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외교보다 힘… ‘팍스 아메리카나’여 영원하라

부시가 꿈꾸는 新국제질서

  •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3-04-25 17: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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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라크전쟁은 아프간전쟁에 이어 미국이 초강대국임을 새삼 확인시켰다.
    •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의 평화)’는 전쟁을 통해서만 실현되는가. 21세기 두 주요 전쟁에 이긴 미국의
    • 패권전략은 무엇인가. 2대에 걸친 부시 미 대통령 부자와 강경파 참모들이 그리는 신국제질서의 실체를 알아본다.
    외교보다 힘… ‘팍스 아메리카나’여 영원하라
    미국은 이라크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10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해방군’ 미군의 무차별 총격으로 죽었다. 미 국방부의 전문용어를 빌리자면, 그 희생자들은 ‘부수적(collateral) 피해자’일 뿐이다.

    살아 남은 자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자살폭탄 공격을 꾀하는 자들, 공공건물의 물품을 약탈하는 자들, 거대한 후세인 동상을 망치로 두들겨 패는 자들, 미군이 주는 껌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어린이들, 밀려드는 공습 부상자들로 절망하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의사들….

    이라크 석유자본 민영화

    미국은 무슨 이유로 국제법과 세계적 반전여론을 거스르며 이라크를 ‘해방’시키려 했는가. 프랑스의 지성 레몽 아롱은 “어려운 시절은 생각을 깊게 만든다”고 했다. 독자들과 함께 이라크전쟁 뒤에 도사린 미국의 거대한 신국제질서 구축 야망을 가늠해보기로 하자.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배경에 세계 제2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라크 석유가 있음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도 부시 행정부는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해왔다.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부시 행정부에서 딕 체니 부통령은 에너지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석유를 포함, 미국의 에너지정책을 주무르는 자리다. 세계 석유 생산량의 25%를 소비하고 15%를 수입하는 미국은 석유의 안정적 확보를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 차원에서 접근해왔다. 에너지위원회를 딕 체니가 이끄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과 더불어 지금껏 고유가정책을 주창해 딕 체니의 신경을 건드려왔었다. 미국은 3차에 걸친 오일쇼크(1973∼82년)를 거치며 혼이 났던 에너지 과대소비국이다. 석유전문가들에 따르면, 미국 영토 내에서 현재 확인된 석유 매장량은 300억배럴. 반면 미국의 1년 석유 소비량은 72억배럴이다. 수입을 안 하고 자급자족할 경우 불과 4∼5년이면 바닥난다.

    미국 내 석유자원은 세월이 흐를수록 줄어드는데도 소비가 줄지 않는 게 미국의 구조적 고민이다. 현재 석유 소비량의 60%를 수입하는 미국은 2020년이면 소비량의 90%를 수입해야 한다.

    만일 미국이 세계 제2의 석유 매장량을 지닌 이라크를 점령한다면, 그래서 석유자원을 요리할 수만 있다면, 장기적 전망에서 에너지 위기의 충격을 줄일 수 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CIA 국장을 지냈지만, 딕 체니와 마찬가지로 ‘매파(the hawkish)’로 분류되는 제임스 울시가 한 TV대담에서 “미국으로선 후세인의 대량파괴무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라크의 민주화를 통한 석유 확보가 관건”이라 말한 것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배경을 솔직히 드러낸 것이다.

    이라크전쟁을 강공으로 밀어붙이는 데 일익을 담당한 딕 체니의 구상은 이라크 석유를 민영화한다는 것이다. 1979년 후세인이 집권하자마자 서방세계를 놀라게 했던 조치가 석유 국유화였다. 그러나 이제 후세인의 몰락으로 그 이권은 서방 석유기업들(구체적으론 미국의 석유 메이저들)에게 돌아갈 참이다.

    석유 민영화 방침을 앞장 서서 주창해온 인물이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후원을 받고 있는 이라크국민회의(INC) 의장 아하메드 찰라비다. 그는 4월4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석유·에너지 실무그룹’의 정책토론장에서 “석유의 국가독점체제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그 토론은 미 국무부의 지원 아래 INC, 쿠르드족 등 반(反)후세인 세력들이 모여 이라크 재건을 논의했던 런던회의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그런데 찰라비가 내세우는 석유 민영화의 논리가 묘하다. ‘석유의 민주적 지배’를 위해서다. 말하자면 외국인 자본가들의 투자를 통해 이라크 석유산업을 발전시키면, 그 과실은 이라크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다른 석유 산유국들에서 보아왔듯, 미국 석유 메이저들의 배만 불릴 전망이다(시아파 출신인 찰라비는 12세 때 이라크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지냈기에 이라크 내에 지지세력이 없다. 1977년 요르단 수도 암만에 페트라은행을 세웠으나 1990년 파산해 물의를 일으킨 논쟁적 인물이다. 요르단 법원은 그에게 사기죄를 선언, 중형을 선고했다. 때문에 파월 미 국무장관과 조지 테닛 CIA 국장은 찰라비를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보고 그에게 이라크 임시정부 요직이 주어지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그들은 미국이 ‘이라크해방법’에 따라 지원한 자금의 상당부분을 찰라비가 착복했다고 믿는다).

