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피가 튀고 살이 찢긴 광란의 살육극… 2만5000 생죽음 육성증언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전문

  • 글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3-04-25 15: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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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건발생 55년 만에 4·3사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첫 공식조사가 이뤄져 진상보고서가 작성됐다. 이로써 그간 ‘남로당 무장봉기’에 가려졌던 군·경 및 우익단체의 양민학살 진상이 밝혀졌다.
    • 진상조사보고서 전문을 단독입수, 피로 얼룩졌던 광기의 역사를 고발한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긴 광란의 살육극… 2만5000 생죽음 육성증언

    1948년 4월3일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군경비대를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여야 합의를 거친 4·3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것은 1999년 12월16일. 국회는 당시 국민회의 추미애 의원의 제안 설명을 들은 후 표결 없이 법안을 가결, 통과시켰다. 추의원은 4·3특별법 발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건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피해자 규모조차 정확히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이 사건을 덮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죄 없이 죽어가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양민피해가 있었다면 이제 이를 조사해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해주는 것이 역사를 승계한 후대의 의무일 것입니다.…중략…제주도민은 더 이상 기다리기에도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제주도민도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21세기를 맞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각 당이 제주도민에게 이 법의 통과를 굳게 약속한 이상 그 신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본 의원이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이듬해 1월 제정·공포된 제주4·3특별법(제2조)에 따르면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고건 총리)’는 지난 3월29일 산하기구인 ‘진상조사보고서 기획단’이 2년여에 걸친 조사 끝에 작성한 4·3보고서를 채택했다. 위원회는 이날 회의에서 4·3사건의 성격에 대해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됐다’고 규정했다. 위원회에 따르면 4·3사건 희생자는 2만5000∼3만 명.

    아울러 4·3특별법 정신에 따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추모사업이 적극 추진돼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건 발생 55년 만에 정부 차원의 첫 공식조사가 마무리된 것이다. 이로써 그간 ‘남로당 무장봉기’라는 측면만 부각돼 ‘군·경에 의한 양민학살’ 진상이 가려졌던 이 사건은 역사의 무대에서 새롭게 조명받게 됐다. 그에 따라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 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503명 증언 채록

    진상보고서를 작성한 기획단은 2001년 1월 발족했다. 정부 부처 국장급 공무원과 제주도 부지사 등 당연직 5명과 유족 대표, 학자, 변호사, 시민단체 대표 등 위촉직 10명 등 모두 15명으로 구성됐으며 박원순 변호사가 단장을 맡았다. 기획단은 산하에 상근 진상조사팀을 뒀다. 전문위원 5명과 조사요원 15명 등 20명이 편성됐으며 양조훈 수석전문위원이 팀장이 돼 조사활동을 이끌었다.

    기획단은 2001년 2권, 2002년 10권 등 모두 12권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아울러 사건 관련자 503명으로부터 증언을 채록해 7권의 증언록을 만들었다. 모든 증언은 녹음기로 녹취하고 캠코더로 녹화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 자료집과 증언록이 보고서의 근간이 됐다. 기획단은 올해도 자료집 3권을 출간할 계획이다.

    위원회는 4·3보고서를 공식 채택했음에도 전문 공개는 미뤘다. 보고서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부 위원들의 의견을 감안해 추가 심의를 거쳐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위원회 관계자에 따르면 수정사항은 많지 않으며 ‘대세’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내용을 문제삼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표현의 문제, 즉 직설적이고 거친 표현을 순화하는 차원의 수정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위원회측에 따르면 현재 수정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돼 빠르면 5월 중 ‘최종본’이 나올 예정이다. 다만 전문 공개 시기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신동아’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전문을 단독 입수했다. 580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이 보고서는 크게 6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첫째는 ‘4·3사건 진상조사 개요’로 진상조사 배경과 진상조사반 활동, 자료수집과정이 설명돼 있다. 둘째는 ‘4·3사건 배경과 기점’이다. 광복 전후의 제주도 상황과 4·3의 도화선이 된 3·1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있다.

    셋째는 ‘4·3사건의 전개과정’으로 그간 사실관계를 두고 논란이 일었던 4·3사건의 원인과 경과 및 결과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무장봉기와 5·10선거(1948.4.3∼5.10), 초기 무력충돌기(1948.5.11∼10.10), 주민 집단희생기(1948.10.11∼1949.3.1), 사태 평정기(1949.3.2∼1950.6.24), 사건 종결기(1950.6.25∼1954.9.23) 등 시기별로 다섯 단계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넷째는 ‘피해상황’이다. 민간인과 군·경 우익단체의 인명피해와 물적 피해 실태가 잘 드러나 있다. 다섯째 ‘조사결론’은 이 보고서의 줄거리이자 요약본이라 할 수 있다. 4·3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한편 사건 개요를 정리했다. 마지막 ‘건의’ 항목에서는 정부에 4·3사건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피해를 보상하는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국가원수의 공식사과, 추모기념일 제정 등 7가지 건의사항이 담겨 있다. 이 건의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내년에 이 사건에 대해 정부 차원의 사과를 할 예정이다.

    1999년 11월 한나라당이 당론으로 4·3 특별법을 발의하는 데 앞장선 현경대 의원(제주)은 4·3 보고서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했다.

    “형식적으로는 특별법에 의해 작성된 최초의 정부 진상보고서라는 데 의미가 있다. 또 내용면에서는 4·3 특별법 취지에 맞춰 좌우 이데올로기 시각을 떠나 인간의 존엄성, 인권 가치를 중시한다는 입장에서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인권유린이 있었음을 공식 확인한 것이다.”

    현의원은 4·3보고서에 대한 군 당국 또는 일부 보수·우익세력의 반발에 대해서는 “보고서가 나오게 된 경위와 특별법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4·3특별법은 5·18특별법과 달리 기존에 규정된 사건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5·18의 경우 기존에는 폭동·내란죄를 뒤집어썼던 피해자들이 특별법에 따라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음으로써 사건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반면 4·3특별법은 남로당의 무장봉기가 이 사건의 원인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 발생한 양민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무고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현의원 표현대로라면 ‘가치중립적인 법’인 셈이다.

    4·3보고서 전문 중 여기서 소개하는 것은 4·3사건의 개요를 정리해놓은 다섯째 항목 ‘조사 결론’과 희생자들의 피해실태가 생생히 드러나 있는 넷째 항목 ‘피해상황’이다. ‘조사 결론’은 전문을, ‘피해상황’은 주요 내용을 발췌해 싣는다.

    [조 사 결 론]

    미 군정기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4·3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50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아 민원이 그치지 않다가, 2000년 1월12일 제주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사건의 배경은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착종되어 있어서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했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광복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고,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관리의 모리(謀利)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터져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3·1절 발포사건은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바로 이 사건이 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反警)활동을 전개했다. 경찰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우익청년단체가 평화협상 깨

    사태를 중히 여긴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이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 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응원경찰과 서청(서북청년단) 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도 잇따랐다.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했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세력은 군정당국에 등 돌린 민심을 이용해 두 가지 목적, 즉 하나는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다른 하나는 당면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서 무장투쟁을 결정했다.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미군정은 초기에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살려준다는 말에 굴 밖으로

    1949년 2월4일(음력 1월7일)은 용강리 주민들에게 악몽의 날이었다. 새벽녘에 군인들이 들이닥치자 주민들은 황급히 도망쳤으나 105명이 총에 맞아 숨졌다. 주로 발 빠르지 못한 노약자, 부녀자들이었다. 용강리뿐만 아니라 이웃마을인 봉개리와 회천리에서도 비슷한 참극이 빚어졌다. 그후로 봉개·용강·화천리에서는 이 날이 되면 대부분의 집안이 제사 준비를 하느라 명절처럼 북적인다.

    평소 잘 피해다니던 주민들이 왜 이 날엔 그토록 많이 붙잡혀 총살을 당했을까. 이날 외할머니와 어린 동생 등 가족을 잃은 송기전은 이렇게 증언했다.

