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강금실·박범계… ‘强骨판사’의 산실

참여정부 사법개혁, 우리법연구회를 주목하라!

  • 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3-04-25 18: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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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법연구회’란 단체가 있다. 진보적 성향의 현직 판사 모임이다.
    • 참여정부에서 강금실 법무부장관 등 개혁적 법조인들이 대거 요직에 발탁된 데는 민변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우리법연구회는 그와 별개로 재조(在曹) 개혁인사들의 오랜 버팀목 노릇을 해왔다. 창립 이후 15년간 베일에 가려있던 이 단체를 전격 해부했다.
    강금실·박범계… ‘强骨판사’의 산실

    1998년 11월 서울대 호암관에서 열린 우리법연구회 창립 10주년 기념 세미나

    법관사회는 직역(職域)의 특성상 개인의사의 적극적 표명을 꺼리는 게 통례다. 곧잘 인용되는,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경구(警句)는 오직 법률과 양심에 따라야 하는 그들의 직업적 소명을 웅변함과 동시에 법원조직의 강한 보수성을 반영한다.

    이런 사법부 내에서 일절 외부로 노출되지 않은 채 15년간 존속해온 자생적 모임이 있다.

    ‘우리법연구회.’ 지극히 생소한 명칭의 이 모임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현직 판사들이 상당수 소속해 있다는 점, 강금실(46) 법무부장관과 박범계(40) 청와대 민정2비서관이 회원이란 점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4월7일 대북 비밀송금 사건의 특별검사보로 임명된 김종훈(46) 변호사 역시 이 모임의 창립회원이다. 그는 특히 참여정부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인사추천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어 우리법연구회의 정체성(identity)에 의구심을 한층 더하게 한다. 이 때문에 법조계 일각에선 우리법연구회가 ‘법조계의 하나회’쯤 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오랫동안 ‘보안유지’에 성공해온 우리법연구회는 어떤 배경에서 태동했을까. 또 ‘장수(長壽)’의 동력(動力)은 무엇인가. 현직 판사들조차 모르는 이가 태반인 우리법연구회의 실체가 언론에 공개되긴 이번이 처음이다.

    순수 법이론 학회로 창립



    1988년 6월10일 밤 9시 서울 서교호텔 뒤편의 맥주집 ‘블랙홀스’. 4명의 소장판사가 모였다.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실무수습을 받고 있던 시보 한 명도 동석했다. 이들은 6·29선언 직후 불어닥친 민주화 열기에도 아랑곳없이 아무런 자기반성도 보이지 않는 사법부 수뇌부의 개편을 주장하는 성명을 내기로 이날 뜻을 모았다.

    같은달 15일 서울·수원·부산·인천지역 소장판사 430여 명은 대법원장 선임문제와 관련, ‘법원 독립과 사법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명에 참여했다. 6공정권이 유임시키려던 김용철 대법원장을 퇴진시키고 그 후임으로 이일규 대법원장을 취임케 한, 이른바 ‘2차 사법파동’은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맥주집 모임’을 가진 이들은 김종훈(인천지법), 유남석 이광범 한기택(이상 서울민사지법) 판사(괄호 안은 당시 근무지)와 사법연수원(18기) 2년차인 심규철 시보(현 한나라당 의원)로, 하나같이 29∼30세의 혈기방장한 나이였다.

    이즈음 이들과 다른 한편으로 법학도서 읽기 모임을 갖고 있던 강금실 판사 등 4명의 소장판사는 수차례의 독서모임을 연 뒤 모임을 전문화하고 확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2차 사법파동을 주도한 판사들 중 3명과 변호사 3명이 합류해 1988년 10월9일 첫 법이론 세미나를 갖는다. 세미나라곤 하지만, 모임장소가 마땅찮아 서로의 집을 돌아가며 법학 논문을 읽고 토론하는 형식이었다.

    1년 뒤 이 모임은 ‘우리법연구회’란 정식 명칭을 단 학회로 출범한다. 창립회원은 당시 판사로 있던 김종훈, 강금실, 강신섭(46·현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오진환(44·사시21회·현 세계종합법무법인 변호사), 유남석(46·현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박윤창(50·현 서울지법 부장판사), 이광범(44·현 서울지법 부장판사 겸 법원행정처 건설국장) 등 판사 7명과 사법연수원 수료 후 바로 개업한 박종술(48·사시27회·현 법무법인 북부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이태화(47·사시24회·변호사), 이양원(44·사시24회·현 법무법인 부천종합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등 3명의 변호사다. 공교롭게도 우리법연구회는 인권변호사들을 주축으로 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의 창립(1988년 5월28일)과 비슷한 시기에 태동했다.

