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美, 경제제재로 숨통 조이며 김정일 백기 노린다

이라크 다음은 북한?

  • 글: 정옥임 국제정치학 박사 oknimchung@korea.com

    입력2003-04-25 18: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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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라크전이 사실상 종결됨에 따라 ‘미국의 다음 목표는 북한이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반도 전쟁에 대해 함부로 억측하지 말 것을 경고했지만, 미국의 북한 핵시설 제한공격 가능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 과연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美, 경제제재로 숨통 조이며 김정일 백기 노린다
    우선 분명한 것은 북한이 미국의 대(對)이라크 공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상됐던 ‘도발’도 감행하지 않았다.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가 공식 발효된 4월10일 이후 북한이 어떤 벼랑끝 전술을 벌일지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4월 중순까지는 우려했던 폐연료봉의 재처리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시험은 시도하지 않았다. 재처리를 시도했으나 기술적인 난관에 봉착했다는 추측도 나온다. 그러나 ‘짖어대지 않고 얌전히 있더라’는 어느 오만한 미국인의 냉소처럼 북한은 이라크전쟁 결과를 분석하며 웅크리고 있는 형국이다.

    북한은 이라크전을 통해 어떠한 교훈을 얻었을까? 일단 미국이 공격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유엔도, 불가침조약도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또 정권의 생존을 위해 핵 억지(nuclear deterrence)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의를 굳혔을 수도 있다. 만약 이라크에 핵무기가 있었다면 아무리 첨단무기로 무장한 초강대국 미국이라 해도 그렇게 무참히 두들길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상병력과 지하터널, 특수부대, 게릴라전의 의미도 다시금 새겼을 것이다. 반면 체면(honorary exit)만 차릴 수 있다면 차라리 손들고 미국의 질서에 편입하여 생존을 보장받고 싶다는 유혹을 느낄지도 모른다. 확실한 점 한 가지는 온 지구를 통틀어 후세인 다음으로 초조해하고 있을 인물이 바로 김정일 위원장이라는 것이다.

    이라크와 북한, 무엇이 다른가?

    이라크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상황에서 다음 차례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화두가 북핵 문제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미국이 이란의 핵개발에 우선 주목하리라는 시각도 있지만 우리로서는 북핵 문제가 발등의 불이다. 이 해결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군사적 긴장과 자본 탈출(capital flight)로 파생되는 비용은 모두 우리가 부담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라크와 북한은 다르다”고 말해왔다. 북한 스스로도 이라크와의 차별성을 강변한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는 다르다”며 일전을 불사할 각오로 체제 생존의 절박함을 드러내고 있다. 선군(先軍)정치도 강화됐다.



    사실 이라크와 북한에 대한 미국의 대응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먼저 이라크의 경우 부시 대통령은 이미 2000년 대선기간부터 후세인 공략을 결정했다. 2001년 9월 알 카에다의 가공할 테러로 인해 이라크를 향한 미국의 구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라크 문제를 방치할 경우 미국 내에서 생물·화학무기 및 핵이 동원되는 제2, 제3의 참혹한 테러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는 반문과 함께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공격 계획을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또한 미국은 이라크 무장해제를 위한 비군사적 방법이 이미 소진됐다며 무력해결을 정당화했다. 1991년 걸프전의 결과로 국제사회가 결정한 이라크의 무장해제는 이행되지 않았다. 미국은 외교적 방법과 경제제재로 압박했지만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1998년 이라크는 자국 내에서 조사를 벌이던 사찰단마저 추방했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소위 ‘사막의 여우(Desert Fox)’ 작전을 전개하며 수백 대의 전폭기와 미사일로 이라크를 공격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기에 9·11 테러가 중첩되면서, 불량국들에 의해 대량살상무기(WMD)가 테러집단의 수중에 들어갈 때 미국의 본토가 절대적 취약성을 드러낸다는 위기의식도 작동했다. 이미 12년간 비군사적 방법은 다 동원한 만큼 군사적 행동만 남았다는 것이 미국의 주장이었다. 그나마도 미국이 마지막 순간까지 ‘결의안 1441’ 등 UN을 통해 문제를 풀려 했던 이유는 미 행정부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역설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고군분투 때문이었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은 우선 알 카에다 같은 중동 테러집단과의 연계 여부가 불분명하고, 미국이 북한 핵이나 미사일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제 막 외교적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라크와 다르다. 나아가 사사건건 미국을 우롱하며 부시 전 대통령의 암살까지 도모한 후세인과는 달리 김정일 정권은 쟁점 해결을 위해 미국과의 대화를 원했다는 점에서 미국은 북한을 이라크보다 긍정적으로 인식한다.

