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이라크군은 종이호랑이였던 것일까. 아니면 미국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던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한국 언론은 이라크전을 전쟁 그 자체로 분석하지 못했다. 전쟁에는 전쟁에서만 통용되는 고유한 원칙이 있는데 이에 대한 분석에 소홀했던 것이다. 미국군(동맹군)이 이라크전에서 보여준 작전과 전술에는 우리가 참고할 것이 많다. 이라크전이 끝나가는 마당에 이러한 것을 챙기고 분석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라크전을 살펴보려면 먼저 ‘종심(縱深)’이라는 단어부터 이해해야 한다. 종심은 ‘깊이’ ‘심도’ 등의 뜻을 가진 영어단어 ‘depth’를 옮긴 것이다. 군사용어인 종심은 이 말에서 파생된 ‘종심작전(Depth Operation)’이라는 단어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종심작전은 한 마디로 적국의 영토 안으로 치고 들어가 싸우는 것이라 자국 영토는 거의 피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종심작전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적국으로 들어가면 지리·기후·언어·적국 주민들의 저항 등 전투와 관련된 모든 조건이 불리해진다. 적진 깊숙이 들어간 전투부대에게 탄약·유류 등을 보급하는 것과 이 병참로를 지키는 것도 힘들어진다. 적국의 국민들이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병참로를 끊어버리면 깊숙이 들어간 전투부대는 고립무원이 돼 몰살할 수도 있다.
종심작전 對 종심방어
종심작전에 반대되는 것이 종심방어(Defense in Depth)다. 종심방어란 적군을 자국 영토로 깊숙이 유인해 들인 다음 병참로를 끊고 지형을 비롯한 모든 유리한 조건을 동원해 무찌르는 것. 종심방어가 성공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국경선에서 적군을 맞는 부대는 적군에게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항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살수대첩’이다.
서기 612년 1월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113만38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요하(遼河) 동쪽에 있는 고구려군 최대의 전략 거점인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의 결사항전으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수 양제는 30만 4000명의 병력을 뽑아 별동대를 만들고 우중문(于仲文)으로 하여금 이끌고 들어가 평양성을 공격케 했다.
요동성이라고 하는 중요 거점을 함락하지 못한 상태에서 별동대를 만들어 깊은 곳에 있는 목표물을 향해 전진시키는 것을 ‘우회접근’이라고 한다. 우회접근은 개구리가 뛰듯이 중요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시시한 곳은 그냥 지나치는 공격술인데, 종심 깊숙한 곳에 있는 목표물을 최단시간 내에 잡으려 할 때 펼친다.
군사작전에서는 ‘집중’이 중요하다. 그런데 첫 번째 거점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별동대를 우회접근시키는 것은 집중이 아니라 분산을 선택한 것이 된다. 별동대가 떠난 후 본대가 거점을 장악하고, 별동대 역시 목표물을 장악한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본대는 거점 확보에 실패하고 별동대는 종심방어에 말려 패퇴한다면, 이 군대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을지문덕은 우중문 군이 평양성에 도달할 때까지 우회접근을 계속하도록 유인했다. 그리고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주는 시)’를 보내 우중문이 종심방어작전에 말려들었음을 암시했다. 우중문은 이 시를 받아본 다음에야 속았다는 것을 알고 황급히 부대를 돌려 퇴각했다.
그러자 살수(청천강)에 군사를 매복시켜놓았던 을지문덕은 살수 상류에 보(洑)를 설치해 강물을 가둔 다음 우중문군이 얕아진 살수를 건널 때 보를 터뜨렸다. 우중문군이 갑작스런 수공(水攻)을 당해 우왕좌왕하는 사이, 숨어 있던 고구려의 복병들이 뛰쳐나와 대대적으로 공격해 30만이 넘는 우중문군 중에서 불과 수 천명만이 살아 돌아갔다.
미국은 후세인을 잡거나 제거하고 생화학무기로 대표되는 대량살상무기(WMD)를 압수하는 것이 전쟁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우회접근을 거듭하는 종심작전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는 한반도의 두 배 정도인 43만7521㎢의 면적을 가진 큰 나라이다. 쿠웨이트-이라크 국경선에서 바그다드까지의 거리는 대략 600㎞나 돼 우회접근작전이 성공할지 미지수였다.
고구려와 수나라가 싸울 때는 수나라의 병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이라크전에 투입된 동맹군은 55만의 이라크군보다 적은 30만명이었다. 이라크 병력은 대부분이 지상군이지만, 동맹군의 병력 중에는 공군과 해군 비율이 적지 않았다. 상황은 오히려 이라크가 종심방어를 하기 좋았던 것이다.
개전 직후 가장 큰 전투가 벌어진 곳은 바스라였다. 바스라는 이라크의 ‘요동성’이 돼 주어야 하는데, 바스라 방어를 책임진 이라크군 51사단장 칼레드 알-하셰미 준장은 개전 이틀째인 3월21일 사단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동맹군에 투항했다. 이라크는 종심방어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