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원칙 속에 스스로를 유배한 ‘고독한 남자’

‘이상한’ 정치인, 섬 같은 국회의원 조순형

  • 글 : 이나리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3-04-25 10: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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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짜 남자는 힘센 자가 아니다. 순정을 지키는 자, 오래 견딜 줄 아는 자, 위기 앞에 정직한 자다.
    • 조순형은 진짜 남자다.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했고, 소신껏 살기 위해 외로움을 자청했다. ‘정치력’이 부족해 실세가 되지 못한 그는 대신 신뢰를 얻었다. 국민이 밥 한 그릇 사고픈 정직한 국회의원이 됐다.
    원칙 속에 스스로를 유배한 ‘고독한 남자’
    여의도의 4월은 꽃 반 사람 반이다. 1년 볼 꽃을 하루에 다 봐버리겠다는 듯, 강둑 메운 사람들의 표정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비장하게 사는 데는 이골이 난 우리 아닌가. 꽃놀이패에 휩쓸려 가다 보니, 그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비장한’ 곳, 국회가 코앞이다.

    봄 냄새에 숨 한번 깊이 담근 후 실내로 들어선다. 국회도서관. 5층 의원열람실은 한가하기가 밥 때 지난 청요리집 같다. 안쪽에서 노신사 한 명이 느릿느릿 걸어나온다. 조순형(68·민주당) 의원이다.

    약속시간을 한참 어긴 주제라 안 그래도 미안한데 인사하는 얼굴에 웃음기가 없다. ‘미스터 쓴소리’ ‘여당 속의 야당’이라는 평을 하도 많이 들어온 터라 그저 그런가보다 한다. 꼬장꼬장한 동네 어른치고 웃음 많고 말 많은 이 없지 않은가.

    자리에 앉자 첫 마디가 “나 같은 사람을 뭘 보러 오셨어요”다. 그런데 이때 얼굴에 슬금 번지는 미소가 뜻밖이다. 계면쩍은 듯 뾰로통한 듯, 낯선 손님 앞에 선 아이가 엄마 치마꼬리 잡고 늘어지며 웃는 바로 그 웃음이다. 웅얼웅얼 낮은 목소리에는 서울 토박이 특유의 ‘예스런 정중함’이 묻어 있다. 그러고 보니 얼굴 대한 몇 분 동안 한번도 눈을 맞추지 못했다. 무뚝뚝한 시선은 탁자 위로, 창문 밖으로, 마주잡은 두 손 위로 하릴없이 허둥거린다. 소파에 푹 묻어 앉지도 않는다. 딸뻘이나 될까 한 사람 앞에서, 지금 이 노신사 쑥스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선량의 사표인가 외곬의 별종인가



    “저는 뭐 한 일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고, 그저 보통 사람이에요. 보좌관이 어떻게 약속을 잡았나본데,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안 하고 싶어요. 전 정말 보여드릴 게 없어요.”

    대안이 없다 했더니 “허… 참…” 하며 난감해한다. 헐뜯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허 참, 이상한 정치인이다.

    이 ‘이상한’ 정치인은 그러나 벌써 5선을 자랑하는 관록의 국회의원이다. 유석 조병옥 박사를 아버지로, 조윤형 전 국회부의장(작고)을 형으로 둔 ‘정치명문’의 후예다. 초선의원 시절부터 ‘대쪽’ ‘영원한 야당’ 소리를 들어온, 그래서 여야를 막론하고 초·재선의원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선배 정치인 중 하나다. 그 해 가장 모범적 의정활동을 펼친 의원에 수여하는 ‘백봉신사상’을 1회(1999년)부터 4회 연속 수상키도 했다(3회는 고사). 시민단체가 뽑은 ‘의정활동 1등 의원’, ‘국정감사 최우수의원’으로 선정된 것만 무려 7차례다.

    그러나 한편 그는 외로운 정객이다. 같은 야당이라도 험한 길로만 돌아온 덕분에 출마할 때마다 당 이름이 달랐다. 어렵게 싸워 이기고도 진짜 힘 있고 번드르르한 직책은 거의 맡지 못했다. 당 최고위원이니 원내총무니, 선출직에도 몇 번 도전해봤지만 다 실패했다. 평소 그를 존경한다던 젊은 의원들도 정작 표 대결이 시작되면 그를 외면했다. 역시 너무 ‘이상한’ 국회의원이어서일 게다. 그는 골프도, 술도, 청탁도, 줄서기도, 지구당 관리도 잘 안 한다. 돈도 없고 계파도 없고 말주변도 없고 친화력도 별로 없다. 이래서야 그 치열한 총선에서 5차례나 승리했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273명 중 섬처럼 외떨어져 있는 별난 중진(重鎭) 조순형. 그는 ‘진정한 정치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우리 시대 선량(選良)의 사표인가, 아니면 현실정치에 적응 못한 외곬의 온실 속 이상주의자인가.

    ■ 첫 번째 날

    조의원은 우익 독립운동가이자 1960년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낸 유석 조병옥 선생(1894~1960)의 3남2녀 중 막내다. 조부는 유관순 열사와 함께 아우내장터 만세사건을 주도한 조인원씨다.

    유석의 고향은 충남 천안시 병천면이지만 조의원은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즈음부터 집안 살림이 극도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부부가 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유석의 반일노선 때문이었다.

    “선친께서는 두 번에 걸쳐 5년간 옥살이를 하셨어요. 고생이 없을 수 없었겠죠.”

    설명은 담백하기만 하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느냐고 물어도, 그저 “자녀를 위해 희생을 많이 하셨다”는 정도로 입을 닫고 만다.

    유석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인텔리였다. 숭실전문·배재전문 등에서 수학한 후 도미(渡美), 콜롬비아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조의원의 어머니 노정면 여사(작고)도 이때 같이 유학생활을 했다. ‘부부란 비슷해야 한다’는 미래의 시아버지와 정혼자의 강력한 지원 덕분이었다. 노여사의 학비는 양가가 반씩 부담했다. 4년 후 노여사가 펜실베이니아주 드류대학을 졸업한 후에야 둘은 혼례식을 치렀다.

    ―가장 어렸을 때 기억이 뭐지요.

    “다섯 살 땐지 여섯 살 땐지, 어머니 손잡고 어딜 갔더니 용수 쓴 사람들이 주욱 지나가고 있더군요. 당시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선친께서 재판받으러 가는 길이었대요. 어머니께서 절 데리고 방청을 가신 거죠.”

    ―철들기 전 선친이 특별한 분이란 걸 알았나요.

    “뭐 하여간 독특했죠. 남다른 데가 있는 아버지라고는 생각했어요. 일정한 직업도 없고, 출입도 들쭉날쭉하고.”

