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군 비밀 첩보부대 출신으로 무관이 된 백동일 대령
- 2년간 1300여 건의 첩보보고 보내 최우수 무관으로 선정
- 한미 해군회담에서 미국측 소개로 로버트김 만나
- 로버트김 “한국의 대북첩보 여건이 그렇게 열악한가. 그렇다면 도와야지”
- 우편으로 美 해군 중요 자료 전달
- FBI, 우편물 개봉하고 CC-TV로 두 사람 만남 촬영
- FBI의 경고, 백대령 ‘올 것이 왔구나…’ 위험 직감
- 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첩보 수집에 대한 보복?
- “나는 실패한 첩보원, 내 사례를 냉정히 분석하라”
- “로버트김과는 식사 한번 한 것이 전부, 금품 수수 결코 없었다”
- 로버트김은 애국자, 노대통령은 그의 석방을 요구하라
사건 당시 로버트김은 ONI(Office of Naval Intelligence)로 불리는 미 해군성 정보국에서 정보 분석을 하는 컴퓨터 전문 문관으로 19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ONI는 첩보 수집부대였던 미 해군 정보사령부(NIC:Naval Intelligence Command)의 후신으로 세계 각처에서 수집한 첩보를 취합, 분석하는 곳이다. 특수한 부서인 만큼 외부로부터의 도·감청이 불가능하도록 특별한 격벽(隔壁)을 설치한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FBI로부터 로버트김을 송치받은 미국 연방검찰은 김씨를 간첩죄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이 사건은 곧 한미간 외교 마찰을 불러왔다. 한국 정부는 “김씨가 적국(敵國)이 아닌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에 정보를 제공했는데 왜 간첩죄에 해당하느냐”고 항의했으나 미국은 들어주지 않았다.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된 로버트김은 배심원들이 유무죄를 평결하기 전에 자신이 미국 법을 어기고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는 ‘플리 바기닝(plea bargaining)’을 선택했다.
플리 바기닝은 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하고 2심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에 검찰은 적은 형량을 구형하는 제도다.
그러나 미국 연방검찰은 로버트김에게 군사기밀유출죄를 적용한 후 법정 최고형(10년)을 구형하였다. 연방검사는 플리 바기닝을 했기 때문에 그나마 간첩죄로 기소하지 않았다며, 군사기밀유출죄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최고형을 구형한 것이었다.
“나는 한국 정부 스파이가 아니다”
1997년 7월12일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연방지방법원의 브링크마 판사는 로버트김에게 “피고는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 한 충성 서약을 배반했다”며 징역 9년에 주거 및 활동을 제한하는 보호감찰 3년형을 선고했다.
이날 로버트김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한국 정부(에 고용된) 스파이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엄청난 실수에 대해 모든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사과한다”는 내용이 담긴 최후진술을 했다. 김씨는 펜실베이니아주 앨런우드 연방교도소에서 구속 기간을 포함해 7년째 수감 생활을 해오고 있다.
한국에선 대통령에 의한 특별사면이 간혹 실시되지만, 미국 사법제도에서는 특별사면의 예를 찾기 어렵다. 미국에서는 재소자가 성실히 수감생활을 할 경우에만 형을 감해주는데, 로버트김은 모범적인 수형 생활을 해옴으로써 15% 감형을 받아 내년 7월26일 출소할 예정으로 있다.
그러나 로버트김은 보호감찰 3년형을 함께 선고받았기 때문에 출소 후 3년간은 거주지(집) 인근에만 머물러야 한다. 미국 법무부는 보호감찰형을 선고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사면해주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로버트김이 보호감찰 3년형을 사면받으려면 정부를 비롯한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각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로버트김 사건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가운데 그와 함께 이 사건을 만들었던 당시의 해군무관 백동일씨가 처음으로 사건경위를 털어놓았다. 사건 당시 백씨는 ‘면책특권’을 가진 외교관이어서 미국 시민권자인 김씨와 달리 체포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 직후 미국 정부는 그를 사실상의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목해 한국으로 데려가도록 했다.
그날 이후 백씨도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실상 그를 추방한 미국 정부는 한국 국방부에 백씨를 진급시키지 말 것과 주한미군과 접촉할 수 없는 부서에만 근무케 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백씨를 전역시키라는 압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결국 백씨는 눈에 띄지 않는 부서를 전전하다가 2001년 1월말 대령 계급을 끝으로 쓸쓸히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이익은 백씨가 받은 심적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백씨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고통받는 한국을 돕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도와주었던 김선생(백씨는 로버트김을 김선생으로 불렀다)이 간첩으로 몰리고 옥살이까지 하고 있는 데 대해 매우 괴로워했다. 이러한 고통이 백씨의 가슴에 사무치게 파고들어 백씨의 얼굴과 가슴에는 깊고 깊은 주름이 팼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미국에서 양식 있는 화이트 칼라가 재소자가 된다는 것은 일평생 쌓아온 명예와 재산과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이다. 실제로 로버트김은 모든 수입이 끊어지고 은행 거래마저 중지되었다. 또 19년간 ONI에서 일해오면서 기대했던 연금이 날아가버려 상당한 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전 주미 해군무관 백동일씨가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로버트김 석방을 요청한 탄원서
로버트김의 소망이 이러한 만큼 백씨가 바라는 필생의 소원도 ‘로버트김 선생’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백씨는 그 첫 번째 노력으로 오는 5월13일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회담 어젠더와는 별개로 로버트김 조기 석방과 보호감찰형 면제를 간곡히 요청해 관철시킬 것을 소망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로버트김을 애국자 반열에 올려줄 것’을 바라고 있다. 세 번째로 자신이 벌인 대미(對美) 첩보수집 활동을 실패한 사례로 삼아 철저히 분석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성공한 사례만 자랑하는 군대는 절대 강군이 될 수 없다. 실패한 사례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 축적될 때 우리는 비로소 실력 있는 군대를 가진 제대로 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백씨는 자신을 실패한 첩보원으로 규정했지만 사실 그는 최고의 첩보원이었다. 정보병과 출신 장교로 해외 군사첩보를 수집하는 무관이 된 흔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첩보 그 자체를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차 북핵위기 이후 한미 관계가 예민하던 시기에 주미 해군무관이 되었다. 미국 FBI와 NSC(미군 보안사령부) 등 외사방첩기관들은 온갖 군데를 쏘다니며 첩보를 수집하는 백씨를 ‘inquisitive officer(꼬치꼬치 캐묻고 다니는 장교)’라 부르며 경계했다고 한다.
