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우군, 적군 구분해 ‘전쟁’ 벌이지 말라

노무현 대통령과 언론

  • 글 : 정진석 한국외대 교수·언론학 historian0@hanmir.com

    입력2003-04-25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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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필요하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주장에는 수긍할 부분이 있다. 하지만 언론이란 대통령의 맘에 안 든다고 개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대통령은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도 끌어안고 설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군, 적군 구분해 ‘전쟁’ 벌이지 말라

    제47회 신문의 날기념식에서 이상기 기자협회장, 홍석현 신문협회장, 노무현 대통령, 김태식 국회부의장, 최규철 신문방송편집인협회장(왼쪽부터)이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건국 이래 우리에게는 아홉 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이 가운데는 이승만, 박정희와 같이 강한 카리스마와 권력을 지닌 대통령도 있었고, 윤보선과 최규하처럼 실질적인 권한이 약했던 대통령도 있었다.

    전두환도 강한 권력을 행사한 대통령이었다. 정치적 민주화의 전환기에 당선됐던 노태우는 군인 출신이었지만 전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큰 힘을 행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 투쟁의 전력을 지닌 김영삼, 김대중은 여론의 향방에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 여론정치에 의존하는 스타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언론자유 외치다 정권 잡은 후 돌변

    이들은 모두 시대 상황과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언론관을 지니고 있었다. 대통령의 언론관은 언론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친다. 아홉 명의 대통령 가운데 특징적인 언론관을 지닌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경력을 지닌 초대 이승만, 군인 출신의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직업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은 젊은 시절 언론인으로 두드러지게 활동했던 인물이다. 1904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1898년부터 배재학당에서 발행하던 ‘매일신문’의 기자와 주필을 거쳐 같은 해에 창간된 ‘제국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일본인이 발행하던 ‘한성신보’와 뜨거운 논전을 펼친 일도 있었다. 독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뒤에는 옥중에 있으면서도 상당 기간 ‘제국신문’의 논설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옥중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이라는 책도 언론 활동의 한 방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광복 후 대통령이 돼 정권을 잡은 후에는 언론과의 갈등이 고조되더니 집권 말기에는 언론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대구매일’ 테러사건이나 ‘경향신문’ 폐간사건이 상징하듯 언론 억압이 계속되자 언론은 더욱 강하게 그를 비판하는 갈등의 상승작용이 되풀이됐다. 그러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나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4·19는 언론이 이끈 혁명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정책적 차원에서 직접 개입해 언론을 계획적으로 탄압한 것은 아닌 듯싶다. 언론에 직설적이고 극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발언도 자제한 편이었다. 그의 언론관은 가부장적인 형태를 띠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는 언론에 뿌리 깊은 불신을 갖고 있었다. 5·16 직후 “국론을 통일하기 위해 무책임한 언론의 자숙이 요청된다”고 한 말이 그의 언론관을 집약한 것이었다. 그해 11월22일 미국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도 “과거 많은 신문이 금전에 좌우되고 부패했으며, 공산주의 색채를 띠었다”고 단정할 정도였다.

    군인이었던 그의 눈에는 언론이 자유당 시절에는 대안 없는 비판과 인신공격을 언론의 자유인 양 여기고 제2공화국이 시작되자 주어진 자유를 절제할 줄 모르고 남용하는 존재로 비쳤던 것이다. 총칼로 권력을 쥔 박정희는 언론계 정비를 단행했다. 4·19 이후 난립했던 군소 언론사를 대량 폐쇄하고 조석간 하루 두 차례 발행이 관행이었던 일간지에 단간제(單刊制) 실시와 카르텔화를 강요해 경영과 편집 양면에서 통제가 쉽도록 했다.