    ―무슨 특별한 교육 지침을 갖고 계셨을 법도 한데요.

    “의식 교육 같은 건 거의 하지 않으셨어요.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도 있고 하니 머지 않아 해방이 되리라는 걸 짐작은 하셨겠죠. 창씨 개명을 안 했는데 그 때문에 형제 모두 학교에서 곤욕을 많이 치렀어요. 큰형님은 징병 때문에 쫓겨다니고, 큰누님은 여학교(경기고녀)를 졸업하고도 소학교 선생 자리 하나 못 얻었지요.”

    ―어머니 고생이 크셨겠네요.

    “어떻게든 가정을 유지하려 애를 많이 쓰셨어요. 나중에는 집까지 차압당해 안국동인가 어디 여관 방 하나를 빌어 살았지요. 모친께서 그곳 상 봐주는 일을 맡아 의식주를 해결했어요.”

    급기야는 식량을 좇아 고향 병천으로까지 밀려갔는데,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이 됐다. 조의원이 열살 때였다. 서울 돈암동 네거리 전차 종점에 자그마한 집을 구했다. 부친인 유석은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돈암초등학교를 거쳐 서울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시절 꿈이 뭐였나요.

    “글쎄…, 어머니께서는 의사가 되라 하셨어요. 존경받으며 안정된 직업이라고요. 또 그때 노구치 히데요라는 일본 의사의 전기를 읽었는데 상당한 감동을 받았지요.”

    ―글 솜씨가 좋은 편인가요.

    “읽는 걸 좋아하고 좋은 문장 외는 것도 즐기는데 문장력은 없는 것 같아요. 정치라는 게 결국 명확한 의사 표시와 설득을 제한된 시간 안에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달린 건데, 전 말과 글 양쪽에 다 재주가 없어요.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 사실 노력도 많이 하거든요. 뭐든 제 이름으로 나가는 건 부족한 솜씨나마 직접 쓰고 발표하는 연습도 좀 하고요.”

    ―국회의원이면 수필집이나 자서전 한 권쯤은 갖고 있게 마련인데 조의원은 없더군요.

    “네. 문장력이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 제 인생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게 못 되거든요.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거지요.”

    솔직히 말해 자서전, 수필집을 정말 제 손으로 쓰고 다듬어 내는 국회의원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문장력이 없어” 책을 못 냈단다.

    ―종교가 있습니까.

    “어디 서류에 (종교가) 뭔지 쓰라 그러면 무교(無敎)라 하지만 무신론자는 아니에요. 어떤 신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은 믿어요.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태들이 많잖아요. 그러니 절대자에 의지할 수밖에요.”

    ―그 신이란 기독교적 하나님인가요.

    “뭐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고…. 하지만 교회나 성당에 나가지는 않아요. 얽매이는 것이 싫고 해서요.”

    ―기도는 자주 하나요.

    “그냥… 간혹 합정동 다리 건너 있는 절두산 성지에 가지요.”

    ―가서 뭘 하세요.

    “벤치에 가만 앉아 있다 와요. 맘이 편해지고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그냥 참 편해요.”

    ―어찌 보면 참 옛날 분 같기도 하고요. 요즘 개혁이나 변화에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기성세대가 참 많은데, 조의원은 어떻습니까.

    “시대가 변하는 거야 당연하지요. 살던 대로 살면 그뿐 두려움 같은 건 없어요. 개혁이란 게 별거 아니거든요. 정해진 대로 행동하고 실천하면 돼요. 뭐든 법이나 제도에 따르지 않고 관행에 의존하는 것이 문제지요. 변화나 개혁을 두려워하는 것은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지, 전 무슨 기득권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요.”

    마음을 당기는 이 수줍음

    ―국회의원이 기득권이 없다 하면…, 어쨌든 국회의원이라 좋은 점도 제법 있지 않나요.

    “말하고 싶은 걸 말할 수 있고, 제대로 말하면 언론에서 보도도 해주고, 뭐 그런 거지요. 하지만 제약도 많아요. 남들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들을 공인이라 못 하는 것도 있거든요. 어디 놀러 다니고 그러는 거.”

    ―성당 안 다니는 것도 비슷한 차원인가요.

    “그런 지도 모르지요.”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눈 안 맞추고, 대답 어눌하고, 두 손 꼭 틀어쥐고, 쑥스러운 듯 미소짓는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 이래서야 속 얘기를 끄집어내기가 쉽지 않다. 말하기를 꺼리는 이에게 말을 강요하다니, 괜히 미안해진다. 다시 찾아뵈마 인사하고 일어서려는데, 문득 무뚝뚝함 속 나이를 잊은 그 수줍음이 마음을 당긴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의원님, 귀여운 면이 있으시네요.”

    순간 얼굴 발개진 노신사, 소파 밑으로라도 들어갈 모양새다. 너무 솔직했나 싶어 또 한번 미안해진다.

    “그런데 정말, 왜 국회의원이 되셨어요? 너무 안 어울려요.”

    예의 느릿한 걸음을 옮기던 그가 귀밑을 만지작거리며 답한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전 아직도 제가 왜 정치인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안 맞는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헤어지면서도 그는 예의 당부를 잊지 않는다.

    “정말 할 말이 없어요. 저말고 다른 훌륭한 분을 찾아보세요.”

    아니다. 그에게 들을 말이 많다. 국회의원은 무엇으로 사는가.

    ■ 두 번째 날

    의원회관 5층에 자리한 조의원의 사무실은 유난히 좁아 뵌다. 탁자, 책상은 물론 바닥 여기저기며 난방기 위에까지 온갖 책, 서류들이 그득그득 쌓여 있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도 7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해 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사무엘 울만 詩 ‘청춘’ 中)

    창문 앞에 놓인 액자에 담긴 시다. 탁자 유리 밑에는 또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신약성서 마태복음 7장 13, 14절 말씀이다.

    다른 의원들 방에서 익히 보아온 세련된 가구, 상패나 트로피, 값비싼 족자며 화려한 장식품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눈에 띄는 건 앞의 두 글귀와 유석 내외의 옛 사진 몇 장이다.

    ―책을 많이 읽는가 봅니다.

    “그렇지도 않아요. (읽는) 속도가 느려서요. 마누라가 만날 흉보는 걸요.”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새 살펴보니, 작은 탁자 한구석에 서울대 규장각 정옥자 관장의 신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현암사)가 놓여 있다. 옆에 펼쳐진 노트에는 둥글둥글한 펜글씨로 책의 주요 내용이 꼼꼼히 정리돼 있다. ‘이런 공부까지 하나’ 싶어 요리조리 들쳐보다, 행여 들킬세라 얼른 돌아와 앉는다.