백씨는 “실패한 사례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김선생의 구명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며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백씨가 풀어놓은 로버트김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수기 형태로 정리한다.
[제1부] 해군 정보장교의 길
나는 1948년 경남 거제시(거제도) 거제면의 한 농가에서 3남2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 부모님은 딸 하나를 낳았으나 두 살 때 병사하고 말았다. 그후 부모님은 아이를 갖기 위해 갖은 애를 썼으나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부모님이 나서서 고향 마을에 절을 세우고 불공을 드리는 등 치성을 다한 끝에 비로소 아이가 잉태되었다. 8년 만이었다.
어렵게 얻은 자식이기에 부모님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거제도에서 중학교를 마친 나는 ‘대처’인 부산으로 건너가 경남공고에 입학했다. 경남공고를 졸업하는 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해양대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으나 보기 좋게 낙방했다. 실업계 출신이다 보니 영어·수학에 약한 것이 낙방의 원인인 듯했다. 할 수 없이 부산 동래에 있는 금성사 입사 시험을 쳤는데 1등으로 합격했다.
금성사를 1주일쯤 다녀보자 ‘이것은 내가 갈 길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회사 생활을 그만둔 나는 영어·수학을 더 공부해 대학에 가볼 요량으로 국민학생과 중학생 자녀 셋을 둔 집의 가정교사로 입주했다. 내가 자력으로 대학에 가보겠다는 꿈을 키워나가자 하루하루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버지께서 고민에 빠졌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네가 대학에 가겠다면 반드시 서울대학엘 가라. 서울대학에만 간다면 내가 똥 묻은 중의(中衣·속옷이라는 뜻)를 팔아서라도 학비를 대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서울대학에 갈 사정이 못되었으므로 다른 방안을 찾아야 했다.
그해 여름 고향에 간 나는 국민학교 동창으로 통영고를 나온 곽영명(郭榮明)의 집에 들렀다가 마침 그의 집에 와 있던 해사 2년 생도 김혁수(金赫洙, 예비역 해군 준장, 초대 해군 잠수함 전단장)를 만나게 되었다. 김생도와의 대화에서 나는 학비 없이 대학 공부를 하고 장교로 임관까지 시켜주는 해군사관학교에 매료되었다.
1968년 가을 치러진 해사 27기 입학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나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길로 한 발짝 전진했다. 나는 해사 생활을 매우 즐겼다. 수영과 기계체조·축구·배구 등 모든 운동을 열성적으로 하였고 학과 중에서는 영어에 대단한 흥미를 느꼈다.
첫째는 ‘생존’이다. 미국이 생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미국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국익이다. 둘째는 ‘석유’다. 생존을 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이 에너지(석유)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미국의 국익에 맞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이라크전쟁을 벌인 것은 석유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셋째는 ‘국제평화’다.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세계를 이끌고 있는데, 미국은 이러한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맞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이러한 체제를 깨려는 세력이 있으면 미국의 국익을 해치려는 세력으로 보고 대응에 나선다. 미국이 대량살상무기(WMD) 제거에 노력하는 것도 국제평화로 치장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넷째는 ‘동맹국과의 관계’이다. 미국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미국과 동맹을 맺은 나라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맹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미국은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이 일어난 1996년처럼 이 국익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기도 하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다섯째는 무역이다. 미국은 국제무역을 방해하는 세력은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세력으로 본다. 여섯째는 인권이다.
한국의 국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분단 국가이기 때문에 생존과 번영이 보장된 다음에는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곱째 국익으로 ‘통일’을 꼽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국익이 이러하다면 우리의 행동 또한 국익을 지키고 얻는 데 집중돼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예비역 군인으로서, 국가를 위한 정보수집에 몸 바쳐온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 세 가지 당부를 하고 싶다.
먼저 지난해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후 우리 사회에서는 거대한 반미 물결이 일었다. 여중생이 사고로 희생된 데 대해서는 분명히 애도를 표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과의 동맹을 해칠 정도로 반미 정서가 팽배해지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동맹국과의 관계는 우리 국익과 깊이 연결된 주제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한미동맹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 단단한 동맹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국익의 손실로 이어질 것이다. 내가 간첩 행위를 한 혐의로 미국에서 추방된 것도 따지고 보면 한미관계가 삐걱거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1차 북핵위기가 진행되던 1992, 93년 클린턴 정부는 분명한 반북(反北) 입장이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는 북한을 고립시키는 데 반대하며 남북대화를 강조했다. 그 결과 북한은 ‘서울 불바다’ 위협까지 해가며 우리를 미국과의 대화에 필요한 ‘징검다리’로 이용한 후 제네바합의가 이뤄지자 우리를 내쳐버렸다. 그 후 우리는 미국에 대해 ‘왜 북한과 가까이 지내느냐’고 항의하다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과 로버트김 사건을 당해서는 그런 항의마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1차 북핵위기가 시작될 때 우리가 미국과 확고한 공조체제를 유지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북핵문제도 ‘동결’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로 끝나고 지금쯤 통일 단계에 진입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2차 북핵위기를 겪고 있다.
최근 EU 국가들이 미국이 원하는 대로 UN인권위원회에 북한 정권의 인권 침해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제출한다는 데 대해 우리 정부가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과거 김대중 정부가 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겠다는 이야기인데, 우리 정부는 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일까. 2차 북핵위기가 진행중일 때 미국과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다.
1차 북핵위기의 교훈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로버트김과 같은 고귀한 애국자가 희생되는 사태를 맞을 수 있다. 미국에서 간첩 행위를 한 혐의로 추방된 사람으로서 나는 ‘통일을 하려면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한미동맹에 관해 보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한다는 차원에서 로버트김 선생을 애국자 반열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나 도산 안창호 선생이 추앙받는 것은 조국을 위해 몸바친 애국적 행적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김선생은 조국에 대한 순수한 애국심 하나로 나를 돕다가 불의의 피해를 당했다. 그로 인해 평생 동안 쌓아온 그분의 명예가 훼손되었고 금전적으로도 상당한 손해를 보게 되었다. 나는 나를 포함한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은 그 분을 애국자 반열에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로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 대한 부탁이다. 오는 5월13일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에서 회담 어젠더에 관한 토론이 끝난 뒤 반드시 로버트김 사면을 부탁할 것을 노대통령께 간곡히 말씀 드리고 싶다. 미국의 사법체제상 사면이 불가능하다면 출소 후 3년간의 보호감찰만이라도 면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면 한다.
