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 비서실을 장악한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 인사들에게 정보와 권력이 집중되고 있다. 대통령의 메시지, 외부 일정도 주로 이들에 의해 기획되고 있다. ‘노무현시대’ 신주류로 급부상한 청와대, 국회, 정당, 법조계, 시민단체 내부 386 운동권 이너서클의 인맥과 최근 활동내역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모 신임 NSC 국장은 이 과정에서 발탁됐다. 그는 연세대 82학번으로 ‘열성적인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청와대 비서진 내에서도 잠시 화제가 됐다. 그러나 박국장은 기자에게 “NSC 소속 요원은 이름과 경력을 외부에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 운동권 출신이 국가안보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NSC에 임명된 예는 거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청와대에서는 이런 일이 더 이상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고 한다.
노대통령은 학생운동권 출신을 청와대 비서진과 내각에 전면적으로, 대거 기용했다. 박국장의 사례는 ‘운동권 중용’의 화룡점정이었다.
청와대 비서관 38명 중 14명이 운동권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국회, 정당, 법조계, 유력 시민단체, 기업에서도 운동권 출신이 급부상하고 있다. 1990년대에도 주요 선거를 전후해 운동권 출신들이 조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치·사회 주류층의 하부구조에 운동권이 편입되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취임 이후 운동권은 정치·사회의 기존 주류들을 끌어내리고 자신들이 주류가 되고 있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2002년 대선은 사회 주류의 교체가 본질이었다”고 말한다.
범운동권의 네트워크와 문화를 모르고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제대로 알기 어렵게 됐다. ‘주사파’나 ‘운동권’이라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던 사람들도 이젠 운동권을 ‘공부’해야 할 처지가 됐다. ‘권력 이너서클’에 들어간 운동권 출신들이 요즘 어떻게 활동하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1980년대 학생운동에 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이든, 운동권을 폄하하는 사람이든 모두에겐 같은 관심거리가 있다. 운동권 출신이 득세해서 주류가 된 이러한 사회현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냐는 문제다.
참여정부에서 장·차관급인 청와대의 실장, 수석비서관, 보좌관 자리 중 안보, 외교 분야를 뺀 비서실장, 정무수석, 민정수석, 국민참여수석, 정책수석 자리가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 진보적 시민단체 활동 경력자들로 모두 채워졌다. 1, 2급 비서관과 3, 4급 행정관으로 내려오면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진출은 더욱 두드러진다. 38개 비서관 자리 중 14개 자리가 학생운동 출신자들에게 돌아갔으며 비서관의 절반 정도가 ‘범민주화 세력’의 범주에 포함됐다. 나머지 비서관 대부분도 김대중 정권 인사, 혹은 외부 진보성향 인사들로 채워졌다.
행정관의 경우 별정직으로 배정된 자리의 절대 다수가 1980년대 당시 대학 총학생회 간부로 활동했던 운동권 출신 인사들에게 돌아갔다. 대략 5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비서실장, 정책실장을 비롯 정무, 민정, 홍보, 국민참여, NSC 등 청와대 전 분야에 걸쳐 정책을 입안하는 실무형 자리에 두터운 ‘운동권 벨트’가 형성된 것이다(이들의 이름, 직책, 청와대 내에서의 위치, 학생운동 경력,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은 참조).
노무현 대통령은 내각은 전문성을 주로 따져 인선하더라도 청와대는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함께 일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노대통령과 마음이 맞는 사람은 학생운동 출신자들이었으며 대통령의 의중대로 청와대 인선이 현실화된 것이다. 특기할 사실은 청와대에 들어온 학생운동 출신자들은 운동권 인사들 중에서도 노대통령과 직접적 인연을 맺어왔거나 대선 때 민주당에서 근무한 인사들에 거의 국한됐다는 점이다.
노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386 운동권 참모들이 보낸 편지에서 ‘대통령을 도구로 사용해 우리의 이상을 실현시키겠다’고 언급한 부분에 깊은 공감을 나타냈다. 이 소식을 듣고 여야 정치의 상당수 인사들은 경악했다. 노대통령이 그렇게까지 운동권 출신자들을 배려하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논리대로라면 ‘노무현 정권의 운동권 참모’가 아니라 ‘운동권 정권의 노무현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다. 과거 노대통령은 “나는 운동권 출신자들에게 포위되어 있어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지난 1990년 3당 합당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라가지 않은 이유를 제시하면서 언급한 내용임). 향후 참여정부에서 운동권 출신 참모들의 의사가 곧바로 국정에 반영될 것이라는 추론도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청와대 내 386 참모들의 성향에 대한 궁금증은 커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청와대가 엄격한 취재제한조치, 공무원 외부인 접촉 자제 조처를 내리면서 정·재계측의 정보갈증은 더 심해지고 있다. 청와대 인사들의 프로필을 정리한 책이 잘 팔릴 정도다. 청와대 386 학생운동권 참모들로 구성된 이너서클의 문화와 성향은 어떠하며 이들은 최근 청와대 내에서 어떠한 활동을 하고 있을까.