    다시 얘기를 학창시절로 돌려본다. 조의원은 1954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법대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국어, 영어 같은 문과 계열 과목을 좋아해 의사의 꿈은 차츰 잊혀져갔죠. 대신 변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아버님이 평소 ‘변호사가 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거든요.”

    하지만 정작 대학생이 된 다음에는 공부와 한참 멀어졌다.

    “서울대 법대다 하고 들어가 보니 별 것도 없고 무슨 걱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고등고시 준비한다고 난린데 저는 뭐 관심도 없고 자신도 없었고요.”

    한마디로 고시에 뜻이 없었다는 뜻일 게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는 일이 싫었던 것은 아닐까.

    “그랬지요. 그리고 또 경쟁이 싫었어요. 대학 가서 해방감을 확 느낀 데다 고시 공부가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더라구요. 방황도 좀 했겠지요.”

    ―대학교 3학년 초에 미국 유학을 떠났군요.

    “네, 군대 갔다 와서요. 그때 작은형이 거기서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왜 갔냐…, 뭐 학교에 재미를 못 붙였나보지요.”

    “후원회, 미안해서 못 열겠어요.”

    워싱턴 조지타운대에서 외교학을 전공하던 그가 귀국한 것은 도미 2년째인 1958년. 아버지 유석의 대통령선거 준비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냥 따라다니고 심부름 하고 그랬어요. (선친의) 신변 안전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어요. 항상 테러 위험에 노출돼 있었으니까요. 집안에서도 곁에 꼭 붙어 있으려 노력했지요. “

    당시 유석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도 터지기 일보직전이어서 이제야말로 희망을 걸어볼 만 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그런데 유석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1960년 1월 지병 치료차 미국을 방문한 유석은 같은 해 2월15일 갑작스레 운명하고 만다.

    유석의 죽음은 그 가족은 물론 정권 교체를 열망한 국민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이어 3·15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민심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4·19 혁명이 터졌고, 다시 1년이 더 지나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격변의 시기였다. 그 사이 의정부 보궐선거에 나선 유석의 차남 조윤형(당시 27세)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부친의 막강한 후광 덕분이었다. 조의원은 서울대 법대에 복학했다. 여전히 고시에는 뜻이 없었다.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나요.

    “네. 형 하나 나갔으면 됐지 동생까지 그럴 필요 있나요. 또 뭐 후광 업고 나간다는 게 내키지 않기도 하고.”

    ―정치 자체가 싫었던 건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전 정치가 무슨 특별한 사람, 선택된 사람이 하는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건전한 사회인으로 각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다 기회가 오면 하고 또 그러는 거지. 어려서부터 (부친이 정치하는 걸) 봤으니 관심도 좀 있는 편이었구요. 그런데 영 자신이 없었어요. 걱정이 돼서 말예요.”

    ―뭐가 그리 걱정됐나요.

    “돈 마련해 쓰는 거요. 사실 지금도 그렇지 뭐, 더하면 더했지…. 그 돈을 마련하려면 자기 신념도 굽히고 원칙 안 맞는 타협도 하고, 그래야 할 것 같거든요. 그런 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들었어요. 또 한 가지가, 부탁을 잘 해야 되겠더라구. 아쉬운 소리도 재주껏 잘 해야 하고. 전 근데 뭘 부탁하고 그러는 게 참 불편하고 잘 안 돼요. 사실 그런 것도 좀 할 줄 알아야 되는데. 그걸 잘 못해 주변에 인기가 없는 것 같아요. 이제와서야 뭐 친구고 친척이고 지역구고 많이들 이해해주는 것 같지만. 나이 든 지금도 이러니 그때야 뭐….”

    그는 지금도 ‘돈 안 드는 선거’로 유명한 ‘돈 없는 국회의원’이다. 그동안 치른 여섯 차례의 총선은 물론 각종 선출직 경선에서도 법정 선거비 이상을 지출해본 적이 없다. 후원회도 두 번밖에 열지 않았다. 1996년 15대 총선 직전, 그리고 1999년 16대 총선 직전이다. 각각 1억2000만원, 1억5758만원이 모였다. 여야가 뒤바뀌었는데도 동료 의원들과는 달리 모금액에 큰 차이가 없었다.

    ―줘봤자 소용없다는 생각들을 하나봐요.

    “뭐 그런 것보다…. 사실 미안해요. 미안해서 후원회도 못 열겠어요.”

    “집단이익 앞에선 여야도 없는 국회”

    그가 이렇듯 빠듯한 돈으로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는 건 지역 조직에 큰돈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당 사무실의 경우 유급 당직자 두 명, 기간 조직도 동책(10개동)까지만 둔다. 통책, 반책까지 두는 지구당이 허다한 세상 아닌가. 남들은 200번, 300번씩 하는 선거철 의정보고회도 2회 정도로 끝낸다. 지역구 관리에 소홀하고 지역 민원 안 챙기기로도 유명하다. 그럼에도 조의원은 수도권에 지역구를 가진 민주당 의원 중 ‘출마=당선’으로 통하는 거의 유일한 중진이다. 그는 평소 “국회의원은 지역 대표인 동시에 전국민 대표다, 일부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지역 민원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라는 뜻을 밝혀왔다.

    ―사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 문제가 많죠.

    “국회라는 곳도 보통 사회예요. 특별히 도덕적일 것도, 특별히 나쁠 것도 없지요. 문제는 관행이고 특권의식이죠. 여야간 꼭 한 하늘을 못 이고 살 것처럼 그렇게 대립하다가도,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으면 또 그렇게 딱딱 단합이 잘 될 수가 없어요.

    우리 국회의 특징이 자정능력이 없는 겁니다. 누가 국회의원을 건드리겠어요. 해서 윤리위원회를 구성해 스스로 규제하게 돼 있는데 이게 허수아비예요. 지금껏 의원 제명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전혀 없다구요. 15~16대에만 윤리위에 80건 정도가 제소됐습니다. 이 중 가결된 건 딱 한 건이에요.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니 여야 할 것 없이 담합을 하는 거죠. 일체 서로의 치부를 들추지 않아요.”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요.

    “우리 사회가 인정과 의리로 똘똘 뭉친 곳이거든요. 거기 동참하지 않으면 비난받고 따돌림을 당하기 쉽죠. 거기 지연-학연-혈연까지 얽혀 있으니…. 자기 집단 문제에는 굉장히 관대한데 그게 특히 심한 게 국회예요. 아니할 말로, 뇌물 문제가 나와도 제재가 이뤄지지 않아요. 14~16대 국회에서 여러 차례 체포동의안 처리가 있었지만 단 한 명도 구속하지 못했어요. 아, 불구속 기소는 한 명 있어요. 그건 또 어떻게 했대.

