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최초의 지식인, 사상의 순교자 볼테르의 ‘톨레랑스’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입력2003-04-28 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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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볼테르만큼 지식인의 고유한 권위에 대한 경멸과 권력에 대한 회의를 철저히 관철한 사람은 없었다.
    • 권력에 대한 불신, 비판과 반대의 정신을 그토록 철저히 체현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에서 그는 최초의 지식인이다.
    최초의 지식인, 사상의 순교자 볼테르의 ‘톨레랑스’
    이라크전쟁으로 수많은 어린이와 시민들이 죽고 고대 문명의 유적이 많은 바그다드가 폐허로 변했다.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이라크를 폭격하는 것에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와 중국이 반대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이 곧 미-영에 영합하리라는 보도가 있으나, 이 글을 쓰는 3월 말까지는 아직 반전 측에 서 있다.

    이 전쟁의 본질은 ‘미국·영국의 이라크 석유 차지하기’라는 분석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반대로 프랑스와 독일 등은 그동안 이라크의 석유와 관련,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특히 프랑스의 반전 기조에 대한 예찬론이 터져나오고 있는 것은 기묘하다. 얘기인 즉슨, 역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프랑스라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베트남전에 대해, 그 실상은 프랑스의 오랜 식민 지배에서 비롯된 것을 미국이 물려받은 것에 불과하나, 미국은 단죄하면서도 프랑스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이처럼 우리는 프랑스에 대해 혁명, 자유, 평등, 인권, 문화, 예술(특히 미술과 문학)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한 이미지는 프랑스 대혁명과 인권선언, ‘아름다운’ 프랑스어, 인상파를 비롯한 프랑스 미술, 카뮈·사르트르의 프랑스 문학, 푸코·데리다의 현대 프랑스 사상 등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최근에는 관용을 뜻하는 톨레랑스라는 말이 유행을 타면서 프랑스의 이미지를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프랑스가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 더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를 갖고 있으며, 프랑스 사회 속의 차별, 특히 식민지에 대한 억압·차별·착취라는 측면을 철저히 무시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가 영국과 함께 제국주의의 선봉이었던 역사적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톨레랑스란 프랑스 국민 내부에서, 그것도 상부 지배계층에서 제한적으로 통용돼온 것이지, 하부 피지배계층, 특히 식민지에서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또 ‘아름다운 프랑스어’ ‘우아한 프랑스어’란 하나의 편견에 불과한 것으로, 실제로 프랑스의 여러 다양한 언어나 민중 언어를 없애고 강제로 형성된 폭압적 언어라 할 수 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전파된 프랑스인의 국어 사랑이란 것도 기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알자스 지방에 프랑스어를 강제 주입시킨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마치 일제 말기에 일본이 우리에게 일본어를 강제한 것과 마찬가지다. 여타 프랑스 미술과 문학에는 기본적으로 그런 프랑스적 국가주의, 자본주의, 체제순응주의가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반역사적이고 반현실적인 측면이 있다. 나는 그것이 프랑스 문학이나 미술, 최근에는 사상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사대주의적 문화 계수 탓이라 생각한다. 정치·경제·사회를 제대로 관찰한 사람들이 거의 부재한 채 식민주의적 문화인이나 지식인들에 의해 프랑스 문화가 소개된 탓일 것이다. 프랑스대학에서, 프랑스인 교수 밑에서, 주어진 주제로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아, 귀국 후 각 대학 교수가 되고, 언론에 프랑스 문화를 소개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다.

    최초의 지식인, 사상의 순교자 볼테르의 ‘톨레랑스’
    미국의 아랍 침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배경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기독교는 기독교인 상호간, 그리고 타종교에 대한 박해의 역사를 갖고 있다. 예수는 톨레랑스, 즉 관용을 가르쳤으나, 후예들은 그렇지 못했다. 단적인 예가 아랍을 침략하는 미국이 역사적으로 계승했다고 자부한 십자군전쟁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상호간의 불관용에 대항한 18세기 계몽사상가 볼테르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편협한 신앙을 비판하고 정신의 자유를 옹호한 볼테르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가 옹호한 관용은 그의 사후에도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 프랑스 대혁명은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고, 그것이 낳은 불관용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특히 제국주의는 범세계적 식민지 착취,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 및 핵전쟁 위협, 오늘의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연원이 닿아 있다.

