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 주기로 ‘큰場’온다
- 수급·재료보다 경기가 우선
- 손절매 달인이 진짜 고수
- 투자자금과 실물자금을 구분하라
- 고양이 줄 생선은 남겨놓고 발라먹자
- 주가는 언제 오르고 언제 내렸을까. 왜 오르고 왜 내렸을까.
- 어떤 테마가 어떤 상황에서 빛을 발했을까. 종합주가지수 1000 돌파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날은 언제 다시 올 것인가.
- 대한민국 1세대 애널리스트 김경신이 25년 현장 체험을 통해 분석한 우리 증시의 흐름과 가슴에 새겨야 할 투자 10계명.
수많은 투자자의 환호와 한숨이 어린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그래서인지 일찍부터 변화무쌍한 주식시장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러던 차에 대한증권업협회에 입사한 게 1978년 4월이었으니 증권계에 종사한 지 벌써 만 25년이 지난 셈이다. 증권업협회 조사부에 근무한 지 10년 만인 1988년 초에 대유증권(현 브릿지증권)으로 자리를 옮겨 그후 15년 동안 리서치 업무를 담당했으니 싫증도 날 만한데, 해도 해도 모자란 듯해서 그런지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난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내겐 보잘것없다 해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하고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책도 쓰고, 강의도 하고, TV와 라디오에서 방송도 하고, 신문에 기고도 하면서 지내왔다. 그러다 보니 남해안의 작은 섬에 산다는 어부로부터 휴전선 근처에서 병역의무를 치르고 있다는 사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로부터 증권투자와 관련한 문의를 받곤 했다.
필자는 지난 25년간 증권 제도 연구와 기업 분석, 그리고 차트를 통한 투자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주관과 방법론을 갖고 투자자들 앞에 서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래도 늘 미흡한 느낌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넘치는 자금, 건설로! 건설로!
1978년 봄, 증권업협회에 입사할 당시 국내 주식시장은 해외 건설경기 활황으로 건설주 열기가 뜨거웠다.
1973년 10월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1배럴당 3∼4달러 하던 국제 유가가 11∼12달러까지 폭등해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치명타를 맞았다(제1차 오일 쇼크).
하지만 그후 국내 건설업체들이 본격적으로 중동 건설시장에 뛰어들어 ‘오일 달러’를 벌어들였고, 이로 인해 1970년대 중반부터 시중 유동성이 높아진 데다 건설주 붐이 일면서 주식시장도 상승세를 타게 된 것이다. 1975∼76년에 건설주는 연평균 200%를 넘는 상승률을 보였고, 1977년에는 135%, 1978년 들어서도 상반기 중에만 99%라는 기록적인 주가 상승률을 실현하는 등 과열 장세가 이어졌다.
이처럼 1978년에는 넘쳐나는 시중 자금이 부동산시장과 주식시장을 넘나들었는데, 부동산시장에 대한 규제가 체계화한 것도 이때부터인 듯하다.
당시 들리는 얘기로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은마아파트를 지어놓고 한동안 분양이 잘 안 돼 고전하던 한보종합건설이 ‘한 방에’ 분양을 끝냈을 정도였다. 그 무렵 잘나가던 건설회사들은 경쟁적으로 번듯한 사옥을 마련했는데, 한보건설은 은마아파트가 사운(社運)을 일으키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보고 아파트 단지내 상가에 둔 본사를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주식시장의 열기도 대단했다. 특히 건설주들은 한동안 ‘팔자’ 물량이 없어 시세판이 온통 기세 상한가(전일 종가보다 높은 상한가로 ‘사자’ 주문이 나왔지만, ‘팔자’ 주문이 없어 거래가 체결되지 않을 경우의 상한가 ‘사자’ 주문)로 표시되는 바람에 ‘사자’ 쪽에 붉은 삼각형이 쭉 연결되기도 했다. 회사 이름에 ‘건설’자만 들어 있어도 건설회사인 줄 알고 페인트 제조회사인 ‘건설화학’에까지 ‘묻지마’ 매수 주문을 냈다는 사연도 있었다.