청와대 한 비서관이 기자에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대통령 취임 2개월째가 되면서 청와대 386 참모들 사이에선 선후배문화, 탈지역성, 대중지향성, 기업에 대해 거리 두기라는 공통 분모가 형성되고 있다. 요즘 청와대의 386 참모들은 노대통령에게 구두 보고하거나 문서를 올릴 때 대통령 호칭 뒤에 ‘님’자를 붙이지 않고 있다. 이는 지난 3월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사항이다. 386 참모들은 즉시 이를 이행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통령을 호칭할 때도 ‘대통령께서…’라고만 한다”고 말했다.
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가동되고 있던 2월 하순, 노대통령 측근이 작성한 ‘청와대 비서실 운영방안’이라는 문건은 “대통령님의 언사(메시지) 관리가 앞으로 정국운영의 핵심이다. 따라서 대통령님의 메시지 기획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라며 ‘대통령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었다.
청와대 일상호칭이 된 ‘형’
참모들끼리 호칭할 땐 자신과 학번이 같거나 낮을 경우 현재 지위의 고하에 관계없이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천호선 청와대 참여기획비서관(연세대 81학번)은 노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이광재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연세대 83학번)이나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고려대 83학번)을 지칭하면서 “광재가…” “희정이가…”라고 한다. 학번이 높은 사람을 부를 때도 역시 직위를 부르지 않고 “~형”이라고 통일해서 부른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민주당 임종석 의원(전대협 3기 의장 출신)을 지칭하면서 “종석이 형이…”라고 했다. 노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한 386 인사는 인수위 시절 한 기자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무심코 “무현이 형이…”라고 했다가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당선자께서…”로 정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운동권 특유의 선후배 문화는 기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이어진다. 청와대 출입기자들 중에도 1980년대 초 중반 학번인 운동권 출신이 여럿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청와대 관계자들을 상대로 취재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이라는 호칭을 쓴다. 한 출입기자는 “DJ정부 때까지만 해도 청와대 고위 관계자를 ‘형’이라고 부르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386 운동권 참모들 중에는 호남 출신이 가장 많다. 그러나 이들은 출신지역으로 친소관계를 따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청와대에 연세대, 고려대 출신 386 참모들이 서울대 출신보다 더 많이 입성하면서 사람을 만날 땐 “출신 대학이나 단과대가 어디냐, 몇 학번이냐”에 더 큰 비중을 둘 때가 많다. 노대통령의 한 386 측근은 기자에게 “고대 출신 386 동문들이 희정이를 위해 SM5를 마련해 준 건데, 그 학교 동문 풍토가 원래 그런 점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 측근은 “그렇다고 386들끼리 학교로 편가르는 일은 없다”고 덧붙였다.
전대협 대의원 출신 인사들의 모임인 전대협 동우회의 회식 모임. 이들 중엔 현재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386 측근으로 활동하는 인사들도 있다.
같은 이유로 386 측근들은 청와대에서도 ‘대중지향적’인 기획안을 수립하는 데 능하며, 이런 기획을 대통령이나 수석비서관에게 자주 보고해 대통령을 이끌고 있다. 예를 들어, 청와대 관계자가 기자에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노대통령이 특검제 수용 전 사회 각계 명망 있는 원로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특검 수용여부에 대한 여론을 청취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도 386 측근의 기획력에서 나왔다고 한다. 당시 연락업무를 맡은 한 386 참모는 노대통령의 정신적 스승으로 알려진 부산의 송기인 신부에게도 참석을 권유했는데 송신부는 이 참모에게 “그 날은 바빠서 못 간다”고 거절했다. 이 기획은 성공적이었다는 게 청와대의 평가다.
대통령을 이런 방식으로 이끈 사례는 또 있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기자에게 “요즘 대통령을 자주 만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야당 대표가 그러기(대통령과 만나기) 힘들었는데 좋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주요 현안에 대해 야당 지도자의 의견을 묻고 협조를 구하는 것도 청와대 내 젊은 보좌진의 구상에서 나온 일로 알려지고 있다.