    박정희는 민정이양 후에 일어난 6·3사태의 원인이 “일부 정치인의 무궤도한 언동,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이었다”는 인식에서 ‘언론윤리위원회법’이라는 독소조항이 담긴 법을 제정하려 했다. 말할 것도 없이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였다.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은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났다. 박정희는 언론을 국가발전에 유익한 노릇을 하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반면 해악을 끼칠 수도 있는 양면성을 띤 존재로 인식했다. 통치에 방해가 된다고 여긴 언론에는 탄압을 가하되 채찍과 당근으로 순치(馴致)하려 했다. 군인 출신인 전두환도 언론의 구조를 바꾸는 여러 조치를 취했는데 기본적인 언론관은 박정희와 유사한 권위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국민의 정부’를 표방했던 김대중은 공식적으로는 언론의 비판을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천명했다. 1998년 4월 신문의 날 기념식에서 “비판 없는 찬양보다는 우정 있는 비판이 중요하다. 우정 있는 비판을 하고, 잘못하면 충고해야 한다”며 “대통령이 잘한 것만 잘했다고 하지 않아도 좋다. 대통령이 그런 말을 듣고 싶어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집권자에 비해 음성적이면서도 세련되고 지능적인 방법으로 언론 탄압을 시도했다. 언론개혁을 명분으로 내걸고 권력을 동원해 다양한 방법으로 언론을 억압하려 했다. 국정원, 국세청, 검찰,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막강한 권한을 지닌 정부기구가 나서서 특정 언론사를 표적 삼아 목을 죄는 수법이 동원됐다. 친정부 언론매체와 시민단체를 통한 여론몰이 작전으로 비판적 언론의 논조와 도덕성에 타격을 입히려 했다. 비밀리에 작성된 ‘언론 문건’이 여러 차례 드러났고 정권은 언제나 이를 부인했지만 그 문건에 적힌 시나리오가 그대로 실행에 옮겨진 것이 현실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전의 대통령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언론을 대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정면대결 구도를 설정했다. 우선 그는 언론을 두 가지 유형으로 단순화해 호오(好惡)의 감정을 명확히 드러낸다. 한쪽은 자신에게 적대적 감정을 지닌 ‘수구 극우언론’, 또는 ‘족벌언론’으로 규정한다. ‘수구 극우언론’이란 메이저 신문으로 분류되는 일명 ‘조동중’으로 조선·동아·중앙일보 3개 신문을 가리킨다. 이 부류는 자신을 ‘이지메’하고 박해하는 언론이다. 우회적인 표현을 쓸 때에는 ‘특별한 소수 언론’과 ‘일반적인 언론’으로도 구분하는데, 두 부류 가운데 ‘특별한 소수 언론’이 개혁 대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인터뷰조차 거절할 정도로 공공연히 적대감을 드러냈다.

    언론을 두 가지 유형으로 단순화

    또 다른 한쪽에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논조를 취해온 매체들이 있다. ‘한겨레’신문, KBS와 MBC, 그리고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가 여기에 속한다. 특히 ‘한겨레’에 대해서는 대통령당선자로서는 이례적으로 당선 직후 이 신문사를 방문할 정도로 친밀감과 신뢰를 표시했다. 미디어 비평지인 ‘미디어오늘’은 “대통령당선자가 직접 언론사를 방문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더욱이 그 시점이 그가 가장 적대적인 신문으로 지목해온 ‘조선일보’가 문희상 의원의 비서실장 내정사실을 특종으로 단독보도, 당선자 신분으로 기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표한 직후였기에 ‘한겨레’ 방문은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당선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는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와는 파격적으로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여기서도 그는 ‘수구언론’에 적대감을 드러냈다. “언론들이 나에게 이지메를 가하고 있다. 조폭적인 언론의 횡포와 맞서 싸워야 한다. 더 이상 언론에 굽실거리지 않겠다”(2003년 2월9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대통령당선자 발언으로는 파격이라 할 정도로 직설적이고 전투적이기까지 한 어법이다.

    방송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 “방송이 없었다면 당선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방송의 지원에 호응하는 말을 했다. 선거 기간에 언론특보를 지낸 서동구씨의 KBS 사장 취임을 관철하기 위해 노조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설득한 것에서 노대통령이 방송에 얼마나 많은 관심과 기대와 애정을 지니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대통령이 스스로 이지메나 박해를 받는다고 생각하건 아니건 그가 언론에 미칠 수 있는 권한과 영향력은 막강하다.

    첫째, 방송이라는 엄청난 동원력을 지닌 매체가 우군으로 포진해 있다. 방송은 역대 정권의 홍보매체 노릇을 해 왔다. 과거에는 여론의 주도권을 신문이 쥐고 있었으나 지금은 방송의 영향력이 신문을 압도한다. KBS라는 거대 언론매체의 사장 자리에 자신의 사람을 앉히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실패한 사건은 노대통령이 방송을 자신의 통치에 어떻게 활용하려 했는지를 드러낸다.

