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MBC 이진숙 특파원의 현장 리포트

불타는 바그다드 지킨 유일한 한국 기자

  • 입력2003-04-25 18: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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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습 전야, “전쟁은 나야 한다”고 외치던 바그다드 사람들
    • 귀를 찢는 폭음, 불 뿜는 방공포, 누더기 된 ‘천일야화’의 거리
    • 포연 속에서도 가재도구 챙기던 여인의 눈물
    • 바그다드 공습현장에 남아있던 문화방송 보도국의 이진숙 기자가 60여 일 동안 가슴 졸이며 기록한 취재파일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공습을 전후한 바그다드 거리와 사람들의 처연한 표정, 작열하는 폭격현장의 공포가 담겨 있는 이 기자의 기록은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편집자)
    MBC 이진숙 특파원의 현장 리포트
    2월9일 일요일요르단 암만에 도착하다

    새벽 2시, 요르단 암만에 도착했다. 낯익은 공항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착과 함께 환전소에서 돈을 바꾸고 비자를 주는 제일 끝쪽 줄에 선다. 심야에 근무하는 입국 심사원들은 조금 지쳐 보인다. 10디나르(1요르단 디나르는 0.7달러)로 공항에서 살 수 있는 비자. 이라크 비자도 이렇게 쉽게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자를 주는 방법은 적어도 중동에서만큼은 그 나라의 안정과 비례한다. 쉽사리 비자를 주는 요르단은 가상의 스파이에게 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나라다.

    월요일인 이튿날 아침 일찍 이라크 대사관으로 갔다. 이제는 친척집에 온 것처럼 익숙한 대사관 건물이지만 최근의 정세를 반영하듯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걸려 있는 이라크 국기 위에 쓰인 ‘신은 위대하시니’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과연 위대한 신은 이라크 국민의 불안과 고통을 덜어줄 준비가 돼 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이 그의 계획에 따른 것일까.

    두꺼운 철문을 두드리니 잠시 후 문이 열린다. “우리 비자가 와 있을 텐데요”하며 짐짓 호기를 부려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저기 앉아서 기다리세요”다. 이라크 취재에 있어 현지에서의 감시·감독이 주는 어려움이 10%라면 현지로 들어가는 과정 자체의 어려움은 90%쯤 된다. 경쟁사끼리 취재를 하다가 승부가 이라크 입구인 요르단 암만에서 결정되는 일이 많다. 어느 한 언론사가 비자를 먼저 챙겨 이라크로 들어가버리면 다른 취재팀은 말 그대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라크 정부가 취재팀을 가리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첫째, 스파이 잠입에 대한 우려. 취재팀으로 가장한 첩보팀이 이라크로 들어와 주요시설을 정탐하거나 현지의 반체제 세력과 연대한다면 이는 이라크로서는 최대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만큼 비자신청 절차에서부터 철저히 신원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도 첫 번째 이유와 연관이 있다. 모든 취재팀은 원칙적으로 정부에서 제공해주는 공무원의 에스코트 없이는 취재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수백 명(2월초 현재 400여 취재팀)의 마인더(minder·이라크 정부 측은 가이드라고 하지만 이것저것 간섭한다고 해서 외국 기자들에겐 마인더로 불린다)를 제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비자를 얻는 일이 까다롭다 보니 암만에는 이라크 비자업무만을 대행해주는 브로커들이 깔려 있다고 한다. 육로로 1000km, 비행기로는 고작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바그다드가 이렇듯 ‘염원(?)의 땅’이 된 것에 대해 사담 후세인에게 감사해야 하나?

    열흘이 지난 2월19일 수요일 저녁,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CNN의 림 브라히미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목소리는 늘 방송으로 듣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림은 문공부 직원 오마르의 부탁으로 나에게 전화를 한다면서 우리의 취재 비자가 승인됐으니 토요일쯤 이라크 대사관으로 가면 비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전세계를 상대하는 CNN의 위력이었다. 급히 바그다드로 들어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MBC 이진숙 특파원의 현장 리포트

    지난 2월23일 바그다드 남부 발전소에서 시위를 벌이는 니컬스 오키프

    바그다드를 가로지르는 티그리스 강가 알 안달루스 아파트 앞은 시골 장터처럼 북적거렸다. 오전 11시 인간방패 ‘휴먼 쉴즈(Human Shields)’가 바그다드 남부 발전소로 출발하는 것을 취재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휴먼 쉴즈는 말 그대로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 미국의 공격을 막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조직한 단체. 창설자 니컬스 오키프는 인터뷰 마이크를 들이대자마자 준비라도 한 것처럼 대답했다.

    “민주주의는 실패작입니다. 전세계 다수의 사람들이 이 전쟁에 반대하지만 각국 정부는 이라크전이 시작되면 석유 계약을 따내려고 뒷거래를 하고 있어요. 얼마나 한심하고 비민주적인 일입니까?”

    오키프는 특이한 경력 때문에 많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지난 1991년 걸프전 당시 그는 미 해병대원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면서 참전했다. 특히 쿠웨이트시티와 바그다드를 잇는 고속도로를 탈환하는 전투에 참여한 것이 그에게는 가장 아픈 기억이다. 당시 이 전투는 ‘죽음의 고속도로’라는 말을 나을 만큼 수많은 이라크군 사상자를 냈다.