    후세인 정권을 몰아낸 이후의 이라크를 누가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지난 1년간 부시 행정부와 워싱턴에 포진한 싱크탱크들은 포스트 후세인(post-Hussein) 구도를 나름대로 그려왔다. 미 정부안은 극비사항이어서 문서 자체를 보기 어렵지만, 부시 행정부와 밀착한 싱크탱크들이 낸 보고서들을 통해 대체적인 윤곽은 드러난다.

    주요한 것들만 모아 보면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현명한 평화, 전후(post-conflict) 이라크 전략’(2003년 1월) △미 외교위원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이라크, 그날 이후’(2003년 3월) △워싱턴 아메리칸대학과 대서양위원회, ‘평화 쟁취하기, 이라크의 성공적 이행 관리’(2003년 1월) △헤리티지재단, ‘사담 이후의 이라크 미래, 미 개입의 청사진’ 보고서들 △미 기업협회, 부르킹스연구소, 웨스트민스터 민주주의재단 등이 연 일련의 이라크 문제 관련회의들 △이라크국민회의(INC) 등 반체제 망명단체들이 미 국무부의 후원 아래 준비해온 ‘이라크 미래 프로젝트’△미 상원 외교위원회의 전후 이라크 관련 청문회 등이다.

    미 상원 외교위 청문회는 2002년에 5번, 2003년 들어 4번 열렸다. 이런 보고서들과 청문회, 각종 회의, 세미나 등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 바탕엔 석유자원 확보를 비롯한 미국의 국가이익을 극대화하는 논리가 깔려 있다. 직설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라크 민주화란 결국 이데올로기적 치장에 지나지 않는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점령정책 계획은 보안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위의 싱크탱크들과 함께 의견수렴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미국의 이라크 행정책임자로 내정된 제이 가너 예비역 중장은 심지어 지난 3월 상원 외교위에 출석하기로 돼 있던 일정을 어기고 나타나지 않아 빈축을 샀었다.

    이같은 부시 행정부의 비밀주의는 이라크 복구에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미국으로선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라크 내에서 미국과 영국의 독점권을 뜻하는 어떤 종류의 제안도 유엔 안보리에서 통과되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프랑스·독일 등 유럽연합(EU) 국가들과 러시아의 분위기도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한다.

    더욱이 일부 드러난 미 행정부의 이라크 재건계획은 비현실적인 일정 때문에 비판받는다. 이를테면 미 행정부가 미국 기업들에게 도로 보수, 학교 건설, 의료체계 점검 등 모든 이라크 재건사업을 맡긴 뒤 1년 안에 마치도록 돼 있다.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전문가들은 이라크 침공으로 ‘일’을 벌인 미국이 1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년 동안은 이라크 재건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고 보고 있다.

    4단계 거치며 사실상 2년간 미군정

    미국은 바그다드 함락 뒤 이라크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첫 단계로 이라크 망명·지역지도자 회의를 소집한 다음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들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이라크 실권을 지배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현재 미국이 그리는 그림은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년간 사실상 미군정을 실시한 뒤 친미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 하나의 형태로 이라크에 왕정(王政)을 부활하는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1958년 군부 쿠데타로 몰락한 이라크 하심 왕조의 법적 토대였던 1926년 헌법에 근거해서다. ‘왕정국가 이라크’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미국이 주장해온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발상이다. 친미 독재왕국인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모습을 미국이 선호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미국은 일단 국제여론과 이라크 국민의 반응을 떠보다가 이 왕정 복귀안을 폐기할 가능성이 크다.

    4월8일 영국 벨파스트에서 열린 부시 미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회동에서 합의된 내용은 4단계 이라크 정권 창출안이다. △1단계:미 예비역 중장 제이 가너(미 국방부 재건인도지원처장)를 우두머리로 한 군정 실시 △2단계:3개월 뒤 임시 이라크정부(IIA) 구성 △3단계:9개월 뒤 제헌국회 구성 △4단계:이라크 신정부 설립이다. 군정 실시부터 이라크 신정부 출범까지는 2년이 걸린다(부시와 블레어는 이같은 구상을 형식적으로 합법화하기 위해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얻어낼 계획이다. 그러나 러시아·프랑스 등이 고분고분 따라줄지는 미지수다. 후세인 정권 아래 맺어졌던 이라크 유정개발권에 대한 기득권을 보장하는 막후 거래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1단계 군정에서 토미 프랭크스 미 중부군사령관은 이라크 보안을 맡고 군정 지도자 가너의 보고를 받는다. 프랭크스가 사실상 ‘이라크 총독’이나 다름없다(독자들이 이 글을 읽는 시점엔 군정이 이미 시작됐을 것이다). 2단계 임시 이라크정부(IIA)엔 22명의 각료를 두고 미국인이 보좌역으로서 실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IIA는 후세인 잔재세력을 제거한 새로운 이라크 군대를 지휘한다. 이 군대는 유전지대와 국경 순찰임무를 맡는다. 후세인 잔재세력의 무장반란에도 이 군대가 투입된다(딕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국민회의 의장 아하메드 찰라비는 펜타곤의 도움 아래 급조한 700명의 ‘이라크의용군’을 바탕으로 군 지휘권을 쥐고 싶어한다. 그는 이 병력과 함께 미국 수송기를 타고 4월초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에 발을 디뎠다).