    또한 미국은 북한에 대한 군사공격이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하는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수준이 이라크나 이란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앞서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막강한 병력과 험준한 산악지형 및 지하터널로 무장한 북한은 국토 대부분이 사막인 이라크에 비해 힘든 상대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고려 대상일 것이다. 더욱이 북한에는 체제 변화를 촉발시킬 반체제 집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천명한 바 있듯 이른바 ‘불량국가’의 WMD를 제거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동원될 수 있다. 북한이 이라크의 다음 차례라고 해서 반드시 군사적 선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또 한 가지 이라크와 북한이 다른 점이 있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은 수년간의 경제제재에도 살아남았다. 미국은 이라크가 갖고 있는 막대한 석유 덕분이라고 판단한다. 석유 때문에 경제제재가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은 다르다. 주체와 자급자족을 목청껏 외치는 북한 정권이지만 실제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대외의존적인 체제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중국이 식량과 원유 공여를 중단하고, 일본이 친북계 조총련의 송금을 차단하고, 한국이 대북지원을 중단하면 북한 정권은 경제위기로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KEDO가 대북 중유공급을 중단하자 가뜩이나 어려운 북한의 전력공급 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북한은 영변 핵시설 봉인 제거와 IAEA 사찰단 추방으로 맞서는 등 강력하게 반발했으나 경제난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주변국을 독려해 경제제재를 추진하면 북한이 고사할 것이라 믿는다. 물론 중국과 한국이 이에 협력할 것인가 여부가 관건이겠지만, 북핵 문제에 관한 한 이들이 핵 폐기라는 기본목표를 공유한다는 점에 대해 미국은 일련의 기대를 갖고 있다. 이는 미국이 북핵 문제에 대해 ‘다자 해법’을 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라크전에 몰두해온 미국으로서는 북핵 문제에서 ‘핵의 폐기’라는 궁극 목표 외에는 어떤 정책도 확정할 만한 시간여유를 갖지 못했다. 오히려 앞으로의 상황전개에 따라 정책을 대입해가며 ‘비용 대비 효과’ 분석을 통한 대안마련에 골몰할 것이다. 결국 미국의 북핵 해법은 북한의 태도 여하에 따라 맞춤형 봉쇄(tailored containment)와 과감한 접근(bold initiative) 사이에서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북한이 이미 핵을 개발했다는 전제 하에 향후 핵무기 생산을 본격화하는 경우를 정책의 출발점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 어떤 선택이든 다자 구도로 풀어나간다는 입장이다. 북미 담판만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북한의 기를 꺾겠다는 의도와 함께 외교적 해결의 명분으로 시간을 벌기 위함이다.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제재안을 상정하는 안보리보다는 다자 틀이 북한에 심리적 안도감을 줄 수 있다는 배려도 깔려 있다.

    난관 많은 다자 구도

    이렇듯 미국이 다자 구도를 선호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라크전이라는 현안을 안고 북한 문제까지 다루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털기 위함이 그 하나요, 이 문제가 북미 갈등 사안이 아닌 NPT 체제를 위협하는 국제 평화의 문제임을 강조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따라서 미국은 북미 대화를 촉구하는 주변국들에 대해 “이라크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결정을 했다고 아우성치면서 왜 북핵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만 나서라고 하는가”라고 반박한다. 만약 북한이 핵 개발을 기정사실화하면 미국은 다자 압박(multilateral pressure)의 형태로 단계를 밟아 북한을 압박할 것이다. 군사적 대응이 아닌 한 대북 경제제재는 평화적 또는 외교적 방법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 미국의 해석이다.

