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전쟁의 본질은 ‘미국·영국의 이라크 석유 차지하기’라는 분석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반대로 프랑스와 독일 등은 그동안 이라크의 석유와 관련,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특히 프랑스의 반전 기조에 대한 예찬론이 터져나오고 있는 것은 기묘하다. 얘기인 즉슨, 역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프랑스라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베트남전에 대해, 그 실상은 프랑스의 오랜 식민 지배에서 비롯된 것을 미국이 물려받은 것에 불과하나, 미국은 단죄하면서도 프랑스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이처럼 우리는 프랑스에 대해 혁명, 자유, 평등, 인권, 문화, 예술(특히 미술과 문학)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한 이미지는 프랑스 대혁명과 인권선언, ‘아름다운’ 프랑스어, 인상파를 비롯한 프랑스 미술, 카뮈·사르트르의 프랑스 문학, 푸코·데리다의 현대 프랑스 사상 등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최근에는 관용을 뜻하는 톨레랑스라는 말이 유행을 타면서 프랑스의 이미지를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프랑스가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 더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를 갖고 있으며, 프랑스 사회 속의 차별, 특히 식민지에 대한 억압·차별·착취라는 측면을 철저히 무시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가 영국과 함께 제국주의의 선봉이었던 역사적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톨레랑스란 프랑스 국민 내부에서, 그것도 상부 지배계층에서 제한적으로 통용돼온 것이지, 하부 피지배계층, 특히 식민지에서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또 ‘아름다운 프랑스어’ ‘우아한 프랑스어’란 하나의 편견에 불과한 것으로, 실제로 프랑스의 여러 다양한 언어나 민중 언어를 없애고 강제로 형성된 폭압적 언어라 할 수 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전파된 프랑스인의 국어 사랑이란 것도 기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알자스 지방에 프랑스어를 강제 주입시킨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마치 일제 말기에 일본이 우리에게 일본어를 강제한 것과 마찬가지다. 여타 프랑스 미술과 문학에는 기본적으로 그런 프랑스적 국가주의, 자본주의, 체제순응주의가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반역사적이고 반현실적인 측면이 있다. 나는 그것이 프랑스 문학이나 미술, 최근에는 사상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사대주의적 문화 계수 탓이라 생각한다. 정치·경제·사회를 제대로 관찰한 사람들이 거의 부재한 채 식민주의적 문화인이나 지식인들에 의해 프랑스 문화가 소개된 탓일 것이다. 프랑스대학에서, 프랑스인 교수 밑에서, 주어진 주제로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아, 귀국 후 각 대학 교수가 되고, 언론에 프랑스 문화를 소개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