    불관용은 우리들 내부에서도 뿌리 깊게 작용하고 있다. 관용이란 자신과 다른 모든 사상 및 행동에 대한 무관심·방임·소극적 인정을 넘어, 그를 적극적으로 존중하고 자유롭게 승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과연 관용의 사회라 할 수 있을까?

    관용은 무관심, 즉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인간관에 입각한 가치 상대주의라 할 수 있는 중립주의나 균일주의, 극단적 허무주의와는 다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확신의 존재들이다. 따라서 한없이 다양하며 무한히 다원적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성과 감성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무관심’이 아닌 ‘확신’을 갖고 있는 우리는 누구도 오류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우리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그를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권리를 갖는 존재로 인정해야 하며,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국제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관용을 체현하고 있는가? 특히 지성이나 사상의 차원에서 우리는 그러한가? 우리는 자기 사상만 옳다고 하는 폐쇄적 절대주의에 사로잡혀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매도하고 자기가 세운 절대적 법칙에 따라 타인을 배제하고 억압하고 있지 않은가? 인류의 수많은 비극은 바로 그로부터 끝없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도 마르크스주의도 불관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카뮈는 말했다. “볼테르는 거의 모든 것을 다 의심했다. 그가 이루어놓은 것은 아주 조금밖에 없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것이다.” 물론 나는 카뮈와 달리 볼테르가 이룬 것이 아주 조금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프랑스 문학사나 사상사에 남긴 르네상스적 업적은 그 어떤 프랑스인보다 위대하다.

    그러나 볼테르는 다음 한마디로도 우리에게 기억됨직하다. “나는 당신이 쓴 글을 혐오한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를 당신에게 보장해주기 위해 나는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최초의 지식인이라 부른다. 그는 사상의 순교자였다. 볼테르만큼 지식인의 고유한 권위에 대한 경멸과 권력에 대한 회의를 철저히 관철한 사람은 없었다. 권력에 대한 불신, 비판과 반대의 정신을 그토록 철저히 체현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에서 그는 최초의 지식인이다. 동시에 그는 명료하고 순수하며 발랄하고 자연스러운 문체로 자신의 회의를 표명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 정신의 계승자였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관용을 주장한 볼테르는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인간이다. 현대 프랑스는 18세기부터라고 한다. 프랑스의 18세기는 ‘철학자의 세기’라 불린다. 그러나 철학개론은 물론 철학사를 뒤져도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철학사 전체를 보아도 17세기 데카르트 이후 곧바로 20세기로 넘어가 베르그송부터 몇 사람이 나올 뿐이다. 18세기는 물론 19세기도 비어 있다.

    이처럼 프랑스의 철학자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철학자와 좀 다르다. 그러나 철학이란 본래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임을 아는 우리는 계몽가나 사상가, 혹은 우리 시대 말로 지식인 또는 지성인이라 부르는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이야말로 철학자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는 그 세기말의 혁명과 관련이 깊다. 철학자들이 혁명의 선구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혁명이 그렇듯 프랑스 혁명 또한 기본적으로 굶주림에서 나온 것이지 철학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물론 혁명이 진행되면서 대의명분이 필요해졌고 그쯤에서 철학이 이용됐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볼테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이 추구한 이상사회는 세기말 혁명이 추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델은 영국이었다. 이를 통해 혁명 후 프랑스에서는 영국의 민주주의를 계승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계몽주의는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었다. 18세기 이전까지 유럽은 세계를 ‘신의 것’과 ‘인간의 것’으로 나누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배를 받았다. 그것을 18세기 계몽사상은 거부한 것이다.

    우리는 그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 바로 ‘법의 정신’(1748년)을 쓴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그리고 ‘사회계약’(1762년)을 쓴 루소다. 이들은 각각 귀족, 중산계급, 장인계급 출신이었다.

