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서양을 막론하고 새우 요리만큼 인기 있는 것도 드물다. 맛은 물론이거니와 영양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단백질과 칼슘이 멸치보다 많고, 비타민과 필수 아미노산도 가득해 남성의 양기를 북돋워주는 강장식품으로도 최고다. 예로부터 총각은 지나친 섭취를 삼가라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올 정도다.
외화가 국내 방송을 통해 소개되려면 먼저 번역을 한 뒤 성우들의 더빙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코끼리 사나이’의 주인공 상태는 최악이었다. 입이 돌아가 반쯤 열린 입술 사이로 말을 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침과 이를 다시 빨아들이는 훌쩍거림…. 아무리 숙달된 성우라도 번역된 대사로 입 맞추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이런 소리까지 전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때 주인공역을 맡았던 성우는 한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한쪽 볼에 알사탕을 물고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시청자들은 일그러진 입으로 침 흘리며 말하고 훌쩍거리는 주인공이 마치 한국말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면 좀 과장일까.
그 때 그 성우가 바로 배한성(裵漢星·57)씨다. ‘목소리의 마술사’ ‘천의 목소리를 가진 사나이’. 아무 이유 없이 그에게 이런 최고의 찬사가 붙은 게 아니다. 물론 타고난 목소리 덕도 있겠지만, 그 이상의 끊임없는 노력과 고민 그리고 도전이 있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찬사다.
월북한 아버지며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고 힘겹게 살았던 어린 시절도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의 하나다. 그는 ‘동아일보’ 배달소년이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배달하며 공부해서인지 지금도 부지런함이 몸에 배어 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나태한 꼴은 절대 못 봅니다”라는 그의 말에서도 그런 태도가 묻어난다.
외화 더빙 작업을 할 때 영화 속 인물의 성격을 분석해내는 그의 치밀함은 작품의 완성도를 극대화시켰다. ‘형사 콜롬보’ ‘맥가이버’ ‘아마데우스’ ‘스타스키와 허치’ ‘빠삐용’ ‘형사 가제트’ 등 수많은 작품에서 그의 목소리 연기는 실제 연기자를 압도할 정도였다. ‘형사 콜롬보’의 주연 피터 포크와 ‘맥가이버’의 리처드 딘 앤더슨이 지금 국내 TV에 출연해 더빙 없이 ‘진짜’ 자신의 목소리로 말한다면 ‘목소리가 원래 저랬나’하며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테니까.
그의 음식솜씨는 어떨까. 배한성씨가 들고 나온 요리는 깐쇼새우. 경기도 평촌 집 인근에 위치한 중화요리점 ‘희래등’ 사장 이재희(李在熙·53)씨에게 한 수 배운 솜씨다. 두 사람은 배씨가 이씨를 ‘바이올린과 자장면’이라는 제목으로 방송에 소개하면서 가까워졌다. 이씨는 자장면을 빼는 솜씨만큼 바이올린을 켜는 실력도 수준급이다.
깐쇼새우 요리에는 손가락만한 크기의 작은 새우가 적합하다. 이보다 조금 큰 중새우도 괜찮다. 먼저 새우의 껍질을 꼬리 부분만 남기고 벗긴다. 중새우의 경우 속까지 잘 익도록 새우 등에 세로로 절반깊이의 칼집을 낸다. 그리고 풀어놓은 계란과 녹말가루에 새우를 넣어 골고루 잘 묻혀 기름에 튀겨둔다.
이 요리의 키포인트는 소스. 대파와 당근 버섯 빨간고추 피망 오이 죽순 샐러리 등 갖은 야채를 잘 다진다. 열이 잘 전달되는 중국냄비나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따라 적당히 가열한 후 다져놓은 야채를 넣어 익힌다. 다진 마늘은 잠시 불을 끈 후 넣는 것이 좋다. 불이 너무 세면 자칫 마늘이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배한성씨와 평소 가까이 지내는 후배 성병숙씨와 손경란씨, 그리고 요리 사부(?) 이재희씨(왼쪽부터)
글리신과 베타인 성분에서 느껴지는 새우의 독특한 단맛에 갖가지 양념이 들어간 소스가 곁들여져 그 맛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매콤하면서도 달콤하고, 또 새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배씨의 ‘천의 소리’에 견줄 만하다.
이날 요리는 배씨의 절친한 후배이자 중견 연극배우인 성병숙(成炳淑·48)씨와 프리랜서 손경란(孫景蘭·27)씨가 도와줬다. 내일 모레면 환갑인 나이에도 이처럼 젊은 후배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것은 그가 아직도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는 증거다.
1967년 TBC(동양방송) 공채2기로 입사했으니 그의 성우 경력은 올해로 만 36년째. 이젠 지칠 법도 한데 그의 방송 일정을 보면 여전히 열혈(熱血) 청춘이다.
매일 아침 6시∼8시 KBS 제2라디오 ‘배한성 오유경의 가로수를 누비며’를 시작으로 낮 12시20분∼1시 국군방송 ‘진중휴게실’, 오후 1시30분∼4시 KBS 사회교육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녹화) 그리고 저녁 6시20분∼8시 교통방송 ‘배한성 송도순의 함께 가는 저녁길’이 이어진다. 이처럼 숨가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일주일에 한번씩 방송되는 프로그램 5개를 소화한다. 주말이면 LG, 현대 등 홈쇼핑 방송으로 이어지고 방송광고, 교육방송 테이프 제작요청도 쉼 없이 몰려든다. 가끔 짬을 내 에세이나 자동차 이야기 등 글도 기고한다.
성우에서 시작해 이제는 내레이터, DJ, MC, 쇼핑호스트, 대학 교수(서울예술대학) 등 만능엔터테이너로 변신해 있는 배한성.
몇 년 전 에세이에서 “’천의 목소리를 가진 사나이’라는 칭찬(?)보다 ‘천의 변신을 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난 오늘도 열심히 달리고 있다”고 했던 그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곳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