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에 관한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저도 있다. 변영로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과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는 이 방면의 포복절도할 쾌저(快著), 명저가 아니던가? 여타 문인들의 소소한 음주기(飮酒記)를 더러 읽어보았지만, 모두 이 두 명저에 몇 걸음을 양보해야 하리라. 하지만 이 책에 불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음주에 관한 역사적 접근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술집에서 술을 마셨으며, 또 술집은 언제 생겨난 것인가? 이 물음에는 아무도 답해 주지 않는다. 답답하다.
술은 역사적인 사회학적 고찰을 요하는 어휘다. 한국 기업의 접대문화는 술과 분리할 수 없는 바, ‘술상무’란 말에는 20세기 후반 한국이 경험했던 압축적 산업화·근대화가 각인되어 있다. 또 지금 한국의 거창한 향락산업 역시 술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뿐인가. 술은 거대한 세원(稅源)이니, 곧 국가경제의 문제다. 음주 허용연령은 청소년 문제와 연관된 사회학적 문제다. “여자가 술을?”이란 의문은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술단지의 밑바닥에 사회, 역사, 경제, 문화가 녹아 있다. 조선시대의 술집과 금주령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식량확보 위해 금주령 발동
국가 권력이 음주를 향한 욕망을 꺾어버린다면, 즉 앞으로 1년 동안, 혹은 석 달 동안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술을 마실 경우 감옥에 가둔다면, 또한 이런 조치가 수시로 발동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선시대엔 이런 적이 많았다. 국가는 자주 금주령을 발동하여 개인의 음주를 금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알코올은 주로 곡물과 과일에서 얻기 때문이다. 벌꿀이나 용설란 같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대종을 이루는 것은 역시 곡물과 과일이다.
술은 곡물을 ‘낭비’한다. 말하자면 주 식량을 낭비하는 것이다. 술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밥은 먹지 않으면 곤란해진다. 경제체제가 전적으로 농업 위주였던 조선시대에 곡물의 안정적 확보는 곧 정치-경제 체제의 안정과 연결되는 문제였다. 흉년이 들었을 때 곡물의 낭비는 곧 많은 사람들의 아사를 불러온다. 그러니 곡물이 술로 낭비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전통이 이어져서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쌀로 막걸리를 담글 수 없었다.
즉, 조선시대엔 흉년이 되는 해에 금주령이 강하게 발동되었던 것이다. 천재지변이라든지 화재와 같은 재난, 국상 등이 있으면 전국민이 근신하는 의미에서 금주령이 발동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에선 500년 동안 금주령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유지됐다.
그렇다면 조선의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 술의 유통을 통제했을까. ‘태조실록’ 7년 5월28일조엔 전국 각도에 술을 금하는 영을 거듭 엄하게 내렸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것이 조선시대 최초의 금주령이라 여겨진다. 물론 그 구체적 내용은 미상이다. 태종 때도 금주령이 잇따라 시행됐다. “금주령을 내렸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늙고 병든 사람이 약으로 먹는 것과 시정에서 매매하는 것도 모두 엄하게 금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태종 10년 1월19일).” “임금이 의정부에 명하였다. ‘금주령을 먼저 세민(細民)에게 행하고, 거가(巨家)에는 행하지 아니하였다. 또 술을 팔아서 생활의 밑천으로 삼는 자도 있으니, 공사연(公私宴)의 음주 이외는 금하지 말라’(태종 12년 7월17일).” “공사의 연음(宴飮)을 금지하였다. 환영과 전송에 백성들이 탁주를 마시는 것과 술을 팔아서 생활하는 자는 금례(禁例)에 두지 말게 하였다(태종 15년 1월25일).”