    이러한 다자 접근의 틀이 현실화할 경우, 미국은 궁극적으로 북한에 제공할 ‘당근’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나 역할도 다른 나라들과 분담할 수 있다. 이같은 접근방식을 통해 만들어지는 협의기구는 북한의 거부(non-compliance)에 대한 본격적인 압박의 전 단계로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의제를 다룰 공간을 만들어준다는 장점도 있다. 대량살상무기뿐 아니라 인권문제, 나아가 인도주의적 참상에 이르기까지 북한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점과 우려를 포괄해서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자 구도에는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불거진 긴장을 일단 가라앉히고 외교적 해결의 가닥을 잡는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북핵 문제와 같은 중요사안을 해결함에 있어 신속한 성과를 유도하기 어렵다. 중국, 일본, 러시아 및 한국의 다양한 이해가 엇갈릴 뿐 아니라 향후 문제 해결과정에서 각자가 부담하는 비용에 따라 지분을 요구하는 상황도 나타날 수 있다. 나아가 북핵 폐기를 전제로 미국이 제안하는 과감한 접근(bold initiative)이 어떻게 ‘다자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도 마련된 바 없다. 무엇보다 큰 어려움은 당사자인 북한이 이러한 해결 틀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편 미국이 염두에 두고 있는 다자 구도는 한국뿐 아니라 북핵 문제와 이해 관계가 있는 주변국 모두의 실리와 역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북한 핵에 반대하며 한반도가 위기 상황으로 치닫을 가능성을 우려한다. 25만 명에 달하는 탈북자 문제도 골칫거리다.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하자 장쩌민 주석은 이례적으로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우려를 표명할 정도로 북핵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美, 경제제재로 숨통 조이며 김정일 백기 노린다

    지난 3월17일 오산 공군기지에서 언론에 공개된 미군의 F-117A 스텔스 전폭기

    중국 지도부의 세대 교체와 함께 북한을 동반자보다는 ‘두통거리’로 인식하는 인사들이 늘어가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방중 때마다 지원을 구걸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늘면서 한국 주도의 통일에 대한 거부감도 줄어들고 있다. 따라서 미국 내에서는 ‘차라리 북핵 문제를 중국에 떠넘겨 북한의 변화 및 궁극적인 붕괴를 촉진시키자’는 제안도 나온다. 국제사회가 북한을 몰아세울수록 중국은 북한 체제연명을 위한 구명복 노릇을 하느라 주름살이 늘 수밖에 없다.

    핵과 미사일을 포함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카드도 중국에는 부정적인 요소다. 미국은 북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시험을 MD(미사일방어) 추진의 명분으로 활용했다. 미·일간 전역미사일방어(TMD)를 위한 공동연구 가속화에도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가 촉매구실을 했다. 북한 핵과 미사일이 궁극적으로 일본의 재무장과 핵개발, 나아가 미국, 일본, 타이완까지 엮는 미사일방어 협력체계를 유도한다면 그같은 상황은 중국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중국과 북한 관계는 2002년 이후 소원해졌고, 이 틈새를 러시아가 비집고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중국은 현재 UN이 북한을 코너로 몰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고 있지만 몇 가지 전례를 살펴보면 결정적 순간에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994년의 핵문제 해결과 1999년 북한 미사일 발사시험 유예 결정이 그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북핵 문제를 다루면서 중국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전략적 고려 때문이다. 타이완 문제나 대미 경제의존도 등을 고려하면 중국도 미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월 북한 핵문제가 IAEA에서 UN 안보리로 이관될 때 중국은 찬성표를 던졌고 대북 원유지원을 잠시 중단하기도 했다. 핵문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중국이 북한에게 보내는 간접경고라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북한은 이라크와 함께 대미관계에서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다. 그동안 러시아는 이라크에 대해 무시 못할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소원하던 북한과의 관계도 푸틴의 외교적 노력에 힘입어 상당부분 복원했다. 농축 우라늄 핵 프로그램으로 긴장이 불거지자 북한이 미국과의 담판을 시도한 것도 러시아를 통해서였다. 러시아의 중재 노력에 의존한 것이다.