1977년에는 건설주 가격이 급등을 거듭하자 급기야 일부 건설주의 경우 매수 주문을 내기 전에 매수 대금의 100%를 미리 내도록 했고, 전날 종가보다 높은 가격의 매수 주문을 인정하지 않는 ‘주가동결조치’ 등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의 증권주나 1990년대 말의 벤처기업 주식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만큼 건설주의 인기는 그야말로 ‘짱’이었다.
당시 증권회사 객장에는 지금의 전광판 대신 상장회사 이름이 빼곡이 쓰여 진 커다란 칠판이 있었는데,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주문시세와 체결시세를 받아적느라고 분주히 뛰어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1978년 여름 종합주가지수 228.8(1983년부터 시가총액식 종합주가지수를 채택했는데, 1980년 1월4일을 100으로 계산했기 때문에 이를 역으로 환산한 수치임)을 고점으로 꺾인 주가는 이후 1980년 초까지 침체의 나락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979년에 제2차 오일 쇼크가 닥치자 1배럴당 12달러 하던 국제 유가가 30달러까지 치솟아 우리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주식시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령 1978년 초 4000원(액면가 500원)이던 대림산업 주가는 8900원을 고점으로 그 해 말에는 2000원까지 떨어진 후 1980년 초까지 하락세가 이어졌다. 다른 건설주들도 대부분 큰 폭의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이것이 이른바 ‘건설주 파동’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건설주를 중심으로 투자에 나선 사람들은 한때 큰돈을 벌기도 했지만, 건설주 파동 이후 1985년 가을까지 계속된 주가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대느라 결과적으로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78년 여름을 고비로 주가가 하락세로 돌아선 것은 발행시장과 유통시장의 균형이 깨진 데다, 증권시장에 대한 여러 가지 규제조치로 인해 공정한 주가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78년의 주식 거래량은 1977년보다 7.6%밖에 증가하지 않아 1977년의 전년대비 증가율 115%에 크게 미달했다. 반면에 1978년 주식시장에서의 자금 조달액은 1977년에 비해 79%나 증가, 1977년 증가율(38%)의 두 배가 넘었다. 유통시장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발행시장의 공급량이 너무 많아 주식시장의 수급 불균형이 극심했던 것이다.
또한 건설주 급등에 따라 일부 종목을 ‘감리 포스트’로 묶어 주가 상승폭을 제한하는 바람에 오히려 투기를 부추기는 왜곡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1978년 8월을 고비로 증권거래세 신설 방침, 시가발행제도 도입 검토설, 건설주 유상증자 집중 등이 악재로 작용하면서 1980년 말 종합주가지수는 고점대비 39%나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1985년까지는 그야말로 재미없는 시간들이었다. 특히 1982년에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진 후 증시는 또 한번 추락했는데, 당시 증권회사 객장은 고객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텅텅 비곤 했다. 액면가 500원짜리 현대자동차 주가가 200원에 거래될 정도였다.
그러나 1985년을 넘기면서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자 ‘꿈이 있는 주식이 크게 오른다’는 투자 격언을 입증하듯 자동차 관련주가 각광을 받았다. 현대자동차 주식은 단숨에 1000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투자자들은 증권회사로부터 신용융자를 받아 큰돈을 번 후 단기 급등을 의식해 신용대주로 돌아섰는데, 주가가 더 오르는 바람에 큰 손실을 입기도 했다.
신용융자는 자기 돈이 40%만 있으면 60%는 증권회사로부터 빌려 투자할 수 있는 제도였다. 따라서 주가가 20% 오르면 50%의 투자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자기 돈 100만원에다 150만원을 대출받아 250만원어치의 주식을 산 후 주가가 20% 올랐다면 50만원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이때 투자원금을 100만원으로 치면 투자 수익률은 50%가 되는 셈이다.