이라크전 파병반대 여론이 드셀 때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은 시민단체 대표와의 면담을 추진하겠다고 언론에 밝혔다. 노대통령은 “만나거든 설득하려 하지 말고 얘기를 잘 들어보라”고 말했다. 그런데 대통령의 이러한 조언까지 언론에 공개한 마당에 시민단체 대표들이 막상 면담을 거절하자 유수석은 입장이 난처해졌다. 시민단체가 청와대의 면담제의를 거절할 수도 있다는 부분을 계산에 넣지 못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청와대가 파병반대 여론에도 귀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대통령 동선 실질적으로 기획
애초 노무현 대통령의 평검사와의 대화를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은 만류했다. 그러나 청와대 386 참모들이 검찰에 대해 갖고 있는 대체적 정서는 ‘반감’ 쪽에 가까웠다. 노대통령이 TV 생방송에서 “검찰 상층부를 안 믿는다”고 한 것은 386 참모들의 이런 정서가 그대로 표출된 것이다. 민주당의 386 출신 한 보좌관은 “단순하게 말해 현직 검사 중엔 우리 편(운동권)이 한 명도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시위전력이 있으면 검사 임용이 안 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학생운동 과정에서 구속 등 사법 처리된 경험이 있는 청와대 386 참모들 중 상당수는 특히 ‘검찰 공안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강금실 법무장관이 공안부 폐지를 언급한 것도 이러한 ‘정권 주류층’의 정서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청와대의 386 참모들은 대체로 대학시절 총학생회에서 활동했으므로 당연직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의원 출신이 많다. 전대협의 후신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 합법화는 어쩌면 자신들의 과거를 정당화하는 일일 수도 있다. 노대통령은 최근 “한총련을 합법화해주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는 386 운동권 참모들이 대거 청와대에 들어왔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여전히 청와대는 검찰, 한총련, 재벌 등 정치·사회를 아우르는 제 세력들의 흥망성쇠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노대통령과 코드가 일치하는 386 측근들이 이들 세력들의 미래를 상당부분 좌우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386 참모들은 특히 재계에 대해서도 거리감을 두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노대통령이 “책잡힐 일 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해온 것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안면이 없는 외부인사들과는 잘 만나려 하지 않으며 아예 청와대와 가까운 광화문 부근은 약속장소로 꺼리는 편. 청와대의 한 386 측근은 “재계와 직접 관련 없는 부서의 비서관이나 행정관이 재계 인사를 만날 이유는 없다. 재계와 관련 있는 부서 역시 굳이 재계 인사를 만날 필요가 있겠느냐”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외부에선 이를 두고 “대통령을 둘러싼 386 측근 그룹들이 배타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청와대가 현재 언론과 벌이고 있는 높은 수준의 긴장관계에 대해 모든 386측근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최근 모 언론사 기자가 공식창구인 청와대 대변인실이 아닌 민원실을 통해 청와대 고위관계자인 A씨 집무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그 기자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면회신청서의 직업란에 무심코 “기자”라고 써버린 것이다. 결국 경호원으로부터 출입을 제지당했다. 나중에 A씨는 그 기자에게 “다음 번엔 ‘무직’으로 쓰라”고 농담을 던졌다. A씨는 “기자가 청와대에 못 들어오도록 이렇게 막아야 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며 여운을 남겼다.
또 다른 청와대 386 참모는 ‘제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백서’ 최종본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각 분과에서 생산된 주요 회의록, 보고서가 대부분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 측근은 “언론에 이미 보도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백서를 만든 것 같다”면서 “빠진 내용을 신문기자에게 주면 아마 한 달 동안은 기사걱정 안 해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기자들의 자율적 취재활동을 제한하는 대신 대변인 브리핑, 청와대 브리핑이라는 이메일 소식지, 인수위 백서 등 공개 자료를 공평하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언론자유를 보장하겠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인수위 백서가 중요한 알맹이는 거의 빠진 채 발간됐다는 것은 청와대가 스스로 밝힌 언론정책을 지키지 않은 일로 비칠 수 있다.
‘토론공화국’이라는 별칭답게 참여정부 청와대에선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자유토론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외부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백서 문제 등은 이와는 다른 사례다. 갈 방향을 미리 정해놓은 채 각론적 사안에만 국한되는 토론은 큰 의미가 없다. 청와대 내에서 주류가 제시하는 큰 방향에 대한 이견이 자유롭게 개진되고 소수 의견이 존중되는지에 의문이 남는다는 것이다. 청와대 386 참모진이 학생운동권 출신자들 중에서도 노대통령과 직간접적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로 국한돼 구성됐다는 점도 이런 우려를 낳는다.