    “내가 직접 사람을 죽인 적은 없지만 나도 그 살육 행위를 지원한 셈”이라고 말하는 오키프는 미국의 정책이 수치스러워 미국 여권을 반납하고 시민권 포기를 선언한다. 2001년 11월 네덜란드에 망명을 신청한 그는 이제 세계의 시민으로서 부당한 전쟁이 일어나려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몸으로 막는 일을 한다.

    반전 운동가로 변신하기 전까지 그는 캘리포니아 남부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해변에서 파도타기를 즐기는 보통 젊은이였을 뿐이다.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 전쟁의 피해도 더 잘 알게 마련인 것. 오키프는 이제 반전단체의 지도자 로서 전쟁 반대 운동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전쟁에 휴머니즘이 있을 리 없고 인간 방패 때문에 전쟁이 나지 않을 리 만무하지만, 그들의 인간적인 저항은 볼 때마다 사람을 감동시킨다.

    2월24일 월요일바그다드의 사람들

    H를 만나기 위해 그의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 앞마당 한 쪽에서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기도하고 있었다. 전쟁의 위협 앞에서도 신실한 모슬렘들은 하루 다섯 차례의 기도 의무를 다한다. H도 기도중이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옆눈으로 관찰할 시간이 있었다. 남루한 옷에 피곤한 표정. 메카를 향해 올리는 그의 기도 내용은 무엇일까.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이라크 사람들은 그동안 너무 오만했던 것일까. 그래서 신의 벌을 받아 20년 동안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른 것도 모자라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주거이전과 비밀투표의 자유조차 빼앗긴 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사무실에서 H와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양고기 두어 점을 썰어넣은 수프와 밥, 빵이 전부였다. 고깃점을 떼내어 나의 밥에 올려주는 H. “바그다드에 올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자 그는 대뜸 이렇게 답했다.

    “모든 게 정부 탓이에요. 국민들은 고통을 받는데 자기네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겠다는 거죠. 지금 이라크에는 두 계층만이 있어요. 국장급 이상은 바깥 세계 사람 못지않은 호화 생활을 누리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짐승처럼 살지요. 겨우 3달러 월급으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공무원이었던 그는 올해 초 은퇴했다. 석 달마다 받는 연금은 2만5000디나르, 우리 돈 1만원 남짓이 전부다. 내가 다시 “이라크 국민들을 생각하면 전쟁이 날까봐 염려된다”고 이야기하자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전쟁이 나야 돼요. 전쟁이 나야 한다구요. 딴 건 몰라도 우리 자식들을 생각하면 전쟁은 나야 해요. 우리는 다 죽어도 됩니다. 전쟁이 나면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고, 그러면 적어도 우리 자식들은 좋은 세상에서 살겠지요. 후세인 대통령은 걸핏하면 국가의 ‘권위’를 찾지만 이제 그 말도 신물이 납니다. 국민들이 죽어나가는데 권위는 무슨 권위입니까?”

    그는 후세인의 망명설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그 같은 소문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인지 물어보는 그의 얼굴에는 언뜻 희망 같은 것이 묻어났다. 어쩌면 후세인의 망명이야말로 지금 상황에서 이라크 국민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미국의 공격을 받을 필요 없이 이 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그것이었다.

    함디 아부 아흐마드는 우리의 가이드를 맡은 관광부 소속 하급 관리다. 관광부에서 일하기 전 정보 계통에서 근무하다가 얼마 전에 은퇴했다고 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마흔여섯이나 마흔일곱 살쯤 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마흔 살이었다. 중동 사람들이 대체로 나이보다 늙어 보이기는 하지만 함디의 경우는 전쟁과 폭정에 시달려 말라죽기 전의 식물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국에 대해 엄청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바그다드에서 값비싼 일본제 제품을 대체하고 있는 한국산 물건들의 영향 때문일까. 취재팀과 안면을 익히자 그는 “한국 보통 사람들의 월급이 어느 정도냐”고 묻더니 이후로는 시간이 날 적마다 한국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한국 비자를 받기는 어려운가요? 한국에 이라크 사람들이 많은가요? 별 두개짜리 호텔의 숙박비는 얼만가요?”

    경제제재 이후 이라크의 봉급수준은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가 최근 부분적으로 올랐다. 그렇다 해도 바깥 세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의사의 한 달 봉급이 40달러인데 길거리에서 행상을 하는 사람도 월 40달러는 번다. 하급 관리의 봉급은 20달러 수준. 함디처럼 외국인을 따라다니면서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팁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인지 10달러 정도의 봉급만 준다고 했다. 그나마 최근에는 전쟁 위협으로 관광객이 많이 줄어 함디가 팁을 받을 기회는 더더욱 줄어들었다. 관광부 소속의 가이드가 160여 명인데 우리 팀이 출국하고 나면 함디는 또다시 160번째 마지막으로 가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한때 그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1984년 스웨덴 대사관에 주재원으로 있었을 때다. 가장 진보적인 유럽의 복지국가에서 3년 동안 살았던 그에게 1만2000원으로 한 달을 꾸려가야 하는 현실은 어떤 의미일까.

    바그다드에서의 짧은 일정이 끝나가자 그의 다급함(?)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다른 일행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때면 어김없이 한국 비자를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채근했다. “한국 여자와 결혼이라도 할 테니 좋은 여자 있으면 소개시켜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내에 아들딸까지 있는 유부남이었다. 그가 “이슬람은 네 번까지 결혼을 허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하길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쏘아붙였다. 엄청나게 실망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드리웠다.

    “이렇게는 살 수 없어요. 이건 사는 게 아니에요.”