    얼마 전 신문을 보니 도쿄지검 특수부에서 자민당 모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대요. 법원, 총리를 통해 체포동의안을 제출했는데 그 다음날 가결됐다는 겁니다, 그 다음날! 야, 이렇구나…!”

    대화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조의원의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간다. 그만큼 맺히고 답답한 사연이 많은 까닭이리라.

    ―1964년에야 대학을 졸업했네요. 그리고 뭘 했죠?

    “뭐 그냥저냥 하다 1966년 삼성물산에 입사했어요. 사회인으로선 늦은 출발이었죠.”

    대학 졸업 후 삼성 입사 전, 그는 서울대 동기들과 보한실업이라는 작은 무역회사를 차렸다. 그러나 사업은 잘 되지 않았다. 서른 넘은 나이에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1968년 연극배우 김금지(61·서일전문대 겸임교수)씨와 결혼하면서 비로소 그도 안정을 찾아갔다.

    5년 열애…속으로 뜨거운 남자

    사실 6~7년 전까지만 해도 조의원은 일반인들에게 ‘김금지의 남편’으로 더 유명했다. 2001년 연극배우협회장을 지내기도 한 김씨는 솔직하고 감각적인 글 솜씨로 정평이 난 수필가이기도 하다. 김씨는 그동안 모두 5권의 에세이집을 냈다. 아무래도 남편인 조의원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유난히 말을 아끼는 조의원의 ‘행간’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 책들을 참고하는 것이 유용하다. 그 중 백미는 역시 5년여에 걸친 두 사람의 연애담이다.

    1963년 무렵, 사진찍기가 취미이던 조의원은 후배인 작가 주명덕씨의 작업실에 들렀다 인화액 위로 떠오르는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여성지 ‘여원’의 포토스토리 주인공으로 출연한 ‘연극계의 신성’ 김금지씨였다. 한눈에 반한 그는 후배를 졸라 김씨와 첫 대면을 했다. 이후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잦은 만남을 가졌다. 그 중 두 장의 사진이 동아사진콘테스트에서 입선작으로 뽑히기도 했다. 두 사람은 다른 청춘남녀들처럼 때로는 싸우고 그러다 더 뜨거워지며 5년을 보냈다. 남자는 여자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고, 여자가 큰 상이라도 받으면 가방 들고 코트 들어주며 뒷시중도 마다 않았다.

    김씨의 글 속에 나타난 조의원은 우직하고 무뚝뚝하지만, 때로는 아이처럼 천진하고, 속에서는 불이 타고 있는 남자다. 자신의 방을 온통 사랑하는 여인의 사진으로 채우고, 짐짓 다른 이를 좋아한다고 말한 김씨 앞에서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하고 절규하며, 그러다 정말 연인이 떠날 것 같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고 마는, 영화 속 주인공이라 해도 손색 없을 열정적 사랑을 했다.

    조의원에게 그때 얘기를 꺼내놓으니 쑥스러워 어쩔 줄 모른다.

    “아이, 그 책이 제가 의원 출마하기 전에 나온 거라 좀 과장이 있을 거예요.”

    ―오히려 그래서 더 솔직하겠죠. 원래 꽃 사들고 다니고 하는 걸 좋아하나요.

    “아녜요. 그런 쪽에는 취미가 없어요. 성격도 내성적이고. 그런데 또 그 때는 그게 좋더라구요.”

    김씨는 연극활동 외에 수제구두점 운영으로 남편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해 왔다. 그러나 때 맞춰 수필집을 내는 것 외에는 선거운동에 직접 나선 적이 한번도 없다 한다. 지구당 사무실도 4년에 한번, 선거 때나 돼야 방문할 정도다. 그렇더라도 조의원에게 아내 김씨는 최상의 상담역이요 영원한 정치 동료다. 밖에서는 그토록 말이 없는 조의원이지만 아내와는 이런저런 주제를 놓고 밤늦게까지 수다를 떠는 일이 잦다고 한다.

    ―대한민국 대표 애처가시군요.

    “어이 그거야, 아내가 워낙 밝고 낙천적이거든요. 솔직담백하고 친화력도 좋고. 저랑 많이 달라요. 그래서 저보고 만날, 애들은 자기 성격을 닮았어야 하는데 절 닮았다고 뭐라 그러잖아요.”

    김씨는 1996년 발표한 글에서 남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편은 네 번의 선거에서 한 번도 법정선거요금을 넘긴 적이 없고, 선거법을 지켰고, 의정활동에서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물론 부정한 돈을 받은 적도 없고, 계보에 속하지도 않고 계보를 만든 적도 없다. 가정에 충실하고, 인권을 존중하며, 남녀차별의식이 없고, 잘난 척 안 한다. 동물을 사랑하고 특히 개를 사랑하며, 유적탐사를 좋아하고, 다산 정약용과 정암 조광조에 심취돼 있고, TV드라마는 ‘포청천’을 즐겨 본다. 사극을 좋아해서 아무리 유명해도 사극에 안 나오는 이는 잘 모르고, 덜 유명해도 사극에 나오면 이름을 안다.’

    “그 틈에 꼭 네가 끼여야 되니?”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전화통화에서 김씨가 한 말이 생각난다.

    “우리 아빠는 소년 같은 사람이에요. 웃기 좋아하고 단순하고, 아기 같은 사람이에요. 잔머리 굴릴 줄도 모르고 자기 식대로 상식에 준해 살아왔어요. 돈 안 쓰고, 사람 안 사귀고, 그저 월급쟁이처럼, 아침 9시에 나가 저녁 7시에 들어오고, 기자한테 커피 한잔 안 사고, 그렇게 20년 넘는 세월을 자기 패턴 그대로 지켜왔어요. 그저 저를 양귀비로 알고, 한결같이 사랑해주면서요.”

    조의원은 1966년부터 12년간 삼성물산에 근무했다. 주로 일본을 드나들며 수출입 업무를 담당했다.

    김금지씨의 첫 수필집 ‘사랑의 순례에 나선 여자’(1979)에는 당시의 생활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이 ‘아파트 분양 사건’이다. 작은 구둣가게를 힘들게 꾸려가던 김씨가 한순간 아파트 분양권에 관심을 갖게 된 것. 이웃인 애희엄마가 선착순 분양이 있다는 소식을 알려오고, 두 사람은 그 근처에 있는 애희엄마 언니 아파트에서 밤을 새기로 한다. 새벽 일찍 줄을 서기 위해서였다. 시어머니에게만 살짝 귀띔하고 집을 빠져나온 김씨는, 그러나 자정이 가까울수록 불안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집으로 전화를 걸고 만다.

    “뭐야? 아파트 추첨? 미쳤어? 거기 무슨 아파트야? 몇 동 몇 호야? 빨리 못 대?”