이와 관련, 민주당 한 의원은 “현재 청와대의 386 참모들은 대통령의 신임을 외부에 과시하지 않고 각자의 업무 한계 내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1980년대 학생운동권은 내부 민주화엔 실패했다. 외부 의견을 수렴하지 않는 조직내 일방적 분위기가 문제였다. 청와대의 386 참모들이 이러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청와대, ‘토론공화국’ 맞나?
노무현 정부의 행정부에는 윤석홍 교육부총리(전국민주화교수협의회 의장 출신), 강금실 법무부 장관(민변 부회장 출신),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1986년 민통련 활동으로 구속 경력), 김영진 농림부 장관(1979년 광주YWCA사건으로 투옥 경력),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대학시절 야학 경력), 한명숙 환경부 장관(1979년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으로 구속 경력), 지은희 여성부 장관(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출신),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영화 ‘박하사탕’ 감독), 권기홍 노동부 장관(진보적 학자 모임인 대구사회연구소 출신) 등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 경력자, 진보적 사회운동 경력자들이 포진해 있다. 20명의 내각 장관 중 절반에 육박하는 9명이나 된다.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치닫는 운동권 출신자들의 중심은 청와대에 들어간 노대통령의 386 참모와 이들 장관들이다. 이들 1진을 둘러싼 2진은 국회, 정당, 재야 등 정치권에서 활동중인 운동권 출신자들이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은 법조계, 시민단체, 일부 기업체에서도 중심축이 되고 있다. “각계의 운동권 출신들은 ‘학생운동 출신’이라는 연대의식이 강한 편이며 여러 가지 인적 네트워크를 이루어 범세력권을 이룬다”는 게 ‘제3의 힘(386 출신 정치모임)’ 김종욱 총무부장의 설명이다.
입법부에선 주역인 국회의원 270명 중 시국사건 구속 경력이 있는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출신 의원이 44명에 이른다. 2003년 3월6일 전대협2기 의장 출신인 오영식(36)씨는 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함으로써 16대 국회 최연소 386 국회의원이 됐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의 국회진출은 그 역사가 짧지 않다. ‘총선 승리’를 위한 ‘젊은 피 수혈’은 이미 지난 1960년대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386 운동권 출신자들의 경우 1996년과 2000년 총선 때 세대교체를 내건 여야 정당의 수도권 선거 전략에 따라 대거 공천을 받아 국회에 진출했다( 참조). 현재 16대 국회의 386 학생운동권 출신 의원은 10명 안팎이다. 민주당 우상호 지구당위원장(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 허인회 지구당위원장(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 한나라당 고진화 지구당위원장(성균관대 총학생회장 출신) 등은 2000년 총선에서 낙선, 재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은 정당 조직과 의원 보좌진에도 대거 포진해 있다. 민주당 곽윤석 보좌관(임종석 의원)에 따르면 민주당 보좌관과 당 간부 350여 명 중 절반이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민주당은 하부 구조로 갈수록 학생운동권 세력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연세대에서 지하서클활동을 이끌었던 최동규 당 기조국장, 최민식 당 정세분석국장(연세대), 김두수 정치개혁특위 사무국장(고려대 82학번) 등이 당내 운동권의 중심이다. 노대통령의 비서 출신인 유수동 국가전략연구소 부장(국민대 88학번)은 안희정 부소장의 측근이다. 국회의원 보좌관 중에도 곽윤석(동국대 총학생회장 출신, 전대협 선전국장), 권재철(경희대 총학생회장 출신), 정기남(고려대 83학번)씨 등 학생운동권 출신이 상당수다.
한나라당의 경우 민주당처럼 많은 수는 아니지만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중심으로 386 출신들이 집결해 있다. 김덕수(서울대 77학번), 김범진(서총련 국장 출신), 박영필(숭실대 총학생회장)씨 등 20~30여 명에 이른다.
