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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기자의 쇼퍼홀릭

털 뽑는 원숭이

  • 김민경 주간동아 편집위원 holden@donga.com

털 뽑는 원숭이

털 뽑는 원숭이
최근 쇼퍼홀릭의 머스트해브가 된 영화 ‘섹스앤더시티’에 네 명의 여성 주인공이 멕시코 리조트의 풀사이드에서 태양을 즐기는 장면이 있다. 이들의 캐릭터는 여기서도 잘 드러난다. 결벽증이 있는 샬롯은 멕시칸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고 ‘펩시’ 요거트만 먹고, 남자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사만다는 살짝 무딘 변호사 친구 미란다의 수영복 차림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세상에, 1998년도 아니고 그 수북한 털이라니, 남자가 찾아갈 수나 있겠니?”(19금 영화의 대사다)라고 무안을 준다. 그러잖아도 남편의 외도로 마음이 상해 있던 미란다는 타월로 다리를 가리지만 아픈 데를 찔린 느낌이다. 하기야 사만다는 원작 격인 TV시리즈에서 비키니 라인을 번개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으니, 털이 수북수북 비죽비죽한 수영복 애티튜드를 도저히 현대 뉴요커의 그것으로 봐주기 어려웠을 거다. 아, 몇 년 전엔가 이미 구찌의 인쇄 광고에는 구찌의 로고 모양으로 셰이빙한 여성의 몸이 등장한 적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털 없는 원숭이’인 인간은 진화의 결과, 그나마 몸에 붙어 있게 된 털에도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모른다. 남자들은 매일 면도를 하고 여자들은 청테이프에서 레이저까지 온갖 장비를 이용해 다리와 팔의 털을 뽑아내려 한다. ‘매끈한’ 피부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뿐 아니다. 겨드랑이 털이 자주 개그 소재가 되면서 남성들 중에도 제모를 하는 경우(개그맨과 스포츠맨)를 보게 된다. 유인원과 인간이 엄연히 다른 존재임을 이런 식으로라도 증명하고 싶은 것일까.

“올해는 제모와 왁싱을 하시는 고객이 정말 많아졌어요. 옷의 노출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수영복은 더 대담해졌죠. 노출된 곳은 얼굴이나 손톱처럼 말끔하게 가꿔야 하고요.”

에스테틱의 한 왁싱 전문가는 날씨가 더워지기 전부터 왁싱 예약 리스트가 꽉 찬 상태라고 말했다. 다리, 겨드랑이, 비키니 라인까지 모든 털을 관리해준다. 한 가전제품 업체 관계자는 올해가 한국 제모기 시장에서 어떤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몸을 가리기보다 드러내기 위한 옷이 트렌드가 됐고, 수영이나 헬스 등이 일상화해서 은밀한 부위도 자신 있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미의 기준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지고, 지금은 미의 평가 영역이 피부를 포함한 몸 전체로 옮겨와 있다. 다이어트와 체형교정 시술은 기본이고, 몸의 터럭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제모가 여름 시즌 쇼퍼홀릭의 ‘머스트해브’가 된 것이다. 남성들이 아침마다 면도하는 것처럼, 여성들도 며칠에 한 번씩 털 뽑기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아무리 섹시한 미니스커트를 입는다 한들 털이 덜 뽑힌 돼지머리처럼 허벅지에 거친 털이 솟아 있다면 미란다처럼 1998년도 사람 취급을 받든가, 여유와 정보에서 소외된 ‘코스메틱 언더클래스’로 분류된다.

‘털 없는 원숭이’의 저자이자 동물학자인 데스몬드 모리스는 ‘면도와 제모는 동물의 몸손질 행위에서 생겨나 과시 기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피부를 손상시키는 행위로 변형됐다. 동물에게 이같이 지나친 몸 손질은 긴장된 상황이나 따분할 때 나타난다. 그러나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진 우리는 이 위험하고 해로운 경향을 몸을 꾸미는 과시장치로 활용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결국 털을 최대한 뽑아내는 것이 오늘날 가장 진화한 원숭이임을 외적으로 과시하는 방법이란 얘기다. 덕분에 오늘날 털관리 산업이 새롭게 번창한다. 그러나 몸에 난 죄 없는 솜털들까지 공적인 영역에서 관리하고 마케팅의 대상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오싹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러다 친밀한 남녀 원숭이들이 서로 털을 골라주는 행복까지 몽땅 뽑게 되는 건 아닌지, 동물학자류의 걱정도 되고 말이다.

신동아 2008년 8월 호

김민경 주간동아 편집위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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