대주(貸株)란 증권회사로부터 주식을 빌려 높은 주가에 미리 판 후, 주가가 떨어지면 낮은 가격에 주식을 사서 갚아 주가가 떨어진 만큼 투자자가 수익을 챙기는 제도인데, 요즘은 제도는 살아 있지만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있다. 당시 투자자 중엔 증권사에서 빌린 주식을 고가에 팔았다가 이후 주가가 더 올라가는 바람에 판 값보다 비싸게 주식을 사서 갚느라 손해를 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건설주 파동 이후 7년 동안이나 숨죽여온 주식시장은 1985년 가을부터 꿈틀거리며 종합주가지수 130을 발판으로 상승세를 타게 되는데, 마침내 1989년 4월1일에는 상승률이 무려 8배에 가까운 대망의 종합지수 1000 고지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600원(액면가 1000원) 안팎에 불과하던 은행주들이 2만원(액면가 5000원)을 넘어서기도 했는데, 더욱이 이 과정에서 2∼3차례의 유상증자, 그것도 요즘과 같은 시가증자가 아닌 액면증자가 시행된 점을 감안하면 투자자들이 엄청난 수익률을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주가가 2만원(액면가 5000원)인데 유상증자를 30% 할 경우 1000주를 보유한 투자자라면 300주를 현재 시세와 관계없이 액면가인 5000원씩에 받을 수 있으므로 권리락을 감안해도 주가가 상승세일 때는 여간 큰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증권주 시세도 액면가의 5∼10배는 보통일 만큼 급등했다. 덕분에 증권회사 직원들은 단연 최고의 ‘배우자 후보’로 떠올랐다. 마치 제2 금융권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신용카드회사 직원들이 자사 주가의 급등으로 지난해 상반기에 선망의 대상이 됐던 것처럼. 당시 기업공개나 유상증자로 우리 사주 조합에 가입해 신주를 배정받은 증권회사 직원들에겐 수천만원의 시세차익을 올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1989년 4월을 고비로 주가가 꺾이자 증권주 역시 급락세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 때 대출을 받아 주식납입 대금을 냈던 증권회사 직원들은 오히려 우리 사주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됐다. 일부 증권사 여직원들은 결혼을 위해 퇴사하려고 해도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근무를 계속해야 했다.
대출을 받아 1주당 3만원에 1000주를 배정받은 한 여직원은 주가가 1만원선으로 떨어지면서 2000만원을 물어내야 회사를 그만둘 수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는 결국 약혼자가 2000만원을 마련해 회사로 들고 온 덕분에 ‘해방’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사주를 ‘노비문서’라 부르기도 했다.
1989년 4월1일 종합주가지수가 1007까지 오른 것은 경기 활황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미국 달러화 약세, 국제 원유가격 하락, 국제 금리 하락 등 소위 ‘3저(低) 현상’이 주원인이었다. 이는 GDP 성장률이나 경상수지 등 경기관련 지표가 호조세를 보인 데서도 알 수 있다. 1985년에 1달러당 200엔 정도 하던 환율이 1987∼88년에는 120엔대까지 내렸으며, 1985년 1배럴당 27달러이던 국제 원유가는 14달러선까지 하락했다.
저달러는 일본의 엔화 가치 상승, 즉 ‘엔고’를 의미하는데, 이는 우리 상품의 수출 경쟁력이 일본 상품보다 높아진 것을 뜻한다. 저금리는 기업의 금융비용을 줄여 순익을 늘게 할 뿐 아니라 개인들의 채권 투자를 주식 투자로 이끄는 요인이 된다. 또한 저유가도 국내 기업들의 제조원가를 낮춤으로써 순익 증대에 기여한다.
그러니 1980년대 후반의 3저 현상은 우리 경제와 주식시장에 커다란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1986∼88년에는 매년 11%의 GDP 성장률을 기록했고, 경상수지 흑자도 1987년에 100억달러, 1988년에 145억달러에 달해 활황세와 유동성 증가세를 엿볼 수 있다.
특히 경상수지 흑자폭이 커짐에 따라 유동성이 증가하자 넘치는 시중자금이 주식시장뿐 아니라 부동산시장에도 밀려들었다. 1988년 초만 해도 서울의 32평짜리 아파트 가격은 6000만원 안팎이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두 배 이상으로 올랐다.