    그들 중 우리는 유독 볼테르에 대해 무지하다. ‘철학서한·철학사전’ ‘캉디드’ ‘관용론’ 외에는 번역된 책도 없으며 소개된 책도 없다. 다른 두 사람의 저작이 알려진 수준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정도다. 그러나 계몽사상의 제1 대표자는 볼테르였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프랑스 계몽주의에 대한 이해는 기형적이다.

    몽테스키외는 권력분립 이론의 선구자였으나, 귀족 출신답게 강력한 귀족정치를 옹호했다. 이러한 몽테스키외를 비판한 볼테르는 당시의 국왕 체제를 전제로 자유주의를 옹호한 정치적 실용주의자였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실학자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라마다 전통, 문화, 역사 등의 차이에 따라 정치체제가다를 수 있음을 인정했다. 동시에 언론 출판의 자유를 비롯한 인권의 보편성을 믿었다. 두 사람의 차이는 그 보편성이 몽테스키외는 귀족, 볼테르는 왕에 의해 가능하다고 믿은 점이었다. 물론 지금 우리는 그런 볼테르에도 찬성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그리 중요치 않다.

    지식인·사법기자·법개혁자

    볼테르는 1694년에 태어나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기 11년 전인 1778년에 죽었다. 판사의 아들로 태어나 법을 공부한 만큼 법을 잘 알았다. 22세에 정권을 야유하는 풍자시를 써서 구속이 된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그곳의 종교적 관용, 정치체제, 언론의 자유를 배경으로 발전한 뉴턴과 로크의 학문을 공부한다. 계몽주의를 결정하는 1734년의 ‘철학서한’이 ‘영국 서간’으로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철학서한’으로 인해 다시 박해를 받게 된 그는 도피한다. 프러시아를 거쳐 제네바로 간다(철학자들은 뒤쫓아오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땅 속에 두세 개의 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1762년 칼라스 사건이 터지자 68세의 노인 볼테르는 분연히 그 사건에 뛰어든다. 그 후 82세로 죽기 몇 달 전 그는 겨우 파리로 돌아온다.

    이렇게 평생 박해를 받고 산 그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유와 정의의 옹호자로 받들어진다. 정교분리가 제도화된 후 그의 반가톨릭주의는 빛을 잃게 되나, 니체가 찬양했듯 비열한 모든 기존 가치의 전환을 모색하며 톨레랑스와 희망을 말한 그의 평생에 걸친 투쟁과 사상은 여전히 지식인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나에게 볼테르는 달리 볼테르가 아니다. ‘철학서한·철학사전’을 쓴 고유한 의미의 철학자나, ‘캉디드’를 쓴 소설가 볼테르가 아니다. 그런 르네상스인 볼테르 역시 검토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여기서의 내 관심은 아니다. 나의 볼테르는 68세에 작은 재판에 관여해 69세에 ‘관용론’을 쓰고 그 후에도 같은 노력을 멈추지 않은 사법기자, 법개혁자, 지식인 볼테르다.

    볼테르가 관여한 칼라스 재판은 19세기말 드레퓌스 재판과 같은 ‘오판 사건’이었다. 후자가 졸라와 연결되듯 전자는 볼테르와 연결된 점에서도 유사하다. 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은 68세의 아버지인 프로테스탄트 칼라스는 무죄를 주장했으나 사형을 선고받아,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형에 처해졌고, 사후에는 불 속에 던져졌다.

    당시로는 흔히 볼 수 있었던 이 사건은 볼테르에 의해 프랑스의 국가적 재판, 나아가 유럽의 세기적 재판이 되었다. 볼테르는 편지, 팜플렛, 판화까지 동원해 그 사건의 문제점을 알렸고, 마침내 재심에서 무죄를 얻어냈다. 지방도시에서 행해진 평범한 사람의 재판에 지식인이 나서 이렇듯 고군분투한 것은 이 사건이 아마도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사건이 터진 곳은 프랑스 최남단인 툴루즈의 포목 상점이었다. 툴루즈는 중세 마녀 재판을 불러일으킨 이단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1761년 10월, 칼라스의 집에서 그의 장남 마르크가 죽었다. 칼라스와 가족은 광신적 신교도로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한 장남을 독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신교도는 극단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 1685년의 퐁텐블로 칙령은 프랑스인은 모두 가톨릭이고 신교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어 1724년 국왕은 가톨릭을 유일교로 선언했다.