    이렇게 윽박지르는 남편 목소리가 너무 무서워 오돌오돌 떨다 통금해제가 되자마자 집에 돌아온 김씨. 남편은 없고 집안은 집어던진 살림살이들로 난장판이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점잖은 사람이 홱 달라지다니, 정말 무섭더라”며 혀를 찬다. 첫새벽에 낯선 집 문을 두드리고 돌아온 남편, 무조건 잘못했다 비는 아내 앞에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또 그 밤낮 하는 돈 철학’을 시작한다.

    “죽들 늘어서 있더군. 흉악한 여편네들이야. 아니, 추악해. 자가용까지 대동했더군. 실수요자는 얼마 안 될 거야. 거의 없어. 그 틈에 네가 끼여야 되니? 그런 식으로 벌려면 벌써 부자 됐어. 사는 방식, 돈 버는 방식이 다 다른 거야. 돈은 하나님이 잠깐 빌려주신 거야. 그거 알아?”

    1979년, 조의원은 부장으로 일하던 삼성물산을 뛰쳐나왔다. 이후 다른 직종에 몸담고 또 한 3년 평탄하게 지냈는데 느닷없이 국회의원 출마 제의가 왔다. 가장 강력한 권유자는 둘째형인 조윤형 전의원이었다.

    “5대에 이어 6, 7, 8대 의원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형이 유신정권 출범과 함께 발이 묶이고 말았어요. 그렇게 9대, 10대, 11대 선거를 놓쳤는데 12·12 사태가 났잖아요. ‘서울의 봄’이 오고 이제 됐다 싶더니만 광주 사태가 터지고, 일사천리로 정치규제법이 통과되고 말았지요. 웬만한 야권 인사들은 모두 그 대상이 돼 출마 자체가 불가능해졌어요. 꼭두각시 야당을 만들기 위한 전두환 정권의 폭거였죠.”

    야권과 재야인사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중 하나가 정치규제 대상자의 가족을 해당 지역구에 대리출마시키는 것이었다. 조의원은 “선거에 참여하는 자체가 신군부에 협력하는 것”이라며 불출마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첫째, 명분상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건 몰라도 (광주에서) 살상을 그리 많이 한 정권에 조금이라도 협력하는 모양새는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요. 둘째, 정치자금을 마련할 자신이 없었어요. 된다 한들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어요. 세비만 갖고는 어렵다는 걸 제가 빤히 아는데.”

    그러나 권유는 계속됐다. 이제는 아예 반 협박조였다. 조윤형 전의원은 “형의 맺힌 한을 풀어줘야 할 것 아니냐. 정치는 집안의 숙명이다. 너만 편하게 살 생각 마라”며 때로는 애원하고 때로는 화를 냈다. 자칫하다간 의절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선거 등록일을 일주일 남짓 남겨놓고 무소속 출마를 결심했다.

    ―나가면 되리란 자신감은 있었나요.

    “없었죠. 솔직히 아내와 저는 그저 2주일만 버티자, 연설 세 번만 하면 끝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마침 아내가 그때 출연한 연극이 히트해 출연료로 포니 자동차를 샀거든요. 아내가 굉장히 좋아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새 차를 끌고 유세를 다니기 시작했죠. 선거 끝나고 나니 의자 스프링이 다 내려앉아 버렸더라구요.”

    당시 선거는 한 지역구에서 의원 2명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두 자리 중 한 자리는 여당이 차지하게 돼 있었다. 제1야당이 확실시되는 민한당은 정치규제와는 상관없는 인사들로 꾸려진 ‘유사 여당’ 같은 모양새였다.

    “우리 구(서울 성북구)는 후보자가 11명이나 됐어요. 당시는 유세가 아주 중요했는데 수천 명을 앞에 두고 연설을 해야 한다 생각하니 너무 걱정되더라구요. 그래, 멀리 떨어진 예식장 하나를 빌려 두세 번 연습도 하고 그랬죠.”

    결과는 당선. 서울에서는 유일한 무소속 당선자였다.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다. 지지자들이 그를 헹가래 치는 사진이 ‘동아일보’ 사회면 톱으로 실리기도 했다. 최초의 ‘3부자 국회의원’이라는 점도 화제가 됐다. 그를 부각시키는 것 자체가 정권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의 출마와 당선, 그 자체가 저항이요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초선의원 시절은 어땠나요. 무소속끼리 모임을 만들기도 했지요.

    “그때 무소속의원이 17명이었는데 함께 ‘의정동우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민한당이 야당 역할을 거의 못하니 우리 쪽에서 그 일을 감당하려 애를 썼지요.”

    “제 월급 제 손으로 올리는 게 의원”

    ―국회의원이 되고 나니 뭐가 달라지던가요.

    “글쎄…, 저는 솔직히 뭐가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오히려 제약 많고 의무 많고. 어떻게 보면 국회의원은 유산 많은 사람이 여가로 하기 좋은 직업이에요. 부업 비슷하니….”

    ―그럼 열심히 안 해도 괜찮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누가 보나, 출석부가 있나, 당이 관리한다고는 하지만 그도 모양뿐이고. 1년365일 매일 놀아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아요. 정말 게으름피우려 마음먹으면 한이 없지요. 또 대통령도 자기 월급은 못 올리는데 국회의원은 그것까지 제 손으로 다 하잖아요. 감시, 비판, 견제, 이게…, 참, 손에 잡히지 않는….”

    ―국회의원도 직업이라 할 수 있나요.

    “한 10년 하면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케네디 대통령도 그랬잖아요. 정치는 고상한 직업이라고. 맞아요. 사실은 고상한 직업이지요. 대부분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하는데 정치는 공익을 위한 거니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기희생, 그게 정치의 본래 모습이거든요. 그래서 정직이 최고의 정치인 거구요.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렇습니까. 정치판이라는 게 워낙 냉혹한 적자생존이니. 이래서 정치 개혁이 어려운 거예요. 신념을 지키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벌써 세 번째 만남이다. 이 정도면 좀 느슨해질 만도 한데, 저고리 한번 벗는 법 없고 말꼬리 한번 낮추는 법 없다. 그의 옷차림은 대단히 단정하다. 양복 넥타이 드레스셔츠 할 것 없이, 마른 몸피 어딘가 꼭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얌전히 녹아들어 있다. 그렇다고 딱히 화려하거나 남달리 세련된 것도 아니다. 오래 매 보풀이 인 타이, 역시 즐겨 사용한 듯 적당히 손때 탄 커프스 버튼이 오히려 그이답다. 노인 냄새 나지 않게 노인이 된 드문 사람이다.

    지난 20년간 한번도 실세다운 실세인 적 없는 조의원이지만, 또 그이만큼 고비고비마다 논란의 중심에 서 있은 이도 없다. 정계입문 자체가 그랬고 2선 도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1984년 민주회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가 결성됐지요. 거기 참여한 몇 안 되는 현역의원이었던 걸로 아는데요.