아, 외환위기…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주가는 1989년 4월 이후 또 한번 본격적인 하락세로 접어든다. 정부는 1989년 말 투자신탁회사를 통한 자금 지원에 나섰고, 1990년 5월에는 증권시장 안정기금을 설치해 주가를 떠받치기도 했지만, 결국 그해 가을 증권회사들은 주가 폭락의 후유증으로 급증한 담보 부족 계좌, 속칭 ‘깡통계좌’의 일괄 정리를 단행한다.
당시에는 신용거래가 활발해 자기 돈 400만원만 있으면 증권회사로부터 그 1.5배인 600만원을 빌려 1000만원을 투자할 수 있었으니 1980년대 후반에 증권투자로 짭짤하게 재미를 본 투자자들은 레버리지 효과를 이용해 적극적인 투자에 나섰다.
그런데 신용융자를 받아 주식을 산 후 주가가 40% 이상 떨어지면 투자자가 원금을 모두 날리는 것은 물론, 증권회사도 빌려준 자금을 회수할 수 없게 되므로 그 직전에 반대 매매에 나서게 됐다. 이 과정에서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오히려 투자자로부터 돈을 더 받아내야 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투자자들은 그야말로 빈 깡통만 차는 지경에 이른 것. 본전을 잃은 것도 아까운데 생돈을 더 물어내게 생긴 투자자 가운데는 ‘나 몰라라’ 하고 종적을 감춘 경우도 많아 계좌를 관리하던 증권회사 직원이 대신 물어주기도 했다.
1956년 3월3일 국내 최초로 개장한 증권거래시장. 한국전구 등 12개 주식이 거래됐다.
또한 증권시장을 통한 기업의 자금조달 실적이 1989년의 경우 주식과 회사채를 합해 21조6000억원으로 4년 동안 6배나 증가했으며, 특히 이중에서 주식공모 실적은 3조5000억원으로 101배, 상장회사의 유상증자 실적은 11조원으로 44배나 늘어났으니 공급물량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왔는지 알 수 있다.
1992년 8월까지 3년 이상 하락세를 이어가던 주식시장은 외국인들의 직접투자와 경기 호전에 힘입어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마침내 1994년 11월 종합주가지수는 사상 최고치인 1145를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수익가치와 자산가치가 높은 회사들의 주가가 5∼10배나 뛰는 가치투자 바람이 불며 ‘저PER주 혁명’과 ‘자산주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1달러당 140엔까지 올랐던 엔-달러 환율이 1995년 봄 80엔까지 떨어져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우리 경제에 도움을 줬다.
그후 주가는 다시 약세로 기울었는데, 1997년 8월 하순 종합주가지수 600선이 무너지면서부터 심상치 않던 외국인들의 순매도 증가세가 결국은 외환위기를 알려주는 징후였음이 드러났다. 이 무렵 신용거래 투자자를 비롯한 많은 투자자가 1998년 6월 종합주가지수 270선까지 밀린 하락세에서 커다란 손실을 입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주식 영업이라면 항상 선두를 달리던 증권계의 한 후배가 외환위기 파도에 휩쓸려 신용불량자로 낙인 찍힌 끝에 자신이 근무하던 증권회사 건물 앞에서 풀빵 장사를 하는 광경을 지켜보기도 했고, 회사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 바람에 대책없이 길거리로 나앉는 동료들도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GDP·경상수지에 주목해야
경상수지와 GDP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서는 등 경제 침체가 주식시장을 이렇듯 폭락사태로 몰고간 것을 보면 경제와 주식시장의 불가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던 주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반등을 거듭하며 2000년 초에는 1060선까지 뛰어올랐다. 1주당 500원을 밑돌던 서울증권 주가가 1만원까지 치솟았고, 3000원 내외에 거래되던 LG증권 주가가 3만3000원까지 오르는 등 특히 증권주들이 큰 폭의 상승세를 이어갔다. 1999년 4월의 증권업종 주가지수가 320이었는데, 2000년 초에는 무려 3600을 넘어섰으니 폭등장세의 위력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코스닥 시장의 열기는 더 뜨거웠다. 1998년 여름에 2500원(액면가 500원)이던 새롬기술 주가는 2000년 초 30만원을 넘어섰고, 1999년 11월 1만1000원(액면가 500원)이던 다음의 주가는 2000년 초 40만원을 뛰어넘었다. 투자자들은 “단군 이래 최대의 급등장세가 왔다”며 흥분했다.