    북핵 위기는 일본의 기회?

    러시아는 미국이 불편해하는 ‘악의 축’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21세기 극초강대국(hyperpower)으로 군림하는 미국을 일정부분 제어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러시아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자 러시아의 당혹감은 극에 달했다. 이미 미국은 아프간전 이후 구소련 영역 내에 기지를 구축했고 나토 병력도 동유럽에 진주시켰다. 동유럽을 압박해 들어오는 미국을 견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러시아가 직면한 딜레마다.

    따라서 대통령선거를 1년 가량 남겨둔 푸틴은 러시아 국민들의 정서를 감안해서라도 부시의 대(對)이라크전이 실패로 끝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미국이 낭패를 봐야 일방주의에 제동을 걸 수 있고 부상하는 러시아 민족주의를 다독일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러시아는 한편으로는 테러가 맺어준 미러 사이의 느슨한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정 수준의 독자적인 목소리도 유지하고자 한다. 이러한 역학구도 때문에 북핵 문제에도 적극 개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의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또 다른 전략지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에 매우 민감할 뿐 아니라 군사력 확충을 위한 명분으로 활용하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개발을 겨냥해 향후 6년간 20억 달러를 들여 8기의 정찰위성을 발사할 계획을 추진중이며 미국과의 정보공유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1960년대 말 우주 계획을 추진하며 군사적 목적은 포함하지 않는다고 해명한 일본이지만 이제 군사적 정찰 목적의 위성을 당당하게 발사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미국과 일본은 북한이 핵문제를 계기로 사거리 1100km 정도의 로동미사일을 재발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과 PAC-II 요격체제 구입 및 장거리 미사일 확보를 추진한다는 것이 일본의 구상이다. 미국의 MD체제에 편입하는 방안도 고려중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대안이 없을 경우 자위 차원의 조처로 북한 미사일기지에 대한 선제공격도 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편 북한이 핵 폐기 등 WMD 해결에 전향적인 입장을 나타낼 경우 일본이 맡을 재정적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북·일간 수교 협상이 가속화하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역할과 입지가 동시에 커지는 호기로 작용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들 주변국들이 미국의 다자 구도에 반대할 이유는 별로 없다. 오히려 미국의 군사공격을 차단할 기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보면 미국과의 ‘담판’을 희망하는 북한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핵문제를 북미간 양자 구도 틀로 유도하기 위해 더 극단적인 벼랑끝 전술을 취하든지, 아니면 다자 구도를 수용하는 대가로 한국 등 주변국들에게 간접 급부를 받아내는 것 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미국은 4월 중순 현재 이라크전 종결선언의 기점을 언제로 잡을지 고민중이다. 이것은 직간접적으로 미국의 대북 핵 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종결 선언이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경우 미국이 그 여세를 몰아 북한 핵 폐기를 위해 다양한 압박을 가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이라크전을 계획대로 단기에 끝낸다 해서 또다시 북한을 상대로 군사적 선택을 결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우선 이라크전 전후 처리에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 북한을 압박한다는 것이 반드시 군사적 결정을 단행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미국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느긋해질 수 있다. 북핵 문제를 극단으로 몰고 갈 경우 치러야 할 비용도 충분히 간파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태도에 따라 좀더 실용적이고 유연한 정책을 펼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설사 북한이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더라도 미국이 처음부터 극단적 조치를 취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군사대응보다는 경제제재를 시도하며 주변국들에 동참을 촉구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중심으로 한 미국 내 강경파들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며, 이라크전을 계기로 악의 축이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며 붕괴할 것”이라고 호언하고 있다.

    반면 파월 국무장관 등 온건파들은 “강경파들의 ‘도미노’ 운운이 북한이나 이란 등으로 하여금 생존을 위한 WMD 확보에 열을 올리도록 만들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라크 공격은 그 자체로 마감되어야지 다음 차례가 있다는 식의 논리 확산은 금물이라는 반론이다. 이러한 미국 내 강·온파간 기싸움이 이라크전 마무리와 함께 대북 정책에도 심각한 기복과 파장을 남길 것은 분명하다.