역대 이스라엘 총리들은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안건 외로 조너선 폴라드의 사면을 미국 대통령에게 요청하고 있다. 김선생은 폴라드와 달리 1센트의 금품도 받지 않고 한국을 도와주신 분이다. 노대통령께서 “우리는 이라크전에 공병대를 파병하며 미국을 돕고 있다. 미국도 우리를 동맹으로 여겨달라”고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줄 것을 간절히 소망한다.
김선생이 석방돼 한국에 들어오면 나는 그분이 청소년을 상대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강의를 하실 수 있도록 하는 데 노력할 생각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의 충정을 우리 사회가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의무와 명예와 조국을 생각하며 평생 군인으로 살아가려 했던 내가 떳떳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절 나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를 가장 존경했다. 맥아더는 6·25전쟁중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극동군 사령관에서 해임됐는데, 퇴역을 앞두고 모교인 웨스트포인트(미국 육사)를 방문해 ‘의무(duty)와 명예(honour)와 조국(country)은 군인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명제’라는 내용의 고별연설을 했다. 군인이 될 예정인 나는 이 말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 훗날 ‘의무와 명예와 조국’이 나를 발전시키는 명제이자 또 나를 옭아매는 절체절명의 주제로 다가오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1973년 봄 해사를 졸업하며 나는 함정병과의 장교로 임관, 반짝이는 ‘쏘위’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함정병과는 육군의 보병, 공군의 조종병과처럼 초급 장교 사이에서 가장 인기 높은 병과이다. 해군에서 제독이 돼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장교는 전부 함정병과로 몰려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4000t급 상륙함(LST)인 수영함의 포술장과 정훈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함정 생활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망망대해는 한없는 자유의 공간으로 비쳐지지만 함정은 좁디좁은 공간이었다. 그 좁은 공간 속에서 나는 채 50m 거리도 되지 않는 함교와 사관실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오르내렸다. 맥아더의 글을 읽던 생도 시절 나는 즐겨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는데, 좁은 함정 생활이 계속되자 생각이 뻗어나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이듬해 중위로 진급해 중형 경비함인 PCE 59함에서 포술장과 작전관으로 근무했으나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섬이라는 갇힌 세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나의 무의식은 크고 넓은 세계를 향해 치달았다. 생도 시절 영어를 배우면서 영어가 나를 미지의 세계로 이끌어줄 날개가 돼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날갯짓을 익히며 세계로 날아오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부대 게시판에서 첩보부대 특수요원 모집 공고를 보았다. 첩보부대 특수요원으로 선발되면 미국 유학 기회를 준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자세한 것을 알아보지도 않고 지원서를 제출해 합격했다. 첩보부대 생활은 혹독한 훈련으로 시작되었다.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훈련을 마치고 이 부대의 팀장(중위)이 되었다.
드디어 미국 연수
그리고 이듬해, 꿈에 그리던 미국 유학의 기회가 왔다. 첩보부대는 온갖 위험 상황에 직면하기 때문에 폭발물 처리(EOD:Explosive Ordnance Disposal) 같은 특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6개월간 미국 육군의 폭발물처리학교에 입교하게 된 것이다. 1976년 7월 나는 영어로 듣고 쓰고 말하는 세계로 간다는 데 대해 큰 호기심을 안고 ‘미지의 땅’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빵과 버터’를 먹으며 특수임무를 배우고 돌아왔다.
내가 근무한 첩보부대는 최일선에서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는 비밀부대인지라 자세한 언급은 않겠다. 소령 시절인 1979년 나는 심해잠수사 자격과 잠수 감독관 자격을 얻기 위해 두 번째로 미국에 가게 되었다. 심해잠수, 이것만큼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심해잠수는 해군 해난구조대(SSU) 대원들의 필수임무로 최근 개봉된 ‘블루’라는 영화의 소재가 된 비밀의 세계이다.
나는 심해잠수 교육을 미 남북전쟁 때 격전지였던 포토맥 강이 흐르는 워싱턴DC와 미 해군 2함대 사령부가 있는 버지니아주 노퍽을 오가며 배웠다. 이때 익힌 워싱턴DC 주변의 지리 감각과 영어는 훗날 주미 해군무관으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10개월간 심해잠수를 익히는 사이 한국에서는 10·26과 12·12 그리고 광주사태가 연이어 일어났다. 비록 교육생으로 미국에 와 있지만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첩보부대 장교로서 조국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1980년 5월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아예 정보 쪽으로 병과를 바꿔 참모로 활동하다 첩보부대에서는 요직으로 꼽히는 기지대장을 맡게 되었다. 그 시절 나는 정신력과 체력과 실력이 더없이 강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온몸을 던져 부대원들을 지휘했다.
그러다 소령 말기에 진해 함대사령부(지금의 해군 작전사령부)로 옮겨가 미국 정보팀과 함께 한미 연합정보 업무에 종사했다. 중령으로 진급해서는 서울 대방동에 있는 해군본부로 올라와 북한의 동향과 북한군의 공격 징후를 실시간 단위로 추적해 판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88년 나는 국방부 국방정보본부로 옮겨갔다. 국방정보본부(DIA)는 국방부 내의 국정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국방과 관련된 모든 첩보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해외에 무관을 보내는 것도 이곳에서 관장하는데, 나는 소련을 담당하며 공산 종주국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목도하였다.
1990년 다시 해군본부로 돌아와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평가하는 업무를 수행하다 1992년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첩보에는 특수요원들이 입수하는 구체적인 정보도 있지만, 국가 안위와 직결되는 전략정보도 있다. 정보의 핵심은 바로 전략정보인데, 대령으로 진급한 해 나는 전략정보의 대강(大綱)을 배우기 위해 또다시 미국에 가게 되었다.
이 교육은 미 국방부 국방정보본부(DIA)가 직접 운영하는 DIA센터에서 받았다. 나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연수생 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았기 때문에 학생장을 맡았다.
미국이 동맹국 장교를 상대로 전략정보 교육을 시키는 것은 그들의 필요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분쟁 해결과 첩보수집을 미국 혼자 다 맡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금의 이라크전쟁처럼 동맹국의 협조를 얻어 정보를 수집하고 분쟁에 대처해야 한다. 유사시 미국을 도와줄 우군을 만들려면 평소 많은 친구를 사귀어놓아야 하는데,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동맹국 장교들을 위한 교육이다.