    최초의 지식인, 사상의 순교자 볼테르의 ‘톨레랑스’

    칼라스 사건은 15~17세기 유럽을 휩쓴 마녀 사냥, 마법사 사냥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건 당일 심야의 제1회 피고인 심문에서 피고들은 마르크는 자살했다고 말했으나, 그들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진 후 제2회 심문에서 진술은 변경됐다. 이어 장남이 이단 공식 포기 선언을 한 것을 안 아버지와 차남이 장남을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학대하는 것을 보고 듣고 알았는지에 대한 심문이 독살 시나리오에 맞춰 벌어졌다.

    또한 사건 내용을 교회에서 낭독하고 게시해 당국과 민중이 독살 시나리오를 공유하게 했다. 볼테르는 뒤에 교회가 파문을 무기 삼아 관련자들에 강제력을 행사한 것에 대해 ‘사형을 판결할 수 없는 성직자가 그에게 금지되어 있는 칼을 재판관의 손에 놓아두는 것은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라고 비판했다. 이는 지금으로 치면 무책임한 언론에 대한 비판이리라.

    그러나 칼라스의 유죄를 결정할 만한 증거나 증언은 없었다. 피고인들은 자백하지 않았고, 칼라스 집안에 다툼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럼에도 최종 판결은 칼라스 부부와 차남에 대한 보통 및 특별 고문 후 처형이었다.

    제1심 판결에 대해 피고인과 변호사는 제2심 법원에 항소했다. 피고인들의 변호사는 신교에 대한 법원의 편견을 비판하고, 제1심의 절차상 문제점을 지적했으며, 마르크의 개종 의사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살은 물리적으로 가능하므로 모살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762년 2월13일, 제2심의 검사는 칼라스 등에게 사형 및 고문을 구형했다. 이어 법원은 칼라스를 고문과 함께 2시간에 걸친 참혹한 능지처참형에 처한다고 결정했다. 칼라스는 참혹한 고문 속에서도 무죄를 주장했으나 결국 처형당했다.

    정의의 승리, 철학의 승리

    3월 하순 볼테르는 칼라스 사건을 처음 알았으나 누명을 쓴 사건이라 생각지 않았으며 당국의 판결을 믿었다. 그러나 차차 의문을 품기 시작해 4월에는 무죄를 확신하게 됐다. 그 확신은 볼테르가 칼라스 집안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관찰한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볼테르는 먼저 파리의 저명한 변호사에게 칼라스 부인을 소개하는 편지를 써서 사건을 의뢰하고, 이어 문필활동을 통해 여론을 환기했다. 그는 친구와 유력자에게 1년 사이 약 200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 중에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도 있었다.

    칼라스가(家)를 대신해 취지서나 청원문 등도 작성했다. 아울러 영국 재판제도가 특히 재판의 공개라는 점에서 뛰어나므로 칼라스 사건과 같은 불행한 결말에 이르지 않는다며 영국의 여러 판례를 소개하는 책을 출판했다. 이어 ‘관용론’을 출판했다.

    그러나 볼테르의 이같은 노력에도 칼라스 사건의 재심은 쉽지 않았다. 법원과 정부의 반대가 극심했다. 정부가 재심 청원을 수리한다 해도 원심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실 판단과 절차에 분명한 오류가 있어야 했다. 변호사측이 지적한 절차상의 흠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피고인의 체포가 문제시되었다. 피고인들은 10월13일에 연행되었으나, 체포명령은 10월15일에야 내려졌다. 당시의 형사소송법은 지금 우리 법과 같이 현행범이나 추적에 의한 체포 시에만 사후 영장의 발급이 가능했다. 따라서 칼라스 사건의 경우 현행범이냐, 추적이 있었느냐가 명백히 밝혀져야 했다.