    거리의 아이들

    라시드 거리에 세워둔 자동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지켜보다가 한 거지와 눈이 마주쳤다. 나중에 알게 된 그의 나이는 18세. 때가 꼬질꼬질 묻은 옷은 그나마 언제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해져 있었다. 동양 여자가 신기한지 한참 동안 내 얼굴을 쳐다보던 그는 문득 자신의 ‘본분’이 생각났던지 차창을 두드리며 손을 내밀었다. 1만디나르짜리 지폐를 건넸다. 4달러 정도 되는 거금(?)을 손에 쥔 그는 처음 보는 것이 거의 틀림없는 이 고액권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만지작거렸다.

    1만디나르짜리 지폐는 후세인 정권이 바닥 모르고 떨어지는 돈 가치를 감당 못해 최근에 발행한 고액권이다. 한 때 이라크 디나르는 중동에서 가장 탄탄한 가치를 지닌 화폐였다. 그 시절 1디나르는 3달러의 값어치가 있었지만, 지금은 2500디나르를 건네야 1달러를 바꿔주는 종잇장으로 변해버렸다. 12년 전 최고액권이었던 25디나르(당시 가치 한화 6만원) 지폐는 이제 어린이들도 받지 않는 폐지가 되었고, 250디나르짜리조차 돈다발의 무게를 저울로 재야 하는 천덕꾸러기가 됐다.

    1만디나르 지폐를 만지작거리던 거지는 자동차 앞 전신주 곁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이제 대학 입시를 걱정하고 장래를 설계할 창창한 젊은이가 길거리를 집 삼아 구걸을 다니고 있는 것이다. 지난 걸프전 때 그의 나이 여섯 살이었다. 부모는 어디에 있으며 또 가족은 있는 것일까. 셀 수조차 없는 바그다드 거리의 아이들이 겪고 있는 불행은 후세인 탓인가 미국 탓인가.

    MBC 이진숙 특파원의 현장 리포트

    떠나는 이들과 남은 이들. 3월10일 임박한 공습을 피하기 위해 바그다드 시민들이 시리아행 버스에 몰려들고 있다

    미국이 정한 이라크 무장해제 시한 하루 전, 바그다드는 점점 비어가고 있다. 붐비던 거리는 이상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바늘로 찌르면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 상당수 일본 기자들은 며칠 전에 이미 철수했다. 세계 각국의 언론사들이 천막 부스를 설치한 문공부 옥상 위에는 빈 자리만 남았다. 바야흐로 전쟁 전야.

    바그다드 시각 저녁 7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바그다드에 있는 사찰단과 기자들에게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면서 철수할 것을 권고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인 셈이다. 미국은 언제 들어올까. 내일 혹은 모레?

    전쟁의 먹구름을 이고도 바그다드는 말이 없다. 철문들은 굳게 닫혔고 사람들로 붐비던 무타나비 거리도 이제는 썰렁하기만 하다. 대부분의 가게는 텅 비어 있고 몇 군데 문을 연 가게들에는 공습에 대비해 유리창에 붙일 테이프만 5층, 6층으로 쌓여 있다. 이들의 모습만 봐도 전쟁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무타나비의 찻집에 들른다. 지난 12년 동안 금요 책시장을 드나들면서 이 거리의 찻집에서 몇 잔의 차를 마셨던가. 가게 주인 모하메드는 전쟁이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인샬라, 마꾸 쉬(아무 일도 없기를 하느님께 바랍니다)”라고 대답한다. 전쟁 전야의 긴장에도 그가 만드는 차는 여전히 맛있다. 아무 생각 없이 맛만 가려내는 미각이 잔인하게 느껴진다.

    무타나비와 인접한 구시가 라시드 거리도 파장 분위기였다. 문 닫은 가게에 걸려 있는 이상할 정도로 커다란 자물쇠들만 눈에 들어온다. 천일야화의 무대였다는 라시드 거리는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함께 온갖 가게들이 들어차 있는 명소였다. 전세계에서 사들인 직물이 가득한 포목점들 사이로 즉석에서 쓱쓱 잘라 만드는 샤월마 샌드위치 가게들이 푸근한 분위기를 내던 곳이었다. 이 거리도 폭격을 맞게 될까. 거리와 그 사이를 떠도는 공기까지 인류의 재산이요 역사인데. 거리는 복구하고 건물은 다시 지으면 된다지만, 저 사람들의 목숨은 누가 복구해줄 수 있을 것인가.

    사흘 뒤인 3월19일, 서울 회사에서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안전이 중요하니 더 이상 머물러 있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그다드를 떠나는 길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버리고 떠난다는 생각에 나는 울었다. 500만의 바그다드 시민도 남아 있는데. 나는 지켜봐야 할 것이 있는데. 서울과 연결된 전화기에 대고 여러 차례 악을 썼지만, 결국 철수 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운전기사 아잠

    바그다드를 빠져나오는 길의 운전기사는 처음 만난 아잠이었다. 깊은 우울에 빠져 있던 나는 최악의 컨디션이었으니 운전기사가 어떤 인물인지 관심이 갈 리 없다. 머리가 벗겨진 40대 후반 정도의(알고 보니 나보다 고작 한 살 많은 40대 초반이었지만), 중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의 사람이었다.