    “그날 다급히 정보가 올라왔습니다. 노약자들은 마을 안 ‘당카름(나무가 우거진 곳)’과 ‘대련수(하천 변) 쪽으로 달아났고 젊은 사람들은 늘 하던 대로 동쪽으로 뛰었습니다. 군인들이 마을 서쪽(오등리 죽성마을)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날은 죽성마을 주둔군뿐 아니라 아랫마을인 함덕리 주둔군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니 꼼짝없이 포위된 것이지요. 잘 뛰지 못하는 노약자들이 중간에서 붙잡혀 많이 죽었습니다. 바위 틈에 머리를 박고 숨진 사람이 많았고 나무 위에 올랐다가 총에 맞아 나뭇가지에 걸쳐진 시신들도 있었습니다.”

    ●빌레못굴 희생 사례

    총 길이 1만1749m에 이르는 빌레못굴은 단일 계통의 용암굴로는 세계 최장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이 굴의 존재는 4·3 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큼의 좁은 입구를 바위가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9년 1월16일 진압군이 이 굴을 발견했을 당시 굴 안엔 남읍리 주민 28명 등 모두 30여 명이 숨어 있었다. 이들은 “밖으로 나오면 살려준다”는 진압군의 꾀임에 빠져 대부분 총살당했다. 이때 경찰이 서너 살 난 아이들의 다리를 잡아 바위에 메쳐 죽였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다. 이 사실은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민보단원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졌다. 당시 유일한 생존자 양태병은 이렇게 증언했다.

    “토벌대가 ‘살려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유혹하는 바람에 모두들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끝내 나가지 않아 살았고 밖으로 나간 이들은 바로 굴 입구에서 학살당했습니다. 강규남의 아들이나 송시영의 아들은 당시 서너 살이었는데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예쁘고 잘난 아이들이었습니다. 토벌대는 그 아이들의 다리를 잡아 바위에 메쳐 죽였습니다. 강규남의 아내는 두어 살 난 딸을 업고 굴 속 깊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굶어죽었습니다. 이들의 시신은 후에 굴 탐사팀에 의해 발굴됐습니다.”

    ●조천면 선흘리 사례

    중산간마을인 조천면 선흘리가 진압군에 의해 불에 탄 것은 1948년 11월21일의 일이다. 소개령에 따라 해변마을로 내려간 20대 여성 5명이 함덕리 바닷가에서 총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동백나무 숲이 있고 자연굴이 산재한 선흘곶에 숨어들었다.

    주민 1000여명 운동장에 모아놓고

    하지만 11월25일부터 연 사흘째 주민들이 은신했던 굴이 잇따라 발각됨으로써 대량 학살의 참극이 빚어졌다. 11월25일 ‘반못굴’을 발견한 군인들은 그 안에 숨어 있던 주민 15명을 끌어내 즉결총살했다. 다음날엔 ‘목시물굴’을 찾아내 아기 업은 여자와 노약자는 함덕국민학교로 끌고 갔고 나머지 주민들은 총살 후 휘발유를 뿌려 시신을 태웠다. 11월27일엔 웃밤오름 부근의 ‘밴뱅디굴’에 숨었던 사람들이 총살당했다. 당시 구사일생한 김형조씨는 억울한 사연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희생자 명단을 적어 항아리에 감춰뒀다. 선흘1구는 당시 300가호였는데, 김씨에 따르면 세 굴에 숨어 있다 목숨을 잃은 주민은 157명에 이른다.

    6) 보복살상

    진압군은 무장대에 의해 주둔지를 습격당하거나 이동할 때 기습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하면 바로 보복에 나섰다. 보복 대상은 주로 도피자 가족이었다.

    ●조천면 북촌리 사례

    1949년 1월17일 해안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는 이른바 ‘북촌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아침 세화에 주둔하는 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중 북촌마을 어귀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담아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흥분한 군인들은 본부에 찾아온 10명의 연로자 가운데 경찰가족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사살해버렸다. 그후 2개 소대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오전 11시쯤 군인들은 1000여 명의 주민을 학교운동장으로 내몰고는 마을을 불태웠다. 400여 채의 가옥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군인들은 군경가족을 나오도록 해 운동장 한편에 따로 세웠다. 어린 학생들을 일으켜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던 그들은 이 일이 여의치 않자 주민들을 몇십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밭에서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 주민학살극은 오후 5시께 대대장의 중지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경찰관이던 김병석의 증언에 따르면 애초 군인들은 박격포를 쏴 주민들을 한꺼번에 죽일 방안을 검토했다고 한다. 하지만 적을 살상한 경험이 없는 군인들에게 ‘실전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총살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날 희생된 주민은 약 300명에 이른다.

    경찰은 1990년 펴낸 ‘제주경찰사’에서 이 사건을 이렇게 왜곡했다.

    ‘이 마을을 습격한 공비들은 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을 남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거나 납치해갔다. 토벌대가 공격하자 공비들은 일부는 산으로 도망가고 일부는 마을로 숨어들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장시간 소탕전이 벌어지고 북촌리는 황폐한 마을이 돼버렸다.’

    가해집단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것이다. 경찰은 2000년에 새로 ‘제주경찰사’를 펴낼 때도 이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이에 많은 제주도민들이 분노하자 제주도경찰국은 결국 그 책을 모두 회수, ‘4·3 관련 부분’을 도려낸 후 다시 배포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제주읍 삼양리 사례

    제주읍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삼양리는 해변마을이면서도 유난히 희생자가 많이 나왔던 마을이다. 1948년 10월27일 경찰은 은신처에서 지내다가 마을의 한 장례식에 모습을 드러낸 청년들을 붙잡아 삼양지서에 감금했다. 이튿날 무장대가 지서를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 청년들은 곧바로 보복 총살당했다.

    11월초 진압군은 삼양리의 모든 주민을 삼양국민학교에 모아놓고 청장년 35명을 지목해 군 주둔지인 함덕으로 끌고 갔다가 그 중 반수 가량을 11월12일에 총살했다. 이어 11월27일엔 굴에 숨어 있던 청년들이 총살당했다. 살아남은 청년들은 앞다퉈 산으로 올라갔다.

    청년들의 도피입산 사태는 주민들을 분리시켰다. 마을에 남아있는 주민들은 대동청년단(후에 대한청년단으로 개편)이나 민보단에 의무적으로 편입돼 토벌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산으로 오른 사람들은 무장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친척과 친구들끼리도 토벌대와 무장대 편으로 나뉘게 됐다. 시대상황이 강요한 비극이었다.

    임산부 벗겨 불에 달군 총구로…

    1948년 12월27일 또 한차례 보복 살해극이 전개됐다. 이날 군인들은 봉개리 명도암 부근까지 가 진압작전을 펴다가 오히려 무장대로부터 기습을 받았다. 화가 난 군인들은 내려오던 길에 마을 어귀에서 보초를 서던 주민 12명을 만나자 속칭 ‘고우니마루’라는 곳으로 끌고가 총살했다. 이때 김정봉은 총에 맞고도 죽지 않은 채 기어서 집으로 갔다. 그러자 그의 부친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아들을 업고 지서로 찾아가 자수했다. 그런데 경찰은 즉각 총살했다.

    1949년 1월3일은 삼양리 주민들이 무장대와 진압군 양측으로부터 크게 피해를 입은 날이다. 2연대가 9연대를 대신해 제주에 막 주둔하기 시작한 때였다. 연대 교체기를 틈타 마을을 습격한 무장대는 마을 어귀에서 보초를 서던 주민 10여 명을 살해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목의 집들을 불태웠다.

    무장대가 물러가자 이번엔 경찰이 몰려와 보복 총살극을 벌였다. 주로 집안에 청년이 사라진 도피자 가족이 그 대상이었다. 당시 희생자의 아들인 김양근은 이렇게 증언했다.

    “1949년 1월3일 삼양지서가 습격당했습니다. 산에 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모 형제가 희생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악이 받쳐 지서를 습격하고 마을에서 보초 서던 사람들을 죽인 겁니다. 산사람이 지서를 습격하면 다음날엔 경찰이 산사람 가족이라 해 주민들을 처형하곤 했습니다. 1월3일 습격 후에는 산에 오른 사람들의 가족들이 멸족을 당했습니다. 한 살 난 아기까지. 우리 가족은 일절 산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아버지와 누나가 희생됐습니다. 아버지가 산에 오른 사람의 외삼촌이라는 게 이유였습니다.”

    당시 삼양지서 ‘정주임’의 만행은 삼양리뿐만 아니라 인근 도련리, 봉개·용강·회천리 주민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제주경찰 10기생으로 당시 삼양지서에 잠시 근무했던 김제진은 이렇게 증언했다.