    둘째, 범행현장에 대한 조서가 문제였다. 형사소송법에는 부상자나 사체가 발견된 상태의 조서는 현장에서 즉시 작성되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그러나 칼라스 사건의 기록은 사건 다음날 시청에서 작성되었고, 가택 검증조서도 3일 후에야 작성되었다. 그런 탓으로 중요한 증거가 상실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셋째, 사체 검증보고를 한 의사의 검진과 대질이 문제가 되었다. 형사소송법은 전문가의 증언도 증인과 같이 개별적으로 청취되고, 검진 및 대질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나, 칼라스 사건의 경우 그것이 행해지지 않아 무효였다.

    최종심인 제2심 판결에 대한 파기는 사법관계 국무회의에서 판단할 문제였다. 볼테르는 국무회의의 변호사에게 편지를 보내 파기 방법을 상의했다. 이어 여러 소송취지서가 만들어졌다. 국무회의 관계자들도 적극적으로 움직인 덕분에 파기 심리가 받아들여졌다.

    볼테르는 이를 ‘민중의 소리가 신의 소리’임을 보여준 것이라며 찬양하고 ‘지상에 정의가 있고, 인간애가 있다’고 기뻐했다. 아직 파기 여부가 결정되지도 않은 단계였지만 그는 ‘이제 소송은 형식만이 남았다’며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제2심 법원은 서류의 복사에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칼라스의 미망인에게 1500프랑을 요구했다. 게다가 법원측은 파기를 요청한 소송취지서를 압수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볼테르는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먼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복사하는 데도 200프랑이면 충분한데 그 7배가 넘는 소송비용은 과다하다고 지적하며 관련 재판관 등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송취지서의 압수에 대해서도 ‘변호사에게 변론할 권리가 없다면 프랑스에는 더 이상 권리도, 법도 없다’고 비판했다.

    그 후 약 1년이 지난 1764년 6월, 국무회의는 제1·2심 판결이 피고인과의 대질 이전에 검진이 없었다는 절차상의 흠을 들어 파기를 결정했으며 전원 일치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 완전한 승리에 볼테르는 눈물을 흘리며 ‘승리를 불러온 것은 철학이었다’고 말했다. 볼테르는 그 뒤에도 여러 오판에 관여했다. 라 바르 재판도 그 중 하나다.

    영화로 유명해진 퐁네프다리는 파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새로 지어진 다리’, 곧 ‘신교’라는 뜻에 불과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유럽의 모든 다리에는 십자가상이 있다. 1765년 파리 북쪽 아브빌의 퐁네프에 있는 십자가상에 칼로 그은 흔적이 생겼다.

    며칠 뒤 어느 교사가 미성년자인 라 바르 등이 자기 학교에 와서 6월의 성체 행렬 때에 모자를 벗지 않았고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을 자랑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라 바르 등이 석고 십자가상을 파괴하려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칼라스 사건에서 본 바와 같은 증언명령서가 여러 교회에서 읽혀졌다. 그리고 다음해, 칼라스처럼 라 바르 등은 고문을 당하고, 사형에 처해졌으며, 시신은 불태워졌다.

    볼테르의 재판 비판 활동 중 라 바르 사건은 ‘신에 대한 대역죄’라는 종교 범죄에 대한 것인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법과 도덕, 법과 종교가 준별되지 않은 구체제 형법제도 아래 종교의 신성을 범한 것은 중죄였다. 반면 앞서 본 칼라스의 경우는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으나 사안 자체가 종교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정이 이런 만큼 라 바르 사건에서 재판관이나 검사를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재심에서 무죄를 얻어내기가 그만큼 더 어렵다는 뜻이다.

    칼라스 사건은 사실인정이 문제가 된 것으로 무죄인 자를 유죄로 한 오판이었으므로 재판관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으나, 라 바르의 경우 경미한 불경행위라 할지라도 법으로 금지된 것이었으므로 재판관으로서는 그에 대한 유죄판결이 당연했고,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과연 잔혹한 신체형에 해당되는가 하는 형법 자체의 문제였다.