    외교보다 힘… ‘팍스 아메리카나’여 영원하라

    이라크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지른 유정에서 미국 소방대원들이 불길을 잡고 있다.

    한편 미국은 이라크를 거주민 특성에 따라 남부·중부·북부의 세 지역으로 나눌 계획이다. 북부는 쿠르드족, 중부는 수니파, 남부는 시아파에게 맡겨 분할통치한다는 것. 이럴 경우 찰라비가 남부지역을 맡을 가능성도 있다. 이라크의 종족간 갈등이 망국적 지역감정으로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는 후세인의 강철같은 지도력으로 그런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분할통치안엔 지난날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통치 단골수법이었던 이른바 분할지배(divide and rule)로써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복선이 깔려 있다고 보여진다. 이 안이 구체화된다면, 이라크가 3개 독립국가로 분열하는 모습도 예상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쿠르드족 독립국가안에 예민하게 반응해온 터키는 이런 가능성을 두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가 3개 독립국으로 분열 약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라크의 영토적 통일성을 보장한다”는 입장이다. 이라크 현 국경선을 그대로 지키려는 것은 두 가지 고려사항 때문이다. 쿠르드 독립국가설로 ‘미국의 동맹국’인 터키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악의 축’인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이라크 전후 복구에 미국은 얼마나 기여할 것인가. 이 대목에 대해 미 싱크탱크들은 후하지 못하다. 유엔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문을 한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쟁(1980∼88년), 12년 터울로 치러진 두 차례에 걸친 걸프전쟁(1991년과 2003년), 그리고 10년 넘게 가해진 유엔의(사실상 미국 주도의) 경제제재로 이라크는 만신창이가 됐다. 따라서 이라크 국가재건비용은 엄청나다. 추산하기에 따라 고무줄이지만, 1000억∼4000억달러 수준이다. 미국은 이런 거액을 댈 뜻이 없다. “그 문제는 유엔에서 논의될 사안”(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란 주장이다. 유엔 결의안을 거치지 않고 국제사회의 반대 속에 이라크 침공에 나섰던 미국이 전란의 뒤치다꺼리를 국제사회에 떠넘기려 하지만 흔쾌히 이라크 지원금을 댈 나라는 많지 않아 보인다.

    미국은 이라크 재건과정을 미국 기업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태도다. 딕 체니가 한때 대표이사 회장으로 일했던 핼리버튼의 계열사 켈로그, 브라운 앤드 루트(KBR)는 이라크군이 불을 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이라크 남부 유정(油井)의 진화작업 계약을 따냈다. 그렇다면 그런 돈을 포함, 막대한 이라크 재건비용은 누가 대는 것일까. 미국은 “이라크 석유 판매대금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라크의 석유를 팔아 전후 재건비용 및 미군 주둔비용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 상원 재무위원장 척 그레스리 등 미 공화당 정치인들은 1907년의 헤이그협정을 들먹이며 “점령국은 피점령국 소유의 자산을 팔아 전쟁비용에 쓸 권리가 있다”고까지 주장하는 형편이다.