    우리법연구회의 창립회원 10명 중 강금실 한기택 강신섭 김종훈 유남석 박윤창 등 6명이 사시23회 및 사법연수원 13기 동기들이란 점은 매우 흥미롭다. 주지하듯, 사시23회(1981년)는 합격인원이 최초로 300명으로 불어난 기수로 법조계 안팎에서 실력 있고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노무현 대통령의 법률자문을 맡은 황덕남(46) 청와대 법무비서관, 양인석(45) 사정비서관도 이들과 동기생이다.

    사시23회를 전후한 법조인들은 유신 말기에 대학을 다니며 냉혹한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쌓아가면서 자연스레 개혁 마인드를 공유한 ‘세대적 체험’을 지녔다. 당시는 서울대 법대가 ‘유신 법대’라는 비아냥을 받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또 1980년대 초반 민주화 바람이 거세던 당시 사시에 합격, 법조계에 뛰어들면서 대학시절에 가졌던 사회비판의식을 그대로 이어간 세대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법연구회 창립회원 중 김종훈 변호사와 유남석 판사는 대학동기로, 이들보다 1년 후배인 이광범·한기택 판사와는 대학시절 서울대 법대 학보 ‘Fides’의 편집위원으로 함께 활동했고, 심규철 의원은 당시 서울대 내 이념서클인 ‘농촌법학회’ 회원으로 학보편집실을 오가며 이들과 친하게 어울리면서 시대적 동지애를 주고받던 사이였다.

    1989년 당시 심규철(45·사시28회) 변호사와 박시환(50·사시21회·현 서울지법 부장판사) 판사는 우리법연구회의 새 회원으로 가입한다. 이때부터 기존 회원의 추천을 받은 젊은 판사들이 알음알음으로 신규회원이 된다.

    창립 이후 우리법연구회는 매월 한 차례 월례세미나를 갖고 헌법, 노동법, 경제법 이론을 개관하는 학회모임을 이어간다. 회원들은 각자 자신이 발제한 주제의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법원 내부에서 일어나는 시사적 문제들을 요약정리해 토론해왔다. 국가보안법, 북한헌법, 사상(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근로기준법 등 토론주제로 삼았던 영역은 무척 다양했다.

    창립 당시 우리법연구회 회칙 3조는 모임의 목적을 ‘법률전문직업인의 비판적 시각에서 법제도, 운영실태, 이론 등 모든 법률문화현상을 법현실, 사회구조와의 유기적 관련 아래 조사·연구하여 궁극적으로 기본적 인권과 실질적 정의가 실현되는 민주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함에 있다’고 규정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결국 부단한 ‘자기개혁’을 통해 법관으로서의 초심(初心)을 지키자는 취지라 할 수 있다. 회칙을 만든 사람은 꼼꼼하기로 소문나 있던 강금실 판사였다고 한다.

    우리법연구회는 또 일년에 두 번 확대모임(봄엔 가족동반모임, 가을엔 정기총회 겸 회원수련회)을 갖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회원 중 한 명인 홍기태(41·사시25회) 대구지법 부장판사 겸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심의관의 부인은 민변 창립회원인 박주현(40·사시27회) 청와대 국민참여수석비서관이다. 그는 우리법연구회의 ‘회원가족’으로 분류된다. 그는 1993년 우리법연구회 창립 5주년을 맞아 ‘우리법연구회에 대한 제언’을 내놓기도 했다.

    1993년 4월 우리법연구회는 당시 총무(대표)였던 김종훈 판사가 ‘법률신문’에 기고한 글 ‘개혁시대의 사법의 과제’가 게재를 거부당하자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논의한다. 이후 이 글은 이른바 ‘3차 사법파동’을 촉발하는 단초가 된다.

    우리법연구회 5주년 기념 자료집(1993년)에 실린 ‘우리법연구회 5년의 회고와 전망’이란 글에서 당시 강금실 판사는 ‘1988년의 법관서명파동 후, 올해에 와서 법원이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 움직임과 지원, 수원지법을 비롯한 각급 법원간의 긴밀한 교감 내지 연락을 취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된 측면이 있다’고 우리법연구회의 역할을 자평했다.