1993년 이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나는 국방대학원 안보과정에 입교했다. 그 시절 나는 해군 정보병과 장교 중 실무를 익힌 최고 계급자이면서 영어가 가능한 장교로 꼽히고 있었다. 이러한 경력을 가진 장교는 해외 무관 요원에 적합하다. 국방대학원에 다닐 때 무관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국방정보본부에서는 소련을 담당했던 나를 러시아 무관 후보로 검토했다.
그런데 몸이 약한 처가 겨울이 긴 러시아 생활을 힘들어 할 것 같아 미국 무관 쪽으로 지원지역을 바꾸었다. 그러나 미국 무관은 아무나 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주미 무관부는 국방부를 대표해서 나가는 국방무관(보통 소장)과 육·해·공군을 대표하는 육·해·공군무관(대령), 방위산업 협조를 담당하는 군수무관(대령), 그리고 이 무관을 지원하는 중·소령급 보좌관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무관부 요원이 되려면 먼저 자군(自軍)에서 선발되어야 한다. 주미 해군무관으로 나가려면 먼저 해군에서 추천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군은 미국군으로부터 교리와 작전 장비 등 많은 것을 배워왔다. 또 국토를 미국군과 연합으로 방어하는 한미연합사 체제를 이루고 있으므로, 각군의 총장은 자신의 뜻을 가장 잘 헤아려 미국군과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을 주미무관으로 내보내려 한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총장의 지명을 받지 못하면 가기 힘든 곳이 주미무관 자리인 것이다.
무관이 하는 일은 국방정보본부에서 관장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정보병과 장교가 가는 것이 옳다. 그러나 참모총장을 비롯한 해군의 주력은 ‘함정병과’의 장교들이기 때문에 대개 함정병과의 장교 중에서 선발되었다. 때문에 정보병과인 나는 과연 주미무관에 선발될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해군 참모총장은 소장에서 일약 참모총장에 임명돼 화제를 모았던 김홍열(金弘烈) 총장이었다. 나는 김총장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염려하며 주미무관 선발에 도전했는데, 신기하게도 나를 제외하고는 주미무관을 희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김총장께서는 “그렇다면 백대령 한 사람만 추천하지” 하며 나를 단독 후보로 지명했다.
이로써 나는 해사 생도 시절부터 그리던 넓은 세계로 나가는 꿈을 이루게 되었다. “의무와 명예와 조국은 군인으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명제”라고 한 맥아더 원수의 말을 행동으로 옮겨 보일 수 있는 자리로 가게 된 것이다.
[제2부] 로버트김과의 운명적인 만남
무관은 정보의 세계에서는 ‘화이트(white)’로 불리는 공개된 스파이인지라, 그 신분이 주재국에 알려진다. 나는 이미 세 차례나 미국 연수를 한 바 있다. 미군 정보요원들과 연합작전을 펼친 적이 있었고 한·미군간 정보 교류회의에도 여러 번 참석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미국 장교들에게 많은 것을 물었는데 이러한 나를 그들은 ‘inquisitive officer(캐묻는 장교)’로 불렀다. 나는 특히 북한의 군사동향에 관해서 많은 질문을 했었으니 그들은 무관으로 나오는 나를 처음부터 주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나는 지독한 골초였다. 1994년 9월23일 외교관 여권을 들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온 나는 연거푸 네 대의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금연이다’하고 다짐했다. 나는 주미무관으로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군인으로서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금연을 다짐했던 것이다.
나의 첫 임무는 코앞에 닥친 국군의 날(10월1일) 행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 국방성 관계자와 방산업체 관계자, 그리고 워싱턴에 나와 있는 각국의 무관을 초청해 성대한 행사를 가졌다. 이어 주미 한국대사관 차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개천절(10월3일) 행사를 바쁘게 준비했다. 본격적인 무관부 일은 두 행사를 끝낸 후 시작되었다.
한국과 미국의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은 매년 한 차례씩 안보협의회의(SCM : Security Consultative Meeting, 국방장관 회담)와 군사위원회회의(MCM : Military Committee Meeting, 합참의장 회담)를 갖고 있다. SCM과 MCM은 매년 10월 초에 열리는데, 한국과 미국에서 번갈아가며 열렸다. 1994년은 미국에서 회의가 열릴 때라 국군의 날과 개천절 행사를 끝낸 무관부는 바로 SCM과 MCM 준비에 들어갔다.
국방무관이었던 박용옥(朴庸玉) 육군 소장은 미국 국방부와 합참 관계자들과 함께 회의를 준비하는 총괄 업무를 맡았다. 육군무관인 노시덕 대령은 이병태(李炳台) 국방장관을, 해군무관인 나는 이양호(李養鎬) 합참의장의 일정을 맡기로 했다. 이렇게 몸으로 뛰면서 바쁜 무관생활을 익혀나가는데, 과거 연수 시절의 경험 덕에 어느 정도 워싱턴의 지리를 알고 있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주미 무관부는 국방부와 각군으로부터 첩보보고 지시를 가장 많이 받는 곳이다. 국방부와 해군본부로부터 떨어지는 각종 첩보수집 지시를 정확히 이행하려면 많은 정보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정보장교인 나는 첩보보고의 신뢰도를 높이려면 한 명이 아닌 복수의 정보원으로부터 첩보를 입수하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정보장교가 하니까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열심히 사람들을 만났고 첩보 보고서를 써보냈다.
해외공관에서는 무관뿐만 아니라 외교부 파견관, 안기부 파견관 등 여러 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이 첩보를 수집하는데, 대부분은 공개된 첩보를 수집하는 것이 상례이다. 공개된 첩보란 그 나라 언론이 보도한 것과 언론은 비중이 적다고 판단해 보도하지 않았지만 그 나라 정부가 발표한 것 등을 말한다. 학자나 언론인이 쓴 책도 중요한 첩보가 된다. 이렇게 공개된 출처에서 얻는 첩보가 전체 첩보량의 80∼95%에 이른다.