당시 새롬기술의 자본금은 66억원이었는데, 주가가 액면가의 600배까지 뛰었기 때문에 시가총액이 4조원에 이르렀다. 당시 포스코 주가가 액면가의 20배인 10만원이었으므로 시가총액은 자본금 4824억원의 20배인 10조원 정도였다. 신생 벤처기업 새롬기술의 시가총액이 ‘철강왕국’ 포스코 시가총액의 40%에 달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가 급등의 주요인은 다시 10%를 넘어선 GDP 성장률과 400억달러에 이른 경상수지 흑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뜨겁게 달궈진 주식시장은 그후 2001년 미국 9·11테러 때까지 460선(코스닥지수는 1998년 가을 60선에서 2000년 3월 292선까지 급등한 후 45선까지 하락)으로 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인터넷 관련주에 대한 투자, 소위 ‘닷컴 투자’로 떼돈을 번 투자자가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다시 높은 가격으로 프리코스닥 주식 투자(코스닥 등록 전의 주식을 미리 싼 값에 산 후 그 주식이 코스닥시장에 등록되면 비싼 값에 파는 투자)에 나섰다가 코스닥시장의 침체로 주권 대신 ‘휴짓조각’을 떠안았다.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간 투자였다.
2002년 들어 종합주가지수가 한때 940선에 이르기도 했으나, 이후 경기 회복 지연으로 발목을 잡히며 다시 하락 기조에 접어들고 말았다. 이런 ‘처절한’ 얘기도 들려왔다.
“2002년 초 은행에서 가계 대출을 받아 5000만원을 투자했다가 봄에 7000만원으로 불렸는데, 10월 초에는 2000만원으로 줄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선물 투자로 돌아섰는데, 다시 500만원으로 쪼그라드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옵션시장에서 뒤집기를 시도하며 방황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숫자의 마술’이라고나 할까. 우리 주식시장을 돌이켜보면 크게 봐서 10년 단위의 랠리가 있었다. 즉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를 10년 단위로 쪼개보면 전반기에는 주가가 비교적 약세를 보였고, 후반기에는 강세를 나타냈다. 또한 종합주가지수 1000 돌파는 5년 주기(1989년, 1994년, 1999년 말∼2000년 초)로 이뤄졌다. 이런 주기를 감안해 2004년 이후의 주식시장에 대해 기대를 건다면 억지일까.
증권사가 주최한 재테크 강좌에 몰려든 투자자들
올해의 경우 지난해 6%선을 기록했던 GDP 성장률이 3∼4%대까지 낮아지고 경상수지도 적자로 반전될 우려가 나오고 있어 주가가 지난해 만큼 신장세를 보이긴 어려울 전망이다. 물론 이라크전쟁과 북한 핵문제, 미국 경기와 주가 동향, 외국인 매매 등 우리 주식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다른 변수들도 잘 살펴봐야겠지만, 주가는 무엇보다 경제의 움직임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이제 지난 25년간 마음 속에 새겨온 증권 투자의 ‘금과옥조’ 10개를 투자자들께 전하고자 한다.
첫째, ‘꿈’이 있는 주식이 장수하고, 그 가치는 반드시 주가에 반영된다.
주가는 눈앞의 이익이나 현재의 모습을 반영한다기보다 미래의 기대 가치를 앞당겨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세보다 저평가된 가치주는 언젠가 제자리를 찾아가게 마련인데, 2000년 초 흥구석유 주가가 한 달 만에 4만원에서 100만원 가까이 급등한 데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간 우리 주식시장의 주도주를 살펴보면 1980년 전후의 컬러TV 관련주, 1985년 이후의 자동차 관련주, 그후의 반도체와 이동통신 관련주, 그리고 최근의 벤처기업 주식 등 당장의 실적보다는 꿈을 키워가는 종목들의 주가가 큰 폭으로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주식 투자는 인내의 싸움이다.