    정글 상태로 돌아간 국제사회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끼리의 전쟁이나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쟁에서부터 21세기 첫 전쟁인 아프간전쟁, 그에 뒤이은 이라크전쟁까지 숱한 전쟁이 있어왔다. 전쟁의 원인을 놓고 여러 정치학자들이 서로 다른 해석들을 내놓지만, 그 본질은 무력으로써 적의 의지를 꺾어 굴복시키는 것이다. 명저 ‘전쟁론’의 저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목적을 ‘우리의 의지를 적(敵)에게 관철시키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부시 미 대통령의 전쟁 코드는 대화나 협상을 통한 의지의 관철은 아닌 듯하다. 유엔을 통한 외교수단은 ‘힘이 곧 진리’라 믿는 부시의 코드와 맞지 않는다. 부시는 이라크전쟁에서 다시 한번 힘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세계정부가 없다는 점에서 국제정치의 본질은 무정부 상태다. 초강대국 미국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런 대로 유엔을 통해 갈등을 조절하고 합의점을 찾아왔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전쟁에서 국제법상 유엔 안보리의 결의를 거치도록 돼 있는 전쟁행위 절차를 외면했다. 이쯤 되면 국제정치는 무정부 상태다. 힘센 자가 약한 자를 누르는 정글의 세계다.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전쟁상태라 표현했다. 특정국가의 전쟁행위를 기구(유엔)나 제도(국제법)로 규제할 수 없다면 힘센 자만이 살아남는 정글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보는 세계의 눈길이 대체로 비판적인 것도 이런 인식에 바탕을 뒀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영향력 있는 정치학자 조지프 나이(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국제분쟁의 이해’(2000년판)에서 인류는 지금까지 세 가지 기본형태의 국제정치를 경험해왔다고 썼다. 첫째는 로마제국의 지배와 같은 세계제국체제, 둘째는 로마 멸망 뒤 중세시대의 봉건체제, 그리고 무정부적 국제정치체제다.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얘기지만, 주권(sovereignty)이란 이름 아래 개별 국가 위의 상위국가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무정부적 국제정치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왔다. 그러나 지금 부시 행정부의 미국은 그런 국제질서를 부인하면서, 로마제국이 누렸던 것과 같은 지배적 국제관계(나이의 용어를 빌리자면, 세계제국체제)를 확고히 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이름하여 패권국가다.

    1990년대를 전후해 동서냉전체제가 무너진 뒤 미국은 유일 패권국가로 떠올랐다. 그런 미국은 이라크 침공에서 유엔을 무시하고 21세기의 ‘세계제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부시가 그리는 국제질서는 고대 로마의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 18세기 영국의 ‘팍스 브리타니카(영국의 평화)’처럼 미국의 힘에 바탕을 두고 (석유를 비롯한) 미국의 국가이익을 관철시키는 ‘팍스 아메리카나’다.

    지구상에서 미국에 맞설 국가나 집단은 없다. 로마제국의 영광을 21세기에 재현하는 모습이다. 이는 곧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인 패권국가(hegemonic power)로서의 미국이다.

    동서냉전 아래 미국의 로버트 길핀 같은 일부 정치학자들은 미국의 패권이 세계평화와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른바 ‘패권안정이론’이다. 길핀의 ‘국제정치학에서의 전쟁과 변화’에 따르면, ‘팍스 로마나’나 ‘팍스 브리타니카’가 그랬던 것처럼 ‘팍스 아메리카나’는 세계에 평화와 안보를 보장해준다고 주장했다. 지난날 로마가 주변국가나 부족들을 힘으로 평정한 뒤 찾아온 평화, 그리고 대영제국이 스페인 등 주요 경쟁국들을 힘으로 누르고 인도를 비롯한 전세계에 식민지를 구축한 뒤 세계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는 입장이다.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핵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이 세계의 경찰로서 질서를 잡아가면 우방국들에게 평화와 안보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비로운 패권국가인 미국이 설정한 국제질서를 따르는 게 세계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묘한 논리다.

    여기서 길핀이 말하는 ‘질서’에는 자유주의적 국제무역질서도 포함된다. 그는 미국의 해외투자도 미국의 패권이라는 정치적·경제적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로마의 평화 뒤에 정복자의 오만과 노예의 고통이 있었고, 영국의 평화 뒤에 식민지 자원 착취와 수탈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패권 지배 뒤에는 종속적 관계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어야 하는 후진국들이 있다. 이를테면 미국 무기체계를 받아들인 국가는 그 기술 종속으로 말미암아 (이른바 로열티나 기술료 형태로) 엄청난 바가지를 써야 한다. 미국의 핵우산 밑에 남아 있길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무기를 개발하겠다거나 국제경제 파트너를 다른 데서 찾겠다고 대든다면? 석유자원민족주의를 내걸었던 후세인 같은 고단한 처지가 되기 십상이다.

    바그다드 함락 무렵 강경파의 거두인 딕 체니 부통령은 “역사가 우리를 평가할 것”이란 말을 남겼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값싼 석유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통해) 미국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길 바란다면 제대로 한 얘기일 듯하다. 그러나 지구촌 평화에 도움이 됐는가? ‘해방’의 대상인 이라크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민주화 도미노이론의 허구

    이른바 ‘민주화 도미노이론’은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들이 패권 확장을 위해 내건 이데올로기다. 중근동(中近東) 이슬람 국가들이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것은 사실이다. 독재왕조(사우디, 쿠웨이트, 요르단)이거나 형식상 공화정이라도 독재국가(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이란)들이다.

    미국은 이 이슬람 독재국가들을 미국의 세력권 안에 편성할 필요를 오래 전부터 느껴왔다. 기본적으론 석유자원의 안정적 확보가 그 목적이다. 아울러 이 국가들을 유로경제가 아닌 미국이 주도하는 달러경제에 편입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미국의 패권 확장에 적대적이거나 비협조적인 독재국가(이라크, 시리아, 이란)를 손봐야 한다. 이라크는 1순위로 꼽혔을 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데올로기가 민주화 도미노이론이다.