그러나 대적(對敵) 계획을 세우는 데 참고가 되는 첩보나, 전략 혹은 정책차원의 첩보는 좀더 깊이 있고 무게 있는 자료라야 한다. 나머지 5∼20%의 자료는 이러한 첩보로 채워야 하는데, 우리 정부의 대적 계획과 전략 혹은 정책을 세우는 데 참고가 되는 자료는 상당한 공을 들여 발굴해내야 했다.
무관으로서 나는 미 국방부 국방정보본부와 해군성의 실무자를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기밀로 분류돼 있지 않는 한 대개는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실무자나 그 상급자와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 정보를 더 빨리 얻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관계가 중요한데 그를 위해서는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첩보의 세계는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의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좋은 첩보를 얻으려면 그만큼 상대에게 뭔가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은 서울에 있는 자국 대사관의 무관부를 통해 우리 국방부 등에서 북한과 관련한 군사첩보를 입수할 것이다. 서울에서 협조가 잘 돼야 워싱턴에서의 첩보 활동도 원활해지는 것이다.
내가 워싱턴DC에 있었던 1994년부터 1996년까지는 한미간 마찰이 심했던 때였다. 이른바 1차 북핵위기 때문이었다. 1993년 3월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본격화된 1차 북핵위기는 북측의 ‘서울 불바다’ 발언, 카터 전 미대통령의 중재, 남북정상회담 합의와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제네바합의 석 달 후인 1995년 1월18일, 미국과 북한은 북한의 5MWe급 실험용 원자로에서 나온 폐연료봉을 ‘건식(乾式) 보관한다’는 데 합의했다. 3월9일 뉴욕에서는 한국·미국·일본·EU의 대표가 참석해 북한에 경수로를 공급하기 위해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만든다는 협정 서명식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KEDO는 그해 12월15일 북한과 ‘경수로 두 기를 공급한다’는 공급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의 NAC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가 북한에 들어가 5MWe 실험용 원자로에서 나온 폐연료봉을 밀봉(건식 보관)하는 작업에 들어간 것은 1996년 4월27일부터였다.
미국과 북한이 이렇게 ‘회담의 길’을 내달린 반면 한때 정상회담을 준비하며 남북관계 개선에 희망을 품었던 김영삼 정부는 조문 파동 이후 북한에 철저히 외면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한국은 미국과 북한이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없었다.
한반도 문제에 있어 한국보다 더 절실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배제하고 미국과 북한이 회담을 거듭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로서는 회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미국에 물어볼 수밖에 없고 미국이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으면 서운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네바합의는 한미관계가 소원해지는 출발점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제네바합의가 타결되기 한 달 전쯤에 주미무관으로 나갔다. 따라서 미국과 북한이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그리고 조문파동 이후 남북관계를 단절한 북한이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등등 알아봐야 할 일이 많았다. 내가 이와 관련된 첩보를 구해서 보내면 정부에서는 대체로 보수적인 의견이 강하게 일어났다. 즉 미국이 북한이 바라는 대로 끌려가고 있다는 시각이 우세해진 것인데 김영삼 대통령도 초기의 입장을 바꿔 이쪽으로 기울어갔다.
최우수 무관에 두 차례 선발
당시 나를 비롯한 주미 무관부가 얼마나 바빴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국방정보본부에서는 6개월마다 한 번씩 첩보보고와 군사외교, 그리고 방위산업협조 분야의 점수를 합산해 최우수 무관을 선발한다. 최우수 무관에 선발되는 것은 주미무관이 되는 것과 더불어 무관 분야에서는 최고의 영예로 꼽힌다. 그런데 그때까지 주미무관이 최우수 무관에 선발된 예가 없었다.
주미무관은 첩보보고가 많을 수밖에 없어, 이 분야에서는 어떤 무관보다 높은 점수를 받는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에 수출할 방위산업 제품이나 기술이 없다 보니 방산협조 부분은 영점에 가깝다. 따라서 주미무관은 최우수 무관으로 선정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주미무관 최초로 두 번이나 최우수 무관에 선발되었다.
1992년 미국 국방정보본부가 주도하는 연합전략정보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세 번째로 미국 연수를 간 백동일 대령(왼쪽에서 두 번째)
높아진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한층 난이도가 높은 첩보 입수를 시도하면서 나는 그전보다 훨씬 더 높은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최고의 무관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명예’를 향한 강한 욕구는 나를 무너뜨리는 ‘매력적인 독(毒)’이기도 했다. 그 누구보다도 명예를 소중하게 여겼던 맥아더 원수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잃었는데, 나 역시 서서히 명예에 중독돼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독 있는 사과(poisoned apple)를 먹었다’고 하던가? 독이 있는 지도 모르고 사과 맛에 취해 자꾸 사과를 먹다보면 어느새 치사량이 넘는 독이 몸 속으로 축적된다. 사과라고 하는 명예와 독이라고 하는 불명예를 함께 먹어야 하는 비정한 패러독스….
본부에서 요구하는 자료는 아무래도 한국에 우호적인 사람에게서 구하는 것이 쉽다. 한국전에 참전했거나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거나 한국인과 결혼한 사람들이 대개 친한파다. 시민권을 획득한 한국계 미국인들도 협조적이다. 그러나 한미관계가 삐걱거리고 내가 주문하는 첩보의 난이도가 올라가자 협조적이던 이들은 ‘알아보겠다’고 하고는 감감 무소식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한국에 대한 애정 이상으로 미군의 보안사령부(NSC)와 FBI 등 방첩기관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품고 있는 두려움은 좀처럼 깨고 들어갈 수가 없어 답답했다. 이런 와중에도 연합군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군과 미군은 연례 행사가 된 회의를 갖곤 했다. 1995년 11월28일 우리 해군은 워싱턴DC에서 한미해군 정보교류회의를 가졌다. 해군무관인 나는 회의를 지원해야 했다.
“이 사람을 통역 겸 안내로 써보시오”
이러한 회의가 열리면 한국 대표단은 으레 통역장교를 대동하고 미국에 오므로 미국측에서는 별도로 통역을 준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는 미국측이 내게 ‘로버트김으로 불리는 한국계 미국인이 ONI(미 해군성 정보국)에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 분에게 통역 겸 안내 임무를 맡기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해왔다. 나는 그 제의를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해군본부에 알렸다. 본부에서도 ‘미국측에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니 받아도 좋겠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렇게 해서 한미해군 정보교류회의가 열리는 첫날인 1995년 11월28일 로버트김 선생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김선생은 열성적으로 회의 진행을 도와주었다. 이 회의가 끝난 후 나는 앤드루 미 공군기지에 있는 장교클럽에서 김선생과 식사를 함께하며 “열심히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이런 의견을 덧붙였다.