    아잠이 암만과 바그다드를 오간 것은 이라크 전쟁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암만에서 실내 장식용품 장사를 하던 그는 우연히 바그다드로 사람을 태워다주게 됐고 이를 시작으로 암만-바그다드 사이의 장정이 시작됐다. 아잠은 아마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면서 보수가 짭짤한 운전 일이 좋은 모양이다.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인 아잠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 해도 요르단에서 자리를 잡을 가능성은 적었다.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 ‘원죄’다. 많이 받는 월급이 고작해야 한달에 100디나르, 한국 돈으로 20만원도 안 되는 수준이다. 암만에서 바그다드까지 왕복 운전을 하면 100달러는 현찰로 손에 쥘 수 있으니 장거리 운전이 훨씬 수지 맞는 일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요즘은 소위 말하는 대목이었다. 부시 대통령의 최후통첩 발표 이후 장거리 운전기사의 몸값은 10배에서 15배 가량 뛰어 1000달러에서 1500달러를 호가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계속하느냐. 이제 웬만큼 벌었으니 정착해서 아내랑 아홉 살 난 아들이랑 안정된 생활을 하라”는 주제넘은 소리에 그는 대답했다.

    “우리를 만든 분이 하느님이에요. 그러니 우리를 거두어들이는 것도 그 분의 몫이지요.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치려고 해도 불가능하죠. 우리가 지하로 숨어도, 바다 건너로 달아나도 죽음은 찾아오게 돼 있어요. 죽게 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피해도 죽음에게 붙잡히게 마련이죠.”

    운명론. 아잠뿐 아니라 중동의 많은 모슬렘들 사이에 퍼져 있는 생각이다. 그의 아내와 아들이 바그다드에 머물고 있는 것도 죽음에 대한 같은 철학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모두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 말이다.

    MBC 이진숙 특파원의 현장 리포트

    16일 뒤 공습으로 폐허가 된 시가지를 근심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는 바그다드 시민들

    암만으로 나온 지 나흘이 지났다. 그 사이 공습이 시작됐다.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가기 위해 오전에 이라크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신청했다. 회사에는 알리지 않았다. 본국에서 비자 승인이 났으니 두 시간 뒤에 비자를 받으러 오라는 데도 마음은 초조하다. ‘혹시 그 사이 정책이 바뀌어 비자 발급을 중단한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있을 수도 없는 생각.

    기다림 끝에 여권에 비자를 받고 나니 그렇게 흡족할 수 없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현장으로 들어간다, 현장으로. 오후 3시, 서울에서 중동전쟁 취재본부를 이끌기 위해 김영일 국장이 도착했다. 요르단 국경지역 취재를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미리 준비해둔 핑계를 꺼낸다.

    운전기사 아잠과 만나기로 한 시각까지는 앞으로 두 시간,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김국장과 함께 도착한 김관식 차장으로부터 방독의와 해독제 등 장비를 건네받았다. 화학전에 대비한 준비물이다. 당초 모든 장비는 한 곳에 모아두었지만 이제 각자가 가지고 있는 편이 낫지 않느냐고 얘기하는데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후 4시40분, 김국장에게 취재비를 변통해달라고 했다. 국경취재 가는데 무슨 취재비가 2000달러씩이나 필요하겠는가. 그동안 우리 취재팀 경비를 운용하던 황성희씨에게서도 1000달러를 더 받았다. 다행히 아무도 바그다드로 돌아가려는 내 생각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오후 5시, 운전기사 아잠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짐을 싣고 출발했다. 아무래도 취재비가 부족할 듯 해서 ATM 기계가 있는 데로 가보았다. 비밀번호가 맞지 않는다는 메시지. 비밀번호를 잘못 알고 있나 싶어 미국 워싱턴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뜬금 없는 전화를 받은 남편은 도대체 왜 현금이 필요하냐고, 돈을 쓸 일이 있으면 신용카드를 쓰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다.

    전쟁중인 바그다드에서 신용카드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라크는 문명사회의 거지가 된 지 오랜데. 모든 것은 현찰이 있어야 하고, 현금 가운데서도 통용되는 외환은 적국의 화폐인 달러뿐이다. 비록 돈 때문이지만 남편과 통화를 했다는 게 다행일까. 작별 인사 치고는 정말 ‘낭만적인’ 대화였다.

    요르단 국경 부근에 이르자 검문 초소가 여러 개 서 있다. 이전과는 다른 풍경이다. 그래도 국경이 아직 열려 있어 다행이다. 요르단 쪽 국경이 폐쇄된다면 시리아로 우회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시리아나 이란의 비자를 받기 위해 또 시간을 버려야 한다. 터키쪽에서 가는 길은 북부 쿠르드 지역에 전선이 형성돼 있기 때문에 이미 막혔다.

    머리 위를 나는 미·영 전투기

    요르단 국경에 도착하니 밤 10시 반이었다. 국경 출입국대기소는 정적에 싸여 있다. 우리를 제외하고는 네 명의 이라크 젊은이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 지금 같은 때 이라크에 들어가느냐”고 물으니 “요르단에서 죽는 것보다는 이라크에서 죽는 것이 백 번 낫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간다”고 답한다. 그들의 나이는 18세, 20세, 22세였다.

    이라크 쪽 입국관리소 관리는 전쟁 통에 들어가려는 내가 황당한 모양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위성전화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라크 정부는 외부로부터 반입되는 위성전화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모든 통신수단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통화가 가능한 전화인 만큼 스파이와 적군 간의 교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국경 세관에 신고해야 하고, 세관이 위성전화를 봉인해 기자에게 돌려주면 그 봉인은 바그다드 공보부에 도착한 뒤 공보부 관리가 떼도록 하고 있다. 이후에도 위성전화는 공보부에 맡겨두고 필요할 때만 꺼내서 사용하도록 규정돼 있다.