    따지고 보면 도미노이론은 케케묵은 곰팡내 나는 이론이다.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할 때 내건 이론이다. 베트남을 막지 못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하나씩 무너져 공산국가가 된다는 이론은 그 뒤 허구였음이 드러났다. 그래서 워싱턴의 정세분석가들 사이에서도 중동 민주화 도미노이론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다. 미 국무부도 최근 작성한 한 기밀보고서에서 “중동지역에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하긴 어렵다”는 결론을 낸 것으로 알려진다.

    이슬람지역에 팽배한 반미감정은 실제 선거에서 이슬람근본주의 성향의 정당 지지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된다. 이는 1992년부터 지금껏 이어진 내전에서 8만명의 희생자를 낸 알제리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1991년 12월 치러진 알제리 총선거에서 이슬람근본주의 정당인 이슬람구국전선(FIS)이 의석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자, 세속적 성향의 집권당인 인민해방전선(FNL)이 군부와 손잡고 선거결과 자체를 부정했다. 그 바람에 지금껏 내전중이다.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副)장관은 부시 행정부에서 도미노이론의 대변자다. 그는 이라크가 아랍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 주장한다. ‘민주 이라크’는 이웃 시리아와 이란의 민주화를 가져오고 이어 아랍세계 전체로 확장될 것이란 얘기다. 그는 최근 (미 방송사들 가운데 가장 친(親)부시적이고 ‘애국적’인) 폭스TV와의 대담에서 “여러 사람들이 아랍 민주화 불가론을 말하지만, 그건 참으로 잘못된 견해(terrible notion)다. 나는 이라크에서 민주화가 가능하다는 걸 (미국이) 보여줄 기회라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딕 체니 부통령은 미국 TV와의 인터뷰에서 “적어도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친미 왕조국가가 미국에겐 바람직하다”고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다. 사우디는 친미왕조일 뿐더러 독재국가다. 의회도 없는 나라다.

    미국에겐 ‘민주냐, 독재냐’ 하는 잣대보다 ‘친미냐, 반미냐’가 더 중요한 잣대다. 민주화 도미노이론은 미국의 중동패권 확장을 위한 허구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런데도 부시의 강경파 참모들은 민주화 도미노이론을 굽히지 않는다.



    외교보다 힘… ‘팍스 아메리카나’여 영원하라

    이라크 임시정부 수반으로 거론되는 아하메드 찰라비(팔짱을 끼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가 이라크 남부도시 나시리야에서 대중연설을 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출신 문명비평가로 이름난 에드워드 사이드(미 컬럼비아대 교수·영문학)는 이라크전쟁을 어떻게 읽고 있을까? 그는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전쟁을 통해 설정한 목표는 아랍세계의 탈아랍화·친미화”라고 주장한다. 이집트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알 아흐람 위클리’가 이라크 위기가 높아질 무렵 마련한 한 토론장에서 사이드는 “미국은 단순히 후세인 제거를 통한 석유자원 확보만이 아니라, 아랍지역 전체에 친미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이드는 이 토론에서 부시 행정부의 중동정책에 (잘못된 방향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이른바 ‘아랍전문가’로 버나드 루이스와 파우드 아자미를 꼽았다. 루이스는 프린스턴대 명예교수로 ‘이슬람과 서구’(1993년), ‘중동의 미래’(1997년) 등의 저서를 낸 중근동(中近東) 역사 연구자다. 루이스는 ‘동심원이론(theory of concentric circles)’으로 아랍국가들을 설명한다. 가장 바깥의 동심원은 국민과 정권이 함께 미국을 혐오하는 반미국가들(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중간의 동심원은 정권은 친미적이지만 국민들은 반미적인 국가들(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요르단, 모로코), 가장 안쪽의 동심원은 정권뿐 아니라 타국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친미적 성향을 보이는 국민들로 이뤄진 국가들(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아랍 에미리트)이 각각 속한다.

    루이스의 동심원이론은 아랍국가들이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아랍지역 국가들을 ‘친미적 정권과 친미적 국민’으로 변화시키는 게 미국의 목표로 설정된다. 이같은 루이스의 이론적 설명은 단순명쾌한 것을 좋아하는 부시의 스타일과 맞아떨어져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다(그러나 사이드는 “루이스는 지난 40년간 아랍지역을 방문한 적이 없어 관념적으로만 아랍을 이해할 뿐”이라고 루이스의 한계를 지적한다).

    시리아에 정치적 압력

    파우드 아자미는 존스홉킨스대 교수로 중근동, 특히 걸프지역 전공자다. ‘아랍의 곤경: 1967년 이후의 아랍 정치사상과 실천’(1981년)이란 저서를 냈다. 아자미는 올해 초 미국에서 발행되는 영향력 있는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기고한 ‘이라크와 아랍의 미래’란 글에서 “이라크 침공의 주요 동기가 아랍세계를 근대화하는 것이라면, 미국의 일방주의(unilateralism)에 바탕을 둔 이라크 침공은 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다”는 요지의 주장을 폈다.