“제네바합의는 북핵 위협을 근본적으로 제거한 것이 아니다. 북핵으로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은 한국인데 미국은 제네바합의를 지키기 위해 한국의 불안을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첩보수집 능력에 한계가 있는 한국으로서는 북한군 관련 첩보를 제대로 입수하지 못하고 있으니 기밀이 아닌 사항은 도와달라.”
이야기를 듣고 나서 김선생은 “한국군의 대북첩보 수집 여건이 그렇게 열악하냐?”고 반문하며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주겠다”고 대답해주었다. 이 만남이 있은 후 김선생은 비밀로 지정되지 않은 것 중에서 한국군에게 도움이 될것으로 판단되는 자료가 있으면 우편으로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선생이 보내준 자료 중에는 “야-” 소리가 나올 정도로 좋은 것도 있었다.
북한 주민과 북한군의 동요 여부, 국제사회가 보내준 식량이 북한군에게 유입되었는지 여부, 휴전선 부근의 북한군 배치 실태, 북한이 해외로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무기 현황, 북한 해군의 동향, 주민의 탈북실태 등등이 그러한 자료들이었다. 이러한 자료들은 그 시점에서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자료는 아니었지만 우리 군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었다.
김선생이 보내준 우편물은 불규칙적으로 날아왔는데, 이 우편물이 도착하면 나는 그 자료에 취해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번역했다. 그리고 김선생이 보내준 원본은 폐기하고, 첩보보고서로 정리한 번역본을 ‘대미(對美) 보안에 유의하십시오’라는 멘트를 붙여 본부로 보냈다. 나는 이러한 자료들이 우리 군이 종합적인 대적(對敵) 첩보판단을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김선생이 너무도 고마워 “식사를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드리면, 김선생은 “그날은 마침 선약이 있네요” 하며 거절했다. 그래서 재차 감사의 뜻을 전하면 김선생은 “내 작은 노력이 조국의 안녕을 기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김선생은 그 어떤 기관보다도 북한 정보에 목말라하는 한국 국방부를 돕고 있다는 데 대해 매우 고무돼 있는 듯했다. 이런 점에서 김선생은 비록 국적은 미국이지만 우리 무관보다도 더 애국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미 나는 ‘독이 든 사과’에 중독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김선생은 나에게 “한국군의 C₄I(Command, Control, Communication, Computer and Intelligence, 지휘 통제 통신 컴퓨터 및 정보) 능력과 수준이 얼마나 되는가”라고 물어오셨다. 나는 이 분야의 일은 해본 적이 없기에 “한국에서 전문가들이 오면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겠다”고 대답했다.
1996년 3월 워싱턴DC에서 한미해군간 고위급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나는 이 회담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는 실무장교들에게 “우리를 도와주시는 로버트김이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한국군의 C₄I 능력에 대해 궁금해하니 한번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이 워싱턴DC의 댈러스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가 예약해둔 내셔널 쉐라톤호텔로 안내했다.
그리고 로버트김 선생과 이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 날 나는 앤드루 공군기지에서 식사를 한 후 두 번째로 김선생을 만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주미 터키 무관부가 주최하는 리셉션이 있는 날이라 나는 양쪽을 소개만 시킨 후 바로 호텔을 빠져나가, 이야기를 나누는 현장에는 합석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때 이미 FBI는 나와 김선생의 동선(動線)을 추적하고 있었다. 통화 감청을 통해 나와 김선생이 내셔널 쉐라톤호텔에서 만난다는 것을 알아낸 FBI는 호텔에 CC-TV를 설치해놓고 나의 소개로 김선생이 한국 해군의 실무자와 만나는 장면을 촬영했다.
이에 대해 “정보장교이면서 CC-TV로 촬영당하는 것도 몰랐느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내가 너무 바빴다는 것과 ‘비문이 아닌 평문 자료를 입수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는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주변에 대한 경계를 약화시켰는지도 모르겠다고 답변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정보장교인 나로서는 특히 후회스러운 점이다.
어쩌면 FBI는 내가 워싱턴DC에 도착했을 때부터 나를 추적해왔는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리아 법정에서 열린 김선생 재판에서 검사는 “백대령은 매우 독특하게 정보를 수집하려고 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 발언으로 유추해볼 때 미국의 외사방첩 기관은 일찌감치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세 차례나 미국 연수를 했고 그 중 한번은 정보교육을 받았던 한국 해군 장교가 한미관계가 매우 불편한 시기에 미국에 와 미국을 상대로 첩보 활동에 들어갔으니, 그들은 나를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근 2차 북핵위기가 고조되면서 한미관계가 크게 삐걱거리고 있다. 나는 무관부를 비롯해 미국에서 첩보를 수집하는 요원들에게 “이러한 때일수록 첩보수집 활동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쉐라톤호텔에서는 내가 선약이 있어 먼저 자리를 뜨는 바람에 김선생을 접대하지 못했다. 그후 나는 딱 한번 김선생을 접대하였다. 김선생이 FBI에 체포되기 며칠 전인 1996년 9월초, 한국에서 제독 두 분이 연수차 워싱턴DC에 왔다. 나는 이분들과 김선생을 인사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자리를 만들었는데 김선생은 다행히 초청에 응했다.
그리하여 나와 김선생, 그리고 제독 두 명이 워싱턴DC 근교에 있는 미 육군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대구 뽈따구찜과 갈비탕으로 식사를 했는데 이것이 내가 김선생께 해드린 접대의 전부였다.
주한 미 해군무관으로 내정된 미군 중령(왼쪽)과 대화하는 백동일 무관(1995년 4월). 백대령이 한국으로 송환됐을 때 서울에 근무하고 있었던 이 미군 중령은 백대령이 미군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폴라드는 연방법정에서 금품을 받고 미국의 군사기밀을 제공한 것이 인정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김선생은 골프를 친 후 식사 한끼를 한 것 외에는 나로부터 그 어떤 금품이나 접대를 받은 사실이 없다. 그분은 내가 대접을 하려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껴 나와 만나는 것을 극구 피한 분이다. 단 1센트도 받지 않고 자료를 제공해준 김선생을 폴라드와 비교하는 것은 선생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미국 검찰과 법원도 김선생의 청렴함을 인정했기 때문에 폴라드보다 훨씬 더 적은 형량을 부과했던 것이다.
