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한편 어떤 이들에게 이어령은, 모호하고 일반론에 능한 전직 장관이자 또 한 명의 ‘기성세대’일 뿐이다. 한국의 40~50대는 젊은 시절, 그를 사랑하고 숭배했으나, 오늘의 청년들은 더 이상 그의 언설에 열광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그가 제 가치의 반만큼도 인정받지 못했음을 한탄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가 지나치게 쓰임받고 찬사 받았다며 삐딱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1950년대, 독기 내뿜던 문화 게릴라 이어령을 기억하는 이들은, 왜 언젠가부터 그는 더 이상 총탄도, 화살도 아니게 되었는지 자못 궁금할 것이다. 그의 생래적이랄 만큼 확고한 정치혐오의식을 아는 이들 또한, 왜 그가 노태우 정권에서 장관직을 수행했으며 이런저런 국가적 문화프로젝트의 단골 장(長) 노릇을 해왔는지 묻고 싶지 않을 수 없다.
극단과 극단, 쉽게 마음 주거나 거둬들일 수 없는 안타까움은 외부의 시선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어령의 의식, 학문, 세상 대응 방식은 그 자체로 모순이며 양 갈래 길이다. 샴 쌍둥이 같은 질곡이요 벗어날 길 없는 숙명이다.
이 무수한 분열과 이해할 수 없음(혹은 이해받을 수 없음)의 중심에도 분명 경계는 있을 터. 우리는 이제 그것을 ‘이어령의 문지방’이라 하자. 빈(貧)과 부(富), 독설과 포용, 내쳐짐과 크게 쓰임, 참여문학과 순수문학,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 사회적 성공과 정신적 ‘왕따’의식. 그 단절의 문지방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럼에도 그를 끝까지 ‘이어령이게’ 하는 가치와 독자성(uniqueness)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오해와 분열의 ‘문지방’
서울 효자동의 한 밥집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몸이 다소 불편해 보였다. 전날 오후 차를 타다 어딘가 모서리에 된통 찧었다고 했다. 그래도 활기가 느껴졌다. 노인에게서는 쉽게 발견하기 힘든 ‘현재진행형’의 감(感)이었다.
수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이야기가 시작됐다. 툭 던진 가벼운 물음에도 그는 빠르고 논리정연하게 대응했다. 일상적 질문은 소용이 없었다. 무얼 물어도 돌아오는 건 절묘한 메타포(수사법에서의 은유·비유)로 포장된 추상 답안이었다. 이어령에게 일상은 하찮은 것, 화제 삼을 이유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사생활 보호’ 차원의 대응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문학인이 아닌 생활인, 일상인으로서 온전히 살아온 자신을 못내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마치 이상의 세계에 사로잡힌 10대 문학소년처럼.
두 번째 만남은 서울 평창동 비탈길에 있는 그의 집과, 아내 강인숙씨(69·건국대 명예교수)가 관장으로 있는 근처 ‘영인문학관’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문학관은 몰라도 내 집 서재를 공개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서재에는 모두 7대의 컴퓨터가 있었다. 각기 다른 운영체계로 돌아가는 데스크톱이 3대, 크기와 기능이 다른 노트북 컴퓨터가 3대, 테블릿 PC가 한 대. 그 7대의 컴퓨터를 직접 네트워킹했다 하였다. 각각의 컴퓨터에 최신 프로그램을 깔고 작은 문제가 생기면 뚝딱뚝딱 손을 보는 것도 그였다.
8시간 동안 계속된 대화는 자못 전투적이었다. 왜 변했느냐, 변하지 않은 것은 무어냐는 집요한 물음에 이어령은 그 이상의 끈기와 열정으로 답했다. 연대기적 질문이 불가능하니 대화는 첫 만남에서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소문난 다변가(多辯家)인 그와 대화하려면 우선 그의 말허리를 끊고 들어가는 요령부터 터득해야 했다. 그렇다고 발언에 맥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상정한 기승전결을 다 끝내기 전까지는 차마 입을 다물 수 없음이었다. 그렇게 때로는 항변하고 때로는 수긍하며 하루해가 다 갔다.
중앙일보 고문실에서 세 번째 만난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그는 이런 이야기로 서두를 꺼냈다.
“후-, 내가 오해받고 있는 점들을 분명히 하기 위해 꽤나 애를 썼는데, (두 번째 인터뷰를) 끝내고 보니 이것이 더 깊은 오해를 낳겠구나, 이 허깨비 같은, 만들어진 환상의 이아무개를 실체에 가깝게 만들려니까 더 큰 환상이 되는구나. 극단이 아닌 나를 보여준다는 게 실제로는 또 다른 극단을 낳는, 이런 모순을 피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런 식의 인터뷰를 할 기회가 앞으로 더 있겠소? 성공해봤자 본전치기도 안 되는 이 곤혹스러움이라도 제대로 전달됐으면 좋겠어요.
남들은 다 화려하고 성공한 사람이다, 부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잔디를 멀리서 보면 흠 없이 파랗잖아요? 다가가 보면 여기저기가 성금성금하고. 반대로 거울을 너무 가까이서 보면 아무것도 안보이거든. 사람이란 그렇게 양파껍질 벗기듯 벗길수록 새로운 게 나오는 거요. 그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인터뷰란 것이 사람 하나를 제대로 보여주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한 발만 잘못 움직이면 떨어지고마는 그런 긴장이 나와 우리 삶에 숨어 있는데, 그게 곧 나인데….”
그의 말이 맞다. 누군가를 “안다”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치기 어린 오만인가. 실존과 소통이 오직 이어령만의 인생 화두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대화는 계속됐다. 무릇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 또한 사람 아닌가.
-선생은 자신을 양손의 인간, 양면성의 인간이라 말하는데 그 연원은 어디일까요.
“부모님이지요. 가령 아이디어를 짜내고 창조적 작업에 희열을 느끼는 거, 컴퓨터 같은 기계에 밝은 것은 아버지 계열이에요. 일제 때 아버지는 참 남들이 안 하는 사업만 골라 했어요. 비닐하우스니 병아리 속성 부화니. 새것, 첨단인 것을 아주 좋아했지요. 우리집엔 아버지가 사업하다 실패한 거, 그 부산물들이 여기저기 뒹굴었어요. 발동기, 고무도장, 전표 같은 것들. 그렇게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할 때마다 내게 풍성한 장난감을 주신 분이야.
반면 어머니는 감성적이에요. 독실한 불교신자로 늘 기도를 하셨지요. 병치레가 잦았던 내 머리맡에 앉아 ‘철가면’ ‘장발장’ 같은 책들을 읽어 주곤 하셨어요. 내 문학적 감수성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그러니 아버지의 언어는 비평의 언어, 어머니의 언어는 시의 언어지요. 내 강의도 그래요. 내가 기호학 강의 같은 걸 하면 듣는 사람들이 막 미쳐. 아주 따분하거든. 군말, 예문 그런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런데 또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은 대단히 재미있다, 구수하다는 평을 들어요. 그렇게 난 양면적인데, 사람들은 대개 그중 한 면만 보려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