    아울러 아자미는 부시 행정부에 이라크전쟁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심어준 인물로 꼽힌다. “일단 이라크전쟁이 벌어지면 미군은 침공군이 아닌 ‘해방군’으로 환영받을 것이며, 이라크 남부도시 바스라와 수도 바그다드의 시민들은 미군에게 꽃을 던질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라크 내 다수 시아파와 후세인 정권을 떠받치는 수니파의 갈등, 후세인 독재에 대한 반감만을 고려한 아자미의 그런 낙관론은 아랍민족주의적 정서를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현재 미국 강경파들이 이라크 다음으로 손볼 대상으로 점찍고 있는 나라는 시리아와 이란이다. 이들 국가는 일찍이 클린턴이 ‘불량국가’로 낙인찍었고, 부시는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두 국가의 공통점은 (미 CIA가 의회에 보고한 자료들에 따르면) 생화학무기와 미사일 등 대량파괴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스커드미사일에 화학무기를 실을 능력을 갖추었다는 점. 특히 이란은 핵무기 개발을 추진중인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미 국무차관 존 볼튼은 바그다드 함락 무렵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량파괴무기를 가지려는 국가들이 이라크사태를 통해 대량파괴무기가 그들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기를 바란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시리아를 겨냥해 “이라크를 군사적으로 돕지 말라”는 경고를 공개적으로 한 바 있다. 물론 시리아는 이를 부인했다. 이를 두고 이라크 다음 순서가 시리아가 아니냐는 섣부른 분석들이 나왔다.

    그러나 현재로선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수준에 그칠 전망이다. 2000년 7월 부친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의 사망으로 30대 중반에 권력을 잡은 시리아의 바쉬르 알 아사드는 그동안 영국의 블레어 총리를 상대로 그 나름의 줄타기 외교를 해왔다(2002년 10월 영국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블레어가 다마스쿠스를 방문했고 12월 알 아사드가 영국을 방문했었다).

    외교보다 힘… ‘팍스 아메리카나’여 영원하라

    미군 병사들이 4월8일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이라크 바그다드의 대통령궁에서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이라크 재건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라크전쟁을 통해 미국의 이익이 안정적으로 확보되는 신국제질서를 구축하는 게 아들 부시의 야망이라면, 12년 전 아버지 부시도 그 비슷한 야망을 내비쳤다.

    ‘신세계질서’는 1990년대 이후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화두다. 1991년 3월6일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미 상하원 합동의회에 출석, 1차 걸프전쟁의 승리 보고를 겸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유명한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선언했다. “소련의 붕괴로 동서냉전이 막을 내린 뒤 유일 패권국가로 등장한 미국이 세계질서를 잡아나가는 역할을 맡겠다”는 뜻을 담은 선언으로, 그가 말한 신세계질서란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재편성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뒤에 언급할 아들 부시의 대외정책에 견주어 자료적 가치가 있으므로 그 요점을 옮겨본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고 있다. 새로운 세계질서의 전망을 담은 세계다. 윈스턴 처칠의 말을 빌리면, ‘정의와 공정함(fair play)의 원리들이 약자를 강자로부터 보호하는 세계질서’다. 냉전시대의 대치상태에서 벗어난 유엔은 그 창설자들이 추구했던 역사적 비전을 이루려 하고 있다. 걸프전쟁은 그 새로운 세계의 첫 시험무대였고 미국은 이 시험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라크에 대한 승리가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a war to end all wars)’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질서가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평화를 지속시키는 것은 우리 미국의 임무가 돼야 한다.”

    이 선언에서 부시는 세 가지 대외정책을 밝혔다. 첫째 미국의 중요한 국가이익이 걸프지역의 안정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아라비아반도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것이며, 둘째 이라크를 포함한 걸프지역 국가들이 대량파괴무기와 미사일 개발 등 새로운 무기경쟁(arms race)에 나서지 못하도록 막겠으며, 셋째 중동지역의 평화와 안정, 경제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부시는 이보다 두 달 앞서 가진 국정연설(1991년 1월16일)에서도 ‘신세계질서’에 대해 언급했다. 그 자리에서 부시는 “법이 국가들의 행위를 지배하고 유엔이 그 창설자들의 약속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평화유지의 역할을 맡는 것이 신세계질서”라고 설명했다.

    똑같이 신국제질서를 추구하면서도 부시 부자에겐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아버지 부시는 미국이 세계평화를 지키는 역할을 맡겠다면서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유엔의 산파역을 맡았던) 전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의 말을 빌리면서까지 유엔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12년 뒤 아들 부시는 2차 걸프전쟁을 일으켜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번엔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을 거치지 않았고, 따라서 유엔의 권위를 깡그리 무시했다. 12년이란 터울만큼이나 큰 차이다.