    “그렇습니다. 민추협은 YS와 DJ가 공동의장을 맡은, 당시로서는 최대의 정권도전세력이자 민주화 인사들의 집합처 같은 곳이었죠. 하지만 신문에 이름 한번 나오지 못할 만큼 극심한 탄압을 받았어요. 그때 우리 의정동우회 회장을 황명수 전의원이 맡고 있었는데 YS랑 가까운데다 담력도 큰 분이었어요. 제도권 의원 중 민추협 결성 때부터 참여한 이는 그분이 유일했지요. 바로 그분이 중추 역할을 해 의정동우회원 중 세 명이 더 민추협에 가담하게 됐습니다. 저, 김정수, 신순범 의원이었지요.”

    당시 조의원은 정치를 계속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정치활동규제가 해제되면서 형인 조윤형 전의원이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형의 선거구에서 ‘대리 출마’한 조의원이었던만큼 형이 원한다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다.

    “그때 새 제안이 온 거지요. 사실 당시 현역의원이 민추협에 참여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어요. 기존 정국구도에 일대 파란을 몰고 올 사건이었죠. 밤 12시쯤 상도동으로 찾아갔더니 YS가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다’며 어찌나 좋아하던지. 이협(당시 민추협 대변인), 김상현(당시 민추협 공동의장대행) 의원과 함께 ‘선명 야당 재건’이란 메시지를 담은 성명서를 마련해, 다음날 아침 국회 기자실에서 전격적으로 발표했어요. 모든 과정은 안기부도 잡아내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진행됐지요.”

    ―그래서 12대 총선 때 신민당(민추협의 후신) 후보로 출마하게 됐군요.

    “맞습니다. 도봉구에서 선거를 치르게 됐죠. 근데 사실 그때 YS는 절 종로로 내보내려 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종로는 정치 1번지라 해서 아무나 출마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거든요. 전 너무 어이가 없어 ‘도저히 못한다’고 사양을 했죠. 그런데 YS 그 분이 참 정치적 감각이 대단해요. 기발하달까, 직감이 뛰어나달까, 그런 쪽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그때도 뭐라고 하냐면 ‘서울 스물 몇 군데에서 다 (당선)된다’는 거예요. 아무도 안 믿었죠. 저보고도 ‘종로 나가면 당 대변인으로 임명하고, 손 붙잡고 다니겠다’며 꼭 된다고 했어요. 그래도 끝까지 못한다 했죠.”

    YS의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1985년 12대 총선을 통해 신민당은 일약 제1야당으로 도약했다. 물론 그도 2선의원이 됐다. DJ의 대행역할을 한 김상현 의원이 입당을 주선한 바 있어 그는 자연스럽게 동교동계로 분류됐다.

    무모한 도전, 한겨레민주당

    1987년, 일생일대의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다. 대통령후보 단일화 논의가 그것이다. 당은 YS와 DJ 중 누구를 대통령후보로 미느냐에 따라 정확히 둘로 갈라졌다. 하지만 그의 소신은 확고했다. 군정종식을 위해서는 후보단일화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양 계파가 비슷한 지분을 갖고 있었으니 논의가 지지부진했겠네요.

    “뭐 계파라는 걸 꼭 그렇게 죄악시할 필요만은 없어요. 운영하기에 따라서는 제법 합리적인 면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결정적 순간에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판단 대신 ‘내가 섬기고 있는 분이어야만 한다’는 아집에 휩싸일 수 있다는 거지요. 그때도 후보단일화를 외친 사람은 소장파 의원 13명밖에 없었어요. 그마저도 계파별로 당이 나뉘는 시점에 가서는 5명으로 줄어들었지요.”

    동교동계가 평민당으로 갈려나가기 직전, 소장파들의 주장으로 마지막 의원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조의원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대표발언을 했다.

    “후보 단일화는 국민적 요구다. 그렇지 않고서는 정권 교체도, 군정 종식도 이룰 수 없다. 후보 지명은 두 분 지도자의 권리가 아니다. 당원과 국민의 권리다. 의원들에게 후보 지명권을 돌려달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이 통일민주당(신민당 후신)의 마지막 의원총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했군요.

    “그렇게 된 거죠. ‘군정종식 후보단일화 국민협의회’ 공동대표까지 맡으며 동분서주했으나, 결국 계파 정치에 지고 말았어요. 명분을 잃은 당과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개혁정당을 만들어 공동대표위원을 맡았죠. 결과적으로 무모한 도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칙 속에 스스로를 유배한 ‘고독한 남자’

    집무실의 조순형 의원. 책상 위는 물론 바닥까지 각종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정치적 실험이 과했던 것 아닌가요.

    “그런 용기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순진하게 믿었던 거죠. 국민은 분명 후보단일화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소신과 명분을 지닌 우리 손을 들어주고 설 땅을 마련해 줄 것이다, 그를 통해 정계 개편이 일어날 것이다…. 한마디로 지역감정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달까요. 선거 공학적으로 보면 실패가 예정된 도전이었죠.”

    한겨레민주당은 시작부터 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현역 의원 5명으로 모양새가 제법 그럴듯했으나 신당 창당준비위원회까지 간 이는 그와 홍사덕 의원뿐이었다. 홍의원마저 정작 창당대회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제정구, 장을병 등 재야 명망가들이 합류해 있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운 뒤였다.

    “3김 청산과 지역감정 청산을 위해 싸운다는 심정으로 13대 총선에 출마했습니다. 떨어졌는데, 그냥 떨어진 것도 아니고 4등이었어요. 서울까지 이럴 수 있나…. 동료의원들에 대한 실망도 이루 말할 수 없어 정치를 그만두기로 작심했죠.”

    ―막상 낙선하고 보니 어떻던가요.

    “당시야 죽겠지요. 하지만 다시 똑같은 상황이 온다 해도 저는 그렇게 할 거예요. 그게 맞는 길이니까요. 지금에 와서는 그때 경험이 참 소중하죠. 승승장구하는 것보다 쓴잔도 마시고 해야 그것이 인생이니까요.”

    대화가 이쯤 이르자 비로소 그의 입이 풀리는 듯하다. 남의 얘기 하듯 무심히 술술 털어놓는데 그 맛이 제법 구수하다.

    청탁, 자기 자랑, 무리 짓기

    ―정치인들은 말 바꾸기나 그런 데 대한 내성이 굉장히 강한가봐요.

    “관행이라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전 그걸 잘 못하겠어요. 용납을 못하겠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정치인들도 그런 문화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어요?”

    ―희망이 보이나요.