한나라당 개혁파의 고민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회내 학생운동출신 의원들 사이에서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학생운동권 출신자들이 한나라당 의원과 민주당 의원으로 갈라선 결정적 이유는 1987년 김영삼·김대중 후보단일화 논쟁이었다. 후보단일화에 찬성한 운동권 인사(김영춘 의원 등)는 1990년대 들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끈 한나라당 정치세력을 택했고 1987년 당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한 운동권 인사는 민주당 행을 택했던 것. “이때의 감정의 골이 깊어서인지 김대중 정권은 한나라당 의원 30여 명을 영입해올 때 한나라당 행을 택한 운동권 출신 의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김덕수 보좌관)고 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양 진영 운동권 출신의 갈등은 해소되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또한 2002년 대선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각계에 진출한 운동권 출신자들의 절대 다수가 노대통령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된 것도 한나라당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입지를 어렵게 하고 있다. 2000년 총선 무렵 운동권 출신자들이 각각 반반씩 한나라당과 국민회의 행을 택한 것과 비교했을 때 한나라당으로선 충격적인 변화인 셈이다.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는 이와 관련 “386세대 유권자 중 상당수가 ‘1980년대 운동권’에 향수를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당으로선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새 정부 들어 법조계의 무게중심은 보수성향의 ‘대한변호사협회’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으로 이동하는 양상이다. 노무현 정부에 7명의 장관, 청와대 수석, 국정원장을 배출한 민변은 운동권 출신 변호사의 산실이다. 1980년대 후반 대학을 졸업하게 되는 운동권 출신 상당수가 사법고시에 도전, 변호사가 된 것이 지금의 민변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1984년 구속된 이정우 서울대 총학생회장(법대 81학번)은 이후 행정·사법·외무 등 3개 고시에 모두 합격했으며 현재 민변 회원이다. 이변호사는 노대통령 측근들이 중심이 된 ‘제3의 힘’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민변의 회원은 350여 명. 이 가운데 이재화 변호사(고려대 82학번), 문광명 변호사(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운동권 출신인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서울대 수석입학, 사법시험 수석합격), 지하서클활동 경력이 있는 김주현 변호사(서울대 81학번), 김인회 변호사(서울대 83학번) 등 학생운동 출신 변호사들이 상당수 가입해 있다. 김선수 민변 사무총장은 “민변은 사회변혁의식을 갖춘 법조인들의 집합체”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가 민변을 정권 엘리트 충원을 위한 인재풀로 활용하고 있는 대목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노대통령은 취임 이후에도 민변 회원 자격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새 정부 출범 후 민변과 함께 사회의 리더그룹으로 급부상한 곳이 참여연대다. 노무현 정부가 참여정부로 명명한 취지는 1994년 참여연대가 ‘참여’라는 단어를 쓰면서 내세운 ‘참여민주주의’의 취지 그대로다. 노무현 정부 들어 대기업들을 얼어붙게 했던 SK 최태원 회장의 구속, 두산그룹 오너 일가의 150억원대 신주인수권부사채 소각은 모두 참여연대에서 발화된 일이었다.
참여연대측에 따르면 참여연대는 전문가집단과 운동권 출신자들의 절묘한 결합체다. 이슈의 선택, 운동방식 결정, 대시민 홍보전략은 운동권 출신들이 맡고 변호사, 교수, 회계사 등 전문가집단은 운동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해당 분야 심층 조사연구 활동을 맡는 식이다. 김기식 사무처장(서울대 인류학과 85학번), 박영선 사무처장(숙명여대 총학생회장 출신, 영문과 85학번), 이태호 정책실장(서울대 서양사학과 86학번, 서울대 총학생회 사무국장 출신), 김민영 시민감시국장(서울대 인류학과 86학번, 서울대 총학생회 사무국장 출신), 이재명 투명사회팀장(서울대 금속공학과 88학번), 박근용 경제개혁팀장(서울대 외교학과 91학번) 등 현재 참여연대에서 일하는 상근 활동가 대부분이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재계로 진출한 386 운동권 출신 인사 중엔 박규현 이네트 대표(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장영승 나눔기술 대표(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이의범 가로수닷컴 대표(서울대 계산통계학과) 등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 내에서 386 운동권 출신들은 주로 부장급. 정권 내부와 사적 채널을 갖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정경유착을 끊기 위해 차라리 잘됐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정권 핵심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예측이 안되어 불안하다”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기업 S사는 386 학생운동권 출신인 민주당 모 인사를 상무로 영입했다가 최근 방출해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학생운동 세력은 1960년 4·19세대를 기점으로 6·3세대(1965년 한일수교 반대 6·3시위의 주역), 긴급조치세대(1970년대 긴급조치 반대 세력), 민청학련세대(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국가전복 혐의사건 연루자들)을 거쳐 80년 서울의 봄 세력(1980년 5월15일 서울역 10만 시위 주역들)에 이어진다. 전두환 정부가 1980년대 초 각 대학 총학생회 조직을 폐쇄시키자 학생운동은 지하로 잠입했다. 그러다 다시 학원자율화조치가 내려져 1984년 가을부터 각 대학에서 총학생회가 부활됐다. 1985년엔 각 대학 총학생회의 느슨한 전국단위연합체인 전학련과 그 산하조직인 삼민투가 설립됐다. 김민석 전 의원은 전학련의장을 역임했다. 허인회 민주당 동대문을 지구당 위원장은 삼민투 위원장이었다. 그러나 학생운동권은 1986년 들어 반미투쟁이냐 계급투쟁이냐를 놓고 이른바 자민련과 민민련으로 갈라졌다. 1986년 이를 다시 애학투련으로 합치자는 취지로 건국대에서 행사를 하는 과정에 공권력이 투입돼 건대 사태가 발생했다.
