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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론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권력자에 맞선 예술가, 진재해와 김성기

권세에 예술혼을 팔 수 없다

  • | 허윤만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권력자에 맞선 예술가, 진재해와 김성기

지금은 기술자나 예술가와 같이 전문성을 지닌 직업이 나름대로 대접받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른바 ‘사(士), 농(農), 공(工), 상(商)’으로 직업의 귀천을 가른 조선에서는 세 번째인 ‘공(工)’에 속하는 기술자, 예술가들은 별반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천시당하기도 했다. 공자는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을 굳게 지키며, 인(仁)에 의지하고, 예(藝)에 노닐어라”라고 하여 예의 중요성을 나름대로 역설했지만, 정작 유교 사회인 조선은 예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이들을 푸대접했다. 

궁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는 관서인 도화서(圖畵署)의 주요 구성원은 전업 화가인 ‘화원(畵員)’들이었다. 그 유명한 김홍도(金弘道), 신윤복(申潤福) 등도 도화서 화원 출신인데, 이들은 문관이나 무관이 아닌 잡직(雜職)에 속했으며, 신분상으로는 양반이 아닌 중인(中人)에 속했다. 도화서 화원이 맡은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바로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그리는 것이다. 숙종 때에 초상화에 능했던 진재해(秦再奚)라는 화원이 있었는데, 숙종의 어진도 그가 그렸다고 한다. 그는 임금뿐만 아니라 당시 노론의 영수인 영의정 김창집의 초상도 그렸다. 

경종 때에 이르러 지관(地官) 목호룡(睦虎龍)이 노론 세력을 해치기 위해 노론들이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고발하자, 수많은 노론 인사가 이에 연루되어 줄줄이 해를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은 사약을 받았고, 국청(鞫廳)에 끌려가 처형된 사람이 20여 명, 곤장을 맞다가 죽은 사람이 30여 명이었으며, 이들의 가족으로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한 사람이 13명, 유배된 사람이 114명, 자결한 부녀자가 9명, 그 밖에 연좌된 이가 173명에 달할 정도였다. 신축년(1721, 경종1년)부터 임인년(1722)까지 계속된 이 참극을 ‘신임사화’라고 한다. 고발자인 목호룡은 역적을 토벌한 공으로 부사공신(扶社功臣)에 책봉되었고, 동지중추부사에 동성군(東城君)의 지위까지 얻었다. 명당자리나 봐주던 일개 지관이 남을 해치는 말 몇 마디를 해 일약 권세가로 신분이 급상승한 셈이다. 

조선에서는 공신으로 책봉되면 나라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제도가 있었다. 당시 공신 책봉을 주관하던 녹훈도감(錄勳都監)에서는 숙종의 어진을 그린 진재해에게 목호룡의 초상을 그릴 것을 명했는데, 힘없는 화원에 불과했던 진재해는 이 명을 단칼에 거절했다. 

제가 이 손으로 숙종 임금의 어진을 그렸는데, 어찌 차마 목호룡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영조실록 1년 4월 21일>

뜻밖의 반항에 목호룡과 한패인 김일경(金一鏡) 등이 수차례 공갈과 협박을 했지만 진재해는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도화서에서 쫓겨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일개 화원인 그가 내쫓기면서까지 일관되게 반항한 이 일을 두고 사관은 이렇게 평했다.

세상 사람들은 송나라 상안민(常安民)이 현명하다고 칭찬하지만, 상안민은 이미 새긴 당비(黨碑)에서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한 것이 전부였다. 진재해가 끝까지 거절하여 아예 손을 대지 않은 것과 비교해볼 때 누가 더 낫겠는가? 옛날에 주자(朱子)는 올바른 의견이 아랫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을 근심하였는데, 요즘은 올바른 의견이 신분이 미천한 화가에게서 나오는 것인가? <영조실록 1년 4월 21일>

진재해는 숙종을 거론했지만, 실제 그가 의리를 지키고 싶었던 인물은 바로 김창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 손으로 직접 김창집의 초상화까지 그렸는데, 그를 참혹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목호룡의 초상을 차마 태연히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신임사화는 조선의 사화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끔찍한 사건이었다. 목호룡의 말 몇 마디에 수십 명의 목숨이 이슬처럼 사라져버린 이 참극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진재해의 심정은 어땠을까? 세상은 그를 하찮은 화원으로 취급했지만, 그는 단순히 그림 그리는 재주만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심장이 뛰고 혼이 살아 있는 예술가였다. 

당시 권세에 저항한 예술가는 진재해뿐만이 아니었다. 악공(樂工) 김성기(金聖基)는 거문고와 퉁소 명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당시 악공은 천인 취급을 받았는데도 김성기에게 거문고를 배우려는 제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종친인 남원군(南原君)도 그의 제자를 자처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목호룡의 무리가 모여서 잔치를 벌이다가 이런 자리에 풍악이 빠질 수 없다며 사람을 보내 김성기를 불렀다. 하지만 김성기는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성난 목호룡은 심부름꾼을 통해 “오지 않으면 큰코다칠 줄 알라”고 협박성 발언을 전했다. 그러자 이를 들은 김성기는 손에 들고 있던 비파를 그 심부름꾼에게 집어던지며 서슬 퍼렇게 꾸짖었다.

돌아가서 호룡이에게 전해라. 내 나이 70이니 어찌 너를 두려워하겠느냐? 네가 고변을 그리 잘한다 하니, 나도 역적이라고 고변해서 한번 죽여보아라! <완암집(浣巖集) 권4 ‘김성기전(金聖基傳)’> 

수모를 당한 목호룡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세간의 이목이 두려워서인지 김성기에게 바로 해코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후로 김성기는 도성을 떠나 두문불출하며 사람들 앞에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2년 후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새로 왕위에 오르자 신임사화를 재조사했고, 결국 목호룡의 무고로 노론 인사들이 누명을 뒤집어쓴 정황이 드러났다. 한때 권세가로 기세등등하던 목호룡은 결국 의금부에서 매 맞다가 죽었고, 그의 목은 효수되어 서소문 밖에 내걸렸다. 한편 우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예전에 진재해가 목호룡의 초상 그리기를 거부한 일을 영조에게 고하자, 영조는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기특하고도 기특하도다! 이처럼 신분이 미천한 사람은 순종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화를 입을 것이니, 시속에 영합하고 권세에 빌붙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끝까지 굳게 거절하였으니, 그 마음이 몹시 가상하다. 특별히 자급을 높여 주고, 해당 조에 분부하여 근속 기간에 따라 적당한 직위에 임용하도록 하라. <영조실록 1년 4월 21일>

권력 앞에서 약자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비록 이들의 눈에 목호룡이 제아무리 혐오스러웠어도 일개 화원이나 악공 처지에서 대놓고 저항한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내건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에는 사대부들도 정쟁(政爭)에 희생되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토록 소신을 굽히지 않고 권세에 맞설 수 있었던 그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고금을 막론하고 예술가들 중에는 높은 기개와 긍지를 가진 이들이 있었다. 진재해와 김성기 역시 이러한 기개와 긍지를 바탕으로 권세에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처신한 사람들이다. 

조선의 예술가들은 시대를 잘못 만나서 천대받았지만, 그들 모두가 약자를 자처하며 스스로 자신의 앞가림에만 급급해한 것은 아니다. 양반 사대부는 아니었을지라도 옳지 못하다고 여긴 권세와 맞서며 소신껏 처신했던 예술가들의 행적에서 범접할 수 없는 ‘예술가의 혼’이 느껴진다.


신동아 2018년 4월 호

| 허윤만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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