    “희망을… 갖게 되죠. 지난 총선도 보면 낙선운동이다 뭐다 해서, 결국 정도를 걷지 않으면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걸 보여줬잖아요. 언제까지나 이렇게 잘못된 관행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겁니다.”

    ―자신에게 정치력이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분명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전 그런 건 별로 없는 사람 같애요. 정치력이란 그걸 발휘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거잖아요. 케네디도 ‘왜 대통령이 되려 하느냐’고 묻자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지요. 하고픈 옳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우리 의원들도 그런 명분 하나씩은 다 갖고 있겠지만, 사실은 결국 자리 싸움인 경우가 많죠. 당권 경쟁이 얼마나 치열합니까. 그런데 되고 나면 뭘 하지요?”

    ―조의원께서도 최고위원과 원내총무 경선 등에 출마한 적이 있지요.

    “내키지는 않지만 ‘그쯤 되면 해야지’ 하는 분들도 있고 또 될 듯도 하고 해서. 근데 뭐 다 안 됐어요. 사실 아쉽긴 하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전 정치인이 되려면 세 가지를 잘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자기 자랑, 부탁, 무리 짓기. 저는 이 셋을 다 못해요. 선거 때라고 갑자기 사람이 달라져 딴 소리를 할 수도 없고. 그리고… 국회의원 되기도 어려운 거잖아요. 이거 열심히 하면 되지 꼭 자리가 있어야 하나요.”

    ―최고의원 경선 자금을 공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글쎄 말예요. 그런 것도 상당히 평가해 줄만 한데. 근데 그게 표로 안 나타나더라구요. 당내 경선이라는 게 결국은 동지간 경쟁이에요. 같은 당 동지끼리 그렇게까지 돈을 쓰며, 후유증을 겪어가며 해야 하는지.”

    ―나는 혼자다,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요.

    “외로울 때가 있죠. 하지만 외롭지 않겠다고 무리 속에 들어가면 제 의지를 펼 수 없어요. 제 딴에는 옳은 소리라고 하는데 그걸 무슨 (의원) 모임 가서 같이 하자 그러면 잘 안 되고. 불이익이건 손해건 저 혼자 감당해야지, 다른 의원에게 피해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달라졌지만 대통령이 총재까지 겸할 때, 다선 의원이면서도 그 가까이 갈 수 없는 바로 그런 것이 큰 불이익이라고 하더군요. 바로 그런 걸 감수해야지요.”

    ■ 네 번째 날

    국회의원들은 바쁘다. 얼굴 한번 보려면, 아니 전화통화만도 쉽지 않을때가 적지 않다. 그런데 그는 아닌 듯 하다. 무슨 회사원처럼, 의원회관 5층 그의 방으로 가면 꼭 그렇게 앉아 뭘 읽거나 쓰고 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했더니 점심이나 같이 하자며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식당에 자리잡고 앉아 또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왜 골프를 안 치나요.

    “뭐 형편도 안 되고, 시간도 많이 들고, 여럿이 하는 거라 결국 무리를 짓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그런데 참 치긴 많이들 칩디다.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부킹부터 신경 쓰고, 만나기만 하면 골프 얘기부터 꺼내고들 말이에요. 사실 사회생활 하는 이가 싱글이다 뭐다 하는 건 꼭 자랑할 일만은 아니잖아요.”

    ―해외 여행은 많이 가봤나요?

    “예전 삼성 다닐 땐 회사 일로 일본에 자주 갔지요. 국회 들어와서 공식 출장은 두 번이었어요. 기회는 몇 번 더 있었는데 가기 싫었어요. 뭐 그런 것에 비판도 많고, 그래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집에 개가 세 마리나 있다면서요.

    “네, 제 자식하고 똑같은 녀석들이에요. 명견 뭐 그런 건 아니고, 정이 많이 든 한식구지요.”

    여기까지 말한 그가 안주머니를 주섬주섬 하더니 사진 몇 장을 꺼내 보인다. 크고 잘생긴 흰색 래브라도 리트리버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잘생겼죠? 이 녀석이 승리예요.”

    사진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뿌듯한지 얼굴에는 예의 아이 같은 미소가 한가득이다.

    “우리 지구당 아래층에 시각장애인 한 분이 사셨어요. 어느 날 맹도견(맹인안내견) 한 마리를 분양받아 왔는데 그 친구가 승리예요. 처음 보고 깜짝 놀랐지요. 참 잘생기고 총명하더라구요. 그 다음부터는 지구당에 갈 때마다 이 녀석을 찾았어요. 승리 주인이 상계동으로 이사를 간 다음에도 2~3개월에 한번씩은 꼭 이 녀석을 보러 그 집까지 놀러를 가곤 했죠.”

    어느 날도 승리가 보고 싶어 불쑥 찾아갔더니 이상하게 개가 그를 반기지 않았다. 다시 보니 승리가 아니었다. 주인 왈, 승리의 건강이 좋지 않아 다른 개를 분양받고 승리는 안내견학교로 돌려보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연락하니 벌써 원주 어디 새 주인을 찾아 보냈대요. 잘 지내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결국 원주로 내려갔지요.”

    새 주인은 좋은 사람이었으나 환경이 열악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평생을 봉사했는데, 그러느라 다른 개들보다 노화도 빨리 오고 수명도 짧은데, 은퇴 후에라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불쑥 화가 났다.

    “새 주인, 안내견 학교와 의논해 드디어 거주 환경 좋은 새 가정을 찾았어요. 이 사진은 바로 그 댁에서 찍은 거예요. 요즘도 보고프면 분당 그 집으로 달려가곤 하지요.”

    강령집에 DJ 사인 받아놓은 이유

    ―1990년 3당 합당이 단행되고 ‘꼬마 민주당’이 갈려 나오자 거기 합류했지요.

    “네. 김상현, 이기택, 김광일, 노무현, 김정길 의원과 함께 했지요. 이후 첫 번째 지방선거에서 우리 당과 평민당이 모두 참패하면서 양당 통합을 생각하게 됐죠. 그렇게 탄생한 것이 통합민주당입니다.”

    ―DJ는 어떤 정치인인가요.

    “의욕적이고, 아주 진지하게 전력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죠. 독서량, 연구, 사전 검토, 정책 수립, 연설… 그 모든 면에서 다 뛰어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요. 흔히 정치력을 그저 협상 능력이나 인맥 쌓기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니에요. 진정한 정치력은 자질, 실력, 공부에서 나옵니다. DJ는 지도자 반열에 올라서도 더 많이 읽고 쓰고 공부한 인물이에요. 후진들이 꼭 본받아야 할 장점이죠.

    여기 이 수첩을 보세요. 우리는 이걸 1년 쓰는데 DJ는 6개월을 못 넘겨요. 그만큼 메모를 많이 하거든요. 또 중요한 건 꼭 빨간 펜으로 딱딱 표시를 해 놔요. 아주 놀랍지요.”

