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2시, 요르단 암만에 도착했다. 낯익은 공항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착과 함께 환전소에서 돈을 바꾸고 비자를 주는 제일 끝쪽 줄에 선다. 심야에 근무하는 입국 심사원들은 조금 지쳐 보인다. 10디나르(1요르단 디나르는 0.7달러)로 공항에서 살 수 있는 비자. 이라크 비자도 이렇게 쉽게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자를 주는 방법은 적어도 중동에서만큼은 그 나라의 안정과 비례한다. 쉽사리 비자를 주는 요르단은 가상의 스파이에게 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나라다.
월요일인 이튿날 아침 일찍 이라크 대사관으로 갔다. 이제는 친척집에 온 것처럼 익숙한 대사관 건물이지만 최근의 정세를 반영하듯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걸려 있는 이라크 국기 위에 쓰인 ‘신은 위대하시니’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과연 위대한 신은 이라크 국민의 불안과 고통을 덜어줄 준비가 돼 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이 그의 계획에 따른 것일까.
두꺼운 철문을 두드리니 잠시 후 문이 열린다. “우리 비자가 와 있을 텐데요”하며 짐짓 호기를 부려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저기 앉아서 기다리세요”다. 이라크 취재에 있어 현지에서의 감시·감독이 주는 어려움이 10%라면 현지로 들어가는 과정 자체의 어려움은 90%쯤 된다. 경쟁사끼리 취재를 하다가 승부가 이라크 입구인 요르단 암만에서 결정되는 일이 많다. 어느 한 언론사가 비자를 먼저 챙겨 이라크로 들어가버리면 다른 취재팀은 말 그대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라크 정부가 취재팀을 가리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첫째, 스파이 잠입에 대한 우려. 취재팀으로 가장한 첩보팀이 이라크로 들어와 주요시설을 정탐하거나 현지의 반체제 세력과 연대한다면 이는 이라크로서는 최대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만큼 비자신청 절차에서부터 철저히 신원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도 첫 번째 이유와 연관이 있다. 모든 취재팀은 원칙적으로 정부에서 제공해주는 공무원의 에스코트 없이는 취재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수백 명(2월초 현재 400여 취재팀)의 마인더(minder·이라크 정부 측은 가이드라고 하지만 이것저것 간섭한다고 해서 외국 기자들에겐 마인더로 불린다)를 제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비자를 얻는 일이 까다롭다 보니 암만에는 이라크 비자업무만을 대행해주는 브로커들이 깔려 있다고 한다. 육로로 1000km, 비행기로는 고작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바그다드가 이렇듯 ‘염원(?)의 땅’이 된 것에 대해 사담 후세인에게 감사해야 하나?
열흘이 지난 2월19일 수요일 저녁,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CNN의 림 브라히미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목소리는 늘 방송으로 듣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림은 문공부 직원 오마르의 부탁으로 나에게 전화를 한다면서 우리의 취재 비자가 승인됐으니 토요일쯤 이라크 대사관으로 가면 비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전세계를 상대하는 CNN의 위력이었다. 급히 바그다드로 들어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