    “서북청년회 출신 정주임은 너무도 잔인했어요. 여자들 옷을 벗겨 더러운 행위를 하는 것도 봤습니다. 삼양지서 옆 밭에서 남자고 여자고 수십명씩 잡아다 죽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쏘아 죽일 것이지 그 마을 대동청년단원들에게 창으로 찌르도록 강요했습니다.”

    악명 높던 정주임의 이름은 정용철이다. 주민 고봉수는 1949년 2월24일 정용철이 벌인 처참한 학살극을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대한청년단 분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지서에 갔더니 남편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젊은 여자 한 명이 끌려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주임은 총구를 난로 속에 넣고 있더군요. 그리고는 여자를 홀딱 벗겼어요. 임신한 상태라 배와 가슴이 나와 있었습니다. 정주임은 시뻘겋게 달군 총구를 그녀의 몸 아래 속으로 찔러 넣었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정주임은 그 짓을 하다가 지서 옆 밭에서 여자의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였습니다. 우리에게 시신 위로 흙을 덮으라고 했는데 아직 덜 죽어있던 상태라 흙이 들썩들썩 했습니다.”

    희생된 여인은 김진옥(당시 21세)으로 산으로 피신했던 김태생의 아내였다. 김태생은 이날 아내와 부모를 잃었고 이튿날엔 처조부를 잃었다. 다시 며칠 후엔 장모와 처제가 살해됐다. 모두가 그의 입산에 따른 희생이었다. 김태생은 나중에 6·25에 참전해 공산군에 맞서 싸운다.

    정주임과 같은 서북청년회 단원들은 어떻게 경찰로 둔갑해 제주에 파견됐는가. 또 어떻게 처음부터 경위로 특채될 정도로 우대를 받았는가. 이에 대해 미군보고서는 ‘이승만의 결정에 따라 과격한 반공주의자로 주목받고 있는 서북청년회 단원을 경찰로 만들었다. 지원자를 늘리기 위해 단원 20명을 모아오면 그 중 1명을 경사로, 50명엔 경위 1명을, 200명에는 경감 1명을 특채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7) 예비검속자 살상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 명목으로 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것으로 그 역사적 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2차대전이 일어나자 전시체제를 구축하면서 1941년 식민지 조선에 ‘조선정치범 예비구금령’을 시행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예비검속법은 해방 후 미 군정이 실시되면서 바로 폐지됐다. 그러나 1948년 10월 이후 내부무는 제주에서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시행했다. 주요 대상은 해방직후 인민위원회 간부, 3·1사건 또는 4·3사건과 관련해 재판을 받았거나 수형 사실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배에 태워 바다에 수장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6월25일 오후 2시 치안국장 명의로 각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전화통신문으로 긴급 하달했다. 7월6일엔 제주지구 비상계엄사령관으로부터 ‘전 제주지구 예비검속자 명부 제출의 건’이, 7월11일엔 다시 치안국장으로부터 ‘불순분자 검거의 건’이 각각 제주도 경찰국장에게 하달됐다.

    이에 따라 제주에서는 요시찰인에 대한 일제 검거가 이뤄졌다. 경찰 공문서에 따르면 1950년 8월4일 현재 제주도내 요시찰인 중 820명이 예비검속돼 있었다. 당시 검속된 사람들 중에는 좌익단체 활동이나 4·3사건 때 입산한 경력이 전혀 없는 자가 많았다. 정부는 예비검속에 이어 검속자들에 대한 총살 집행을 계획했다. 제주에서는 1950년 7월말부터 8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제주읍과 서귀포 모슬포 등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집단총살이 벌어졌다.

    ●제주읍 예비검속

    제주읍에서 첫 예비검속은 1950년 8월4일에 있었다. 제주경찰서 주정공장 등지에 수감돼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을 제주항으로 끌고 가 배에 태워 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수장시켰다.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제주항 부두 파견 헌병대에서 경비근무를 했던 장시용의 증언에 따르면 밤 9시경 50명씩 태운 차 10대가 부두에 도착해 알몸 차림의 500여 명을 내려놓았다. 이어 이들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아갔는데 두 시간 정도 지나 빈배로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 해병대 군무관으로 근무했던 박춘택과 제주항에서 화물선박을 출항시키던 김인평도 비슷한 증언을 한다. 주정공장에 수감돼 있던 상당한 수의 예비검속자를 해군 경비정에 태우고 가서 수장시켰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집행은 1950년 8월19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실시됐다. 검속자들은 주로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이들 예비검속자 수백명은 제주비행장에 끌려가 그곳에서 총살당하고 암매장됐다.

    ●서귀포 예비검속

    생존자 및 목격자들 증언에 따르면 서귀포 예비검속자들이 희생된 날은 1950년 7월29일이다. 이들이 끌려나가는 것을 목격한 생존자(이재준·당시 교사)는 약 150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모슬포 예비검속

    모슬포경찰서 관내 한림·대정·안덕면 예비검속자 수는 344명이었다. 그 가운데 252명이 군에 송치됐다가 희생됐다. 모슬포 절간 고구마 창고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1950년 8월20일 새벽 5시에, 한림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된 사람들은 같은 날 새벽 2시에 총살됐다. 총살 장소는 남제주군 대정면 상모리 ‘섯알오름’에 있는 일제 때 탄약고로 쓰이던 굴속이었다. 총살 당일 현장을 목격한 주민에 의해 알려져 유가족 400∼500명이 모여들어 시신을 수습하려 했지만 방첩대 소속 군인들이 제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성산포 예비검속

    성산포경찰서 관내 성산·구좌·표선면 예비검속의 경우 총살 희생자 명단이 제주 지역 예비검속 사례 가운데 유일하게 경찰 자료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성산포의 경우 군 송치 대상인 D급(가장 중요한 자)과 C급(중요한 자) 예비검속자는 각각 4명, 76명이었다. 그러나 경찰서장 문형순이 이중 6명만 군에 넘기는 바람에 희생이 작었다.

    8) 무장대의 살상행위

    4·3 무장봉기 초기 무장대는 경찰, 서북청년회나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원, 그리고 군·경에 협조하는 우익인사와 그들의 가족을 지목해 살해했다. 그러나 1948년 11월 이후 무차별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토벌대 편으로 기울었다고 판단되는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도피자 가족 총살이 벌어지는 데 대한 보복이었다.

    ●구좌면 세화리 사례

    경찰지서가 있는 세화리는 평소 우익세력이 강해 토벌대에 잘 협조하는 마을이었다. 1948년 12월3일 밤 9시경 무장대는 세화리를 대대적으로 공격, 길가 집들에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살해했다. 40가호 150채 가량을 불 태운 후 새벽 2시경 물러갔는데 중산간마을에서 소개된 사람까지 포함해 50명 가량이 희생됐다.

    당시 세화지서엔 본서 직원 15명과 응원경찰인 충남부대 20명 등 35명의 경찰이 있었으나 무장대가 물러갈 때까지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사건으로 가족과 친척 8명을 잃은 지형종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날이 밝자 경찰은 지서에 감금돼 있던 이웃마을 주민 16명을 지서 옆 밭에 모아놓고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했다. 며칠 후에는 세화리 출신 무장대의 가족들을 끌어내 죽였다.

    ●남원면 남원·위미리 사례

    무장대는 1948년 11월28일 오전 7시 남원지서와 남원면사무소 소재지인 남원리를 습격했다. 당시 남원지서엔 약 30여 명의 경찰이 있었다. 무장대가 성담으로 둘러싸인 지서를 포위하자 경찰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장대는 마을을 휩쓸며 주민 30여 명을 무차별 살해했다. 또 대부분의 집에 불을 지르고 식량을 약탈했다.

