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 남은 자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자살폭탄 공격을 꾀하는 자들, 공공건물의 물품을 약탈하는 자들, 거대한 후세인 동상을 망치로 두들겨 패는 자들, 미군이 주는 껌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어린이들, 밀려드는 공습 부상자들로 절망하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의사들….
이라크 석유자본 민영화
미국은 무슨 이유로 국제법과 세계적 반전여론을 거스르며 이라크를 ‘해방’시키려 했는가. 프랑스의 지성 레몽 아롱은 “어려운 시절은 생각을 깊게 만든다”고 했다. 독자들과 함께 이라크전쟁 뒤에 도사린 미국의 거대한 신국제질서 구축 야망을 가늠해보기로 하자.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배경에 세계 제2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라크 석유가 있음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도 부시 행정부는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해왔다.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부시 행정부에서 딕 체니 부통령은 에너지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석유를 포함, 미국의 에너지정책을 주무르는 자리다. 세계 석유 생산량의 25%를 소비하고 15%를 수입하는 미국은 석유의 안정적 확보를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 차원에서 접근해왔다. 에너지위원회를 딕 체니가 이끄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과 더불어 지금껏 고유가정책을 주창해 딕 체니의 신경을 건드려왔었다. 미국은 3차에 걸친 오일쇼크(1973∼82년)를 거치며 혼이 났던 에너지 과대소비국이다. 석유전문가들에 따르면, 미국 영토 내에서 현재 확인된 석유 매장량은 300억배럴. 반면 미국의 1년 석유 소비량은 72억배럴이다. 수입을 안 하고 자급자족할 경우 불과 4∼5년이면 바닥난다.
미국 내 석유자원은 세월이 흐를수록 줄어드는데도 소비가 줄지 않는 게 미국의 구조적 고민이다. 현재 석유 소비량의 60%를 수입하는 미국은 2020년이면 소비량의 90%를 수입해야 한다.
만일 미국이 세계 제2의 석유 매장량을 지닌 이라크를 점령한다면, 그래서 석유자원을 요리할 수만 있다면, 장기적 전망에서 에너지 위기의 충격을 줄일 수 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CIA 국장을 지냈지만, 딕 체니와 마찬가지로 ‘매파(the hawkish)’로 분류되는 제임스 울시가 한 TV대담에서 “미국으로선 후세인의 대량파괴무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라크의 민주화를 통한 석유 확보가 관건”이라 말한 것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배경을 솔직히 드러낸 것이다.
이라크전쟁을 강공으로 밀어붙이는 데 일익을 담당한 딕 체니의 구상은 이라크 석유를 민영화한다는 것이다. 1979년 후세인이 집권하자마자 서방세계를 놀라게 했던 조치가 석유 국유화였다. 그러나 이제 후세인의 몰락으로 그 이권은 서방 석유기업들(구체적으론 미국의 석유 메이저들)에게 돌아갈 참이다.
석유 민영화 방침을 앞장 서서 주창해온 인물이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후원을 받고 있는 이라크국민회의(INC) 의장 아하메드 찰라비다. 그는 4월4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석유·에너지 실무그룹’의 정책토론장에서 “석유의 국가독점체제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그 토론은 미 국무부의 지원 아래 INC, 쿠르드족 등 반(反)후세인 세력들이 모여 이라크 재건을 논의했던 런던회의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그런데 찰라비가 내세우는 석유 민영화의 논리가 묘하다. ‘석유의 민주적 지배’를 위해서다. 말하자면 외국인 자본가들의 투자를 통해 이라크 석유산업을 발전시키면, 그 과실은 이라크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다른 석유 산유국들에서 보아왔듯, 미국 석유 메이저들의 배만 불릴 전망이다(시아파 출신인 찰라비는 12세 때 이라크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지냈기에 이라크 내에 지지세력이 없다. 1977년 요르단 수도 암만에 페트라은행을 세웠으나 1990년 파산해 물의를 일으킨 논쟁적 인물이다. 요르단 법원은 그에게 사기죄를 선언, 중형을 선고했다. 때문에 파월 미 국무장관과 조지 테닛 CIA 국장은 찰라비를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보고 그에게 이라크 임시정부 요직이 주어지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그들은 미국이 ‘이라크해방법’에 따라 지원한 자금의 상당부분을 찰라비가 착복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