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5년 롯데호텔에서 열린 김강섭 팝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1970년대로 접어들 무렵. 미국의 젊은이들은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장발에, 맨발에, 청바지, 미니스커트, 통기타. 히피들이 집단을 이루어 도시를 누비고, 전원을 찾고, 기존 체제에 반발했다. 월남전 반대와 마약. 그들이 내세운 모토는 화합, 양해, 호감, 그리고 믿음이었다. 감성적이고 반항적인 물병자리(Aquarius)의 물결은 높고 위태롭고 사납기까지 했다. 그 물결은 미국을 넘어 세계를 훑었고 그 여파가 서울에서도 뚜렷이 감지될 정도였다.
어쿠웨리어스 기의 특징은 “천재냐 광기냐”로 표현되기도 했다. 당시 세계 국가원수들의 모임에서 동서를 막론하고 공통의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었는데 그것은 “젊은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였다고 한다.
4·19 혁명을 뒤집고 집권한 5·16 주체에 대해 1970년대 젊은이들은 크게 반발했다. 대학에는 정보원과 군대가 배치됐고, 애국가와 최루탄이 한 공간에서 엇갈리며 뒤섞였다. 공연윤리위원회는 금지곡을 양산했고, TV 쇼에서조차 집단으로 흔들고 뛰는 동작을 자제해야 했다.
1970년 TBC에 사표를 내고 프리랜서가 됐다. 그리 마음먹은 것은 ‘전문가’보다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것이 나의 앞날에 도움이 되리라는 나름의 예측 때문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섰을 때 내 나이는 37세. 이제 곧 40세가 될 터인데 그때 가 타의로 직장을 그만둬야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아무리 방송국이 좋은 직장일지라도 계급이 올라갈수록 윗분들의 눈치를 더 봐야 할테고, 그래서 ‘내 생각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적어도 50세까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기초를 넓게 닦자. 무슨 일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그게 어떤 일이라도 내게 맡겨지면 번듯하게 해치울 수 있는 스페셜리스트가 돼야 하지 않겠나. 내가 선택한 스페셜리스트의 길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젊음과 음악과 라이브 현장’에 파고들어가는 것이었다.
청담스님의 별난 청아성
프리랜서가 돼 KBS TV와 MBC TV에서 각각 5분쇼와 미니스테이지의 사회를 맡아 하던 때의 얘기다. 당시 나는 청개구리집(YWCA가 운영한 청년마당)의 수요일 담당이었는데 마침 방송일이라, YWCA의 한 여성간사에게 프로그램 앞 부분인 청담스님 소개를 부탁한 뒤 자리를 떴다. 허겁지겁 방송을 끝내고 돌아와보니 이게 웬일인가. 아수라장이었다. 오자미(팥주머니) 놀이를 하는 남녀, 엎드려 팔씨름하는 사람들, 응원하는 친구들…. 한쪽에선 어떤 녀석이 제법 신이 나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반쯤 팔베개하고 누워 그 노래를 들어주는 쪽도 있고 벽에 기대 앉아 허공을 보는 친구도 있었다. 와글와글 바글바글.
초등학교 교단 높이의 마루에 걸터앉은 청담스님 바로 앞에는 네댓 명의 스님이 다가앉아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시종스님이 법장을 높게 세워든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 옆에 자리한 여성간사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학생들이 듣는 척하다가 천천히 분위기가 바뀌면서 이런 지경이 됐다 했다. 시종스님 역시 법장을 안고 조는지 알아보는 기척이 없었다.
청담스님 앞에 나도 바싹 다가앉아 귀를 기울였다.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물오물 억양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음성은 자음이나 모음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입 속에서 삭히고 있었다. 경문일까 주문일까. 어두운 조명 탓인지 회색 법의 때문인지 내가 본 것은 청동상(靑銅像)이었다. 아수라장 속에 어떤 따스함이 느껴지는 부동의 조용한 청동상.
시종스님에게 다가가 흔들어 깨운 후 의향을 물었다.
“스님께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씀 드려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다시 청담스님에게 가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님. 고맙습니다. 긴 시간 같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실내가 주춤하더니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스님께로 집중됐다.
“벌써 시간이 다 됐어?”
청개구리들에게 클로징 멘트를 했다.
“스님께서 이제 자리를 뜨십니다. 다들 일어나서 박수로 환송해주십시오.”
잠이 완전히 깬 시종스님이 벌떡 일어나 법장을 받들고 앞장섰고, 청담스님을 부축하듯 여성간사가 뒤따랐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세 분이 시야에서 벗어났다. 나의 잔소리가 없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