    무장대는 또한 이날 이웃마을 위미리도 동시에 습격했다. 위미리에도 지서가 있었다. 남원면의 경찰지서 소재지 두 곳을 동시에 공격한 것이다. 남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을 지르고 식량을 빼앗았다. 주민 현봉협의 어머니는 이날 불타는 집에서 식량이나 옷가지를 꺼내려 하다가 무장대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아기가 울자 얼굴에 총 쏴

    ●한림면 두모리 사례

    1948년 12월15일 자정이 지날 무렵 한림면 두모2구(현재의 한경면 한원리)에 무장대가 들이닥쳤다. 무장대는 동향을 살피기 위함인지 마을 어귀의 한 집을 불태우면서 “양민들은 나와서 불을 꺼라”고 외쳤다. 이때 밖으로 나왔던 김경석 노인과 요강을 들고 나왔던 박정생 여인이 살해됐다. 무장대는 마을을 점령해 식량을 약탈하고 가옥에 불을 지르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두모지서 경찰과 고산리 주둔 응원경찰대가 출동하자 무장대는 나팔 소리를 신호로 부리나케 퇴각했다. 부상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까지 포함해 이날 사건으로 13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표선면 성읍리 사례

    표선면 성읍리는 중산간마을 중에서는 유일하게 불에 타지 않은 마을이다. 토벌대가 모든 중산간마을을 불지르면서도 성읍지서 소재지인 이 마을은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성읍리는 소개령도 안 내려졌고 오히려 토벌대의 전진기지가 됐다. 주민들은 경찰지서의 철저한 통제 아래 민보단에 편입돼 진압작전에 동원됐다. 무장대도 군·경이 주둔한 이 마을에 쉽게 접근하지 못해 별 사고가 없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49년 1월13일. 이날 주민들은 아침부터 출동 준비에 부산했다. 군이 주도하고 경찰과 민보단 특공대가 참여한 합동진압작전이었다. 합동 토벌대가 산중에서 수색작전을 펴고 있을 때 마을 안에서는 한 여인이 총살을 당했다. 그 여인은 남편이 산에 오르자 만삭의 몸을 이끌고 친척이 있는 성읍리로 와 갓 출산한 상태였다. 마을에 남아 있던 경찰은 그녀를 끌어내 발가벗긴 채 마을의 여인들에게 창으로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결국 총으로 쏴 죽였다. 아기가 옆에서 바둥거리자 아기 얼굴에 대고 총을 쏘았다.

    주민들이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오후 5시께 비상사이렌이 울렸다. 합동토벌대가 마을을 비운 틈을 타 무장대가 역공한 것이다. 무장대에게 식량을 내놓지 않은 주민들이 살해됐고 일부 가옥이 불에 탔다. 모두 38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나) 고문 실태

    4·3사건 당시 우익단체에 가담하지 않은 청장년들은 수시로 군부대나 경찰서, 우익단체 사무실에 끌려가 신문을 받았다. 이때 그들에게는 극심한 고문이 가해졌다. 1947년 3·1사건 이후 좌익활동을 하던 인사들을 수시로 고문하던 경찰은 1948년 4·3사건 직전 기어이 큰 일을 냈다. 김용철과 양은하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부검 결과와 목격자 증언에 의해 경찰의 가혹한 고문 방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김용철의 경우 거꾸로 매달아 곤봉으로 내리쳤으며 양은하는 고환을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당시 경찰에서 고문을 담당한 자들은 주로 일제 때 고등계형사의 고문기술을 습득한 자들이었다.

    제주4·3사건위원회는 희생자신고서를 통해 많은 사람의 고문 피해사례를 수집했는데 특히 생존 후유장애 신고자 142명 가운데 40여 명이 고문에 따른 고통을 호소했다. 주요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양규석 사례: 경찰에서 고문으로 허위사실 고백한 후 유죄형을 받음

    “고문이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는 것이지. 인덕지서에서는 몽둥이로 개 패듯 두드려 맞았지. 또 장작을 다리에 끼우기도 하고. 서귀포경찰서에서는 전기고문을 했어요. 손가락에 전기 반지를 끼워 순경이 단추를 누르면 사람 오장에 불이 나요. 또 물고문도 받았죠. 큰 통에 물을 담아 얼굴을 그 속에 담그는 것이죠.”

    ●김옥녀 사례: 고문으로 허위자백서에 도장을 찍음

    “그때는 ‘사람 죽였냐’고 하면 ‘죽였다’라고도 할 판이었습니다. 옷도 모두 벗겨 심한 고문을 하는데 어떻게 안 했다고 합니까. 전기고문을 그렇게 받으면 아기도 못 낳는다고 말했습니다. 난 그때 쇠좆매로 맞은 것 때문에 지금도 허리 양쪽이 다 튀어나왔습니다.”

    ●김계생 사례(동생 김갑길 증언) : 일본으로 도피한 동생의 거처를 확인하기 위해 고문

    “언니(김계생)가 살을 자르면 바른 말 할 줄 알았는데 모른다고만 했던 것이다. 살이 찢겨지고 나중에는 실어다 정방폭포에서 죽여버렸다. 살점을 도려낸 것을 봤다. 무엇을 도려냈는지 허벅지 등이 마구 도려져 있었어.”

    ●백창원 처 사례(김계순 증언)

    “신엄에 백창원이라고 좌익활동을 한 사람이 있었다. 아내가 딸 하나 낳고 산에 있었다. 백창원은 총 맞아 죽고 아내는 잡혀왔다. 옷을 홀딱 벗겨놓고 매일이다시피 전기취조를 했다. 사람이 매일 두세 번씩 전기취조를 당하면 죽어 있는지 살아 있는지 모른다.”

    ●김인평 증언

    “(1948년 1월22일) 밤중에 경찰에 연행돼 트럭에 실려 감찰청에 가서 죽도록 맞았다. 나는 열흘 살고 나오고 동생은 보름 살고 나왔다. 고문이란 고문은 다했다. ‘소련비행기’를 태운 후 내려놓고 하는 얘기가 ‘남로당에 가입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이었다. 소나무 장작 두 개를 들어 막 두드려놓은 다음 도장 찍은 것을 내놓고 ‘이렇게 가입한 것이 있는데 왜 바른말 안 하느냐’고 했다. 남로당 가입신청서였다. 내가 도장 찍은 바도 없고 남로당이 어떤 건지 북로당이 어떤 건지 모를 때였다. 지금도 한이 맺혔다. 어깨가 부러지고 죽지 않으니 산 것이다. 장작으로 때리니까 부채뼈에 금이 가서 몇 해 고생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양관표 사례(고경흡 증언)

    “양관표는 산에 안 올랐다. 그는 서북청년으로 구성된 특별중대에 잡혀갔다. 나도 같은 시기에 잡혀갔다. 국민학교 교실마다 칸막이해서 취조실을 만들었는데 귀를 대면 다 들렸다. 두드려 맞아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사람이 수두룩했다. 어찌 동족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서북청년들이 몽둥이로 치니까 뼈가 부서진다. 호흡이 그르릉 그르릉. 누워서 팔을 들면 건들건들. (양관표의) 뼈가 다 부서졌다. 생나무로 막 패니까. 양관표는 이 고문으로 사망했다.”

    ●좌봉 사례(1948년 5월30일 응원경찰대는 한림면 청수2구를 기습, 마을사람들을 끌어내 국민학교 마당에 집결시킴. ‘빨갱이 새끼들’이라며 심하게 구타)

    “토벌대는 큼직한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그러다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홀랑 벗겼지. 나는 당시 마흔 살이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여지가 있나. 그냥 옷을 벗으라고 하니 벗을 수밖에. 토벌대는 옷을 벗긴 채 또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그러다 싫증이 났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녀 한 명과 총각 한 명을 지명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짓을 강요하는 거였어. 인간이 아니었어.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가자 주민 4명을 끌고가 총을 쏘아버렸어.”

    ●김호겸 증언 사례

    “1948년 11월경 경찰서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비명이 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취조실로 가보니 한 여자가 나체 상태로 거꾸로 매달려 고문당하고 있었어요. 내가 일본도를 들고 가 화를 냈더니 취조하던 수사대원이 도망가버렸습니다.”

    ●정순희 사례

    “둘째 오빠가 행방불명되자 우리는 ‘산폭도 집안’으로 몰렸습니다.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나까지 토벌대에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옷을 벗기고 거꾸로 매달아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코와 입에 부어댔습니다. 입을 다물면 쇠붙이로 이빨 사이를 억지로 벌리는 바람에 이가 다 부러졌습니다.”

