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무원으로서 1급까지 했으면 일단 다한 거죠. 로또 복권도 그런가요, 본인의 복이나 운이나…, 시대적 흐름과 맞아떨어지면 정무직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집에 가서 건강도 회복하고 공부도 하고 배우자와 같이 놀러 다닐 필요도 있죠.”
정찬용 대통령인사보좌관의 말인즉슨, 솔직히 맞다. 아니 오히려 너무 정확해 기분 나쁠 정도다. 1급에서 차관 혹은 청장으로 승진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말 그대로 운이요 시대적 흐름과의 조화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장·차관이 바뀌고 관료 사회가 요동을 치겠는가.
그런데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 1급 자리를 그만두면 집에서 놀아야 한다? 이건 좀 문제가 있다. 아니 사실관계에도 맞지 않는다. 지금껏 수많은 1급들은, 특히 경제부처 출신들은 퇴직 후 놀지 않았다. 어디든 갈 곳이 있었다. 마련해놓은 자리의 요모조모를 따져, 혹은 받아들이고 혹은 퇴짜 놓는 여유까지 부리는 이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그도 쉽지 않으려나. 그러나 A씨는 곧 ‘안 주고는 못 배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배려’ 없이 관료조직을 물갈이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괄 사표와 ‘정무직 로또론’
지난 3월18일, 행정자치부 1급 공무원 11명이 명예퇴직을 신청하거나 사표를 제출했다. 행자부에는 총 12석의 1급직이 있다. 이 중 공석인 차관보를 제외한 전원이 사의를 표명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해양수산부 1급 3명도 전원 사표를 제출했다. 이러자 전 부처 1급 간부가 다 사표를 내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관가에 급속도로 퍼져갔다. 그 와중에 정찬용 보좌관의 이른바 ‘정무직 로또’ 발언이 불거져나온 것이다.
이전에도 정권 교체기에는 큰 폭의 인사가 이루어지곤 했다. 그럼에도 이번 조처가 남다른 관심을 모은 건 ‘일괄 사표’라는 파격적 방식 때문이었다. “선별 면직시켜도 될 일을 굳이 일괄사표라는 방식을 택해 망신을 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언론 또한 기다렸다는 듯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국가를 위해 평생 봉사했는데 이럴 수 있냐” “한창 일할 나이에 앞길도 마련해 주지 않고 무작정 옷을 벗겨도 되느냐”는 식의 감정적 반응들이 연일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우려했던 ‘전 부처 1급 일괄 사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기존 1급의 60~70%가 옷을 벗었으나, 그렇다고 ‘충격적’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격렬한 변동이 일어난 부처는 많지 않다. 특히 경제부처는 해양수산부, 국세청 등을 제외하고는 파장이 최소화된 모양새다. 오히려 사회부처 쪽 변화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 역시 행정고시 기수를 2~3회 낮추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그렇더라도 파격은 파격이다. 지난 4월11일 중앙인사위원회는 2003년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이번 1급 인사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공정·투명한 인사를 위한 다면평가 전면 실시 △서열과 기수를 뛰어넘는 능력중시의 발탁인사(연령 : 52세→50세10월, 행시기수 : 14~17회→17~20회) △민간전문가 유치 확대 및 과학기술인력 우대. 이러한 변화는 새 정부의 개혁 성향 및 세대 교체 중시 경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