    1997년 국민회의 창당을 준비중일 때였다. 당시 조의원은 정책위원회장으로서 당의 강령을 마련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밤 10시쯤 초안을 보내놓고 다음날 아침 8시에 그 주제로 회의를 하는데, 그 사이 DJ는 벌써 책 한 권 분량의 초안을 다 보고 군데군데 수정까지 마쳐놓은 상태였다.

    “‘조의원, 내가 쪼꼼 고쳐봤어요’ 하고 내미는데 참 훌륭합디다. 뭐 하나 빠진 게 없더라구요. 이건 오래 남을 강령이다 싶어, 앞에 DJ의 사인을 받아놨지요. 요즘도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다른 의원들에게 이 강령집을 보입니다. 정말 최선을 다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려주고 싶거든요.”

    ―DJ의 공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잘한 일이 많지요. 하지만 옷로비 사건 이후로는 문제도 적지 않았어요. 인재를 널리 구하지 않은 점, 집권당 인사들을 중용치 않은 점, 비선라인에 의존한 점, 언로를 막아버린 점. 뒤를 잇는 대통령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들입니다.”

    ―그동안 민주당 최고위원(1991), 국회 교육위원장(1992), 국민회의 사무총장 및 공천심사위원장(1995), 민주당 상임고문 및 정치개혁추진위원장(2002) 등을 지냈으니 자리 복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가만 보면 결국 자신의 색깔에 맞는 ‘봉사직’에 주로 몸담았던 듯합니다.

    “누군가는 소극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좋은 뜻을 펼치기 위해 권력을 추구한다 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런 집념이 자꾸 욕심처럼만 느껴져요.”

    ―자금세탁법이니, 변호사법이니, 국민경선 방식이니, 윤리위원회 운영이니, 조의원을 보면 그야말로 사사건건 소수 편에 서고, 밝히지 않아도 될 소신까지 밝히며 꼿꼿이 고집을 세운다는 느낌이 듭니다. 지난 대선 때도 그랬지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국민경선을 통해 뽑은 대선 후보가 있는데 지지율이 떨어진다고 후보 교체니 신당 창당이니 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그런 민감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공개적으로 의견을 밝히는 것이 정치인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정치 생명을 걸어야지요.”

    덕분일까, 조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중앙선거대책위 공동위원장을 맡았고, 한때 중용설이 나돌기도 했다.

    “허허, 그래도 별 거 없어요. 별 거 없는 게 훨씬 좋은 거예요. 저는 당과 국회에 남아 할 말을 계속 해야죠.”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벌써 여러 차례 새 정부에 대한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뭐가 그리 걱정스러운 걸까.

    “당선자 시절이었습니다. 대통령을 뵐 기회가 있어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올바른 국정의 출발은 공정한 인사다, 주변 인사부터 공정해야 한다, 좀 극단적인지 모르지만 청와대 들어갈 때는 그동안 헌신하고 신세진 사람 중 아무도 데려가지 마라, 그런 사람들은 쓴소리를 못한다구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우선, 노대통령이 사람을 너무 주변에서만 찾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한다. KBS 사장 선임, 진대제 정통부 장관 임명에서도 볼 수 있듯 인사검증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대통령이 할 일은 큰 구상입니다. 지금 같으면 북핵 문제나 한미동맹관계, 국민통합이 최우선순위겠죠. 그런데 언론과 필요 없는 논란을 벌이고 국정 분권에도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대통령이 비서관·보좌관과 매일 회의를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총리·내각을 중심으로 한 국정 지휘체계를 존중해야지요. 대통령이 자기 일을 못하면 총리, 장관의 일을 빼앗아 하게 됩니다. 또 국민에 직접 호소하고 직접 담판을 짓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남용은 안 됩니다. 결국 모든 일의 책임이 대통령에게 집중될 수 있어요. 행정 조직도 무력화할 가능성이 크구요.”

    그의 또 한 걱정은 노대통령의 ‘입’이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것이 좋지요.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지켜야 할 품격은 무엇인지 좀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어휘도 좀 정제된 걸 쓰구요.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얘기를 듣는 입장이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로만 보면 노대통령은 DJ보다 더 심한 것 같아요. 이런 때는 사실 당에서 고언을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처럼 정신이 없어서야….”

    ―신당 문제는 어떻게 보세요.

    “저는 지금 신당을 꾸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당 개혁이지 새 당을 만드는 게 아니거든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사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대통령의 결심이 서야 합니다. 그런데 왠지 개혁 쪽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 것 같아요. 호남에서 95%의 지지를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건지.”

    ‘거름’ 혹은 ‘계단’

    어찌 보면 조순형 의원은 지금, 정치인으로서 최절정기에 와 있다. 오랜 세월 고집스레 ‘원칙과 개혁’을 외쳐온 그의 주변에 그와 뜻을 같이하는 소장파 의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핵심 역할을 한 ‘여의도정담’ ‘쇄신연대’ ‘23인 성명의원 모임’ 등은 지금 당 개혁론을 이끌어가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당 개혁이 성공하고, 그래서 이른바 신주류가 당권의 중심에 서는 날이 온다 해도 조의원에게 돌아올 ‘현실적’ 몫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거름이고 계단일 뿐, 별이 되고 태양이 될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섭섭하지 않을까. 제 몫을 빼앗긴 듯 아프지는 않을까.

    “저는 자리, 명예, 재물, 그런 게 인생의 목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니구요. 최선을 다해,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정도를 걸어가는 그것이 후회 없는 인생이겠지요. 꼭 뭐를 이루겠다, 무슨 자리를 차지하겠다 하는 집념이 저는 없어요. 누구는 중학 시절부터 책상 앞에 ‘대통령’이라고 써놨다지만, 어디 있건 어느 자리에서건 열심히 살면 그걸로 된 것이지요.”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니 엉거주춤 따라 일어선 조의원이 또 한번 당부한다.

    “저, 아무래도 쓸 말이 없을 것 같애요. 그럼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빼세요. 아유, 이거….”

    눈 못 맞추고, 손 꼭 마주 잡고, 존대말 깎듯이 쓰는 것도 처음과 한치 다름없다.

    밖으로 나서니 제법 거센 봄비 줄기에 벚꽃잎이 분분하다. 날 개이면 절두산 성지에나 올라볼까, 엉뚱한 생각을 한다. 김금지씨 말이, 남편과 어디 식당에라도 들어가면 돈 안 받고 또 대신 내주고 하는 이들이 제법 많단다. 국민들이 밥 사주고 차 대접하고 싶어하는 국회의원,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그에게 설렁탕 한 그릇 사고 싶다. 손도 꼭 잡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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