    ●차경구 사례

    “난 ‘거슨새미오름’ 주변 천막에 보름 동안 갇혀 있으면서 고문을 많이 받았어요. 뒤로 몽둥이를 끼운 채 무릎을 꿇려놓고 위에서 마구 밟았습니다. 지금도 잘 걷지 못해요. 난 당시 임신중이었습니다. 임신했다고 사정했지만 통하지 않았어요. 결국 유산됐습니다.”

    ●홍경토 증언 사례

    “창고 안에는 여러 마을 사람들이 갇혔는데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 구타하면서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그 썩는 냄새로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난 그들이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긴 광란의 살육극… 2만5000 생죽음 육성증언

    4월3일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에서 열린 ‘4·3사건 희생자 범도민 위령제’에서 유족들이 헌화와 분향을 하고 있다.

    한편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의 ‘4·28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 등으로 깨졌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의 제주 파견, 경비대 9연대장 교체 등을 통해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월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다.

    그러자 미 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5월20일에는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해 무장대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생겼고, 6월18일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 충격을 주었다.

    그 이후 제주 사태는 한때 소강국면을 맞았다. 무장대는 김달삼 등 지도부의 ‘해주대회’ 참가 등으로 조직 재편의 과정을 겪었다. 군경 토벌대는 정부수립과정을 거치면서 느슨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소강상태는 잠시뿐이었다.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이유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한 것이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산간지대에서뿐만 아니라 해안변 마을에 소개(疏開)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였다.



    12월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 진압을 계속하였다.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었다. 가장 인명피해가 많았던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선무 병용작전이 전개되었다. 신임 유재홍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그해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또 전국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가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잔여 무장대들의 공세도 있었으나 그 세력은 미미하였다.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실로 7년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번 진상조사 과정에서 쟁점이 되는 다음의 사항들이 집중적으로 조사되었다.

    ●발발원인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군정당국과 제주도민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그 이후 외지출신 도지사에 의한 편향적 행정집행과 경찰·서청에 의한 검거선풍, 테러, 고문치사사건 등이 있었다. 이런 긴장상황을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는 없었다는 것이 각종 문헌과 증언에서 입증되고 있다. 그런데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까지 살해한 점은 분명한 과오다. 그리고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1948년 8월 해주대회에 참석, 인민민주주의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판단된다.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4월3일 동원된 인원은 350명으로 추정된다. 무기는 4월3일 소총 30정으로부터 시작해 지서 습격과 경비대원 입산사건 등을 통해 보강되었다.

    ●4·3사건에 의한 사망, 실종 등 희생자 숫자를 명백히 산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만4028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4·3사건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다. 아직도 신고하지 않았거나 미확인 희생자가 많기 때문이다. 본 조사에서는 여러 자료와 인구변동 통계 등을 감안, 잠정적으로 4·3사건 인명 피해를 2만5000∼3만명으로 추정했다. 1950년 4월 김용하 제주도지사가 밝힌 2만7719명과 한국전쟁 이후 발생된 예비검속 및 형무소 재소자 희생 3000여 명도 감안된 숫자이나, 향후 더욱 정밀한 검증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는 토벌대 78.1%(1만955명), 무장대 12.6%(1764명), 공란 9%(1266명) 등으로 나타났다. 가해 표시를 하지 않은 공란을 제외해서 토벌대와 무장대와의 비율로만 산출하면 86.1%와 13.9%로 대비된다. 이 통계는 토벌대에 의해 80% 이상이 사망했다는 미군보고서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10세 이하 어린이(5.8%·814명)와 61세 이상 노인(6.1%·860명)이 전체 희생자의 11.9%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21.3%·2985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 진압작전에서 전사한 군인은 180명 내외로 추정된다. 또 경찰 전사자는 14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4·3사건 당시 희생된 서청, 대청(대동청년단), 민보단 등 우익단체원들은 ‘국가유공자’로 정부의 보훈대상이 되고 있다. 보훈처에 등록된 4·3사건 관련 민간인 국가유공자는 모두 639명이다.

    고문, 방화, 집단총살

    ●서청 단원들은 ‘4·3’ 발발 이전에 500∼700명이 제주에 들어와 도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들의 과도한 행동이 ‘4·3’ 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4·3’ 발발 직후에는 500명이, 1948년 말에는 1000명 가량이 제주에서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입고 진압활동을 벌였다.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도 서청에 의해 자행되었다. 서청의 제주 파견을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이 후원했음을 입증하는 문헌과 증언이 있다.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였다. 강경 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4·3사건으로 가옥 3만9285동이 소각되었는데, 대부분 이때 방화되었다. 결국 이 초토화작전은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 명 가량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이 무렵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피해마을은 세화, 성읍, 남원으로 주민 30∼50명씩 희생되었다.

    ●9연대에 이어 제주에 들어온 2연대도 공개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즉결처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주민 집단총살사건인 ‘북촌사건’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을 주민 400명 가량이 2연대 군인들에 의해 총살당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 학살사건이 “군인들에게 총살 경험을 주기 위해 실시됐다”는 충격적인 증언도 있었다. 위원회에 신고된 자료에 의하면, 100명 이상 희생된 마을이 45개소에 이른다.

    ●1948년 12월(871명)과 1949년 6월(1659명) 등 모두 두 차례 253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는 ‘4·3사건 군법회의’는 조사결과, 재판서·공판조서 등 소송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점, 재판이 없었거나 형무소에 가서야 형량이 통보되는 등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는 관계자들의 증언, 하루에 수백 명씩 심리 없이 처리하는 한편, 이틀 만에 345명을 사형선고했다고 하나 이런 사실이 국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은 점, 그 시신들이 암매장된 점 등 당시 제반 정황을 볼 때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1948년 11월17일 선포돼 그해 12월31일 해제된 ‘4·3 계엄령’에 대해서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법적 근거 없이 발효됐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측과 일제 계엄령이 계속 효력을 갖고 있기에 적법하다는 측의 다툼이 있다.

    여기서는 계엄의 법적 근거 여부를 떠나서 제주도에서의 계엄령 집행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이탈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계엄령 하에서 재판절차 없이 즉결처분이 빈번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군지휘관들조차 계엄령을 잘 알지 못했는데, 심지어 계엄령 해제 후인 1949년 제주작전에 참여한 2연대 대대장이나 독립대대 대대장은 그때까지도 계엄령이 지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집단살상 지휘체계를 볼 때, 중산간마을 초토화 등의 강경 작전을 폈던 9연대 송요찬 연대장과 2연대 함병선 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이 두 연대장의 작전기간인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까지 6개월 동안에 전체 희생의 80% 이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제주도사태를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지시를 한 사실이 이번 조사에서 밝혀졌다.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미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건이 미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미군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한미간의 군사협정에 의해 한국군작전 지휘권을 계속 보유하였고, 제주 진압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하였다. 특히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켰던 9연대의 작전을 ‘성공한 작전’으로 높이 평가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송요찬 연대장의 활동상을 대통령의 성명 등을 통해 널리 알리도록 한국정부에 요청한 기록도 있다.

    군 지휘관의 증언 거부

    ●연좌제에 의한 피해도 극심하였다.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4·3사건 때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희생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활동을 제약받았다. 제주공동체에 엄청난 상처를 주었던 4·3사건의 상흔들이 그 유족들에까지 대물림된 것이었다. 제주도민들과 유족들은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로 인하여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1981년 연좌제가 폐지되면서 그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유족들이 당하는 정신적 고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948년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에서, 제노사이드는 유엔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되고 문명세계에 의해서 단죄되어야 하는 국제법상 범죄임을 명시했다. 1949년 제네바 협정은 전시(戰時)에서도 민간인에 대해서 △고의적인 살인 △고문 등 비인간적 행위 △고의적인 괴롭힘이나 신체 상해 △군사적 목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대량 파괴와 약탈 등을 금하도록 규정했다. 더 나아가 모든 재판상의 보장을 부여하는 재판에 의하지 않은 판결 및 형의 집행을 인정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1948년 제주도는 전쟁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이런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됐다. 특히 법을 지켜야 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살상하기도 했다. 토벌대가 재판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상한 점, 특히 어린이와 노인까지도 살해한 점은 중대한 인권유린이며 과오다. 결론적으로 제주도는 냉전의 최대 희생자였다고 판단된다. 바로 이 점이 4·3사건의 진상규명을 50년 동안 억제해온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 조사는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4·3사건의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 수 없다. 경찰 등 주요 기관의 관련문서 폐기와 군 지휘관의 증언 거부, 미국 비밀문서 입수 실패 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부는 이 불행한 사건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국가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희생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적절한 명예회복 조치를 취할 것을 기대한다.