좋은 종목을 낮은 가격에 사긴 했지만, 너무 일찍 팔아버리는 바람에 큰 수익을 내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뒷골목의 쓰레기통들을 뒤져댄 끝에 롯데제과 제품을 먹고 버린 포장지가 유난히 많은 것을 발견한 한 친구는 2001년 초 1주당 10만원대에 롯데제과 주식을 샀다가 15만원에 팔았는데, 그후 70만원까지 주가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허탈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 결단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사야 할 때와 팔아야 할 때 생각에만 그칠 게 아니라 즉각 행동에 나서는 자세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주식을 바닥권에서 사는 건 쉽지만, 상투권에서 파는 것은 훨씬 어려운 것 같다. 아마도 사람의 욕심이 바닥권에서보다는 상투권에서 더 커지기 때문일 것이다. ‘천정 3일, 바닥 100일’이란 증시 격언을 염두에 두고 1년에 한두 차례 오는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 특히 손절매를 해야 할 때는 과감히 매도한 후 더 낮은 가격에 그 주식을 다시 사서 주식 수라도 늘려놔야 나중에 주가가 오르면 손실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이겨야 성공
넷째, 주식 투자에서 성공하려면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2001년 여름 대구은행 주가가 1500원이었는데, 실적 호전을 기대한 한 투자자가 액면가인 5000원이 되면 팔겠다고 결심하고 100만주를 사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가가 계속 뛰어올라 2002년 봄에는 8000원을 넘어섰다. 주가가 그 수준까지 오는 동안 팔고 싶은 충동이 얼마나 컸겠는가.
아무리 상승세라 하더라도 주가가 출렁거리면서 올라갈 때는 100원이 오르내리는 데 따라 계좌에서 1억원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니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매일 전광판 시세를 들여다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대구은행 주식 100만주를 실물 주권으로 찾아 장농 속 금고에 넣어뒀다고 한다. 주가가 흔들리면 팔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봐 금고에 ‘다시 한번 생각하라’는 글을 써붙이기도 했다.
다섯째, 주식 투자 자금과 실물 자금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한 투자자는 1만원짜리 주식 5000주를 매입했다가 주가가 2만원까지 오르자 팔려고 하다가 그만 매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후 주가가 1만8000원으로 떨어지자 아예 팔 마음이 사라졌다고 한다. 2만원에서 1만8000원으로 2000원이 하락했으니 1000만원(2000원 × 5000주)을 손해봤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1000만원이면 소형차 한 대 값인데, 다시 오르면 팔자’고 기다렸다가 주가가 더 떨어지는 바람에 결국 손실을 키웠다.
투자자들은 왜 최고 시세를 본전으로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다. TV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알게 된 한 방송인도 “주식투자로 1억원을 손해봤다”고 하길래 사정을 들어봤더니 “투자한 돈에 비하면 수익을 냈지만, 최고점에 못 팔아 손실을 봤다”고 털어놨다.
주가는 끊임없이 오르고 내리는데, 이를 일일이 자동차 한 대 값이니, 냉장고 한 대 값이니 하며 실물 자금과 비교한다면 결국 매매 타이밍을 놓쳐 손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여섯째, 모든 종목을 다 알려고 하지 말라. 그러나 알아야 할 종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아둬야 한다.
현재 거래소 시장과 코스닥 시장에서 주식이 거래되는 회사는 1500개가 넘는다. 필자는 2001년 한 해 동안 일주일에 한 회사씩 탐방한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결국은 40개 정도밖에 찾아보지 못했다. 상장사 전체를 한 번씩만 탐방해도 30년 이상 걸리는 일이니 개별 회사의 내용을 하나하나 다 알아내기는 어려울 성싶다.