    북한 핵문제에 대해 미국은 “공격 의도는 없지만 모든 대안을 열고 있다”고 거듭 언급해왔다. 이미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북한의 미 정찰기에 대한 근접위협을 이유로 B-52와 B-1 전폭기 24대를 괌에 배치하도록 명했다. 한미 공동군사훈련을 위해 배치했던 스텔스 전폭기와 F-15도 철수하지 않았다. 예측 불가능한 북한이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지 않도록 억지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북한을 포함한 주변국들은 선제공격의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금기시해왔던 ‘제한적 군사행동’의 적실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하는 한반도 전문가들도 생겨나고 있다. 북한의 당면목표가 정권의 생존이라고 가정할 때 과연 핵시설의 외과적 공격(surgical strike)에 대해 대량보복을 감행하겠느냐는 반문이다. 대량보복은 곧 정권의 붕괴를 의미하는 자살행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이 문제시설을 정밀타격으로 무력화하고 방사능 낙진을 극소화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화학·생물 무기와 특수부대로 무장한 북한이 대량보복으로 방향을 잡아 제2의 한국전이 발발할 경우, 미국이 치러야할 비용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다. 이것이 북한의 남침을 전제로 한 작전계획 5027을 놓고 미 국방부가 고민하는 주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주한미군의 휴전선 이남 재배치와 감축을 공론화한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미군의 인계철선(trip wire) 역할은 북한의 군사도발 시 미국의 자동개입을 보장해 북한을 억지하는 것뿐 아니라, 미국의 대북 군사조치도 자제시키는 역(逆)억지(rever se deterrence) 기능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미군 병력의 재배치 가능성에 오히려 북한이 초조해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분명히 미국은 북한이 레드 라인을 넘는 상황까지 상정해 취할 수 있는 모든 선택지를 열어놓았다. 이것이 곧 군사적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100%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북한핵 문제가 민족 전체의 운명이 걸린 생존의 문제임을 감안하면 단 0.1%의 가능성에도 예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결국 북한의 향후 태도가 미국의 행동을 결정하는 1차적인 독립 변수다. 다행히 최근 북한이 다자 구도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면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와 함께 미국의 강경파들은 “역시 압박정책이 먹혀들었다”며 환호하는 분위기다. 미국의 강압책을 우려한 중국의 막후 역할이 컸으리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 할 고비는 많다. 다자 구도에 참여할 국가들의 이해가 다양하고, 미국과 북한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명확히 가늠하기도 어렵다. 북한이 핵 폐기에 나선다면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무엇을 제공할지에 대한 단계적 계획도 필요하다. 사실 다자 구도의 틀 속에서 실질적인 북미 양자구도가 형성될 때, 한국이 미국 혹은 북한에 행사할 수 있는 지렛대는 위축될 것이 분명하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미간의 견해 차이와 외교적 균열은 한국 정부가 이라크전에 비전투병을 보내기로 결정함으로써 어느 정도 아물었지만, 이로 인해 미국이 대북 정책에 우리 의사를 온전히 반영할 것으로 본다면 오산이 아닐 수 없다.

    북한 역시 남북관계를 북미관계의 종속 변수로 치부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주도권을 인정할 리 없다. ‘미국과 담판 지으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북한 지도부의 인식에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북핵 문제에 있어, 미국의 ‘선의’나 북의 ‘변화’에 ‘희망’을 갖는 것은 ‘정책’이 아니다.

    최근 북미간에 대화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매우 고무적이다. 적어도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긴장 증폭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써 향후 한국의 재량폭이 줄어들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대북 정책에 대해 한미간 의견 간극이 넓어져도 문제지만, 다자 구도의 틀 속에 한국의 입지가 묻혀버리는 상황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누가 갖게 될지, 주한미군 재조정 및 평화구축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등 모든 문제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북핵 정책의 키워드는 현실주의적 실용주의여야 한다. 북한이 전향적 입장을 보일 때 제공할 당근을 구체화한 ‘핑크빛 로드 맵’과 함께, 향후 대미·대북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는 ‘제2의 복안’도 준비해두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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