    개황

    피가 튀고 살이 찢긴 광란의 살육극… 2만5000 생죽음 육성증언

    ‘신동아’가 단독 입수한 580쪽 분량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가) 인명 피해 개황

    1) 희생자 신고서에 나타난 인명피해 실태

    1993년 3월20일, 제4대 제주도의회에 ‘4·3특별위원회’가 설치됐다. 4·3 특위가 이듬해 2월7일부터 2000년 2월29일까지 피해신고실을 통해 접수한 피해자 수는 1만2243명이다. 나이별로 보면 20대가 가장 많다. 4257명으로 전체 피해자의 34.7%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 차원의 첫 공식조사는 2000년 6월부터 시작됐다. 4·3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제주4·3사건위원회는 국내외에 4·3사건 희생자 신고처를 설치하고 2001년 5월까지 신고를 받아 희생자 수를 1만4028명으로 최종 집계했다. 여기서 희생자라 함은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또는 후유 장애가 있는 자로 제주4·3사건위원회의 심의·결정을 거친 자를 말한다. 나이별로 분석하면 20대가 4956명(35.3%)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30대로 2108명(15%)이다. 특히 전혀 ‘전투능력’이 없다고 할 수 있는 10세 이하 어린이와 61세 이상 노인 희생자가 각각 5.8%(814명), 6.1%(860명)를 차지한 점이 눈길을 끈다. 시기별로는 강경진압작전 진행 전후인 1948년 10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집중적으로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모두 8894명이 이 시기에 희생됐다.

    가해자별 분석에 따르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1만955명으로 전체의 78.1%를 차지한다. 반면 남로당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수는 1764명(12.6%)이다. 이러한 비율은 결국 2만명에서 3만명에 이르는 주민들의 대다수가 국가공권력에 의해 희생됐음을 뜻하는 것이다. 더욱이 10%를 웃도는 노약자에 대한 무차별 학살은 4·3사건을 진압한 국가공권력의 인권유린 실태를 명확히 보여준다.

    2) 군·경·우익단체의 인명피해 실태

    4·3 당시 제주에는 이곳에서 창설된 9연대를 비롯해 11연대, 2연대, 1독립대대, 해병대, 무지개 부대 등이 포진해 있었다. 이중 무력충돌이 가장 심했던 1948년 후반과 1949년 전반에 주둔했던 부대는 9연대와 2연대였다.

    군 당국 기록에 따르면 9연대 전사자는 12명이고 2연대는 92명이다. 9연대의 사망자 수가 적은 것은 이 부대의 소개작전이 무장대와의 직접 교전이 아닌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강경 토벌작전이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2연대는 한라산 속으로 작전지역을 옮겨 직접 무장대와 교전을 펼쳤기 때문에 전사자가 속출했던 것이다.

    한편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에 배치됐던 6여단 유격대대에서도 27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그밖에 11연대 4명, 해병대 13명 등이 4·3사건에서 숨졌다. 4·3 사건으로 인한 군인 전사자 수는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하지만, 180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4·3사건에 연루된 우익단체로는 대동청년단, 서북청년회, 대한청년단, 향보단, 민보단, 청년방위대, 특공대, 학생연맹 등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군·경 토벌대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마을의 방위와 방범, 순찰 업무를 맡았다.

    4·3사건으로 사망한 우익단체원들은 소정의 절차를 거쳐 국가유공자 및 유가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주4·3사건위원회가 제주 보훈지청으로부터 입수한 4·3사건 관련 국가유공자는 총 744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경찰과 애국단 출신으로 신고돼 있는데 경찰 출신 105명을 제외한 639명이 우익단체원에 해당된다.

    (나) 물적 피해 개황

    4·3사건에 따른 물적 피해는 크게 마을공동체의 파괴 및 소실, 공동시설의 소각 피해, 산업부문의 피해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49년 3월부터 1950년까지 각종 국내외 자료에 나타난 기록에 따르면 300여 마을과 2만여 호(戶), 4만여 동(棟)이 파손됐다. 그밖에 학교 관공서 공장 경찰지서 등 공공시설이 소각되거나 파괴됐다.

    (가) 집단살상

    1) 초토화 시기 살상

    1948년 11월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전개됐다. 중산간마을 거주자는 모두 적이라는 전제 아래 벌인 작전이었다.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이 기간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불에 타 사라졌다.

    “살려줍서 살려줍서!”

    진압군은 중산간마을 방화에 앞서 주민들에게 소개령(疏開令)을 내려 해변마을로 내려오도록 했다. 그러나 일부 마을에는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아, 또는 채 전달되기도 전에 진압군이 들이닥쳐 방화와 함께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남녀노소 구별 없이 집단희생을 당했다. 이 기간에는 중산간마을뿐만 아니라 일부 해변마을에서도 서북청년회 단원들에 의한 집단살상이 벌어졌다.

    ●조천면 교래리 사례

    1948년 11월13일(음력 10월13일) 새벽 5시께 군인들이 중산간마을인 조천면 교래리를 포위한 가운데 집집마다 들이닥쳐 다짜고짜 불을 붙이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 다급히 밖으로 뛰쳐나오던 주민들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날이 밝았을 때 100여 호가 모여 살던 교래리는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양재원 등 25명의 희생자는 한둘을 빼곤 다 노약자였다. 대부분 총에 맞은 채 불에 타 버렸고 열네 살 난 소녀는 대검에 찔려 숨졌다. 이날 아홉 살 난 아들을 잃은 양복천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날 남편과 조카는 미리 피신했고 나는 아홉 살 난 아들, 세 살 난 딸과 함께 집에 있었습니다. 날이 막 밝아올 무렵에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습니다. 집에 불을 붙이는 군인들에게 무조건 ‘살려줍서 살려줍서’ 하고 막 빌었어요. 그러나 군인들은 나를 탁 밀면서 총을 쏘았습니다.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로 쓰러지자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 하고 내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 발을 쐈습니다. ‘이 새끼는 아직 안 죽었네’ 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아들은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그들이 나가버린 후 아들이 불에 탈까봐 마당으로 끌어낸 후 담요 끈을 풀어 업었던 딸을 살폈지요. 아기를 등에서 내려보니 담요가 너덜너덜하고 다리에 손바닥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습니다. 내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다리까지 부숴놓은 겁니다. 난 지금도 허리를 못 쓰고 딸은 잘 걷지 못하는 불구자입니다.”

    한편 이날 여섯 살짜리 한 아이(김용길, 아명 김창식)는 세 군데나 총상을 입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역시 총에 맞아 숨져 가면서도 급히 손자를 담요에 싸 대밭으로 던진 증조할머니 덕분에 불에 타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김용길은 당시 총상으로 평생 오른팔 한번 제대로 구부리지 못했으며 왼쪽다리 관절뼈가 산산조각나는 바람에 목발 신세를 져야했다.

    ●제주읍 농업학교 수용소 사례

    1948년 가을 9연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는 제주농업학교에는 ‘농업학교 수용소에 갇히지 않으면 유명인사가 아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법조·교육·언론·행정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감금돼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쳐서 마련한 수용소는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대기소와 같았다.

    제주지방법원장과 검사가 끌려와 고문을 받는 상황이니 일반 주민들이 끌려와 겪는 고초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감자 중 일부는 구사일생했지만 많은 사람이 즉결 총살당했다. 군인들은 천막 수용소에 들어가 총살시킬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석방’이라고 외쳤다. 수시로 ‘대석방’이 있었고 그때마다 수감자들은 전전긍긍했다.

    제주읍내 주민들의 희생에 큰 역할을 한 사람으로는 송요찬 9연대장 외에 9연대 정보참모 탁성록 대위, 제주비상경비사령부 직속 특별수사대 최난수 경감, 제주도 서북청년회 김재능 단장 등이 꼽힌다. 이들은 제주도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당시 9연대 군인이었던 윤태준은 이렇게 증언했다.