    이는 우리법연구회가 법조계 내부에서의 진보적 움직임을 모임으로 엮어낸 최초의 단체란 점을 시사한다. 강판사가 서울민사지법 소장판사 40여 명이 사법부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대법원장에게 전달한 3차 사법파동 당시 ‘평판사회의’ 설립을 주도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법연구회는 1996년 3월을 전후해 그동안 폐쇄적으로 운영해왔던 모임을 회원가입을 희망하는 소장판사들에 한해 부분개방하는 등 규모를 확대키로 결정한다. 규모가 커지면 자칫 모임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고심도 있었지만, “같이 공부 좀 하자”는 80년대 학번 후배들의 요구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박범계(사시33회) 판사도 회원으로 가입, 1997년 5월 ‘형사소송법 개정에 즈음하여 인신구속제도에 관한 개관’이란 논문을 발표했고, 지역별 간사(광주고법 관내 담당)로도 활동한다. 규모가 커지면서 우리법연구회는 자연스레 이전의 개인적 친분관계 모임의 성격을 탈피하게 됐다.

    1993년 25명에 불과했던 우리법연구회 회원은 1998년 90여 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1995년 이전에 가입한 5명을 제외하곤 더 이상 변호사를 신규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명실공히 판사모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민변이나 대한변호사협회 내 인권위원회 등 변호사들이 소임을 다할 곳이 많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시기에 서울대 법대 출신이 아닌 판사들도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모임의 구성원들도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우리법연구회의 재원은 회비(월 1만원)로만 충당되고 있으며 외부 지원은 전혀 받고 있지 않다.

    강금실·박범계… ‘强骨판사’의 산실

    회원만 자료열람이 가능한 우리법연구회 홈페이지

    사법연수원이나 법조계 안팎엔 민법, 상법, 민사소송법을 주로 연구하는 민사판례연구회(약칭 민판) 등 자생적인 학회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법연구회는 그런 단체들과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이에 대해 김종훈 변호사는 “1977년 결성된 민판의 경우 법관과 법학교수들을 아우르는 학회로 임관성적이 우수한 판사들이 주로 가입하는 등 엘리트주의적 색채가 짙다. 그에 비해 우리법연구회는 회원들의 사법개혁에 관한 ‘코드’가 맞다는 점만 빼면 회원층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다”고 말한다. 창립 초기엔 ‘운동권 출신 판사들이 시대현실에 대한 울분을 달래는 친목모임’ 성격이 강했지만 회원들이 점차 불어나면서 다양한 성향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3년 4월 현재 우리법연구회의 회원은 예비판사를 포함해 전국 각급 법원의 판사 100여 명. 국내 판사 수가 1751명이고 예비판사는 224명이니 결코 적지 않은 규모다. 사법연수원 11기부터 2003년 임용된 예비판사(사법연수원 32기 수료, 대개 사시42회)들까지 폭넓게 포진해 있다. 현직 부장판사만도 15명에 달한다.

    활동 성과도 많이 쌓였다. 창립 이후 지금까지 네 권의 논문자료집을 발간했고, 1998년 11월엔 창립 10주년을 기념한 세미나를 서울대 호암관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우리법연구회 명의로 사법개혁을 공론화한 적은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회원 개개인은 판사로서 보수적이고 경직된 법원조직 문화에 대항해 사법개혁의 목소리를 꾸준히 높여왔다. 일례로 지난 1월 법원 내부통신망에 대법관 인사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글을 올렸던 한기택(44·사시23회)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문형배(38·사시28회) 부산지법 판사, 이용구(39·사시33회) 서울지법 북부지원 판사, 정진경(40·사시27회) 광주지법 부장판사 등이 모두 우리법연구회 회원이다. 특히 한기택 부장판사는 현재 우리법연구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당시 문형배 판사가 올린 ‘사법개혁 논의에 즈음하여’라는 글을 잠시 보자.

    ‘변화와 개혁이 시대의 당면한 요구로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고 법조인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된 만큼 사법개혁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제도화를 통해 사법부의 발전을 도모할 때’ ‘그동안 대법관 인사가 정치적 고려에 의해 지역·기수·직역별 안배가 이뤄져 왔으나 이제는 성향별 안배도 필요한 시점이 왔다’ ‘진보적 성향의 대법관이 보수적 성향의 대법관과 함께 최고법원을 구성해 사회의 보편타당한 가치를 모색할 시점이 됐다’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는 것이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던 때도 있었으나 사법권에 중대한 위협이 되는 문제를 법관이 제기하지 않으면 그 해결책이 마련되기 힘든 만큼 사법개혁에 관한 법관의 토론이 활성화돼야 한다’….

