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초대에세이

당연히 잊혀졌어야 하는 사람인데…

김국태(소설가)

  • 글: 김국태

당연히 잊혀졌어야 하는 사람인데…

2/2
작년부터 ‘現代文學’ 편집실 창에 비친 시인·소설가라는 어쭙지않은 잡문을 연재하면서, 나는 소설은 쓰지 않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회한을 질겅질겅 씹으며 지내는 바이거니와 고희를 눈앞에 둔 나이가 되어버린 마당에 내 몸을 깡그리 망가뜨릴 요량으로 이런 글을 쓰는 모양이라는 생각이다. 망령됨이 급기야 내게도 다가든 것일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 대학시절에 피천득 선생님의 영미시 강독은 겁이 나서 수강할 엄두가 나지 않았거니와 그 선생님이 쓰신 ‘수필’이라는 수필과 김진섭 선생님 작품 ‘窓’쯤 되어야 올곧게 수필이라 할 수 있겠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수필가라는 명패를 달고 있는 분에게 여쭙고자 한다. 내 견해가 여전히 경직돼 있다 하시겠소?

다음에 늘어놓는 옛날 이야기야말로 에세이가 아닌 우리 식의 수필쯤 되는 게 아닐까.

눈에 핏발이 서고 술냄새 풍기면서 몽둥이로 바닥을…

나는 본분을 지키며 조용하고 차분하게 살아보겠다는 신조로 문학단체에조차 가입하지 않고 사노라 해왔는데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때로 착잡하다.



1969년, 1972년과 1970년대 중반 어느 해에 중앙정보부 ‘남산’으로 끌려가 취조를 받았고, 보안사령부에도 갔고, 1977년 초겨울에는 소위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서대문교도소에 갇혀본 적이 있고 보면 결코 차분하고 조용하게 살아온 인생은 아닌 듯하다. ‘본분을 지킨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을까.

1969년 ‘남산’에서 만난 취조관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다. 키 작달막하고 얼굴색 하얗고 눈알에 핏발이 서 있고 쉰 듯하면서 짜랑한 목소리로 나를 취조했던 사람, 그 취조관은 나더러 무엇을 곧이곧대로 대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댈 자료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사정이었다.

취조관은 첫날은 ‘김국태씨’라 부르다가 다음날에는 ‘국태 형’이라고 확 바꾸었다. 나는 의아해하지 않았다. 저런 호칭 바꾸기가 내 감성을 자극하여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기술일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키 작달막한 그 취조관은 또한 자기 가슴 높이께 올라가고 손아귀에 간신히 잡히는 자연목을 항시 손에 거머쥐고 있었는데 지팡이라 하기에는 너무 긴 듯했고 몽둥이라 하기에도 지나치게 굵어서 그 용도가 도대체 궁금했다.

득도한 늙은 중이 자기 키만하고 굵은 명아줏대 지팡이를 짚는다는 이야기를 읽었는데 아주 가뿐할 테여서 좀 굵고 길더라도 지팡이 몫을 잘 감당하겠지만, 그 취조관이 거머쥔 자연목은 때로 취조실 시멘트 바닥을 찍노라면 좀 떨어져 있는 내 발을 울리는 것으로 보아 명아줏대 지팡이처럼 가볍지는 않은 듯했다.

몽둥이일 것이라고 단정하자 저것이 내 몸뚱이 어떤 부위에 언제쯤 와 닿을까 해서 많이 궁금했고 조바심까지 치게 했다. 그런데 계속 ‘국태 형’이라고 하는 바람에 저 사람이 초중고, 대학, 또는 군대 등 어디에서 만난 후배일까 하는 데에 몰두하기에 이르렀고, 취조관이 원하는 자료가 내게 있었다면 확확 불어댈 듯도 했다.

어떤 날은 저녁나절 두 시간쯤 나가서 반주를 했는지 눈에 핏발이 더 서고 술냄새를 조금 풍기면서 진작에 떨어지고 없는 담배를 내게 건넸고, 지팡이 같은 그 연장으로 바닥을 쾅쾅 찍을 뿐 끝내 몽둥이로 쓰지는 않았다.

1972년 ‘남산’에 또 끌려가 먼젓번과는 달리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국태 형’이라 불러대던 그 취조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 만났던 후배인가 하여서 새삼 안달이 났는데, 하루는 취조실에 그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고, 고문을 더는 받지 않을 듯싶어 반가웠지만 악수나 말 한마디 없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준 채 취조실 옆방에 들렀다가 휭 하니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30여 년 세월 저쪽에 있었던 일인데, 어느 정당이 국정원 도청 문제를 한사코 떠들어대니까 그 기관에 몸담았던 사람이 유난히 많은 그 당 정황이 어처구니없게 다가들면서, 나를 ‘국태 형’이라 불렀던 그 취조관이 문득 생각난다.

나이 먹어 확 달라진 얼굴로 그 정당 소속 국회의원쯤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회한에 후닥닥 잠기는 것이다.

신동아 2003년 3월호

2/2
글: 김국태
목록 닫기

당연히 잊혀졌어야 하는 사람인데…

댓글 창 닫기

2022/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