    그러나 24시간 전황을 전해야 하는 기자들에게 이 규정은 지킬 수 없는 것이어서 전화기를 개인용 가방 깊숙한 곳에 수건으로 싸서 넣어두었다. 가방을 쳐다보는 세관원의 눈길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다행히 발각이 되지 않았다.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절차를 밟고 나니 이라크 시각으로 자정이다. 상공에서는 웅웅 하는 전투기 소리가 들려온다. 이미 이라크의 상공은 미·영 합동군에 접수당했다. 이라크는 소형 헬기 몇 대를 가지고 초현대적인 무기와 장비들로 중무장한 합동군과 싸워야 한다. 출입국관리소의 직원들이 퇴근하려다 하늘을 쳐다본다. 그들의 얼굴에 피곤함과 함께 불안감이 배어 있다.

    고속도로를 따라 5분 정도 달리다 다시 차를 국경으로 돌렸다. 상공에서 나는 전투기들이 십여 대는 되는 것 같다. 무거운 소리를 내며 비행하는 전투기, 전폭기들은 분명 공습을 준비하는 걸 텐데, 지금 바그다드로 가는 것은 바보짓이다.

    MBC 이진숙 특파원의 현장 리포트

    3월20일 바그다드 시내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한 기획부 청사와 주변 건물들에서 화염이 솟아오르고 있다.

    앞 좌석의 의자를 뒤로 눕히고 몸을 기댄다. 전쟁을 치르는 나라의 하늘에도 별은 있다. 반짝이는 별들 위로 가족들의 모습이 스쳐간다. 아잠은 옆에서 큰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데,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불안과 동요, 흥분과 기대, 이런 것들이 뒤범벅이 된 채 머리 속을 휘젓고 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둔중한 비행기 소리. 비몽사몽간에 눈을 떠보니 새벽 4시였다.

    국경 부근에서 사람소리가 들려 다가가니 이라크 사람들이 50~60명 정도 모여 있다. 일부는 담요를 깔고 자고 있고 일부는 이른 잠을 깬 채 국경 부근을 서성이고 있다. 전쟁을 피해 바그다드에서 나온 사람들, 요르단에서 이라크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섞여 있다. 매장량 세계 2위의 석유 부국(富國) 사람들이 거지처럼 보인다.

    3월24일 월요일불타버린 자동차들

    아잠을 깨워 바그다드로 출발한 것이 새벽 4시 반. 두어 시간을 달리자 서서히 여명이 밝아온다. 아직 불안감은 가시지 않는다. 달리는 길에 미사일이 날아든다면 그것도 운명일 것이다. 모슬렘들의 믿음에 따르면 하느님이 데려갈 때가 된 것뿐이다. 죽음은 바다도 뛰어넘고 지하 방벽도 뚫는다고 하지 않던가.

    날이 밝아오자 주변 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전쟁의 흔적은 주로 앙상하게 불탄 자동차들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주변 바닥은 멀쩡한데 자동차만 불탔나 싶었지만, 알고 보니 미사일의 파괴력 때문에 자동차들이 수십 미터씩 날아온 것이었다. 좌석 스무 개 정도의 버스도 몽땅 새카맣게 타버렸다. 버스에 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바그다드를 250km 가량 남겨둔 지점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닷새 전 암만으로 나가면서 난민을 취재했던 주유소 옆 상가가 미사일 공격을 받아 폐허로 변해 있었다. 곳곳에 폭발의 잔해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곳은 이번 전쟁 최초의 민간인 사망자가 난 곳이기도 하다. 암만-바그다드를 오가던 운전기사 가운데 한 사람이 가족에게 안부 전화를 하던 중 미사일을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암만-바그다드 간 고속도로 위를 넘어가는 많은 고가도로 가운데 하나도 피격됐다. 부근에 레이더기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아잠이 설명한다. 조금을 더 가니 붉은 초생달이 선명히 그려진 지프가 공습에 나동그라진 것이 보인다. 붉은 초생달은 국제 적십자와 유사한 이슬람 구호기구가 예수를 상징하는 십자가 표식을 피해 만든 상징 마크다. 자동차에는 이라크 후생성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찍혀 있다.

    자동차 안에는 군용으로 보이는 국방색 어깨 가방에 차와 설탕이 들어 있고, 이라크 돈도 보인다. 운전대와 의자, 창문 등이 모두 부서져 자동차 내부는 일부러 구겨놓은 듯 헝크러져 있다. 이 차는 누가 타고 가다가 폭격을 당해 이렇게 내버려져 있는 것일까. 부서진 자동차 앞에 서서 리포트를 녹화했다. 운전기사 아잠이 생전 처음 비디오 카메라를 잡았다.

    바그다드에서 30여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이르자 연기기둥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공습으로 인한 화재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이라크 주민들의 맞불이었다. 연기가 나서 이미 폭격을 맞은 지점인 것처럼 보이면 전폭기들이 더 이상 폭격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주민들이 마을 부근 곳곳에 불을 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여파로 바그다드의 하늘은 폭풍 전야의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웠다. 아침 9시 무렵인데도 바그다드의 하늘은 겨울 저녁 7시쯤의 하늘 같았다.