    또한 라 바르 사건은 당국이 계몽사상을 공격하고자 한 점에서도 심각했다. 압수된 책 중에는 볼테르의 ‘철학사전’이 있었는데, 그 책은 1766년 라 바르의 처형시에 불살라졌다. 말하자면 이 사건은 볼테르의 저술이 피고였으며, 볼테르 자신이 위협을 느낀 사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이 사건에 더욱 비판적이었고, 이를 통해 형법제도의 근본적 개혁까지 생각하게 됐다. 라 바르의 명예회복은 볼테르가 죽고 혁명이 일어난 후인 1793년에야 가능했다. 당시의 국민공회는 라 바르를 ‘미신과 무지의 희생자’라 불렀다. 그 후 라 바르는 모든 종교적 범죄의 소멸을 말하는 경우에 항상 인용되는 자유사상의 상징이 되었다.

    형사법 개혁운동의 선구자

    18세기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볼테르는 문학이나 철학 외에, 라 바르 사건을 경험한 1766년 후 삶을 마감하기까지 10여 년간 계속된 재판비판 및 형법개혁 투쟁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 이는 그 후 형사법 개혁운동의 모델이 됐다.

    볼테르의 형사법사상을 보여주는 최초의 책은 1766년에 출판된 ‘한 지방변호사에 의한 ‘범죄와 형벌’이라는 책에 관한 주석’이다. 이어 죽기 1년 전인 1777년에 ‘정의와 인간애의 상’을 출판했다. 전자는 70대, 후자는 80대에 쓰인 책이었다.

    볼테르는 무고한 칼라스가 사형에 처해지고, 라 바르와 같이 3개월의 구금형이면 충분한 자가 극형에 처해진 부정의는 폭정과 광신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정의의 차원에서 범죄와 형벌의 균형을 주장하고, 인간애의 차원에서 잔혹한 형벌 부과를 비판하며, 유용성의 차원에서 무익한 형벌의 전환을 촉구했다. 극도로 불균형한 형벌의 부과는 범죄에 대한 공포심을 감소시키고 법 자체를 파괴한다고 경고했다.

    또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의 법칙에 대해서도 유용성과 인간애의 차원에서 비판했으며, 신분에 따른 형벌의 차별도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최종 목표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를 주장하고, 형벌을 잔혹하게 만들지 않고 범죄를 줄이는 방법을 추구했다.

    특히 종교적 범죄에 대해 볼테르는 그것이 범죄가 될 수 없다고 한 점에서 당시 법률가들과 대립했다. 마녀재판에 대해서도 사법이 10만명 이상을 살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볼테르는 자신이 관여한 라 바르 사건에 대해서도, 라 바르는 종교 행렬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에 대한 최대의 불경죄에 처해졌으나, 증거라고는 술자리에서 옛날 유행가를 불렀다는 것뿐이었다고 성토했다.

    여기서 볼테르는 묻는다. 도대체 불경죄의 요건은 무엇인가? 신을 죽이는 것인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인가? 그러나 라 바르는 그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몽테스키외의 ‘신을 존경해야 하나, 그렇다고 신을 위해 보복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인용했다. 볼테르는 그밖에도, 종교적 문제를 재판으로 해결하려는 것 자체를 비판하며, 법과 종교를 구별하고, 종교적으로는 관용, 법적으로는 탈주술화와 형벌 완화를 주장했다.

    볼테르는 또한 당시에 교회법의 영향으로 중죄에 처해진 중혼, 간통, 이교도간의 결혼, 근친상간, 남색, 자살 등에 대해서도 그 법적 규제를 상대화하고자 했다. 즉 그는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의무와 지역에 따라 상이한 특수적 의무를 구별하여 혼인규제를 포함한 종교규제는 후자라 보고, 후자에 대한 엄벌은 불합리하며 그보다는 도덕으로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간통에 대해 그것의 금지는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를 재산으로 생각한 탓이었으나, 이제는 시대가 변해 처벌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에는 중대한 범죄였던 자살에 대해서도 십계의 ‘죽이지 말라’에 자살이 포함되었고, 사람은 국가의 소유라는 사고에서 비롯되었으나, 성서가 자살할 지경에 이른 사람의 죽음을 금지한 것은 아니라고 비판했다.