개봉 흔적 남은 우편물
그로부터 수일 후인 1996년 9월12일 김선생이 보내준 우편물이 도착했는데 닷새 전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 전의 우편물은 대개 이틀이나 사흘 전 소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유심히 봉투를 살펴보니까 누군가가 개봉한 흔적이 있었다.
정보기관은 봉투를 열어보더라도 그런 흔적을 절대 남기지 않는다. 그런데 개봉 흔적을 남긴 것은 누군가가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그만하지’ 하는 사인으로 흔적을 남긴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절망감에 빠졌다.
봉투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북한이 이란에 미사일 기술을 팔았는데 북한이 제공한 기술에 뭔가 문제가 있었는지 이란이 미사일 기술 도입선을 러시아로 바꾸려고 한다, 일본 방위청 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일·중 국방장관 회담을 가졌다는 내용을 비롯해 한반도 안보와 관련된 최초 보고 형태의 자료 12건이 들어 있었다. 이 봉투를 개봉한 자는 이 자료를 복사해서 갖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나는 모든 첩보수집 활동을 중지하고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를 흔적을 지우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사건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첩보의 세계에는 ‘차단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이 원칙에 따라 내가 하는 일을 대사나 국방무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나는 이 원칙을 끝까지 지키리라. 그런데 이 사건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벌레 먹은 사과가 익기도 전에 떨어지듯이 나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머리 속에서 여러가지 생각이 얽혔다. 나는 몹시 예민해졌다.
김선생은 1995년 12월부터 우편으로 대략 50여 건의 자료를 보내주었고 나는 그 중에서 30여 건을 번역해 한국에 보냈다.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마지막 자료가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조심하자. 조심하고 기다리자’는 다짐을 반복하였다.
이상한 크리스토퍼 장관 발언
그런데 1996년 9월18일(한국시간) 한국에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해안으로 북한의 상어급 소형 잠수함이 침투하는 초대형 안보사건이 터져나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사흘간 나는 불면의 날을 보냈다.
잠수함은 전투에서 아주 중요한 공격장비다. 이러한 장비가 침투했다는 것은 설사 군사 작전이 아니라 정찰국 요원을 침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간과할 수 없는 명백한 도발행위다.
이러한 도발은 불가침을 약속한 ‘남북 기본합의서’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다. 1991년 12월31일 북한은 우리와 함께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에 서명해놓고도 1차 북핵위기를 일으켰다. 이렇게 식은 죽 먹기로 약속을 어기는 것이 북한인데 미국은 제네바합의를 금과옥조처럼 믿으려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쩌면 미국은 북한 잠수함이 침투하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동맹국인 한국에 통보해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본부에서도 이러한 의심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의구심은 사건 발생 다음날인 9월18일(미국 동부시간)에 나온 워런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의 발언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날 미일 외무·국방장관 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을 한 워런 크리스토퍼 장관은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에 대해 묻는 질문에 “모든 당사자들(남북한을 지칭)이 더 이상의 도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당사자들은 우리가 남북대화나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을 진전시킬 수 있도록 추가적인 도발행동을 하지 않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나는 ‘비핵화공동선언과 불가침 합의를 어긴 것은 북한이다. 그런데 우리의 동맹국인 미국은 우리와 북한을 동급에 놓고 자제하라고 요구하는, 상식에도 맞지 않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때마침 서울에 있는 미국대사관에서는 우리 외무부를 찾아가 크리스토퍼 장관의 진의가 잘못 표현되었다는 해명을 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렇게 미국이 덮으려 하자 미국에 대한 우리의 의구심은 오히려 커질 수밖에 없었다.
최혜국(MFN) 대우는 미국이 한국에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은 생존을 모색하기 위해 연합방위 체제를 구축한 미국에 더 많이 그리고 더 훌륭히 최혜국 대우를 해주고 있다. 이러한 대우는 혈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1996년 9월18일 강릉 해안으로 침투한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 백대령은 미국이 이 잠수함의 침투를 알고 있었는지를 추적하다 미국에서 추방되었다.
항구 주변은 수심이 얕다. 때문에 출항하는 잠수함은 수면 위로 뜬 상태(浮上 항해)로 나와 지정된 잠항 포인트에서 물 속 깊이 잠수한다. 일단 물 속으로 들어간 잠수함은 여간해서는 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2∼3일 잠항하면 배터리가 방전돼 다시 충전하여야 한다. 배터리를 충전하려면 디젤엔진을 돌려야 하고, 디젤엔진을 작동시키려면 공기(산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잠수함은 수면 바로 밑까지 떠올라 수면 밖으로 공기 흡입관을 올려 대기를 흡입한다.
이렇게 디젤엔진을 돌리면 잠수함에서 방사열(放射熱)이 나오는데 미국의 군사위성은 이를 포착해낼 수 있다. 또 P-3C 같은 초계기도 같은 방법으로 잠수함을 찾아낼 수 있다. 이렇게 부상시마다 추적을 하면 잠수함의 이동 경로가 나오므로 이 잠수함이 한국으로 침투하고 있는지를 판정할 수 있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미국이 상어급 잠수함의 이동로를 알고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은 사실을 포착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물론 김선생께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글쎄 미국이라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라며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외교관이 쓰는 전화는 100% 주재국의 외사방첩기관에서 도청한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워낙 위중하였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미 국방부의 정보본부(DIA)와 미 해군성의 작전·기획참모부(N-3 & N-5) 등에 전화를 걸어 자료 제공을 부탁했다. 내가 거리낌없이 전화를 걸어 부탁한 것은 이러한 첩보는 과거 미국측에서 제공해주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도움을 청하면 이들은 기밀이 아닌 자료를 제공해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이렇게 잠수함 침투사건으로 정신 없는 가운데 국군의 날 행사가 다가왔다. 그해의 국군의 날 행사는 잠수함 사건 발생 엿새 후인 9월24일 워싱턴DC의 포트 마이어 미 육군 장교클럽을 빌려 열기로 되어 있었다. 이 행사를 앞두고 무관부는 여러 곳에 초청장을 보냈다. 물론 로버트김 선생께도 ‘내외분이 함께 와 주십사’ 하는 초청장을 보냈는데, 김선생은 ‘혼자 오겠다’는 답변을 보냈다.