    겨우겨우 무사히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전쟁 개시 후 처음으로 암만-바그다드 간의 피격 현장이 뉴스데스크에 방송됐다. 알 자지라보다 사흘 빨랐다. 전쟁의 한복판 바그다드에 마침내 이른 것이다.

    지난 걸프전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이 라시드 호텔이라면 이번 전쟁은 팔레스타인 호텔을 중앙무대로 올려 놓았다. 이곳은 이라크 공보부 본부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아침 9시 반, 기자들이 모여있는 팔레스타인 호텔로 가니 방이 없다고 한다. 기자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드는 바람에 방이 동났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객실 600개의 큰 호텔이 어떻게 다 찰 수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셰라톤 호텔로 발길을 옮겼다. 정부 초청이 아니면 방을 줄 수 없다는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3분 거리에 있는 바그다드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만수르 호텔로 가서 체크인을 했다. 뜻하지 않게 인간방패가 될 수 있는 곳이다.

    바그다드는 티그리스 강을 사이에 두고 두 지역으로 나뉜다. 동쪽은 라사피, 강 건너 서쪽은 카르흐라 불린다. 애초 바그다드를 도읍으로 정한 칼리프 자파르 알 만수르는 서쪽(현재의 만수르 지역)에 궁을 짓고 바그다드 사방으로 넓은 도로를 건설했다. 그러나 13세기 몽골의 훌라구의 침입을 받은 후 카르흐의 옛 흔적은 모두 사라졌다.

    몽골 대침공 이후 현재의 바그다드는 신·구도시가 바뀐 것처럼 보인다. 재건된 카르흐는 서울로 치자면 강남에 해당하는 신시가지다. 대통령궁과 외무부, 기획부, 공보부 등 관가가 밀집해 있고 오히려 라사피 지역에 있는 구시가지가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사담 후세인 정권 교체를 목표로 바그다드로 진격하는 미군의 공습 목표물은 우선적으로 전략시설이 집중된 카르흐 지역이 될 것이다.

    바그다드에서 외국 기자들이 주로 묵는 호텔은 라시드와 만수르, 팔레스타인, 셰라톤 등 네 개 호텔이다. 부시의 최후통첩이 있기 전 외국 기자들은 네 호텔에 골고루 머물고 있었지만 최후통첩 이후 모두 팔레스타인 호텔로 거처를 옮겼다. 라시드와 만수르 호텔은 카르흐, 팔레스타인과 셰라톤 호텔은 라사피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라시드는 정보부와 공화국 대통령궁을 지척에 두고 있고 만수르는 공보부와 이라크 텔레비전 방송사를 이웃하고 있어 미사일이 조금만 빗나가도 피격될 수 있는 상황이다(실제로 앞에 언급한 모든 목표물들이 공습 개시 후 미사일 공격을 받아 파괴됐다).

    그러니 이라크 정부로서는 라시드와 만수르에 외국 기자들을 투숙하게 함으로써 미군의 공격을 피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전쟁에서 인간성을 기대하는 이라크 정부가 순진한 것인지도 모른다. 외국 기자, 특히 미국 기자들은 모두 팔레스타인 호텔로 옮겼고 나처럼 전쟁 이후에 들어온 소수의 외국인들만 만수르 호텔에 있는 것이다.

    결국 만수르 호텔 604호에 짐을 풀고 위성전화를 설치했다. 서울로 전화를 했더니 전화를 받은 선배가 깜짝 놀란다. “뭐, 바그다드라고?” 상황설명을 하고 일단 위성 송출 장비가 설치된 공보부로 달렸다. 가능하면 오늘 서울로 녹화분을 보내야 한다. 공보부 옥상은 전보다 한산했지만 여전히 위성 송출은 가능했다. 그 전에 거래하던 APTN으로 가서 위성 사용시간을 배당받는다.

    APTN은 이번 전쟁으로 장사를 톡톡히 한 모양이다. APTN의 직원들 역시 공습이 시작되기 직전인 19일 암만으로 출국을 시도했지만 이라크 국경에서 외환반출을 문제삼아 바그다드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어쩌면 이라크 입장에서는 서방의 대표적인 위성송출회사인 APTN과 로이터를 붙잡아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외국인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라크 시설에 대한 미군의 공습 강도가 낮아질 거라 기대하는 것이다.

    APTN에서 위성 송출을 하고 나니 온 몸이 나른하다. 그러나 진짜 취재전쟁은 지금부터다.

    오전 11시경 샤압 폭격. 민간인 14명 사망, 50여 명 부상. 현장은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처럼 만신창이였다. 미사일 파편 조각으로 자동차들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집들은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하게 변해 있었다.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왜 민간인 지역을 폭격하느냐는 게 요지다. 머리에 붕대를 친친 감고도 남은 가재도구를 정리해내는 여인들을 보니 전쟁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거실에 있던 ‘시아의 12번째 이맘’ 상상도와 사담 후세인의 초상화도 모두 부서졌다. 종교도 정치도 국민들을 전쟁에서 건져내지 못했다.

    이튿날인 3월27일 오전, 유스피아 고속도로 건설회사 기숙사 폭격. 8명 사망. 앞마당에는 아직 터지지 않은 포탄이 남아 있다. 유스피아에서 돌아온 직후인 오후 3시, 공보부 앞에서 갑자기 귀를 뚫을 듯한 폭격 소리가 들린다. 이와 동시에 공보부 옥상에서 방공포가 불을 뿜었다. 공보부 프레스센터 앞에서 대기중이던 나는 본능적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리에 앉는다고 폭격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저절로 몸을 쪼그리게 된다.