    ‘파워엘리트’ 배출 이후 음모론 대두

    이 글에 깃든 메시지는, 판결이 판사의 가치관과 정의를 담아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임엔 틀림없지만 이젠 판사들도 개혁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혁’과 ‘토론’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코드’와 매우 닮은꼴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법조계 내부의 시각이 우리법연구회에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최근 들어 우리법연구회 회원들이 참여정부의 요직에 발탁되면서 노대통령의 개혁전위대로 불리는 민변처럼, 장기적으로 ‘참여정부의 또 다른 인재풀’이 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강금실 장관과 박범계 비서관을 다분히 의식한 우려 섞인 전망이다.

    아직 우리법연구회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덕에 이런 의혹이 법조계 외부로까지 불거지진 않았지만, 거꾸로 보면 그런 의혹이 생겨나는 것 자체가 모임 운영의 폐쇄성 탓도 크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우리법연구회는 홈페이지를 개설해두고 있지만, 모든 관련정보는 초기화면에서 회원으로 가입한 뒤 로그인해야만 열람할 수 있다. 회원전용일 뿐 외부로 공개된 사이트는 아닌 셈이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우리법연구회란 단체를 아느냐”는 물음에 “처음 듣는다”고 답했다. 창원지법의 한 소장판사 역시 “전혀 들어본 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법연구회 회원들은 그런 시각은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강변한다. 우리법연구회 회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심규철 의원은 “강금실 장관이나 박범계 비서관이 발탁된 것은 개인적인 ‘영예’일 뿐, 정작 회원들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법조계에 명망가는 많아도 정작 개혁인사들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은가. 우리법연구회는 개혁성을 지향하는 판사들의 결집체이지, 결코 권력지향적인 모임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념성도 강하지 않다는 게 우리법연구회의 자체 평가다. 비록 강금실 장관이 민변 부회장을 역임했고 김종훈 특검보도 과거 민변 사법위원장을 맡는 등 두 사람 다 한때 민변을 거쳤기 때문에 우리법연구회가 민변으로 가는 가교(架橋)가 아니냐는 선입관도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은 변호사 개업 후 민변에 가입하기 전까지 이미 우리법연구회에서 ‘잔뼈’가 굵을 대로 굵어졌기 때문에 우리법연구회와 민변을 연관짓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광범(44)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겸 법원행정처 건설국장은 “우리법연구회에도 물론 일부 래디컬(radical)한 판사들이 없진 않다. 그러나 우리법연구회는 어디까지나 사법관료들의 모임인 만큼 개혁 성향의 재야 법률가단체인 민변처럼 적극적인 이념성을 띠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법연구회가 법조계의 ‘이너서클’이 될 만큼 조직화되지는 못한 ‘느슨한’ 단체란 점을 시사한다.

    그런데도 우리법연구회측은 수차례에 걸친 ‘신동아’의 취재요청을 한사코 거절했다. 이에 대해 우리법연구회 회장인 한기택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는 “모임의 존재가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외부인들이 우리 모임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언론에 노출될 경우 가뜩이나 개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법원조직의 특성상, 자칫 인맥을 앞세운 ‘법조계의 하나회’ ‘정치판사들의 비밀결사’식으로 불필요한 오해나 파벌의식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며 “언론에 보도될 경우 모임을 존속시킬지 여부에 대하여 토론에 붙여야 한다는 회원들도 있다”고 밝혔다.

    우리법연구회가 특정인맥 구축을 통한 권력 바라기를 속성으로 한 과거 군부의 ‘하나회’와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지금까지의 궤적만 놓고 봤을 때 그렇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사법개혁에 대한 ‘코드’가 참여정부와 거의 일치하는 우리법연구회가 향후 어떤 조직 특성을 머금게 될지는 미지수다.

    2002년 4월 발탁 승진에 의한 현행 법관인사제도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는 등 꾸준히 사법개혁을 주창해온 문흥수(46·사시21회) 판사는 “우리법연구회 회원은 아니지만, 그 모임이 보수적이고 자기의사 표현에 인색한 법원 내부에서 소신 있고 일관성 있게 진보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법개혁의 산실로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법연구회의 걸음걸음에 비상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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