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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튀고 살이 찢긴 광란의 살육극… 2만5000 생죽음 육성증언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전문

  • 글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피가 튀고 살이 찢긴 광란의 살육극… 2만5000 생죽음 육성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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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1월 한나라당이 당론으로 4·3 특별법을 발의하는 데 앞장선 현경대 의원(제주)은 4·3 보고서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했다.

“형식적으로는 특별법에 의해 작성된 최초의 정부 진상보고서라는 데 의미가 있다. 또 내용면에서는 4·3 특별법 취지에 맞춰 좌우 이데올로기 시각을 떠나 인간의 존엄성, 인권 가치를 중시한다는 입장에서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인권유린이 있었음을 공식 확인한 것이다.”

현의원은 4·3보고서에 대한 군 당국 또는 일부 보수·우익세력의 반발에 대해서는 “보고서가 나오게 된 경위와 특별법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4·3특별법은 5·18특별법과 달리 기존에 규정된 사건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5·18의 경우 기존에는 폭동·내란죄를 뒤집어썼던 피해자들이 특별법에 따라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음으로써 사건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반면 4·3특별법은 남로당의 무장봉기가 이 사건의 원인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 발생한 양민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무고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현의원 표현대로라면 ‘가치중립적인 법’인 셈이다.



4·3보고서 전문 중 여기서 소개하는 것은 4·3사건의 개요를 정리해놓은 다섯째 항목 ‘조사 결론’과 희생자들의 피해실태가 생생히 드러나 있는 넷째 항목 ‘피해상황’이다. ‘조사 결론’은 전문을, ‘피해상황’은 주요 내용을 발췌해 싣는다.

[조 사 결 론]

미 군정기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4·3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50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아 민원이 그치지 않다가, 2000년 1월12일 제주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사건의 배경은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착종되어 있어서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했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광복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고,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관리의 모리(謀利)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터져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3·1절 발포사건은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바로 이 사건이 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反警)활동을 전개했다. 경찰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우익청년단체가 평화협상 깨

사태를 중히 여긴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이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 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응원경찰과 서청(서북청년단) 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도 잇따랐다.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했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세력은 군정당국에 등 돌린 민심을 이용해 두 가지 목적, 즉 하나는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다른 하나는 당면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서 무장투쟁을 결정했다.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미군정은 초기에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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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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