    그래도 찍어야겠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공보부 옥상으로 맞춘다. 쾅쾅 하는 폭격 소리는 기자들에게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저 멀리 티그리스 강 동쪽에선 쿵쿵 하는 둔중한 폭격 소리와 함께 건물 위로 시커먼 연기가 풀썩 솟아 오른다.

    이번 공습을 통해 얻은 또 한 가지 지식은 폭격이 만들어내는 연기를 구분하는 법이다. 바그다드 사람들이 공습을 피하기 위해 지피는 불은 뭉게뭉게 부드러운 곡선의 연기를 피어올리고, 폭격 뒤 솟는 연기는 날카로운 테두리를 만들었다. 성냥불을 지폈을 때 나는 연기처럼 뾰족한 연기 덩어리들이 바그다드 곳곳을 파괴해갔다.

    3월28일 금요일팔레스타인 호텔 924호

    묵고 있던 만수르 호텔은 이라크 텔레비전 방송사 건물과 붙어 있어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언제 폭탄이 쏟아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새로 옮긴 안달루스 호텔은 위성전화가 터지지 않았다. 기사를 보내야 하는 나로서는 다급한 일이었다.

    급기야 가이드인 오마르가 별난 해결책을 제시했다. 자신은 역시 가이드인 친구 나시르와 팔레스타인 호텔에서 방을 같이 쓰고 있는데, 그 방을 하루 몇 시간씩 빌리도록 주선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나시르는 이 제안에 동의했지만 그가 요구한 대가는 하루 100달러였다. 바그다드 시각으로 밤 10시에서 새벽 2시 반까지 하루 4시간 반 방을 빌리는 대가가 너무나 셌다. 그래도 어쩌랴, 나는 방송을 해야 했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시르는 100달러 방값을 정당화하려는 듯 걸핏하면 “들키면 당신은 고작 추방이지만 나는 바로 사형”이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호텔 방값이 외국인의 경우 하루에 40달러였으니 그는 내가 머문 사흘 밤 동안 일주일이 넘는 호텔 방값을 벌어간 셈이었다.

    밤 11시10분, 호텔 건물이 진동하면서 멀리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오늘은 또 어디가 목표물이 되었을까. 첫 번째 폭격 소리에 이어 연발로 10여 차례 계속되는 폭음. 이라크의 하늘은 합동군의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사일 폭격 소리가 이어진다. 나시르는 연신 불안한 기색을 보이더니 어디론가 나갔다. 그는 밤만 되면 술을 마셔댄다. 만 두 살 반짜리 딸과 이제 막 두 달 된 아들이 있다는데. 아버지로서 그는 아이들의 장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내가 본 나흘 동안 나시르는 취하지 않은 때가 별로 없었다. 방 냉장고와 서랍에는 언제나 맥주와 위스키 병이 가득 들어 있었다. 술에라도 취해야 이 저주받은 시간을 제대로 넘길 수 있다는 듯 나시르는 술에서 위안을 구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런 그를 보며 가슴이 답답했다. 어디 나시르 한 사람뿐이랴. 갈 곳 모르고 마음 붙일 데 없는 사람들이 바그다드 거리 곳곳에 넘쳤다.

    아침 6시에 자명종을 맞춰놓았는데도 7시 무렵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나자프와 카르발라로 가기로 한 날이지만 현지 교전상황을 보면 쉬울 것 같지 않다. 나자프와 카르발라에 공화국 수비대가 투입되면서 전세는 미국의 희망과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1주일 만에 바그다드에 입성한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웠지만 이라크측의 저항은 미국의 예상을 넘어서고 있다.

    지난 1991년 전쟁 때 43일 만에 사실상 항복을 받아낸 미국은 이라크 전력을 과소평가했던 것일까.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이번 전쟁을 둘러싼 중동권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점일 것이다. 미국 정부가 국제법 절차를 무시했다는 사실은 12년 전의 전쟁보다 더 큰 반작용을 중동에서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라는 명명백백한 이유를 가지고 응징에 나섰던 그때와 달리, 이번에 미국은 대량살상무기와 독재자 제거라는 명분을 들어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는 이미 유엔 무기사찰단이 사찰을 진행하는 중이었고, 독재자 제거는 순전히 국내문제라는 데 이번 전쟁의 딜레마가 있다.

    국제여론마저 이 전쟁을 침략 전쟁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한 듯하다. 이는 이라크군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쳐 불법적인 침략 전쟁을 몸으로라도 막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전쟁을 계기로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이 시작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다. 일단 전쟁은 승리할 테지만 수많은 ‘오사마 빈 라덴’이 중동에서 생산되리라는 것이다. 지금 지하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수백, 수천명의 오사마 빈 라덴은 시간이 흘러간 뒤 미국에 어떤 보복을 가할 것인가.

    아니나다를까 이튿날인 3월30일, 이번 전쟁 이후 이라크에서 최초로 자살 폭탄 공격이 발생했다. 나자프 부근에서 이라크 사람 한 명이 택시를 타고 미군 검문소에 접근했다. 무언가 도움을 요청하려는 듯 보인 그에게 미군은 경계 태세를 풀었고 이와 동시에 운전사는 검문소로 돌진해 몸에 두르고 있던 폭탄 띠를 터뜨렸다. 그 자리에서 4명의 미군이 사망했다.