9월24일 스탠딩 뷔페 형식으로 국군의 날 리셉션을 하고 있는데 양복 차림의 ‘초대받지 않은’ 미국 젊은이 세 명이 들어왔다. 이들은 김선규 국방무관에게 ‘로버트김이 여기에 왔느냐’라고 물었다. 국방무관은 그들을 내게 보냈다. 내가 ‘무슨 일로 김선생을 찾느냐’고 하자, 그들은 ‘로버트김이 이 행사장에 오는 도중 경미한 자동차 사고를 냈기 때문에 잠시 조사를 하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김선생에게 다가가 “이곳에 오시다가 접촉 사고를 내셨습니까”라고 묻자 김선생께서는 “그런 일이 없는데…”하며 의아해하셨다. 그때 청년들이 다가와 김선생에게 “잠시 행사장 밖에 나가서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이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그들은 김선생을 향해 “FBI다. 당신을 미국 국가기밀 유출 혐의로 체포하겠다”고 알리고 바로 김선생을 연행해갔다.
내가 보는 앞에서, 그것도 한국 무관부가 국군의 날 행사를 열고 있는 곳에서…. 하늘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행사장으로 되돌아온 나는 생각이 복잡해 식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랐다.
행사가 끝나고 손님들이 행사장을 떠날 때 나는 행사 주최측 인사로서 손님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는데, 그때 우리 행사 요원 한 명이 무심코 나를 향해 스냅 사진을 찍었다. 안화된 사진 속에 나와 내 아내의 얼굴은 잿빛 그 자체다. 나는 나와 김선생의 일생이 무너지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그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나는 김선규 국방무관과 박건우(朴健雨) 대사에게 모든 것을 보고했다. 얼마 후 미 국무부는 나를 사실상의 ‘기피인물’로 지목해 미국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기자들이 몰려왔다. 무관부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피한 나는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이동해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FBI에 연행된 김선생께서 받은 고통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나 또한 그때가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오랫동안 불교를 믿어왔다. 불교는 스스로 견성(見性)해서 해탈하는 종교다 보니 어렵고 힘들 때 기댈 대상이 없다. 나는 나를 낳기 위해 지성으로 불공을 드린 할머니(李小順伊)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어렵게 태어난 나를 귀여워해주셨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격려해주셨다. 여장부셨던 할머니는 내가 소령으로 갓 진급했을 때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1996년 9월24일 FBI가 로버트김을 연행해간 직후의 백동일 무관 부부.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다.
함정병과에서 정보병과로 옮겨오면서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오게 된 나는, 제독이 되고 싶다는 큰 꿈을 품었다. 주미무관이 되면서는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좋아하던 담배마저 끊었다. 조국에 대한 열정으로 나의 의무를 다하면 명예로운 군인이 될 수 있다고 믿고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나는 지금 기피인물로 지목돼 한국으로 추방되고 있다.
그렇게 처절한 심정으로 앉아 있는데 까맣게 잊고 있던 할머니가 떠오른 것이다. 나는 속으로 ‘할머니, 할머니…’를 외쳐 부르며 울고 또 울었다. ‘서울대학에만 가면 똥 묻은 중의라도 팔겠다’시며 큰아들인 나를 편애하시던 아버지의 얼굴도 떠올랐다. 나는 3년의 무관 임기가 끝날 때쯤 아버지(白相基)와 어머니(金貴岳)를 미국으로 초청할 생각이었는데, 그 일도 해보지 못하고 미국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이 억울하고 또 한스러웠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기무사의 처장급 장교로부터 사건 경위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처장급 장교가 조사에 나선 것은 그래도 나를 예우해준다는 뜻이리라. 나는 “로버트김 선생께 단 한푼의 금품도 주지 못했다. 그분께서는 위기에 처한 조국을 생각하시고 협조하다 체포되었다”며 모든 것을 소상히 밝혔다. 기무사는 나를 죽일 놈으로 보지는 않았던 듯, 내 진심을 들어주는 선에서 조사를 마무리지었다.
그후 나는 다시 첩보부대로 돌아갔다. 그 부대는 1년에 한 번씩 미군과 연합작전을 하는 곳인데, 미군측은 내가 있는 부대와는 작전을 할 수 없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기피인물로 쫓아낸 나와 함께 작전 하는 것을 꺼렸던 것이다. 과거 내가 근무했던 부대로 옮겨가야 했다.
국방부와 해군의 배려
미군은 내가 진급하지 못하도록 유형무형의 압력을 가했다. 그런데도 국방부와 해군은 나에게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김동진(金東鎭) 국방장관께서는 나에 대한 관심을 표해주셨고 류삼남(柳三男) 총장께서는 나를 친정이나 다름없는 첩보부대장에 임명해주셨다. 과거 이 부대장은 제독(준장)이 맡았다. 류총장께서는 미국의 요구로 나를 진급시킬 수는 없지만 제독이 맡는 자리에 보내줌으로써 배려해주신 것 같았다. 이 부대장을 하면서 나는 정보병과의 최고위직인 병과장(兵科長)까지 맡게 되었다.
대령 계급장을 달고 제독이 맡는 자리에서 병과장을 겸하는 것을 끝으로 나는 해군을 떠났다.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해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국은 내가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제대를 앞두고 나는 언젠가 국가가 위기에 처해 다시 나를 군인으로 불러준다면 제일 먼저 응소할 것을 다짐하며, 역을 면하는 ‘퇴역(退役)’ 대신 예비역을 선택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군인이 되고 싶다.
[제3부] 로버트김을 위하여
‘짧은 만남 긴 기억.’ 로버트김 선생과 나의 인연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짧은 만남은 선생과 나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김선생은 7, 8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영(金尙榮·90)옹의 장남인데, 연로하신 그의 부친께서는 치매와 뇌졸중으로 건강이 매우 위중하다고 들었다. 나는 부디 김선생께서 부친을 임종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김선생은 버지니아주 한인교회의 장로로서 독실한 신앙심을 닦아오신 분이다. 그의 부인 장명희(張明熙·60) 여사의 오빠는 해군 제독(준장) 출신인 장세환씨다. 김선생은 아무 사심 없이 조국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의 애국심은 1996년 당시 미국이 생각한 ‘미국의 국익’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지금 많은 사람들이 ‘국익’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국익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정의 내리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2년간의 주미무관 생활을 통해 나는 미국이 생각하는 국익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낸 미국의 국익은 여섯 가지로 정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