    둘째, 대통령에게는 자신을 지지하는 친(親)정부 성향의 매체들이 있다. KBS와 MBC라는 양대 공중파 방송을 비롯해 오늘날 ‘대한매일’로 제호가 바뀐 ‘서울신문’은 역대 정권의 충실한 대변인 노릇을 했다. 5공 전두환 정권이 들어설 때에는 ‘경향신문’도 앞장서서 그가 권력을 쥐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언론 역사를 알고 보면 특정 수구언론이 “군사독재와 결탁해 민주화 열망과 서민의 권리를 억압하는 대신 특권과 특혜를 누렸다”는 노대통령의 인식은 균형감각이 결여된 것이다. 군사정부 시절 존재했던 언론사 가운데 더 큰 특권과 특혜를 누렸던 매체가 방송을 비롯해 오늘날 친정부 성향으로 분류되는 신문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른 형태의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으로 대통령을 지지하는 매체들이 있다. 친정부 성향의 시민단체와 연대한 이 매체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군사정부 시절보다 훨씬 커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노대통령은 적대적인 언론에 대해 불신과 피해의식에 그치지 않고 과거 역사까지 편향되고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 대통령은 언론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권력을 쥐고 있다. 2001년 1월11일 김대중 대통령이 연두회견에서 언론개혁을 언급한 직후 국세청은 언론사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당초 60일이던 조사기간을 세 차례나 연장해 142일에 걸쳐 1000여 명의 직원을 투입해 23개 언론사에 단일 업종으로는 최고액인 5056억원의 추징금을 부과했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는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특정언론을 겨냥해 ‘이중잣대’를 들이댔다는 논란이 있었다. ‘조선일보’(864억원), ‘중앙일보’(850억원), ‘동아일보’(827억원)의 순으로 이들 3개 신문사의 세금 추징액은 세무조사를 받은 23개 신문·방송사 전체 추징액의 절반 수준인 2541억원에 이르렀다.

    공정거래위원회도 13개 언론사에 과징금 242억원을 부과했다. 그러나 공정위는 지난해 12월30일 15개 언론사에 부과했던 과징금(182억원) 취소결정을 내려 과징금 부과가 원천적으로 잘못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세무조사 과정에 국세청은 언론인들의 금융계좌를 무차별적으로 뒤져 ‘마구잡이 조사’라는 비난도 받았다. 위세가 당당하던 당시의 국세청장은 해외로 도피해 종적이 묘연한 상태다.

    얼마 전 ‘동아일보’ 칼럼에서 나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은 칼과 펜이 맞서는 현실에선 적용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며 언론에 비해 압도적인 힘을 지닌 권력이 사라진 뒤에야 이루어지는 역사의 평가일 뿐”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직 대통령이 언론의 ‘박해’를 받는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대통령은 언론보다 훨씬 큰 힘을 가졌기에 공정하고 균형 있는 인식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언론을 향해 던지는 말과 제스처는 바로 언론 정책에 반영돼 언론을 위축시킬 수도 있고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최근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브리핑 제도 도입이나 기자들의 관공서 출입 제한, 신문보도의 의도성을 따지는 문제, 오보와의 전쟁 등 새로운 조치들이 바로 대통령의 언론관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는 언론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권을 향한 과정에서 경쟁과 협상, 또는 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어떤 정치인이건 모든 언론으로부터 호의적인 대접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언론환경에서 다른 경쟁자보다 언론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이 있었다. 당선에 기여한 호의적인 매체도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정치의 성패가 언론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 언론에 대해서는 정치투쟁과 동일한 차원에서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싶다. “언론이 대통령을 ‘박해’할 정도로 강한 힘을 지녔기 때문에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는 말이나, 국회에서 행한 첫 시정연설에서 “이런 언론환경에서 성공한 대통령이 가능한지 회의적”이라고 말한 것은 언론이 정치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언론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대통령에게는 저절로 우호적인 매체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비판적인 언론과 우호적인 언론을 아울러 이끌고 가는 것이 대통령 자리에 앉은 정치가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우군과 적군의 이분법으로 언론을 규정할 것이 아니라 자유경쟁과 적자생존의 자본주의 언론시장을 염두에 둔 언론관을 정립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신문과 방송, 그리고 새로운 매체인 인터넷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균형 잡힌 인식이 필요하다.

    언론시장의 과점(寡占)은 경계해야 할 현상이다. 하지만 경쟁을 통한 언론사의 점유율을 인위적으로 평준화한다면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언론시장의 과점 문제는 신문보다는 방송 쪽이 더 심각하다는 점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신문의 시장 점유율은 민주정치에서 투표에 의해 당락이 판가름나고 정권이 지지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자유주의 언론이론이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마찬가지로 자사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언론기업도 결국은 사회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독자는 누구나 신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따라서 그들이 원치 않는 신문은 사라질 것이며, 그들이 지지하고 좋아하는 신문은 번창한다. 독자는 하루하루 신문을 검증하고 감시한다. 그래서 신문이 국민으로부터 검증, 시험, 감사를 받은 적이 없다는 대통령의 인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비해 공중파 방송은 채널이 극히 제한돼 과점상태에 있기 때문에 더욱 엄중한 공중의 규제와 감시가 필요하다.

    언론이 권력화했다거나 언론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필요하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주장에는 분명히 수긍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언론이란 그렇게 우군과 적군이라는 이분법으로 단순화해 ‘전쟁’을 벌이는 자세로 개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대통령은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도 끌어안고 설득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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