    이슬람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금하고 있다. 유일신을 숭배하는 다른 종교인 기독교와 유대교처럼 이슬람교도 창조주 하느님만이 인간의 목숨을 끊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중동 지역에서 자살 폭탄의 역사는 길다. 모슬렘들이 자살 공격을 하는 것은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그 순간 천국으로 직행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독립운동처럼 이번 이라크전쟁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라크 사람들은 미국이 불법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이 싸움에서 목숨을 잃으면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다.

    나자프의 자살공격은 ‘미군 4명을 희생시키는 데 그친 작은 사건’으로 치부할 수 없는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이라크에서 자살폭탄은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계속되는 폭정에서조차 자살 공격은 없었다. 이라크에서 미군을 상대로 한 자살폭탄 부대가 늘어난다면 그것은 미국에게 악몽의 시작이 될 것이다.

    닷새가 지난 뒤 타하 야신 라마단 이라크 부통령은 “이라크에는 다른 아랍 국가에서 온 6000명의 전사들이 있으며 이 가운데 3000여 명은 폭발을 기다리는 시한 폭탄과 같다”며 미군을 폭파시킬 자살폭탄 희망자들이 있다고 공언했다. 나 역시 팔레스타인 호텔에서 전쟁을 위해 입국한 예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예멘 역사상 단 한 차례도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다”며 자긍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라크가 모슬렘 전사들의 집결지가 되어 구소련을 쫓아낸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된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꿈에도 생각하기 싫은 악몽 같은 시나리오일 것이다.

    MBC 이진숙 특파원의 현장 리포트

    4월4일 일시귀국한 이진숙 기자가 인천공항에서 마중나온 딸 지은이를 안으며 웃고 있다.

    새벽 5시 기상. 나는 다시 암만으로 나가야 한다. 지난 며칠 동안 내가 쓴 기사는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어젯밤에도 공습은 계속됐습니다. 미군은 대통령궁을 비롯한 전략 시설물에 집중 공습을 퍼부었습니다. 이라크 정부는 오늘 민간인 지역 피격 현장을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미사일의 위력을 보여주듯 건물들은 성냥갑 구겨지듯 무너졌습니다. OO명이 사망하고 OO명이 부상했습니다….”

    거의 똑 같은 기사를 사나흘 쓰고 나니 맥이 풀려버렸다. 다른 지역에서의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진 듯하고 바그다드 상황에도 큰 변화가 없어지자 급기야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전쟁 취재가 지루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상황이 장기화되는 거라면 차라리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엊그제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아잠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는 어제 승객을 태우고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왔다. 일단 비자를 얻어두고 바그다드를 떠난다. 공보부 가이드 오마르에겐 2주일 뒤에 다시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때의 상황은 또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4월12일 토요일비행기에 오르며

    정확하게 2주일 뒤 한국에 돌아와 분주한 시간을 보낸 나는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간다. 회사에서는 이번에도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운명을 믿고 비행기에 오른다. 이제 네 시간 뒤면 GMC 차를 타고 요르단 국경으로 갈 것이고, 같은 루트로 바그다드로 들어갈 것이다.

    회사에서는 “이미 기사 가치가 많이 떨어졌고 우리 회사 기자가 들어가 있으므로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번 입국이 더 의미 있을 것이다. 과연 이번 전쟁은 해방전쟁인가, 미군은 지금 바그다드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미국에 대해 이라크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모든 것을 똑똑히 보고 싶다.

    바그다드가 함락되던 날, 이제 스무살 안팎의 미 해병대원들은 파라다이스 광장의 사담 동상을 무너뜨리면서 성조기를 게양했다. 많은 아랍 사람들은 이 광경을 충격으로 지켜보았다. “침략전쟁이 아니라 해방전쟁”이라고 말해왔지만, 어린 해병대원들은 잠재의식을 감추지 못하고 성조기로 후세인의 얼굴을 뒤덮어버렸다. 아랍인들은 더 이상 ‘이라크 해방 전쟁’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유엔의 무기사찰 활동을 강제로 종식시키면서까지 개시한 이번 전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지금 광장에 뛰어나온 이라크 국민들의 환호 소리에 묻혀버린 듯하다. 그러나 반(反)사담이 친미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독재의 끝에 대한 환호가 외세를 환영하는 소리로 들린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이는 20세기 아랍의 역사가 입증한다.

    에필로그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그런 정신 나간 짓을 왜 하냐고, 만용을 부리는 것이 아니냐고. 나에게 있어 이번 취재는 ‘당연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중동 역사와 문화, 석유, 강대국의 이해 관계에 대해 연구해왔다. 대학원도 다녔고 아랍어도 꾸준히 공부했다. 그 지역의 언어를 알면 현장취재 때 사람들과 함께 숨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는 모두 언젠가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지 인사기록카드에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회사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인접국인 요르단 암만으로 나와 기사를 쓸 때 내게는 1분1초가 가시방석 같았다. 물론 난민 취재도 했고 아랍 국가들의 전쟁관도 발로 뛰어 취재했다. 그러나 사건의 현장이 바로 옆에 있는데, 이것을 위해 십여 년 동안 준비해왔는데, 그냥 인접국에 앉아 있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이슬람권을 취재하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일까. 이제는 나도 운명을 믿는다. 지금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서울에서도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어린 딸과 오래오래 재미있게 살고 싶지만 지금 가야 하는 운명이라면 우주로 도망간들 그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나는 기자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 결과로 한국의 시청자들이 좀더 정확한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부수적인 이득이다. 그 모든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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