    “연대 정보참모가 탁성록인데 그 사람 말 한마디에 다 죽었습니다. 그때 헌병에게 잡혀가면 살고, 탁대위에게 잡혀가면 민간인이고 군인이고 가릴 것 없이 다 죽었습니다. 또 서북청년 이 놈들이 고얀 놈들입니다.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이 놈들이 사건을 악화시켰습니다. 진압을 하라면 진압만 하지…. 그래서 도망갈 길 없는 주민들이 더 산으로 오른 겁니다.”

    탁성록은 워낙 악명이 높아 그에 관한 증언이 많다. 놀랍게도 그는 마약중독자로 밝혀졌다. 이에 관해서는 당시 제주도립 제주의원 경리주임이었던 하두용, 병원 의사였던 장시영, 9연대 군수참모였던 김정무 등의 증언이 있다. 9연대 정보참모라면 당시 제주도 진압군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마약 중독자이며 무소불위로 인명살상과 성폭행을 했다는 사실은 진압작전의 무모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제주비상경비사령부 직속 특별수사대 대장 최난수 경감도 제주4·3사건과 매우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그는 특별수사대원을 제주 출신은 한 명만 남기고 모두 타 지역 출신으로 바꿨다. 당시 제주에서 경찰간부로 재직했던 김호겸은 이렇게 증언했다.

    “최경감은 왜정 때 고등계형사 출신으로 그때 버릇이 남아 고문을 일삼았기 때문에 나와 마찰이 잦았습니다. 하루는 취조실에 가보니 한 여자를 나체로 만들어 거꾸로 매달아놓고는 고문하고 있었습니다. 홍순봉 청장에게 ‘최난수가 너무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제주사람들은 점점 더 육지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고 따졌습니다. 그래도 최난수는 막무가내였어요. 특별수사대는 또 삐라를 만들어 특정 마을에 몰래 뿌려놓고는 그 마을사람들을 잡아다 고문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돈도 나오고 여러 가지가 나오거든요. 자유당 시절의 소위 ‘관제 공산당’인 셈이지요.”

    제주도 서북청년회 김재능 단장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금품갈취와 고문은 물론 살인과 부녀자 능욕을 일삼았다. 김재능은 특히 물품을 달라고 강요하다가 거절당하자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을 서청 사무실로 끌고가 타살했다. 이에 관해 미군 보고서에는 “1948년 11월9일 서북청년회 단원이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을 폭행 치사했다. 서북청년회는 공산분자로 알려진 그를 단지 취조할 의도였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진술했다”고 기록돼 있다.

    ●애월면 하가리 사례

    애월면 하가리는 약 160호 가량의 작고 평범한 마을이었다. 해변을 따라 조성된 일주도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중산간마을이라고 하기에 애매한 마을이다. 그 때문에 하가리에는 소개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1948년 11월13일 새벽 1시께 제주읍 외도리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진압군은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냈다. 술잔치를 벌이고 있던 정기봉의 집 등 14채의 가옥에 불을 지르고 속칭 ‘육시우영’이라 불리는 인근 밭으로 주민들을 끌고 갔다. 곧 총성과 비명이 뒤섞이는 아비규환의 처절한 장면이 벌어졌다. 희생자는 김두천을 비롯해 25명에 이른다. 그 중 고순화는 만삭의 임산부였다. 이날 총에 맞고도 구사일생한 오창기는 뒷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3기로 지원 입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총 쏜 후 다시 칼로 목을

    이날 남편을 잃은 강응무는 이렇게 증언했다.

    “군인 세 명이 집으로 들어와 잠자던 남편을 끌어냈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관총으로 쏘았다. 총알이 몸 여기저기에 박혔는데 빨리 안 죽으니까 그랬는지 칼로 목을 잘라버려 피가 낭자했다. 난 그들을 군인이 아니라 인간 백정으로 본다.”

    군인들은 왜 주민들을 무차별 총살했을까. 이에 대해선 진압군이 산간마을인 원동에 무장대가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출동하던 중 그 중간지점인 하가리에 다다랐을 때 주민들이 모여 있자 ‘폭도 모의를 하는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날 애월면 소길리의 원동마을, 조천면, 안덕면 등 각처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총살과 방화사건이 동시에 벌어진 점을 감안하면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월면 소길리 원동마을 사례

    애월면 소길리 원동마을은 초토화작전이 막 개시된 1948년 11월13일 이후 지도에서 사라져버렸다. 원동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이미 하가리에서 무모한 학살을 벌인 바로 그들이었다. 온 마을을 뒤졌지만 무장대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두익 등 34명의 주민을 총살했다. 당시 17세였던 고남보는 참혹했던 그날을 이렇게 증언했다.

    “군인들이 플래시를 들고 다니며 주민들을 집합시켰으니 새벽 5시께였을 겁니다. 그들은 주민들 손을 뒤로 돌려 결박시킨 후 마치 굴비 엮듯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밧줄로 이었습니다. ‘폭도가 있는 곳을 가리키라’고 했지만 누가 그걸 알 수가 있어야지요. 결박당한 채 폭도를 찾아 이리저리 끌려다녔습니다. 새벽부터 굶은 채 하루종일 그 짓을 하다 오후 5시경에야 다시 주막집 앞으로 돌아왔지요. 처음엔 우릴 죽일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한때 결박을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군인 한 명이 어디론가 무전을 치더니 ‘너희는 10분 내로 총살된다’고 하더군요. 곧 애월리 쪽에서 군인 차가 올라왔지요. 난 급히 결박을 풀어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그들이 서로 경례하는 사이에 숲으로 뛰었습니다. 잠시 후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군인들은 시신 위에 식량과 이불을 덮어놓고 불을 지른 후에야 가 버렸습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긴 광란의 살육극… 2만5000 생죽음 육성증언

    4월3일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에서 ‘4·3사건 희생자 범도민위령제’에 참석한 고건 총리가 헌화하고 있다.

    ●표선면 토산리 사례

    표선면 토산리에 엄청난 비극을 몰고 온 사건은 1948년 12월15일부터 시작됐다. 마을을 포위한 군인들은 주민들을 모두 집합시킨 후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들을 분리했다. 또 여자들에게는 달을 쳐다보라고 한 후 20세 미만의 젊고 예쁜 여자들을 분리했다. 군인들은 이들을 표선국민학교로 끌고 가 감금했다가 주로 12월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총살했다. 그날 이후 토산리는 청년이 없는 마을이 됐다.

    1987년 ‘6월항쟁’ 직후 민주화 분위기가 조성되자 주민들은 그동안 한으로만 남아 있던 이 사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해 주민들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4·3사건 실상기(實狀記)’라는 진정서를 작성했다. 여기에 기록된 희생자 수는 157명이다.

    2) 도피자 가족 살상

    진압군은 소개령에 따라 중산간마을에서 해변마을로 내려온 사람들이라도 가족 중 청년이 한 명이라도 사라졌다면 ‘도피자가족’이라 해 총살했다. 주민들은 이를 대살(代殺)이라 불렀다. 총살은 진압군 주둔지인 해변마을에서 벌어졌는데 총살이 내내 그치지 않자 소개민들이 다시 도피 입산함으로써 사태를 장기화시키는 한 요인이 됐다.

    ●애월면 하귀리 사례

    초토화작전이 시작될 무렵인 1948년 11월 중순경 애월면 하귀리에서는 청년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경찰에 의한 총살이 잇따라 벌어지자 청년들이 은신처를 만들어 숨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8년 12월5일경 외도지서에서 하귀리 주민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월동용 장작을 마련해야 한다며 톱과 도끼 등을 갖고 지서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임산부를 매달아 대검으로 찌르다

    이에 주로 노인과 부녀자들이 연장을 들고 나타났고 경찰에게 주목받을 만한 것이 없다고 자신한 일부 청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경찰은 나무 베러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모인 사람들을 구타하고 그 중 청년들은 차에 태웠다. 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게 밀리던 국군에 의해 집단 총살됐다.

    ‘노력동원령’으로 일부 청년들을 잡아들인 외도지서에서는 뒤이어 ‘자수공작’을 펼쳤다. 첫 자수공작은 개수동(뒤에 학원동으로 개명)에서 벌어졌다. 숨어 있는 청년 10명의 이름을 대며 이들이 나타나면 모두가 무사하고 그렇지 않으면 마을사람 전체가 다칠 것이라고 협박했다. 10명 중 한 명인 김호중이 대표로 경찰서에 찾아가 자수했으나 곧바로 총살당했다.