    동서냉전 뒤의 국제질서를 뜻하는 ‘신세계질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정치학계엔 지금도 논란이 많다. 질서(order)에는 힘(power)의 논리가 관철된다. 뒷골목 질서를 주먹 센 자가 잡듯, 세계질서를 잡으려면 세계경찰이 나서야 한다. 아버지 부시는 유엔이란 국제기구를 언급했지만, 결론은 미국이 세계경찰을 맡겠다는 얘기였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세계질서 유지를 미국이 맡아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미국의 대외정책과 국가이익이 전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정책과 이익일 수 있는가(다시 말해 미국은 걸핏하면 인권·정의 같은 보편주의를 들먹이지만, 미국의 이익은 보편적인 것인가)? 미국의 국가이익과 충돌하는 것은 사악한 것이고 징벌의 대상이 되는가? 아울러 세계질서와 평화유지가 미국의 국가이익과 충돌한 경우 과연 미국은 국가이익을 버리고 세계평화유지를 위해 헌신해왔는가?

    멀리 갈 것도 없이 1990년대의 주요 분쟁에서 미국이 내린 결정들을 살펴보면, 미국이 말하는 인권과 정의란 그들 편한 대로 적용하는 가변적·자의적 이데올로기임이 드러난다. 석유이권이 걸린 걸프전쟁에는 적극 뛰어들었지만, 르완다 학살(1994년)은 외면했다. 10년을 끌며 많은 시민들의 손목이 잘려나갔던 시에라 리온 내전도 외면했다. 국가이익에 도움이 안 되는 개입이었기 때문이다.

    현대 미국정치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한스 모르겐소는 그의 명저 ‘국제정치론’(1965년)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개입하는 것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다”라고 주장했다. 정치학자 마이클 왈처도 ‘정의와 불의의 전쟁들’(1977년)에서 “국가는 단순히 사람들의 목숨을 건지려고 파병하지 않는다. 외국인의 목숨은 국가정책 결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썼다. 그에 따르면, 흔히 말하는 ‘인도주의적 개입’은 부분적인 동기일 뿐이다.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이 복잡하고 정교한 논리로 설명해왔지만, 요점은 “국가는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2004년 재선 고지를 하루도 잊지 않는 부시다. 그로서는 모든 일정을 재선 캠페인에 맞춰야 한다. 캠페인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되면 다른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인도주의적 군사개입이 절실한 경우라도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副)장관은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의 세 거두다. 여기에 한 사람을 더 보탠다면 리처드 펄 전 국방정책위원장(지난 3월 뇌물 추문으로 위원장 사임, 위원직은 럼스펠드의 배려로 그대로 유지)이다. 이들의 신념은 미국이 국제관계에서 외교보다 힘을 앞세워야 국가이익을 확실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브레인은 유대인 출신인 월포위츠다. 그는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으로 있던 1992년 초 당시 딕 체니 국방장관(현 부통령)의 수석참모였던 스쿠터 리비와 함께 동서냉전 해소 뒤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군사적 역할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상관인 딕 체니를 거쳐 부시에게 제출된 그 보고서는 “미국은 초강대국(superpower)답게 군사적 측면에서 보다 더 공격적으로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월포위츠는 이 보고서에서 앞으로 미국은 미국의 세계 패권 구도에서 두 종류의 잠재적 위협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잠재적 라이벌 국가들(러시아·중국·독일·프랑스·일본 등)이고, 둘째는 가까운 장래에 핵무기, 장거리미사일, 생화학무기 등 대량파괴무기를 개발, 보유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이라크·이란·북한 등)이다. 월포위츠는 잠재적 라이벌 국가들에게는 “(미국을 자극하는) 보다 큰 역할(a great role)을 맡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신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잠재적 안보위협 국가들에게는 “필요한 경우 군사력을 사용해서 대량파괴무기 개발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월포위츠 보고서’는 유일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물리력으로 지키자는 공세적 안보전략 개념을 담고 있었다.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공식화된 예방공격론(preventive attack) 개념은 11년 전 이미 월포위츠 보고서에 나타난다. 그 보고서의 첫 과녁은 이라크였다.

    1992년 말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부시 대통령은 “미국 내 정치적 여건이 이를 받아들이긴 무리”라는 판단 아래 ‘월포위츠 보고서’가 주장하는 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뉴욕타임스’ 기사를 보면 “국제기구인 유엔의 역할을 무시하고, 미국이 세계의 초강력경찰(supercop)로서 신경과민한 눈초리로 잠재적인 도전자들을 바라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월포위츠 보고서’를 비판하고 있다. 여론의 비판에 내심 당황한 딕 체니 국방장관은 서둘러 1992년 4월 또 다른 국가안보전략 보고서 초안을 내놓았다. 그 보고서는 미국의 초강력 군사력을 유지하면서도 국제분쟁 해결에서 유엔의 역할을 강조했다.