개인 투자자들은 상장기업 분석 책자를 통해 10종목 내외를 선발한 다음 기회가 있으면 기업도 탐방하고, 전화나 이메일 등으로 주식 담당자와 교분을 쌓아가면서 노트 한 권마다 투자 대상 기업 하나씩 신문기사, 각종 공시와 정보, 외국인 매매동향 등을 정리해나가면 좋은 성과를 얻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하면 그 종목에 대해서는 머리 속에 주가 흐름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증권회사 직원이나 업종담당 애널리스트와도 회사 실적이나 전망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하락기에 손실 줄여야
일곱째, 모든 생각은 주식 투자로 통해야 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는데, 주식 투자에서 성공하려면 모든 것을 주식 투자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가령 날씨가 예년보다 더우면 냉방이나 빙과류 관련주에 관심을 갖고, 추우면 가스나 난방 관련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올 초 로또 복권 열풍이 불었을 때 관련 주식의 주가가 크게 올랐고, 대구 지하철역 사고로 한때 소방 관련주가 관심을 모았던 것도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일상에서 지나쳐버리기 쉬운 사소한 일도 늘 주가와 연결시켜보는 습관을 지녀야 남보다 먼저 낮은 가격으로 주식을 사고, 빨리 팔더라도 차익을 챙길 수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한 마리라도 더 잡는 법이다.
여덟째, 시세차익을 혼자 다 먹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바닥권에서 주식을 못 사 안달한다든지 상투권에서 못 팔아 아쉬워하는데,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라’는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생선을 살점 하나 안 남기고 발라먹으려다 보면 가시가 목에 걸리는 수가 있으니 고양이가 뜯어먹을 만큼은 남겨둔다는 자세로 투자하자. 다른 투자자도 어느 정도 먹을 게 있어야 매수세가 밀려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아홉째, 주가 상승기보다 하락기에 손실을 줄여야 한다.
1만원에 산 주식이 2만원으로 올라 1만원의 시세차익을 얻었다면 주가 상승률은 100%다. 반면에 2만원에 산 주식이 1만원으로 떨어져 1만원의 손실을 입었다면 주가 하락률은 50%다. 1만원을 벌려면 상승률이 100%라야 하지만, 하락률은 50%만 돼도 1만원을 잃는다는 얘기다. 기준이 되는 주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가 상승기에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가 하락기에 잘 팔아서 손실을 줄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열째, 주식은 나눠 사고 나눠 팔아야 한다.
주식 투자에서는 수익을 얼마나 많이 올리냐는 것만큼이나 위험을 얼마나 줄일 수 있냐에 신경을 써야 한다.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분할매수·분할매도 전략이다. 이 방법은 ‘최대 수익과 최소 손실’을 실현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최대 손실을 방지할 수 있는 투자 테크닉이라고 본다.
분할매수·분할매도 전략은 투자심리를 안정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는데, 이 대목에서는 종목, 금액, 시기의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종목은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처럼 분산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금액은 전체 투자 자금을 여럿으로 쪼개서 매수한 후 나눠서 매도하라는 것이며, 시기는 한 번에 다 사거나 파는 게 아니라 일정 기간을 정해 매매하라는 것이다.
주가는 인생이다
그동안 증권시장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주가는 인생과 같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나가는 인생이든 보잘것없는 인생이든 유아기에서 시작해 청소년기와 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른 후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주가도 언젠가는 시세를 분출한 후 생을 마감하게 된다. 크게 보면 이런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셈이니 일종의 윤회라고나 할까.
경험적으로 봐도 큰 시세가 난 종목은 한동안 침묵을 지킬 때가 있고, 아무리 긴 잠에 빠져 있던 종목도 최소한 한번쯤은 빛을 발한 경우가 많았다. 어제 없는 오늘이 없고, 오늘 없는 내일이 있을 수 없으니 어제의 중요성은 오늘이나 내일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지나온 시간들은 아무리 길어도 짧아 보이고, 다가올 시간들은 아무리 짧아도 길어 보이는 인생의 진리를 주식시장에서도 되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