    볼테르는 그런 종교적 범죄의 처벌을 요구하는 법률가를 불신해 ‘법의 정신이 왜곡되어 있는가 아닌가를 선언하는 것은 법률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위임된다. 국민 전체가 죄가 없다고 보고 존경하는 사람을 한줌의 인간들이 유죄로 판단하여 사형에 처하는 것은 비극적인 모순’이라고 했다. 또한 법이 정하지 않은 형을 부과한 재판관은 모두 처벌되어야 한다 하여 전횡적이고 자의적인 형벌 부과에 반대했으며, ‘법이 처벌하는 것이지 인간이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법은 국민이 제정하므로 법률가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볼테르가 잔혹한 형벌 부과 비판의 기준으로 삼은 ‘인간애’란 1770년대부터 자주 사용되었고, 특히 프랑스 대혁명기에는 의회 연설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말이었다. 볼테르는 인간애의 차원에서 특히 능지처참형을 폭군정치의 산물로 비판하고 ‘신체형은 단순한 죽음을 넘어서는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혁명 후 제정된 1791년의 형법전에 그대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생명의 자유라는 법리로부터 사형의 폐지를 주장한 베카리아와 달리 볼테르는 절대적인 사형폐지론자는 아니었다. 이러한 점은 루소가 사회계약의 차원에서 사형을 정당화한 것과 같다.

    비밀 심문과 배심원제

    볼테르는 1670년의 형사왕령이 ‘오직 피고인을 파멸시키려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죄인에게는 두렵고, 죄 없는 자에게는 유리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비판했다. 그는 ‘로마에서는 증인이 공개리에 피고인의 면전에서 질문을 받고, 피고인은 증인에 답할 수 있었으며, 거꾸로 스스로 질문할 수도, 또 변호사를 세울 수도 있었다.

    이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모든 것이 비밀이다. 즉 재판관 한 사람이 서기와 함께 증인을 한 사람씩 심문한다’며 이는 라틴어를 잘못 읽은 탓이라고 했다. 곧 증인을 ‘비밀’로 심문한다고 하는 ‘비밀’이란 사실 재판관실을 뜻한다는 것이다.

    볼테르는 이러한 비공개 심리절차는 피고인을 파멸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증인들은 보통 하층 민중이고, 재판관은 그들과 밀폐되어 자신이 바라는 어떤 것도 말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변경하면 위증죄로 처벌받으므로 처음의 위증을 끝까지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재판관은 무죄인 자에게 언제나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영국의 배심제를 찬양했다. 그곳의 배심원은 피고인의 변호사와 같은 것이었으나, 어떤 피고인도 2명의 변호사를 채용할 수 있게 했다. 이는 배심원은 사실을 판단하는 재판관이고, 변호사는 법해석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프랑스의 형사법전은 시민을 파멸시키고자 하나, 영국의 형사법전은 시민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볼테르는 칼라스 등이 배심원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면 상황 증거만으로 유죄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일 신분에 의해 재판 받을 권리는 그리스, 로마로부터 영국의 배심제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를 지니며, 재판에 참여하지 않고 재판만 받는다면 노예일 뿐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금전이 문제되는 민사에서는 변호사가 인정되는데, 생명이 문제되는 형사에서 변호사가 인정되지 않는 점을 비판했다. 변호사가 없기 때문에 피고인은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석재판은 피고인에게 지극히 불리하다. 도망쳤다는 사실만으로 무죄인 자가 유죄 판결을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사에서는 원고의 주장이 입증되어야 하나, 형사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고문이었다. 볼테르는 고문은 피고인에게 진실을 무리하게 이끌어내려는 소송절차이자 투옥의 혐의를 부과하기 위한 하나의 형벌이라는 점에서 사형 자체보다 극심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볼테르는 ‘로마에서는 네로와 같은 황제도 단 한 사람의 시민을 고문한 적이 없고, 영국·러시아·독일에서도 이미 고문이 폐지되었으나 범죄는 늘지 않았는데, 왜 프랑스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가’ 하고 개탄했다.