    당시 워싱턴 정가의 정세분석가들 사이에서 ‘월포위츠 보고서’는 ‘벙어리 보고서(dumb report)’로 일컬어졌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공식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웨스트버지니아 출신 상원의원 로버트 바이어드는 ‘월포위츠 보고서’를 “근시안적 보고서”라 비난했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누리는 ‘자비로운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에 흠집을 내는 보고서란 시각에서였다. 그러나 아들 부시 행정부에 들어와 ‘월포위츠 보고서’는 결코 ‘벙어리’도 아니었고, 근시안적인 것도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1992년 월포위츠가 언급한 선제공격 개념은 정확히 10년 뒤 아들 부시 대통령의 입을 타고 공표됐다. 2002년 6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서 한 연설에서 제기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NSS)을 가리킨다. 선제공격의 명분은 2001년의 9·11테러였다.

    부시의 연설이 있자, 미국의 여러 신보수주의 이론가들이 그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에 나섰다. 백악관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가 2002년 11월 부르킹스연구소 부소장 제임스 스타인버그, 같은 연구소 선임연구원 마이클 오핸론과 함께 작성한 ‘새로운 국가안보전략과 선제공격’이란 논문에 따르면, “선제공격은 아주 가까운 장래에 적이 공격해올 것이 확실하다는 판단이 서면 이를 앞질러 공격하는 것으로 국제법상으로도 정당하고 적절하다(legitimate and appropriate)”는 주장을 폈다. 공동필자들은 이 논문에서 “미국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늘어나면서 가까운 장래에 공격이 일어날 것이란 증거가 없다 하더라도 미국은 무력사용을 할 수 있다”고 예방전쟁(preventive war)의 의미를 더욱 넓혔다.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부시의 대통령 선거캠프에 합류할 무렵, 미국의 영향력 있는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즈’(2000년 1∼2월호)에 ‘국가이익 올리기(Promoting the National Interest)’란 기고문을 통해 “미군은 아시아-태평양지역, 중동, 페르시아 걸프지역, 유럽에서 미국의 이익뿐 아니라 동맹국들의 이익을 위협하는 어떠한 군사적 적대행위의 출현에도 단호히 맞서야 한다”고 강경론을 폈다. 라이스는 이 글에서 “오로지 미국의 군사력만이 억지(deterrence)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미국의 군사패권에 대한 신뢰감이 넘쳐나는 글이다. 이런 주장은 부시 후보의 당선 뒤 미 대외정책으로 고스란히 현실화되고 있다.

    “미국적 국제주의로 밀고 나간다”

    미국은 역사상 지구상에 출현한 어느 국가보다 초강대국이다. 문자 그대로 슈퍼파워(superpower)다. 미국의 2003 회계연도 국방예산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다음 순위 20개국의 국방예산을 합한 것보다 많고, 2005년이면 미국을 뺀 전세계 국방예산을 넘어설 전망이다. 펜타곤(미 국방부) 관리들은 “미국에 경쟁이 될 어떤 잠재적 세력의 출현도 우리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 공언해왔다. 그런 엄청난 예산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어떤 잠재적 위협에 대해서도 “위협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예방전쟁의 논리 아래 선제공격을 가한다는 방침을 세워놓았다.

    외부의 침략에 맞서는 자위수단으로만 전쟁을 인정하는 유엔의 헌장은 부시 행정부의 매파들에겐 사문서(死文書)나 다름없다. 이런 시각에선 국제법도 다시 쓰여지고 재해석돼야 한다. 이미 미국의 보수적 법학계에선 이라크 침공을 뒷받침하는 해석들을 내놓은 바 있다.

    타국에 대한 일방적 선제공격은 나치 히틀러의 군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즐겨 썼던 전략이다. 전쟁이 끝난 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정은 그와 같은 행위를 ‘평화에 대한 범죄(crime against peace)’라고 비판했었다. 그러나 21세기 미국에서는 그런 비판이 통하지 않는다.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즐겨 쓰는 용어인 ‘미국적 국제주의(American internationalism)’는 미국의 일방주의 대외정책에 대한 비판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맞서는 용어로,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다. 미국적 일방주의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이 용어를 이라크전쟁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논리가 된다. “만약 유엔이 미국의 예방전쟁론을 받아들여 안보리에서 결의를 해주면 좋고, 아니면 유엔을 제치고 뜻 맞는 동맹국들끼리 이른바 ‘의지의 동맹(coalition of the willing)’을 맺어 (미국의 군사적 개입 명분 강화용 들러리로 세워) 군사행동에 나선다.” 만약 다른 나라들이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린다면? 미국 혼자서도 “인류의 자유·평화와 인권보호를 위해 십자가를 진다”는 자못 공세적인 이데올로기다.

    문제는 이런 미국적 국제주의(일방주의)를 통제할 제도나 실체가 국제사회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의 이라크 침공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이 유엔을 무시하고 이라크 공습을 감행하던 날, “오늘은 유엔과 국제사회에 슬픈 날”이라는 한탄을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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