파 무림인들을 통해 나타난다. 서장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이 작품 속의 무림 사회는 바야흐로 사파가 쇠퇴하고 정파가 득세했으나 정사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득세한 정파에게 의협과 선행은 명분뿐이고 실제로는 자만심과 이기심만이 팽배해 있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정파의 연합 세력인 무림맹이다.

능조운은 정파의 위선을 폭로하고 위선자들을 응징한다. 예를 들어 출운유객 악건은 의제(義弟)를 죽이고 그의 비급을 탈취했으며, 무적신권 조천명은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 여인을 강간 살해했다. 정파의 최고 신분으로 무림의 존경을 받는 소림파의 천외성승이 가장 극단적인 예다. 그는 출가 이전에 자신의 약혼녀였던 여인을 그 남편과 함께 살해했다. 능조운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그는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때 천외성승을 존경하는 무림맹의 총사 백연하가 “인간에겐 누구나 실수가 있는 법이에요. 아직도 저희들은 성승을 믿고 있어요”라고 위로하는데, 그러나 백연하야말로 천외성승을 필두로 한 정파 무림인들에게 보물을 빼앗기고 살해당한 백대 선생의 딸이며(이 사실은 나중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참회의 눈물을 흘린 뒤에도 천외성승은 자신의 공력을 강화하기 위해 제갈혜를 죽이고 그 피를 빨아먹는다. 그렇다면 그 참회의 눈물은 진실인가 허위인가.

능조운은 점원일 때나 마종지주일 때나 한결같이 기성 질서의 부당성에 대한 반항의 표상이다. “냉막과 고독으로 하여 마치 황야에 우뚝 선 한 마리 늑대와도 같았다”라는 묘사는 반항의 표상에 썩 어울린다. 그런데 그의 반항은 동기와 의도에서는 순수하며 정당하다고 할 수 있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그 자신도 정당성을 훼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반항이다. 이것은 야설록식 ‘반항’이 갖는 숙명적 아포리아다.



능조운이 무림의 패자가 되고 사파가 무림을 지배하게 된 뒤 사파인들의 횡포가 도처에서 행해진다. 강간, 살인, 약탈 등의 추악한 행위가 만연하는 것이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위선의 지배를 택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될 만큼 세상은 추악한 행위로 가득 찬다. 바로 이 때문에 능조운이 절망에 빠지고 허무에 사로잡혀 죽음을 자청하게 되지만, 사실 능조운의 반항은 그 문제 설정 자체부터 이미 이러한 한계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한계는 서사의 구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개연성이라는 기준에 입각해서 볼 때 가령 그토록 현명한 능조운이 무림을 제패한 뒤 그 적절한 관리를 위해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능조운의 현명한 참모들도 마찬가지다. 백연하의 위험성을 잘 알면서 그녀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는 것 역시 개연성이 적다. 백연하 또한 그토록 지모가 깊으면서도 정작 사태의 진상에 대해서는 거의 불감증 증세를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백연하에게 진실을 밝히고 그녀와 함께 혼란에 빠진 무림을 개혁해가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선택은 애당초 배제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의 서사는 개연성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작위적인 것이다.

거듭남을 위한 희생양

그러나 각도를 바꿔 생각하면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야설록식 반항을 그리기 위한 작위의 소산이며, 그래서 오히려 필연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야설록식 반항은 ‘문제 설정의 단순성과 반항 이후에 대한 전망 없음’으로 특징지어지는 나이브한 반항,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사춘기적 반항이다.

주목할 것은 천외성승이 백연하에게 느끼는 애정이라든지 능조운과 천외성승이 공감하는 고독자(孤獨者)의 고뇌,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진실인가 허위인가를 묻게 만드는 천외성승의 참회의 눈물 같은 장면들이다. 이 장면들은 진실/허위의 이분법적 틀에서는 모순적이라는 데서 공통점을 갖는다. 아마도 진실은 이 모순 속에 있을 것이지만, 이 작품은 이 모순을 단편적으로 언급할 뿐 그것에 대한 성찰을 진행하지는 않는다. 그 성찰을 서사의 핵심에 놓았더라면 이 작품은 아주 다른 모습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순은 사춘기적 반항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일 따름이다. 사춘기적 반항은 그 모순을 배제한 채 감상으로 가득 찬 장렬한 비극적 최후를 향해 치달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능조운 역시 그렇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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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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