    또한 볼테르는 판결문에 판결의 이유가 없는 점을 비판하고, 형 집행 전에 판결문이 공시되어야 한다고 촉구했으며, 재심의 비용이 높아 이를 청구하려 해도 가족이 빈곤에 빠진다는 점 등을 비판했다.

    볼테르의 형사법 개혁 사상은 그가 죽은 1년 뒤인 1779년부터 근본적인 형법개혁을 요구하고, 형사절차에서는 소송의 공개, 피고인에 대한 선서 강요의 금지, 고문의 폐지, 변호의 완전한 자유, 자유 심증의 체계, 배심재판 등을 요구하는 여러 저술들로 이어졌다.

    형법개혁에 있어 또 하나의 중심은 변호사들이 작성하는 소송취지서였다. 이는 형사재판에서 변호가 인정되지 않던 당시 현실에서 중요한 피고인 변호 자료였다. 그것은 1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신문이 보통 2000부 정도 팔리는 시절이었으니 참으로 대단한 인기였다 하겠다. 여성들도 소설 대신 소송취지서를 읽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변호사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크게 변했다. 작가와 법률가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피가로의 결혼’의 작가로 유명한 보마르셰도 베스트셀러가 된 몇 편의 소송취지서를 썼다.

    이러한 노력 끝에 형사법 개혁은 1780년의 감옥 개혁과 사전 고문의 폐지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근본적 개혁은 역시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배심제의 도입이었다. 이는 구체제의 규문주의형 형사소송과의 결정적 단절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의는 권력 아닌 법에서 비롯돼야

    배심제의 도입은 필연적으로 자유심증주의를 채용하게 만들었다. 당사자가 증언 및 증거, 그를 둘러싼 토론을 직접 배심원에게 제시하고(당사자주의, 서류에 의한 증거 배제=직접주의=구두변론주의), 그 인상으로부터 배심원이 자유롭게 심증을 형성하는 것(자유심증주의)을 요구하는 것이 곧 배심제이기 때문이다.

    구체제의 정의는 ‘국왕’을 비롯한 복잡한 여러 권위에서 비롯되었으나, 대혁명 후의 정의는 오직 ‘법’에서 비롯됐다. 전자의 경우 앞서 보았듯 죄형은 자의적인 응보형이고, 종교적 범죄는 물론 자살도 처벌되었으나, 대혁명 후에는 죄형법정의 교육형으로 바뀌었다. 종교적 범죄와 자살에 대한 처벌은 금지됐다. 1789년의 인권선언은 죄형법정주의를 선언하고, 1791년에는 사면, 신분에 의한 상이한 형벌, 종신형을 폐지했다. 초안에는 사형 폐지도 들어 있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사법제도 전반의 개혁은 1790년에 행해졌다. 즉 종래의 각 재판기구를 지역적으로 평등하게 설치하는 것으로 개혁하고, 파기법원이 설치되었다. 재판관의 매관제를 철폐하고, 모든 재판관은 원칙적으로 공선하며, 중죄법원에도 배심제가 도입됐다. 또한 변호사회가 폐지되었으며, 변호 업무가 자유화되었다. 이는 앞서도 말했듯 볼테르가 비판한 ‘법전문가주의’가 ‘법일반인주의’로 대체되었음을 뜻한다. 1793년, 반혁명 범죄를 재판하는 단심의 혁명법원이 설치되어 사법의 정치화가 가속화되었다.

    그후 나폴레옹이 집권하고 제정한 1800년 법원구성법이야말로 현재 프랑스 사법제도의 기본을 형성한 것이었다. 그에 의해 항소법원이 신설되고, 재판관 선거제가 임명제(치안판사는 공선)로 바뀌었다. 그리고 1804년 민법전이 성립되었고, 법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변호사회가 부활되었다는 점에서 ‘현대법’의 출발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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