1987년 드디어 전국 총학생회장의 연합체인 전대협이 출범했다. 1기 전대협 의장은 이인영 고려대 총학생회장 (현 민주당 구로갑 지구당 위원장)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학생운동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일궈냈으나 민주세력 후보단일화가 실패하면서 대선 패배의 좌절을 겪었다. 전대협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상징이었으나 1993년 한총련으로 개명되면서 사라졌다. 전대협은 주로 반미투쟁 성향의 NL계열이 주도했다. 노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 부소장도 이 시기 활동했던 주사파의 일원이었다. 이 과정에서 문용식씨의 ‘깃발’, 조성오씨의 ‘철학에세이’, 김명인씨의 ‘반파쇼학우투쟁선언문’ 등 감성을 자극하는 운동권의 명저들이 나왔다.
1980년대 수십만 명의 대학생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다. 이들 모두를 ‘광의의 학생운동권’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전대협 출신자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386 학생운동권은 1980~88년 사이 대학 총학생회에서 주요 간부직을 역임한 인사들을 일컫는다. 특히 정계에 진출한 386 운동권은 1980년대 전국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한양대 등 이른바 수도권 5개 대학과 지방의 전남대, 부산대, 경북대 총학생회 간부들 중에서 주로 배출되었다. 이럴 경우 386 학생운동권 출신자들의 실제 인재풀은 훨씬 좁아진다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청와대와 국회에 진출한 386 운동권도 거의 대부분 이들 8개 대학 총학생회에서 배출된 인사들이다.
‘운동권 주류론’ 논쟁
흥미로운 점은 1990년대 들어 국회의원 공천을 받은 학생운동 출신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유명 대학 총학생회장 출신이라는 사실이다(송영길, 이성헌, 임종석, 김성호, 김영춘, 심재철 의원 등). 여기에다 ‘변호사’라는 타이틀이 붙은 경우도 많다. 학생운동권 출신자들도 정계에 진출하려면 ‘간판’이라는 세속적 장벽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이러한 타이틀을 갖춘 학생운동 출신자들은 이미 1990년대 세 차례 총선 때 대부분 기성 정치권의 러브 콜을 받아 정계에 진출한 상태다. 따라서 학생운동권에서 ‘남은 인재풀’은 훨씬 적다는 얘기도 나온다. 더구나 1990년대 이후 학생운동권은 위축돼 90년대 학번에선 학생운동권 인맥이 거의 고사한 상황이다(1990년대 중반 이후 한총련 대의원 급감).
상당수 대학교수들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학생운동권이 사회의 주류를 완전히 대체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서울대 총학 출신인 참여연대 김민영 국장은 반대 견해를 내놓고 있다. 김국장은 “기존 정치권의 386 학생운동권 출신들은 신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운동권의 인재풀이 협소한 데다 90년대 학번의 충원도 사실상 끊겼다. 학생운동 세력은 소수세력일 수밖에 없으며 이들이 사회주도세력의 지위를 잠시 동안 차지할 수는 있겠지만 이내 잃을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1993년 10월 연세대 토론회에서 경실련의 서경석 당시 사무총장은 1980년대 학생운동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념적 편향, 독단적 의사결정 구조, 합리적 대안부재가 비판의 이유였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학생운동 세력을 권력의 중심부에 포진시켰다. 정치권과 사회 각 분야에서 19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의 르네상스가 찾아왔다. 그러나 주류가 된 운동권은 지금 또다시 ‘편향과 독단’의 논란에 직면해 있다. 여권 내부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 운동권의 이념과 미래의 운명을 건 ‘투쟁’은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