    이어 12월10일 개수동에 들이닥친 경찰은 주민들을 속칭 ‘비해기(비학)동산’으로 집결시켰다. 그리고는 피신한 청년들의 부모와 자식 등 이른바 도피자가족을 골라 집단총살했다. 이날 희생자는 36명. 총살 대상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안인행(당시 13세)은 닷새 간격으로 부모를 잃었는데 ‘비해기동산’ 총살사건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경찰은 주민들을 비학동산에 모이게 한 후 가택수색을 벌여 집에 남아있던 두 사람을 끌고 왔습니다. 광령리에서 소개돼 온 부자(父子)인데 부친은 70대 노인이었고 아들은 35세 정도였습니다. 경찰은 먼저 아들을 패기 시작했습니다. 부친이 ‘우리는 소개민이다. 아들은 4대 독자니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곧 부친을 구타해 죽였습니다. 아들은 도망치다 총에 맞았습니다. 공포에 떨고 있는데 이번엔 어떤 여자를 지목해 끌어냈습니다. 25세쯤 되는 임산부였습니다. 경찰은 그 여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팽나무에 매달아놓은 후 경찰 3명이 총에 대검을 꽂아 찔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쏠 것이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개수동 주민들은 1949년 1월24일에도 큰 화를 입었다. 이날 저녁 고대규의 아내인 김산춘이 외도지서의 출두령을 받았다. 김산춘은 비학동산 총살사건 때 팽나무에 매달린 채 죽은 여인과 동서사이다. 세 살 난 아기를 업고 나간 김산춘은 외도리 입구에서 아기와 함께 총살됐다.

    “찌르지 않으면 너희가 죽는다!”

    두 모자말고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개수동 희생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호적과 족보를 일일이 대조했다는 고창선은 “당시 43가호 56가구가 살던 마을에서 63명이 희생됐다”고 말했다. 하귀1구가 친정인 김계순은 18세 때 겪었던 참으로 힘든 증언을 했다.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돼온 처녀가 하귀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 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도망쳤지만 다시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땐 너나 할 것 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경찰은 이미 초주검이 된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찌르지 않으면 대신 너희들이 죽는다’는 협박에 단장인 여자부터 차례로 찔렀습니다. 내 차례가 되기 전 그 처녀는 죽었습니다. 경찰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 안 되니 그렇게 한 것입니다.”

    희생자의 이름은 강조순으로 동네에 예쁘다고 소문났던 18세의 꽃다운 처녀였다. 그녀의 죽음의 구실이 됐던 오빠 강조행은 이미 4·3 발발 초기에 경찰에 끌려간 상태였다.

    ●표선면 가시리 사례

    1948년 11월15일 새벽 진압군은 표선면 가시리에 들어서자마자 닥치는 대로 총격을 가했다. 이날 희생된 사람은 30여 명인데 젊은이들이 급히 피신한 가운데 집에 남았던 노인과 어린이들이 화를 입었다. 60대 노부부인 안만규 김인하는 손녀와 손자를 데리고 냇가로 피신해 굴속에 숨었다. 하지만 아기 울음소리가 새 나가고 말았다. 진압군은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졌고 이들 가족은 운명을 같이했다.

    한편 소개령에 따라 표선리로 옮겨온 주민들은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됐다. 수용생활 한 달째인 12월12일 진압군은 수용자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호적과 대조해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가족이라는 구실을 붙여 속칭 ‘버들못’ 위쪽에 있는 밭으로 끌고가 76명을 한꺼번에 총살했다. 토산리로 소개돼 온 오태경은 “토산리 창고 부근에서 총살이 있었는데 총살할 때 박수를 치라고 했다. 총살 때 아기가 폴폴 기어서 위로 올라오니까 아기에게도 총을 쏘았다”고 증언했다.

    3) 자수자 살상

    진압군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과거 조금이라도 잘못한 사람은 자수하라. 자수하면 살려주지만 나중에 발각될 경우 총살을 면치 못한다”고 협박했다. 이에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거나 1947년 경찰의 3·1절 발포사건에 항의해 시위나 파업에 참여한 적이 있는 주민들은 모두 자수했다. 그러나 진압군은 약속과 달리 이들을 집단총살했다.

    ●조천면 와흘리 사례

    1948년 11월11일 무장대가 조천지서를 습격하고 퇴각하자 진압군은 이들을 쫓아 와흘리 1구까지 왔다가 마을에 불을 질렀다. 이틀 뒤 다시 찾아와선 마을에 남아 있던 노약자들을 죽였다. 경찰은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소개했는데 보름 가량 지났을 때 이른바 자수사건이 벌어졌다.

    “곱게 죽어주면 가족에게 알리고…”

    조천면 관내에서 200명 가량의 청년들이 경찰의 회유에 자수를 했는데 그 중엔 와흘리 출신 청년이 많았다. 중산간에 살면서 ‘식량을 제공하라’ ‘집회에 참석하라’는 무장대의 요구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군 주둔지인 함덕국교로 찾아간 자수자들은 보름 가량 지난 후 제주읍내 농업학교로 옮겨졌고 12월21일 ‘박성내’라는 냇가로 끌려가 총살됐다. 당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김태준의 증언.

    “12월21일 ‘토벌 간다’며 일부를 호명했습니다. 토벌에 갔다오면 자유롭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자원자가 많았는데 나도 그 대열에 끼었지요. 주먹밥을 하나씩 나눠줬는데 곧 버스가 오는 바람에 주먹밥을 늦게 받은 사람들은 미처 차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200명의 자수자 중 150명이 버스를 탔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다.

    “버스를 타고 제주농업학교에 도착하자 군인들은 갑자기 우리들 손을 철사줄로 결박한 후 10명씩 엮어 스리쿼터에 태웠습니다. 박성내에 이르자 지휘관은 ‘여러분이 곱게 죽어주면 가족에게 알려 시신이라도 찾게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군인들은 총살에 앞서 우리들의 주머니를 뒤져 돈과 귀중품을 털었습니다. 냇가의 바위 위로 끌고 가 묶여 있는 10명 단위로 총을 쏴 떨어뜨렸습니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팔에 총알을 맞은 나는 정신을 잃지 않고 있다가 다음 사람들이 끌려오는 3∼4분 사이에 철사를 끊고 바위틈에 숨었습니다. 거기서 새벽까지 숨어 있다가 현장을 벗어났습니다.”

    4) 함정토벌

    군·경이 무장대 복장을 하고 민가에 들어가 협조를 구하고 이에 응하는 사람들을 총살하는 것이 ‘함정토벌’의 전형이었다. 낮에는 군·경이 마을을 장악해 ‘폭도 혐의자’라고 총살하고, 군·경이 물러간 밤에는 무장대가 들이닥쳐 ‘반동분자’라고 숙청하는 바람에 일반 주민들은 무장대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군·경은 무장대 지원자를 찾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함정을 팠다.

    ●제주읍 도평리 사례

    1949년 1월3일 총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제주읍 도평리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에게 “동무, 동무” 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 중엔 인공기를 든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그런데 이들은 무장대가 아니라 인근 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원들이었다. 일부 주민은 눈치를 채고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대한민국 만세’까지 외쳤지만 결국 70명이 총살당했다.

    5) 피난 입산자 살상

    중산간마을이 방화되자 집 잃은 사람들은 산으로 피신했다. 또한 해변마을에서 연일 벌어진 도피자가족 총살은 소개됐던 사람들을 다시 산으로 피난케 하는 결과를 빚었다. 이런 사람들이 군경의 산악지역 수색 때 발각돼 총살을 당했다. 진압군은 이들을 무조건 무장대원으로 간주했으며 학살을 ‘전과(戰果)’로 둔갑시켰다.

    ●제주읍 용강리 사례

    제주읍 용강리는 산악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까닭에 무장대가 해변마을을 습격하러 가면서 거쳐가는 곳이었다. 진압작전이 심해지자 주민들은 항상 도망칠 준비를 하며 ‘빗개(보초)’를 바라보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됐다. 진압군이 무장대와 일반 주민을 전혀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진압군이 들이닥치기 전 빗개의 신호를 받아 도망쳤고 진압군이 물러가면 마을로 되돌아와 불타버린 움막을 다시 짓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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